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만 청각이 예민해도 듣지 못하는 소리는 있다.
예를 들자면, 천둥 소리를 틈 타서 뻗어나오는 암기 같은 게 그랬다. 과열된 공기가 찢어지면서 터지는 폭음은 암기의 소리를 완전히 감추었다.
─텁!
하지만 나는 제 6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영감을 발휘해서 날아오는 암기를 붙잡았다.
마나 없이는 귀 뒤쪽 같은 급소를 노려도 나를 죽이지 못한다. 청각에 의존할 수 없어도 마나가 듬뿍 담겼으니 거기 묻어나오는 살기는 느껴졌다.
뇌룡을 내려친 자세로 암기를 확인했다.
‘쇠침 같은 건가.’
던져서 돌려주기엔 위력도 부족하고 요령도 필요한 무기였다.
대충 던져버리고 착지하자 팔에 식물 뿌리처럼 화상을 입은 엘프가 후퇴했다. 쫓아오길 바라는 듯 했기에 기꺼이 따라잡아서 머리통을 쪼개줬다.
─턱!!
삿갓이 반으로 잘리면서 창대에 손맛이 남았다.
별로 즐거운 손맛은 아니었다. 차라리 낚싯대를 당길 때가 훨씬 나았다.
“크아아아!”
호박처럼 머리가 쪼개진 엘프가 뇌를 쏟아내며 덤볐다. 마치 좀비 같은 생명력이었다.
“벌레가 몸을 움직이고 있나.”
뇌가 죽으면 몸 속 벌레가 역할을 대신하는 구조였다.
그래도 그나마 있던 전투기술마저 잃은 채여선 승패를 논할 가치도 없다. 자폭까지 시간을 끄는 게 고작일 것이었다.
휘적거리는 손을 피하면서 자폭하기 전에 마나를 때려박았다.
─텅!
몸에 침투한 마나가 작은 벌레들을 싸그리 터트리고 뭉개버렸다. 엘프는 등이 들썩이다가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보라색 피를 쏟아냈다.
『똑같은 보라색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지 모르겠군. 내가 아는 보라색은 좀 더 요염하고 퇴폐적인 느낌인데, 이 놈들 피는 영 역겹기만 하네.』
나는 시체를 치우듯 던졌다. 동료였던 새끼가 지 발밑에 구르는데도 모여드는 엘프들은 복면 아래 얼굴을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니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
『숭고한 헌신이다. 그도 후회는 없을 터.』
삿갓 엘프들이 포위망을 갖추었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다굴은 괜찮은 전법이다. 마법으로 일망타진을 당하지만 않으면.
나로서도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것보다는 나만 노리는 게 편했다. 할 말도 있고.
『숭고한 희생이라. 이상한 얘기군. 저게 개죽음이 되지 않으려면 너희들이 날 죽을 동 살 동 막아야 할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뜻인데.』
『배신자에게 아무 것도 듣지 못한 모양이지?』
『배신은 개뿔. 애미 터지는 소리 하고 있네.』
샤오라이가 들었으면 억울하다 못해 자기도 저 새끼한테 칼빵 좀 놓게 무기라도 빌려달라고 말할 소리였다. 나는 창대를 만지작대며 말했다.
『여기까지 온 거,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엘프들이 한 뜻으로 뭉치면 너희 같은 급진파들과 의기투합할 녀석들이 줄어서 그런 거라고.』
배 부르고 자존심 상할 일이 없는 일상!
그것만 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저냥 만족하기 마련이다. 당장 나도 시비 털고 좆 같이 구는 사람만 없으면 아내들이랑 즐겁게 사는 게 목표다.
『……크흐흐흐.』
엘프들은 웃음을 참기 힘들다는 듯 삿갓을 눌러썼다.
완전히 헛다리를 짚는 멍청한 놈을 비웃는, 우월감에 찬 웃음이었다.
나는 눈을 반개했다. 불완전한 발판인데도 엘프들은 줄창 모여들었다.
‘수가 생각보다 많은데.’
이 국경지대의 검문이 천하의 씹허벌인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일단 이런 난장판이 잦은 건 아닌지, 처마 밑의 거리가 꽤나 소란스러웠다. 가면을 쓰고 나올 걸 그랬나.
『알량한 지혜만 믿고 오만하구나, 인간이여.』
『네깟 놈의 척도로 존자(尊者)를 가늠하지 말라. 따르지 않는 자는 이끌 필요가 없다. 이윽고 재림하실 천혜신군께서는 구원자가 아니시니.』
『자길 믿는 놈들만 골라서 시작하겠다? 노아의 방주냐?』
기척을 죽이며 모여드는 엘프들!
네페르티티나 다른 사람들 걱정은 잠시 접었다. 나 아니어도 자기 몸 정도는 챙길 여인들이었다. 마흐잔이랑 샤오라이? 뭐, 죽지야 않았겠지.
─척. 창을 늘어트렸다. 창끝이 웅웅대면서 내가 밟고 서 있는 기왓장을 떨게 만들었다.
『숙청의 날까지 신군께서 하실 일을 줄여두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며, 천명이다.』
엘프들은 부적을 집어서 강시처럼 자기 이마에 붙혔다.
요란스럽게 움직이지 않고, 바위처럼 굳건하게 진형의 자리를 굳히는 그들.
『혼돈의 사생아들에게 오염된 엘프는 필요하지 않다.』
『견고한 믿음과 정통한 피를 이어받은 이만이 심판의 때에 구원받을지어다!』
우리는 선택받은 자이며, 믿으면 구원받으리.
신앙 치고는 진부한 종교관이었다. 문제는 그게 완전한 사이비는 아니란 점일까.
당장 보통 사이비들도 교인들끼리 깽판을 치면 사회문제가 되는 법인데, 인류 전부 죽인다맨으로 각성한 신까지 존재하는 판국이니까.
그렇기에 나는 실소를 흘렸다.
『몇 마디 했다고 친절하게도 설명해 주는군.』
삿갓과 복면 사이로 엿보이는 엘프들의 눈빛이 굳었다.
『아니 뭐, 이해해. 자부심과 참을성은 양립할 수 없는 법이지. 몇십 몇백 년 내내 계속 일코를 해왔따면 오죽 하겠냐만은…….』
마나를 끌어올리며 똑같이 비웃음을 돌려줬다.
『나보다는 너희가 더 입을 조심해야겠는걸.』
병신들. 살살 긁어주니까 신나서 떠들기는.
복면을 당겨서 입을 가린 엘프가 으르렁댔다.
『네가 안다고 바뀌는 것은 없다. 아니, 너희는 제대로 아는 것조차 없을 터.』
『그렇게 지껄여대 봤자 말 안 해 줄 건데? 난 니들이랑 다르게 입이 무거운 편이라서. 하여튼 너희들을 경계한 건 괜한 걱정이었나 보군.』
나는 적지 않게 들던 걱정을 가볍게 털어냈다.
『본진을 좆털리고 도망친 패배자들이 새삼 뭐 대단한 계책이나 꾸몄겠어?』
〈편찬대대〉를 어떻게 할 능력이 됐다면 에퀴녹스처럼 뭐라도 했겠지.
서방으로 침투한 놈들이라면 몰라도, 그 예르나 역시 괄시하던 타타르니아에 남아 빌붙은 새끼들 아닌가. 대단한 위협이 될 것 같진 않았다.
내가 그렇게 웃음기마저 섞어 내뱉었을 때였다.
찌르는 듯한 살기가 공간을 지배했다.
─쐐액!!
엘프들은 고함으로 분노를 토해내지 않았다. 그 대신 각자 칼을 쥐고 동시에 돌진했다. 영화에서 그렇듯 한 명씩 친절하게 덤벼드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날아드는 검만 10개였다. 손이 2개인 사람은 뭐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숫자 차이였고, 또 많은 마나를 품고 있어서 만만한 공격도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뻔했다.
채앵─!
나는 창으로 검 3개를 걷어내고 그 공간으로 내 몸을 끼워넣었다.
분명 굉장한 공력이 담긴 검이었다. 저 새끼들 스스로도 완전히 컨트롤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기에 검이 통제에서 벗어나자 엘프들은 그 속도와 출력을 주체하지 못했다. 차라리 공격의 위력이 아니라 신체능력을 강화했다면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물론 신체능력의 강화는 모든 전사들의 지상과제이고, 그건 다시 말해서 보통 수단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보통이 아닌 수단을 가진 사람을 달인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화르르르륵─!!
야수회귀의 마나가 벼락으로 변하며 창을 감고 반월을 그렸다. 푸른 전뢰가 스친 엘프들의 상체가 하반신과의 눈물 어린 작별을 나누었다.
오딘의 눈이 읽을 수 있는 건 달인들의 움직임 뿐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오딘의 눈이 아닌 나 자신의 눈에도 저들 수준의 공격은 뻔히 보였으니까.
위협적인 공격? 칼을 들었는데 그렇지 못한 게 더 문제 아닌가?
『위력만 강하다고 능사가 아니지.』
모든 공격에는 예측하지 못할 정도의 신묘함이 담겨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뻔히 보인다면 다 알고도 못 막을 경쾌함이 있어야 하고 말이다.
이들의 검에게는 그러한 깨달음이 전혀 없었다.
『너희의 검은 텅 비었다. 아무 것도 없어.』
파츠츠즈즈즈즈─!!
오러를 감은 번개는 적을 감전시키며 벌레까지 불태웠다.
엘프들은 죽음도 불사하고 덤벼들었다. 검술은 사나우면서 날카로웠고, 철저하게 고찰한 전법이 그 검술의 단점을 메꾸었다.
그래도 그것 뿐이다.
즉각 메꿔지는 진형에 내 창이 파고들며 엘프의 목을 날려버렸다.
죽은 이들의 자폭을 피하고자 거리를 벌리려는 진법의 운용도 진부하다. 시체를 걷어차서 폭발을 유도했다.
콰앙─!! 폭발이 일어나자 더 크게 무너졌다.
『제기랄!』
폭발에 데인 엘프가 악을 쓰며 검술을 펼쳤다.
나는 페이크를 넣고 발을 멈췄다. 검은 정확히 내가 예상한 간격에서만 움직였다. 칼날은 내 코 끝 1cm 앞에서 난폭하게 바람만 일으키며 헛방을 쳤다.
엘프는 놀란 나머지 내려친 검을 되돌릴 생각도 못했다.
『통일성, 규격……. 말은 좋지만, 아까 해치운 놈의 검술이랑 똑같아서야 맞아주길 바라는 게 더 염치 없다고는 생각 안 하냐?』
─뎅겅! 엘프는 복면을 쓴 얼굴로도 보일 만큼 허망한 표정으로 목이 잘려나갔다.
뛰어난 검술도 커다란 톱니바퀴의 한 축일 뿐, 스스로 발전시킨 흔적이 없다. 개성이 없다. 절대 굽힐 수 없는 옹고집을 벼려낸 신념이 부족하다.
원래라면 같은 무술도 도달하는 곳은 다르다.
전사의 무예는 자신의 심상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다치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전술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자기 줏대란 게 없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한계를 누군가의 길을 닦는 청소부로 잡고, 그가 던져주는 콩고물을 받아먹는 게 꿈인 놈들 아닌가. 우물이 아무리 높아도 우물일 뿐이다.
신을 섬기는 신도들도 자신의 뜻이랄 건 있는데 말이다.
『저번에 왔던 군바리 살수들만도 못한걸.』
─촤악!
나는 창을 휘둘러서 피를 털었다. 보랗고 빨간 피마저도 그들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지 못하고 맹탕처럼 휙 털어졌다.
『헤니르가 너희의 꿈이 돼 주진 못했나 보군.』
마지막 남은 엘프는 자기 칼에 뚫린 배를 잡고 끄르륵 거리며 피거품을 물었다.
펑─!
다른 놈들이 뒈진 걸 확인하고 돌아서자, 마침 근처에서도 엘프 불꽃놀이가 열리고 있었다. 화약 대신에 마나와 혈육을 쓰는 게 꽤 참신했다.
─쫘악!!
굵직한 오러가 채찍처럼 휘며 도망치는 엘프를 말 그대로 갈아버렸다.
“다 끝나셨습니까?”
“응. 별 거 없었어.”
네페르티티도 상처 하나 없었다. 그녀는 해치운 적들보다도 모여드는 사람을 더 걱정하고 있는 듯 했다.
하긴, 저 놈들보단 이 성의 병사들이 더 귀찮은 상대다. 해치워버릴 수도 없으니까.
“거기! 둘 다 튈 준비해!”
다나가 창문을 열고 급하게 외쳤다. 내 몫의 짐 가방이 날아오길래 낚아챘다.
자기도 창문 밖으로 빠져나온 다나는 익숙하지 않은 바이츠니아의 옷이 불편한 듯 길고 넓은 옷 소매를 대충 털어댔다.
“사람이 모이기 전에 튀자. 지금은 소란 때문에 인파가 물러났지만, 경비병이 모이거나 하면 몰래 빠져나가기도 힘들 거 아냐.”
“샤오라이는?”
“앵간치 생각 났대. 자, 네페르티티 씨도 여기 짐 받으시고!”
이어서 창문으로 올라오는 일행들.
나는 베로니카에게 손을 뻗었는데, 그녀는 새초롬하게 지붕을 잡고 날다람쥐처럼 올라왔다. 그러면서 힐끔 쳐다보는 게, 이 정도도 못할 줄 알았느냐고 묻는 듯 했다.
“샤오라이가 자기 신분으로 말을 몇 마리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베로니카를 보며 픽 웃자 마흐잔이 말했다.
“그 말을 타고 벗어나죠. 순검장이라도 병사가 아니라 관직을 맡은 이들이 성문을 맡으면 지나갈 수 없을 겁니다.”
“이젠 저 친구를 믿어줄 생각이 들었냐?”
“예. 싫어도 믿고 싶어질 만 하더랍니다. 제길, 믿겨지십니까? 모반자 놈들끼리만 아는 『전이술』 술법진이 있답니다. 그것도 바이츠니아 한복판에!”
성을 내던 마흐잔은 샤오라이에게 무슨 환약─이 문화권의 포션일지도 모른다─ 같은 걸 던져주고 지도를 펼쳤다.
황야에서도 봤던 처음 보는 X자 표시가 있었다.
“이걸 알았으면 바이츠니아에 숨어들려다 죽은 동족들이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겁니다. 제 역시 알게 된 이상에는 그냥 못 넘어가죠. 저희들도 이 술법진을 써 먹읍시다.”
“어디로 이어지는데?”
“타타르니아 근처의 국경입니다. 위험한 장소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경비도 없고요.”
당연히 그럴 것이다. 삼엄한 경계로 지켜진다면 타타르니아의 엘프들이 병신이 아니고서야 못 알아차릴 수가 없으니까.
『저기! 경비병들이 옵니다!』
시내의 동태를 살피던 샤오라이가 외쳤다.
그는 되찾은 기억에서 낯익은 얼굴이라도 있는 듯 기함을 하며 요란법석을 피웠다.
『저, 저! 위병장 쑨취안입니다! 저 개자식 저거 빌어먹게 깐깐하기로 유명한데, 잡히면 고운 꼴 못 보실 겁니다! 당연히 저도 그렇고요!』
어쩔 수 없겠군. 나는 발퀴리에들을 회수하고서 다나랑 베로니카를 안았다. 이렇게 경비병을 피해 튀는 건 오랜만이군. 살짝 그리울 정도인데 그래.
퉁─! 우리는 기왓집의 처마를 박차고 날았다.
“베로니카! 왼쪽으로 몸 좀 틀어줄래? 왼쪽만 가슴으로 가려져서 안 보여!”
“야! 개새끼야!”
***
우리가 찾던 술법진이란 녀석은 바위산의 그늘 안쪽에 있었다.
『이 바위를 치워야 하는데…… 끙!』
샤오라이는 더듬더듬 만지다가 큰 바위를 힘껏 밀었다.
쿠르르르르…!
바위는 장치가 되어 있는 듯 밀리긴 했는데, 꽤 묵직한 소리를 냈다.
그래서였을까. 바위를 밀고서 원하던 술법진을 찾았는데도 샤오라이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기 손바닥을 쥐락펴락 해댔다.
『하하……. 밥 지을 물만 옮겨도 팔이 저리던 쭉정이가 출세했군요.』
잠깐 복잡한 듯 그를 보던 마흐잔이 물었다.
『……부모님은 계시나?』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계시죠. 깡촌이라서 잘 지내시는가 모르겠군요. 제가 편지를 안 쓴지 한참 됐으니 원.』
『괜찮으실 거다. 걱정하고 계실 테니, 꼭 뵈러 갈 수 있게 도와주마.』
그가 어깨를 두드리자 샤오라이는 혼자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럴려면 우선은 저부터 괜찮아져야죠. 몸 안에 사람을 조종하는 벌레를 넣고 어머니를 뵈러 가는 불효막심한 놈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기이한 상황에서 유대감이라도 생겨난 듯 얘기를 나누는 그들이었다.
─끄덕.
그새 마법진을 확인한 베로니카가 OK 사인을 보냈다.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샤오라이. 기동법은?』
『피가 필요합니다. 제 손가락 끝을 살짝 잘라 주시겠습니까? 전 못하겠군요.』
『이리 내 봐. 쫄리면 눈 감고 있던가.』
나는 마나를 날카롭게 뽑아내서 그의 손가락을 그었다.
─사악. 살짝 베인 손가락에서 피가 쏟아졌다.
눈을 질끈 감은 샤오라이는 그걸 술법진에 뿌리면서 주문을 외웠다. 몇 어절의 주문이 끝나자 그 술법진에서 마나가 깃들었다.
『이제 됐습니다. 가시죠.』
그는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힘든 것처럼 먼저 그 술법진에 발을 내디뎠다.
공간이 연결되어 있는지 샤오라이의 몸이 바로 사라졌다. 우리도 입구의 바위를 다시 닫고서 술법진에 발을 올렸다. 마흐잔이 혀를 찼다.
“노르드 님. 건너편으로 넘어가면 곧바로 부숴버려도 되겠습니까? 이 술법진을 타고 도망치는 모반자들이라도 나오면 곤란합니다.”
“니들 선조가 남긴 물건일 텐데, 좆대로 하렴.”
파티 멤버에 진짜 텔레포터도 있는데 이까짓 게 아까울 게 뭐 있나.
그렇게 느긋하게 술법진을 건너서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낮게나마 풀이 자란 곳이었다. 황야에선 동물들이 다 처먹어서 보기도 힘든 풀들이 여기엔 가득 자라 있는 것이다.
나도 신기할 정도였으니, 유목민인 마흐잔은 그 꼴에 대뜸 인상부터 썼다.
『하나 같이 마음에 드는 게 없군. 샤오라이? 그 모반자 놈들은 여기서 목축이라도 하나?』
『……샤오라이?』
하지만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별 생각 없던 우리는 뒤늦게 샤오라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우리가 그를 따라들어오기까지 고작 몇 초조차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마흐잔의 얼굴이 굳었다.
“……젠장, 샤오라이!! 보초는 없다며!!”
“그럼 보초가 아닌 거겠지.”
뇌까린 나는 달인의 오감을 최대한 일깨웠다.
아무런 기척도 찾을 수가 없었다. 텅 빈 방에서 소리를 듣고자 귀를 쫑긋 세운 것 같았다. 들리는 건 벌레들의 울음소리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알아낸 것도 있었다.
이 초원은 분명 녹음이 우거진 곳인데도, 마치 황야처럼 생명력이랄 걸 느낄 수가 없었다. 인공 잡초만 기른 운동장도 이것보단 생기가 넘칠 것만 같았다.
그 원인은 술법진의 건너편에 있었다.
『호. 그런가, 그런가. 쥐새끼가 혼자 다니지는 않겠지.』
길쭉한 귀의 노인이었다. 그저 늙은 게 아니라 수명의 끝이 가까운 듯 노쇠한 모습. 생명력이 텅 비어서 아무 마나도 느낄 수 없는 엘프였다.
그의 손은 시체처럼 뻗은 샤오라이의 머리채를 잡고 있었다.
─챙!
대뜸 칼부터 뽑은 마흐잔이 식은땀을 흘렸다.
『……아슈카트 장로. 그를 어떻게 했습니까.』
『죽이진 않았다. 뭘 어떻게 했길래 살아 있나 물어보려 했지.』
장로라고 불린 엘프가 샤오라이를 내팽개쳤다.
안 죽었다는 말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생기가 없는 모습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느껴지는 생명활동이 전혀 없었다.
엘프 장로는 수염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그래도 이제는 너희에게 물으면 되겠구나. 할 얘기가 많겠어.”
“피차 마찬가지야, 영감쟁이. 얘기라면 편하게 앉아서 하자고.”
그때 다나가 자신의 발퀴리에들을 불러냈다. 풀 무장한 발퀴리에들이 투구를 내려썼다.
“앉기 귀찮으면, 그냥 거기 드러누우시던가!!”
─펄럭!!
발퀴리에들은 심념으로 명령을 받은 듯 무장을 전개하고 날아들었다. 쏜살처럼 빠른 속도는 일전에 나와 싸웠던 개체에게도 꿀리지 않았다.
저 엘프의 강함을 직감한 다나가 내 위험을 줄이고자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발퀴리에들은 모든 힘을 다해서 싸우도록 명령받고 창을 휘둘렀다.
저장한 마나를 전투에 돌리면 발퀴리에의 힘은 최소 미스릴 클래스.
여차할 때 내가 아내들의 안전을 맡길 수 있을 만큼의 강한, 천공신의 신병(神兵)이 3마리.
저기 서 있는 게 나였어도 승리는 커녕 튈 걱정부터 해야 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 광경은 심히 이질적이었다.
『……오오, 익숙한 얼굴이 아니더냐.』
발퀴리에가 최고 속도로 찌른 랜스 차지.
엘프 장로는 그걸 손가락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그 공격을 막으면서 뒷걸음질을 치지도 않고, 걸친 털옷에 먼지 한 톨 묻지 않았다.
빠지지직…!!
양 손가락에 끼운 창이 수수깡처럼 부숴졌다.
『어연 천 년만이구나, 여왕 폐하의 원수야.』
환하게 웃은 엘프 장로의 양팔이 흐릿한 잔상을 그렸다.
─빠각!! 발퀴리에들의 머리가 터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