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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 저번에 봤던 그 자폭이잖아!”
다나가 화들짝 놀라며 손바닥을 합쳤다. 반사적으로 펼친 실드 마법이 방을 감쌌다.
베로니카와 다나의 2중 결계!
이제 폭발해도 여관이 무너지고, 소란이 벌어질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내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사실 폭발 자체는 나 혼자서도 막을 수 있었다. 룬 마법으로 오러를 펼치면 그게 바로 결계니까. 마나 효율은 나쁘지만 저번에 흑마법사 소탕전을 할 때도 사용했었다.
‘하지만 이러면 또 나가리인데.’
나는 순검장의 입에서 꿈틀대는 벌레를 손으로 붙잡았다.
예전에 이계의 털복숭이 벌레들도 마주 보면서 싸웠던 나다. 원형 그대로 튀겨서 입에 넣는 것도 아니고, 만지는 것 정도는 그만큼 역겹진 않다.
“석사박궤(碩士縛柩).”
─펑!
그대로 마나를 불어넣어서 폭발시켰다.
벌레만 깔끔하게 터트려 봤는데, 자폭의 전조는 그대로였다. 다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야, 노르! 실드 치게 나와!”
“아냐. 이대로 갈아버릴게. 그럼 못 터지겠지.”
자폭하기 전에 흔적도 없이 날려버리면 끝이다.
또 정보를 캘 수 없게 되겠지만, 별 수 없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오러를 끌어올렸다.
“여러분, 잠시만! 제게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마흐잔이 크게 외치며 자기 짐을 뒤졌다. 대나무 통을 꺼낸 마흐잔이 주먹을 높이 든 내 옆에 앉으며 통의 뚜껑을 열었다.
“침통?”
“예! 저도 점혈을 좀 할 줄 압니다! 또, 사람의 몸에 심는 벌레라면 동방에는 고독충(蠱毒蟲)이란 사술 외에는 없습니다!”
마흐잔은 능수능란하게 침들을 장갑에 끼웠다. 보기만 해도 믿음이 가는 손놀림이었다.
“고독충은 내장 등에 기생하지만, 그래서 점혈 등으로 신체를 침정(沈靜)시키면 함께 정지합니다! 시간을 조금 주시면 제가 제압할 수 있어요!”
나는 코와 귀에 피를 흘려대는 순검장을 보면서 혀를 찼다. 밑져야 본전이다.
“점혈 기다리다 터지면 좆 되는 거 알지?”
“저만 실드 안쪽에 있겠습니다!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 짐을 가지고 동쪽의 헌류성에서 마굿간 궈메이샹제를 찾아가십시오! 그가 저를 대신해 줄 겁니다!”
“지랄 말고. 나도 남는다. 너는 벌레가 어딨는지 모르잖아.”
이 새끼를 살려야 뭘 물어보든가 할 것 아닌가. 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마흐잔은 당황한 듯 침을 하나 떨궈버렸다. 씁, 갑자기 못 미덥넫.
“위, 위험합니다! 제가 실수하면──”
“니 친구 터지던 거 못 봤어? 나는 휘말려도 안 뒤져. 벌레 위치도 모르고 온몸을 쿡쿡 찌르다가 같이 터져 뒤지려는 건 아니지?”
됐으니까 닥치고 환부만 빨리 점혈하고 끝내자. 나는 다나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방어막 좀 부탁해. 일단 나도 쳐 둘게.”
“진짜 목숨 귀한 줄을 몰라요, 못난 남편 새끼.”
저번에 지근거리에서 폭발에 휘말리고도 멀쩡한 나를 봤던 덕분일까. 다나는 궁시렁대면서도 우리 주변을 실드 마법으로 둘렀다. 나도 룬으로 마나 코팅을 만들어냈다.
“내가 벌레의 위치를 말한다. 그 부위를 짚어.”
“……해 보겠습니다.”
나는 마나를 퍼트리며 주요 장기나 근육에 붙은 벌레를 가리켰다.
잠수함 레이더 같은 원리인데, 처음에는 이걸로 몸을 검진하려 했었다. 그리고 이 벌레들은 그런 내 마나를 느끼자마자 자폭을 시도한 것이었다.
“시작한다. 우선 오른쪽 어깨.”
“견정(肩井), 결분(缺盆).”
─쿡, 쿡.
내가 가리킨 곳에 마흐잔의 침이 꽂혔다.
그러자 침이 파고든 곳에서 보라색의 피가 새어나왔다. 인체라면 뚫려도 되는 곳인데, 그 자리에 있던 벌레가 침에 찔려서 절명한 것이었다.
“다음. 왼쪽 배꼽 위.”
“양문(梁門). 유문(幽門).”
“다음. 명치. 조금 아래다. 꽤 커.”
“옥당(玉堂). 구미(鳩尾).”
“척추. 모가지 뒤쪽이군. 지렁이 같은데.”
“거기라면…… 계문(械門)과 풍부(風府)겠군요.”
머리를 들춰서 옆으로 눕힌 마흐잔은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점혈했다. 척추에 손가락이 반마디 쯤 박혔다가 뽑히는 게 은근히 징그러웠다.
“으컥……! 커헉!”
─푸확! 순검장이 코에서 피를 뿜었다.
“머야 쓰벌!”
나는 깜짝 놀라서 몸을 뒤로 젖혔다. 출혈량이 심상치 않았다.
“존나 먼데? 실패야? 뒤졌어?”
“아뇨, 중독된 피가 뿜어진 겁니다. 위험한 혈들인데 잘 짚였군요.”
안심한 듯 숨을 쉬는 마흐잔. 그새 진땀이 잔뜩 새어나온 걸 보면 점혈이라는 것도 말처럼 간단한 기술은 아닌 듯 싶었다.
“어디 보자.”
나는 다시 한 번 심폐정지술의 요령으로 마나-MRI를 시전했다.
기생충의 형태는 여러가지였다. 그냥 그 자리에 머무는 놈도 있고, 내장을 좀먹은 놈도 있고, 빙빙 감은 놈도 있었다. 내가 제압을 포기한 이유였다.
‘……전부 멈췄군.’
그런데 점혈에 성공하자 순검장의 몸에 머물던 기생충들은 다 뒤지거나, 죽은 듯 얌전해졌다. 기절한 순검장의 마나를 뽑아서 터트리려던 것도 멈춘 채로 말이다!
‘이 틈에 터트릴까?’
한순간 고민했는데, 그만두기로 했다.
어떤 형태로 해를 끼칠지 모르는데 손을 대는 건 좋지 않았다. 어차피 살려서 심문하려는 것도 아닌 마당에 벌레가 있건 말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폭은 멈췄군. 잘 했다, 마흐잔. 밥값은 했군.”
─퍽! 제압을 확신한 나는 마흐잔의 등을 쳤다. 그는 켈록대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가, 감사합니다.”
“근데 이 색갸. 점혈이 가능하면 일찍 좀 말할 것이지. 진작 알았으면 황야를 건널 때 물어보고 나도 배워뒀을 거 아냐. 갑자기 존나 괘씸하네.”
“아, 아니오. 점혈은 인체의 경락을 꿰고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
“농담이야, 농담. 내가 그런 것도 모를까 봐.”
침술이란 게 하루아침에 배워지는 거면 한의원은 다 문 닫아야지.
‘한의사도 의사잖냐. 복수전공은 미친 짓이라고.’
의대생이 졸업까지 몇 년 들고, 또 졸업해서도 몇 년을 현장에서 굴러야 하던가.
그렇지 않아도 수의학-고고학 이중전공자가 돼 버린 가여운 처지의 대학원생이 바로 나다. 개인적으로 점혈 같은 건 꼭 배워보고 싶긴 해도, 시간 낭비까지 해 가면서 배울 생각은 없었다.
마흐잔은 땀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이 놈은 어떻게 할까요?”
“깨워야지. 이 새끼 침 뽑아도 되냐?”
“상관없습니다. 제가 뽑아드리겠습니다.”
나는 마흐잔이 침을 빼길 기다렸다가 순검장의 대굴빡에 룬을 적었다.
ᚦ(Thurisaz)의 룬과 ᚲ(Kenaz)의 룬.
‘안식의 룬으로 정신에 개입하고, 자각의 룬으로 깨운다.’
지금 떠올린 응용법이지만 가능할 듯 했다. 난 카페인을 혈관에 꼽고 주사하는 기분으로 그 놈의 의식을 수면에서 단숨에 끌어올렸다.
“굿!! 모!! 닝!! 빰빰빠 빰빠 빰빠빠빠──!!”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광기의 메들리가 터져나오자 순검장은 기겁하며 눈을 떴다. 눈코입과 귀에서 피를 흘리며 날뛰는 게, 어디 스플래터 영화에 출연해도 되겠다.
그가 빠르게 눈을 뜬 것에 만족하는 나였는데, 이어지는 말에는 눈을 반개하고 말았다.
『뭐, 뭐죠? 여기가 대체 어디입니까……?』
눈을 뜬 순검장은 나를 쫓아올 때 보여주던 가학적인 웃음기는 코빼기도 없이, 순해빠진 어벙하게 생긴 얼굴로 코를 훌쩍였다.
『개, 객잔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대체……?』
『이런 씹어먹어도 모자랄 호로 자식이!! 어디서 감히 시치미를 뗀단 말이냐!!』
─덥썩! 격분한 마흐잔은 순검장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다.
『무, 무슨 짓이십니까! 위병! 위병!』
『닥치지 못하겠나! 네놈의 몸에 고독이 기생해 있는 꼴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보았다!』
이를 가는 마흐잔의 표정이 여간 사나운 게 아니어서였을까. 순검장은 침을 꿀꺽 삼키며 반항도 못 하고 멱살을 잡혀서 데롱데롱 매달렸다.
『타타르니아와 동족을 배신한 모반자들이 너와 같은 벌레를 몸에 심었더군. 그게 네놈들이 바이츠니아에게 매수됐다는 증거가 아니면 뭐겠나!』
『매, 매수라뇨! 저는 일개 문관일 뿐입니다!』
『문관? 걸음걸이에서부터 무예를 갈고 닦은 걸 숨길 생각도 없던 녀석이 자기가 곤궁해졌답시고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하는구나!』
마흐잔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순검장의 놀란 표정을 살폈다.
‘연기 같진 않은데?’
저게 연기라면 이세계에 헐리우드를 세워서 엘프들을 고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단지, 배신자에게 흥분한 마흐잔은 이만 박박 갈았다.
『네 스스로의 영달을 꾀하는 건 좋다 치겠다! 또 첩자들을 색출한 것도 너희 나라에 충성한 셈 치마! 그러나 네 동족의 정신적 지주가 될 세계수마저도 기르지 못하게 하겠다고?! 그렇게 해서까지 출세가 하고 싶으냐!』
『무, 무슨……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이 개자식이 끝까지!』
『마흐잔, 시끄러워.』
그렇게 말한 건 놀랍게도 네페르티티였다. 나는 생각하던 것도 잊고 어안이 벙벙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페리티티는 무릎을 끌어안으며 쪼그려 앉았다.
〈로마니아 말, 할 수 있어?〉
〈예, 예! 하, 할 수 있습니다!〉
…끄덕끄덕! 코피를 문질러 닦은 순검장은 겁을 먹은 듯 대답했다.
〈네페르티티.〉
〈……예?〉
〈내 이름. 나는 네페르티티. 너는?〉
〈어, 아……〉
바짝 굳은 순검장은 마흐잔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나마 네페르티티 쪽이 말이 통할 것 같다고 생각한 듯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저, 저는 샤오라이입니다.〉
〈응, 샤오라이. 안녕.〉
〈예, 예. 안녕하…… 십니까?〉
〈응. 우린 안녕해.〉
생뚱맞게 인사한 네페르티티는 담담하게 물었다.
〈가장 최근 기억은, 언제?〉
네페르티티의 잔잔한 목소리는 귓가에 파고드는 것만 같은 마력이 있었다.
그 신비한 마력은 듣는 사람들이 시끄러운 곳에서도 그녀의 작은 성량을 경청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또 흥분을 가라앉혀 주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샤오라이도 조금씩 냉정을 되찾아갔다.
〈과거(科擧)에 합격해서…… 등청을 허가받고 봄에 수도로 올라왔습니다.〉
〈봄?〉
〈예, 예. 봄이 맞습니다. 꽃이 아름답게 피고, 등청하는 길을 수놓아서, 분명 이젠 밥 벌어먹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걸 말이라고──〉
눈을 부라리는 마흐잔의 목덜미를 다나가 잡아 당겼다. 닥치고 있으란 뜻이었다.
턱을 쓰다듬던 내가 질문에 끼어들었다.
〈로마니아 어를 배운 걸 보면, 외교관이었나?〉
〈그, 그렇진 않습니다. 과거 시험에서 서이의, 아! 서방대륙 국가들의 신앙이나 철학이 출제되곤 해서 배웠을 뿐입니다.〉
〈듣고 보니 발음이 좀 어색하긴 하군. 그런데 올해 봄에 관직에 붙었다고?〉
〈무, 문제라도 있습니까?〉
있지. 해 봤자 몇 달 전이라는 얘기 아냐.
〈사, 사실입니다. 제가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억!〉
내가 눈을 찌푸리자 겁을 먹던 샤오라이는 자기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기겁했다.
〈머, 머리!! 제 머리카락이 왜 이렇게 길죠?!〉
〈……그렇구만. 기억이 없다면 올해 봄이라는 증거는 없겠지.〉
기억이 어쩌구 하는 말에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눈치챈 듯, 샤오라이는 사색이 되었다.
다나가 팔짱을 끼며 한숨을 쉬었다.
“기억이 없는 채로 조종을 당했단 얘기잖아.”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