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633화 (632/1,009)

“어떻게 생각해도 좋은 소식은 아니군.”

샤오라이의 증언에 베로니카는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사람의 기억과 의식, 육체를 조종하는 기술이 최소 몇 년 이상은 이어진다는 얘기다. 저 사내의 말이 사실이라면 적잖이 우려해야 할 사태야.”

“저 놈의 말을 믿으시려는 겁니까?”

납득이 가지 않는 듯 마흐잔이 역설했다.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기억상실이라뇨! 그런 편리한 변명이 어디 있습니까?”

“너 역시 증거로 믿음을 산 건 아니었잖느냐.”

짤막한 말로 마흐잔을 아무 말도 못 하게 만든 베로니카였다.

우리는 머리를 굴렸다. 결국 이 고생을 하고도 아무 정보도 얻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조용해진 방에서 가장 먼저 말문을 연 건 다나였다.

“……뇌에는 벌레가 없었지?”

뜬금없다면 뜬금없는 말!

하지만 그녀의 중얼거림이 흘러나온 순간, 우리 가족은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사람을 조종한다면 뇌가 제일 빠르지 않냐?”

“그리고 제일 어렵지. 잘못 건들면 뒤지잖어.”

“허나 척추에는 벌레가 있었다지 않았느냐?”

“자폭할 때의 확인사살용…… 은 아니지? 그런 거라면 명치에 박은 놈으로 족해. 심장하고 내장 절반이 날아가면 트롤도 골로 가겠다.”

“그럼 의식을 잃게 만들려고 심은 거겠군.”

랠리처럼 빠르게 교환한 가설을 내가 받았다.

“척추를 조여서 의식을 차단하고, 자아를 봉인한 상태로 각자 알아서 행동하게 했겠지. 순검장이란 직위는 대단한 신분이 아니야. 직접 조종하는 건 시간 낭비지. 배치된 인원 중 하나라는 거야.”

아내들이 패스하며 완성한 가설.

나는 그것을 결론이라는 득점 포인트에 스매시로 내려쳤다.

“다시 말하자면, 샤오라이한테도 기억은 남았어. 본인이 기억하지 못할 뿐.”

몽유병 환자의 증세나 어릴 적 추억처럼, 거의 떠올리지 못하고는 있다.

하지만 그건 잘 생각해보면, 어떤 계기로 다시 떠올릴 수도 있다는 뜻!

“좋아. 그런 거라면 지금이 적기겠네.”

다나는 기지개를 한 번 펴고서 말했다.

“꿈이란 건 일어나고 몇 분이면 잊혀지잖아. 더 잊어버리기 전에 이 녀석의 머리에 치유 마법이나 걸어 보면 어때?”

“나도 한 손 거들지. 망각한 기억이란 표류물과 같아서, 산 자의 것이라도 추출하기 어렵지 않다. 본인에게 되돌려주는 거라면 더욱 그렇지.”

베로니카는 몇 마디 더 마법 설명을 해 줬는데, 나는 꿈과 무의식과 비현실 사이의 기억이 어쩌구 하는 얘기를 절반 정도밖에 알아먹지 못했다.

“아~ 아무튼 ‘잊어버린 기억’에만 효과를 볼 수 있는 마법이라는 거지?”

“……비슷하다. 성공률엔 개인차가 있다만, 다나 정도의 치유사가 도우면 더 올라가겠지.”

“에헤이, 설명 짤라먹었다고 삐지지 말고. 얼른 한 번 해 보자.”

프로이트인지 프로이센인지 모르겠지만, 심리학 분야는 내 전공이 아니라고.

‘대신 동네 문방구에서 500원에 팔던 심리 테스트 정도는 씹가능이지.’

당신은 거북이를 들고 숲을 거닐고 있습니다…. 나는 친절한 사람처럼 다정다감한 스마일을 짓고 샤오라이에게 객잔 수건을 내밀었다.

『미안하다, 우리끼리만 떠들어서. 지금 상황이 이해하기 힘들지?』

『아니오. 제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제가 몇 년 정도 기억을 잃었었나 보군요.』

오, 과연 공무원 시험 합격자. 안색은 나쁘지만 이해는 빠른걸.

‘하지만 아마도 고작 그 정도가 아닐 거거든.’

이해하는 것과 경험하는 건 다르다.

‘우리가 대뜸 설명해도 어느 정도나 믿어줄 지는 모를 일이지.’

그리고 그냥 믿어주기만 해도 의미가 없다. 우리들이 아직 모르는 무언가를 이 친구가 떠올려줘야 하는 거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 동안 뭘 했을지는 상상이 가나?』

『……순혈 엘프께서 절 죽이고 싶어서 길길이 날뛸 짓이겠죠?』

『아마 그렇겠지? 네가 합격한 게 몇 년도냐?』

『진련 51년입니다.』

옘병. 이 나라는 다르게 세는군.

하긴. 기원 전, 기원 후의 기준이 되는 분이 이 세상엔 없으니까.

나는 마흐잔에게 눈치를 줬다.

『……올해가 73년인가 할 겁니다.』

『그럼 나랏일에 종사한지 22년째 되는 해겠군. 자기 분야에서 잔뼈가 굵어지다 못해서, 예전에는 없던 선례도 몇 개쯤 남기고도 남을 시간이야.』

나는 눈을 반개했다.

『하지만 너는 전혀 기억이 없지.』

『……빌어먹을, 예.』

샤오라이는 머리를 어지럽히는 걱정들마저 어이없다는 것처럼 헛웃음을 지었다.

『22년이라. 제가 벌써 마흔이 넘었습니까? 저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요.』

『까짓 거 살아만 있으면 못 갈 것 있나? 1년도 안 되서 아내를 5명 들인 홀애비도 있어.』

『다섯이요? 아주 개새끼네요. 배알 꼴리게.』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실실대며 아까 터트렸던 벌레 조각을 집어들었다.

『이게 네 몸 안에 있던 벌레다. 아직도 안에 몇 마리쯤 남아 있고.』

『……소름 돋는 일이군요.』

『저 친구를 너무 고깝게 보진 마. 니가 자폭하려고 들길래 나는 그냥 터트릴까 했는데, 저기 저 친구가 목숨을 걸고 널 점혈해서 살린 거니까.』

샤오라이는 기겁을 하면서도 새삼스러운 눈으로 마흐잔을 봤는데, 마흐잔은 콧방귀를 뀌어댔다. 어디 진짜인지 구라인지 봐 주겠다는 눈초리였다.

새끼, 하프 엘프 슬레이어가 되기 직전이구만. 난 픽 웃었다.

『우리가 보기에, 네 머리에는 아직 그 무렵의 기억이 남아 있다. 어쩌면 악몽처럼 꿈에 나올지도 모르지. 아, 물론 네가 펑 하고 터져 죽지 않은 날 밤에.』

『굳이 그렇게 겁 주지 않으셔도 제가 여러분께 협력해야 하는 당위성은 이해했습니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협력적이어서 좋은걸. 우리가 도와줄 테니까, 너는 그냥 떠올리기만 하면 돼』

나는 벌레를 혈수마공의 삼매진화로 불태웠다.

『마법조차 아닌 벌레 몇 마리야. 사람의 항상성(恒常性)을 무시하고 몇 년이나 조종할 순 없어. 네 몸 속 벌레에게 주기적으로 영양을 준 놈, 혹은 네 손으로 영양을 넣으러 간 곳이 있다.』

『인물이나 장소를 떠올리면 되는 겁니까?』

『종류에 연연하지 마. 생물의 뇌는 반복학습을 기억하고, 22년을 거듭한 일이다. 네 머리에 남지 않았다는 건 불가능해. 가장 먼저 떠오를 일이야.』

마법진을 그린 베로니카가 내 석판에서 약재를 배치하고, 다나가 마법을 발동했다.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불경처럼 들렸다. 베로니카의 지팡이에 태운 약초가 아릿한 냄새와 연기를 풍기며 샤오라이의 귀에 파고들었다.

모락….

그때였다. 언뜻 안개 낀 숲을 관찰한 것처럼, 그 연기에서 뭔가가 엿보였다.

선분홍색. 빨간색. 피와 내장. 웃는 얼굴. 다름 아닌 샤오라이 자신이었다.

『웁…… 우웨에에엑!』

연기를 들이킨 샤오라이가 토악질을 했다. 흐릿한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문관 지망생이었던 젊은 하프 엘프가 버틸 수 없는 광경을 보았던 걸까.

한동안 토악질을 하던 샤오라이는 수건에 자기 얼굴을 비볐다.

『……여기가 아닙니다. 훨씬 더 전이에요.』

『할 수 있겠냐?』

『글쎄요. 제 몸에서 벌레를 제거해 주신다면 더 힘이 날 것 같긴 하네요.』

『노력해 보지. 나 말고, 저기 저 친구랑 저 친구 조국에서.』

『……네가 무고한 피해자고, 모반자의 정체를 밝혀준다면, 그래. 얼마든지.』

마흐잔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샤오라이는 실실대며 웃다가 말했다.

『마저 합시다. 가능하다면 더 빨리 지나갔으면 하네요.』

스으으으으…….

숨을 뱉은 샤오라이는 휘발되고 만 기억을 연기에서 빨아들였다.

그는 본능적에 새겨진대로 운기조식을 하듯 양반다리를 만들었다. 코와 입으로 연기를 마시고 뱉는 엘프! 객잔의 분위기가 합쳐지자 그 광경은 몹시 기괴한 의식처럼 느껴졌다.

동양의 이적을 두려워하던 서양인들이 상상하던 주술사가 이러했을까?

역겨운 듯 얼굴을 구겨대던 샤오라이가 불현듯 중얼거렸다.

『굴라나뢰크?』

『뭔 로크? 쓰벌, 딴 생각 하다가 못 들었어.』

『뢰크요. 굴라나뢰크. 그렇게 부르는군요. 음. 저 같은 엘프들이 보입니다. 벌레에게 영양을 주는 게 아니라 아예 알을 집어먹고 있네요. 인간족도 있는데요?』

굴라나뢰크, 굴라나뢰크…….

고유명사지만 뜻은 존재했다. 만언신의 파파고 번역기에 해석이 됐으니까.

“황금(Gulllana)의 황혼(Røkkr)이라.”

나는 입에서 발음을 몇 번 더 굴려보다가 혀를 내둘렀다.

“엘프 말종 놈들. 네이밍 센스 존나 까리하네.”

무슨 인민 도살장 같은 이름이잖아. 이쪽 동네는 왜 이렇게 빨간맛이 심해? 귀쟁이 동무들의 사상이 심히 의심되는구만 기래.

─신대가 끝난 후, 인간이 번영하는 미래를 선지자님께서는 황금시대(Golden Age)라고 부르셨지.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인지 모를 것도 아니군.

베로니카는 눈을 반개하며 텔레파시를 흘렸다.

우리 가족에게만 보낸 텔레파시였다. 이 정보를 공유하는 게 우리 뿐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게르마니아 어에서 황금과 갈매기(Gull)는 발음이 같다.

‘그 안아키스트 대머리 엘프도 갈매기가 어쩌니 했었지.’

많고 많은 단어 중에서도 ‘황금’과 발음이 같은 단어를 찝어서, 갈매기의 시대를 끝내겠다? 존나 숨길 마음이라곤 코빼기도 없는 표현법이다.

나 같았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자기 어필!

이 자기과시는 그들의 비대한 자아와 폐 가득히 들어찬 헛바람, 그리고 인종차별적인 사고관의 종족 자부심을 암시하는 게 분명했다.

─인류멸망이라. 슬로건으로 내세우기도 쪽팔린 단어인데.

─그래. 확 와닿진 않지만, 그래도 익숙하기는 한 목표로구나.

최근 그다지 존재감이 없었던 어느 듀라한 신의 버킷 리스트였지, 아마?

가끔씩 말한 적이 있는데, 고고학계에선 대전쟁 이전의 시기를 고대문명 황금시대라고 통칭한다. 인류가 가장 번성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도 그 미래를 보고 황금시대라는 단어를 쓴 걸까?

아무튼 확실한 건, 굴라나로크라는 조직 이름은 일부러 ‘신들의 운명(Ragnarǫk)’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해 온 네이밍이라는 거였다.

다나는 역사서에서 저주의 문구라도 발견한 듯 혀를 찼다.

─신의 시대가 끝나고 인간의 시대가 왔지. 그럼 그 인간의 시대가 끝나면?

─해가 지면 달이 뜨는 법이잖느냐. 그러니 달이 지면, 또다시 해가 뜨겠지.

진짜 그럴지는 몰라도, 그 굴라그 어쩌구 하는 새끼들은 그렇게 믿고 있겠지.

‘이거 일이 좀 커지려나?’

죽다 살아난 신 한 명.

어느 정도의 힘을 갖고 있을지는 몰라도, 딱히 약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계속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고 있는 샤오라이에게 질문했다.

『너 같은 놈들은 전부 세뇌당한 거냐?』

『아닙니다. 저 같은 하프 엘프 뿐이고, 귀가 더 긴 양반들은 자기 의지로 따르고 있습니다. 만약 순혈 엘프인데도 따르지 않으면, 숙청 대상이라는 듯 하네요.』

『끝내주는군.』

엘프 인민의 어버이께서는 부하의 피가 흐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이지.

나는 투스타스 상회장이 남긴 말을 떠올렸다.

─동족의 아이야, 황야 밖의 엘프를 조심하거라.

황야 밖의 엘프.

그건 혹시 타타르니아에 반역하는 엘프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을까?

상회장의 가족을 죽여서, 그가 〈편찬대대〉에 투신하게 만들었다는 엘프들.

이쯤 되면 다른 놈들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겠군.

“노르드.”

그렇게 투덜대고 있는데, 갑자기 네페르티티가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왜 그러느냐고 물으려다가 얼굴을 팍 찡그렸다. 손가락이 저절로 팔찌에 걸쳐졌다.

“씁, 왜 저는 맨날 눈치채는 게 늦을까요?”

“……생각이 많으니까? 응, 아마 장점이야.”

존나 감사하신 말씀. 나는 소리를 죽이고 창문 옆에 붙었다.

‘발경대, 집합.’

발퀴리에 예비군 3마리를 소환했다. 손을 떼지 못하는 일행에게 붙일 호위다.

‘창밖에 기척이 셋, 넷…… 다섯인가.’

심지어 계속 모이고 있다. 네페르티티는 채찍을 손에 걸며 말했다.

─샤오라이에게 걸린 추적 마법……?

─아뇨, 그런 건 없었습니다. 대신, 이런 얘기가 있죠.

타이밍을 맞추고자 수신호를 보냈다. 기습이란 건 준비 중에 역습 당하면 오히려 치명적인 틈을 보이게 된다. 들키기 전에 선빵을 치는 게 옳았다.

나는 야수회귀와 오딘의 눈을 킬 준비를 하면서 말했다.

─일부 곤충은 수km 밖에서도 동족의 페로몬을 맡을 수 있다더군요.

돌격까지 3, 2, 1……

지금.

투쾅─!!

창틀을 열어젖히며 나랑 네페르티티는 지붕으로 도약했다.

『발각됐다! 각자 위치로!』

각자 다른 지붕에 서 있던 삿갓을 쓴 남자들은 냉정하게 발검했다. 얼굴에 복면까지 감은 놈들은 자기 손가락과 어떤 벌레를 연결한 실을 칼로 냉큼 잘랐다.

마법을 쓰지 않는 추적술이라. 문화권이 다르니 확실히 색다른 맛이 있군.

내 앞에 있던 놈이 기수식을 취하듯 몸을 낮추며 으르렁거렸다.

『천혜신군(天慧神君)의 재림을 막는 무뢰배여! 우리는──』

『아, 실례지만 제가 종교를 안 믿어서요!』

칼 들고 찾아온 귀쟁이다. 대화할 이유가 없었다.

〈번개의 화살〉에 룬을 더해서 형상과 위력을 늘렸다. 내 손에서 뇌룡이 몸을 뒤틀며 피어났다. 밝은 대낮에도 눈에 띌 만큼의 격뢰(激雷)였다.

『광룡강천(狂龍降天)!!』

『ᚦ(Thurs)──!!』

콰르르르릉─!!!

폭발한 번개가 공기를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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