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635화 (634/1,009)

─후두둑.

머리를 잃은 발퀴리에들은 마치 무게가 없는 솜 인형처럼 바닥을 굴렀다.

그 로봇 메이드들의 강함을 나름대로 알았기에 우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름 정을 주던 발퀴리에들의 최후에도 다나는 입을 다물 뿐이었고, 마흐잔조차 쟤들 중 1마리가 배신자들을 도륙내는 걸 보았으니까.

─……그대여.

지팡이를 움켜쥔 베로니카가 심념을 쏘아냈다.

─뒤의 마법진을 발동시키겠다. 샤오라이 없이 쓰려면 개량이 필요하겠지만, 잠깐이면 된다. 말로 시간을 벌어다오. 발퀴리에 셋을 순식간에 해치워버리는 놈과 싸워서는 안 돼.

나는 대답하는 대신에 발을 내디뎠다.

피할 수 있는 싸움이라면 승산 이전에 피하는 게 맞다.

『댁의 사정은 모르겠지만, 남들 듣기 좆 같은 오해는 풀고 넘어가지.』

언제 공격당해도 맞설 수 있게 긴장을 풀지 않은 채로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는 〈편찬대대〉가 아냐. 그 발퀴리에는 놈들 중 1명을 해치우고 빼앗은 녀석들이고. 조금 관점을 달리 하면, 내가 니들 복수를 대신해 준 셈이라고 할 수 있겠네.』

말을 하고 안색을 살폈다.

내 말을 듣는 틀딱 엘프의 표정에는 변화랄 게 없었다.

이 씹새…… 빡친 건지 아닌지도 구분이 가지를 않는군. 아예 내 말을 듣기는 한 건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한 무반응이었다.

마치 늙다리 엘프의 모습으로 조각한 식물에게 말을 거는 듯 하다.

『그렇겠지.』

불편할 정도의 무반응을 보여주던 틀딱 엘프는 의외로 고개를 끄덕였다.

씨발, 뭐지? 생각보다 말이 통하는 새낀가?

『그 놈들이 우리에 대해 알았더라면 〈인신〉 중 누군가가 친히 나섰겠지. 자네도 〈편찬대대〉의 이름을 아는 걸 보면 영 허언은 아닐 테고.』

나는 눈을 반개했다.

이 틀딱, 말하는 걸 보면 우리가 〈인신〉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신경이 쓰이는 일이긴 한데, 지금은 보류하자.

『그래, 그래. 싸울 때 싸워서 죽이건 죽건, 날 그 애미 터진 새끼들이라고 생각한 채로 끝내는 건 좀 역겹거든. 우리 서로 오해는 풀자고.』

저 씹틀딱련은 우리가 누구건 간에 개의치 않고 죽이려 들겠지.

하지만 나를 그 씨팔럼들의 일원으로 보는 건 내 본의가 아니다. 베로니카의 말마따나 시간도 벌어야 할 테고, 대화에 어울려 준다면 쌉이득이다.

『허허. 오해라. 확실히 다소 아쉽기는 하군.』

─끌끌. 수염을 쓰다듬던 틀딱 엘프 아슈카트가 존나 아쉬운 듯 혀를 쳤다.

『자네가 놈들 중 한 사람이라면 기뻤을 것을, 슬픈 소식만 가지고 왔구나. 그 찢어죽여도 성치 않을 인간 계집이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죽었다는 말인가.』

『복수 대리비를 청구하진 않을 테니 안심하셔. 우리도 튄 불똥을 쳐냈을 뿐이고, 너희가 원하는 세계수의 부산물도 그 과정에서 얻은 거라서.』

세계수의 새순을 꺼냈다가 살짝 후회하는 나.

이걸 보고 어그로가 끌려서 바로 ‘내놔 씨발아’ 하고 달려드는 건 아니겠지? 난 티가 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는데, 아슈카트의 반응은 의외였다.

『흐음…….』

그 놈은 몹시 흥미롭다는 듯 내가 든 이파리를 쳐다보았다가 말했다.

『기묘한 일이군. 리오스알브가 친우에게 건넨 우정의 증표인 듯 한데.』

『……눈썰미가 좋은데. 맞아, 세헤테피브라가 준 거다. 그녀의 시련을 통과한 상으로.』

『호오! 그게 사실인가? 자네는 상당한 모험을 겪었나 보구나.』

칭찬하듯 말하는 아슈카트였지만, 나는 그다지 기쁘진 않았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겉으론 정중하고 친절해 보이는 태도인데, 그 속내에서 느껴지는 다른 감정이랄 게 전해지는 인간들이 말이다.

그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헌데, 발퀴리에만큼은 아니어도 자네 역시 꽤 낯이 익군.』

『우연이군.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던 참인데.』

이건 빈말이 아니었다. 거의 데자뷰처럼 굉장히 희미한 느낌이었지만, 저 아슈카트라는 틀딱의 낯짝을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이 들던 것이다.

‘아마 알프헤임의 기억에서 본 거겠지.’

틀딱의 시선을 받으면서 가볍게 인상을 썼다.

내 쪽은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저 새끼가 알프헤임 시절에도 살아 있었다면, 그 기억을 본 내가 어디선가 스쳐지나갔을 수도 있을 노릇이니까.

하지만 저 놈이 날 어떻게 안단 말인가?

내가 VR 무한도전 시뮬레이터를 플레이했어도 유느님이 날 알아보는 건 불가능하다. 그건 진짜 당사자들과는 다른, 꿈 속의 기억에 불과하니까.

『말씨는 나쁘지만 얘기를 재미있게 하는 동방 출신의 노예. 보라색 머리카락의 당돌하고 과감한 인간족 계집.』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아슈카트의 말에 입을 꾹 닫고 말았다.

씨발,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아슈카트는 눈에 흐릿한 살기를 품었다.

『소식이 뚝 끊긴 왕녀가 편지로 이야기하던 제자들과 쏙 빼닮았군.』

『누구더러 제자래, 좆 터진 새끼가.』

그만 성을 내고 말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예르나 년이 내 인생에 남긴 가르침은 반면교사로서의 것들 뿐이야, 애미쌉부랄 놈아.

『허허허, 역시나!』

날 선 반응에 아슈카트는 껄껄거리며 쪼개댔다. 무생물 같던 표정에 처음으로 생기가 서렸다.

『──물어야 할 게 늘었군. 유익한 대화였다.』

“그대여! 지금이다!”

베로니카의 외침을 방아쇠로 삼아서 백 스텝을 밟았다.

마법진까지 올라오자 빛이 넘실댔다. 이대로 튈 수 있다면 최고다!

『누가 놓쳐 준다 하였느냐?』

하지만 그때 아슈카트가 손을 뻗으며 무언가를 움켜쥐는 손짓을 했다.

“……아악!!”

베로니카가 숨을 삼키며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마법진의 빛이 뚝 그쳤다.

난 순식간에 그녀를 돌아보고, 다친 듯 보이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안도감과 함께 보란 듯이 임계점을 넘은 분노가 머리를 싸늘하게 식혔다.

『……씨팔거, 통구이 되다 만 앰창 꼴통 놈이 감히 우리 여신님한테 손을 대?』

─화르르르륵! 살기가 오러를 머금고 창에 맺혀 넘실댔다.

『닌 천 번 뒤져 마땅해, 개좆 같은 새끼야!』

“잠깐…… 기다려라!”

분개하는 한편 냉정하게 킬각을 계산하는 나를 멈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베로니카였다. 그녀는 날 붙잡으며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나는, 괜찮다. 마나가 갑자기 사라져서 술식이 헝클어졌을 뿐이야. 부디 냉정해지거라!”

“베, 베로니카님! 머리에 뿔이!”

말리려는 우리에게 마흐잔이 당황하며 말했다.

뿔? 내 시선과 베로니카의 손이 그녀의 머리로 이동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자 변신 마법으로 가리고 다니던 베로니카의 양뿔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변신 마법이 풀려서 원래 모습이 드러난 것이었다.

‘마법이 풀려?’

훼까닥 돌아갔던 뇌가 트위스트를 추면서도 몇 개의 위화감을 뱉어냈다.

『실전된 룬 마법에 자연적인 뿔이라. 네 정체가 짐작되지 않는 것도 아니구나.』

내가 그것을 씹어 삼키며 하나로 반죽하려고 할 때, 틀딱 엘프가 손가락을 튕겼다. 나는 지면에서 꿈틀대는 기척을 느끼고 창을 바닥에 찔렀다.

─푸확!!

땅을 헤집고 나오려던 엘프 살수가 창에 머리를 뚫렸다.

오러가 아니었으면 손이 얼얼해질 만한 방어력! 혀를 차면서도 능숙하게 놈의 멱을 딴 나는 뒤를 잇는 기척에 혀를 찼다.

─콰앙!!

룬 부적으로 땅에 잠영하던 엘프들이 난폭하게 무기를 휘둘렀다.

맞기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우리를 분단할 생각이었다.

‘움직이기 전까지 기척을 못 느꼈어!’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건 이 땅강아지 씹새들의 은신술이었다. 네페르티티조차 놀란 기색을 미처 숨기지 못한 채로 살수 한 명을 해치우고 있었다.

‘이 놈들의 기술이 아냐.’

저 틀딱이다.

나랑 네페르티티 같은 달인의 오감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이 공간은 이미, 아슈카트의 펼쳐내는 정체불명의 무공의 범위에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너희는 계집과 어리석은 동포를 처리하거라. 그 둘은 너희 손에는 과분해.』

『존명.』

내 공격에 팔을 잃은 엘프 살수가 눈 하나 꿈쩍 않고 아내들에게로 검끝을 돌렸다.

본능적으로 그 앞으로 나서려던 나는 낙뢰처럼 내려꽂히는 바람을 느끼고 창을 돌렸다. 지척까지 한 달음에 날아온 틀딱 엘프가 장법을 날렸다.

이 속도, 창으로는 막기 힘들다!

『오러권 20배다!!』

최대 방어자세를 전개했다. 오러와 야수회귀의 마나를 부풀린, 말 그대로 핵융합로 고슴도치와도 같은 공방일체의 태세!

『요란스럽군. 젊은이의 특권이지.』

하지만 틀딱 엘프는 좆도 개의치 않았다. 땅에 찧은 진각이 가볍게 지축을 울렸다. 발끝에 담긴 체중이동의 능숙함과 무게를 증명하는 보법이었다.

오러로 덮인 팔에 날아오는 장법!

『──석사탈주!』

나는 그 공격이 닿기 직전에 몸을 당겼다.

저 틀딱이 어련히 치매에 걸린 게 아니라면, 저 과감한 공격은 내 방어를 무시할 자신이 있다는 뜻밖에 되지 않았다.

씨발, 피하기에는 늦었어도 정면에서 막아내는 것보단 낫겠지!

파스스…!!

전투경험이 자아낸 임기응변은 정답이었다.

틀딱의 장타가 나한테 닿은 순간, 내 팔에 감긴 모든 마나가 말라붙었다. 궁극의 공방일체 권법인 오러권도, 그 밑에 깐 야수회귀의 마나도 싸그리 싹 다!

‘마나가 사라졌어.’

ᛁ(Isaz)의 룬인가? 틀렸다. 그 룬은 이런 작동방식이 아니었다. 의문과 위화감을 품은 채로 뒤로 뛴 나를 건조한 날벼락 같은 장타가 후려쳤다.

나는 아무런 방어 기술도 없이, 틀딱의 엘프식 여래신장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쩌어어어엉!!!

『……애미, 씹팔!!』

굉장한 충격을 역으로 이용해서 뒤로 날았다.

둔탁한 팔의 통증이 이를 악물게 했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몸을 빼려고 했으니까 이 정도로 끝난 것이다.

정면에서 막았으면 지난 결의가 무색하게도 팔이 부러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버텨냈나? 좋은 갑옷이군. 아니면 육체 본연의 강인함인가.』

『요즘 내 동년배들은 다들 나만큼 피부 탱탱해! 실버타운 엘프 씹새야!!』

『가끔씩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더니, 그것도 왕녀의 얘기대로군.』

틀딱의 공격이 막힘없이 이어졌다. 그건 흐르는 물 같다기보단 말라붙은 낙엽이 바람에 떠밀리듯 삭막한 느낌이었다.

쿠과과과과광…!!

물론 막아내는 내 입장에선 저 공격을 낙엽처럼 가벼운 것에 비유할 수 없었다.

일부러 처맞고 좀 밀려나서 창을 휘두를 거리를 벌었지만, 힘과 속도에서 밀리고 있었다. 대항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오딘의 눈 덕분이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진 않다.’

발퀴리에들이 당했을 때도 그랬다.

공격을 가하는 순간마자 흐릿해지긴 했는데, 그 속도는 내 눈에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오딘의 눈을 킨 상태라면 예측도 가능했다.

정면에서도 싸우지 못할 건 없다.

‘아내들은…… 아니, 괜한 걱정이야.’

이 놈만 아니면 그녀들도 자기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다. 아직 멀쩡한 발퀴리에도 있고.

우리 아내들이 마냥 지켜줘야만 하는 여자들은 아니잖은가. 그녀들을 신경 쓰다가 내가 다치면 그게 또 무슨 추태겠는가? 나는 눈을 부라렸다.

‘야수회귀는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창에 휘감은 오러는 전부 흩어졌다.

그렇다면 시험해 보자. 나는 집중력의 일부를 룬 마법에 투자했다. 창날에 새긴 ᚨ(Ansuz)의 룬이 내 창을 시퍼렇게 물들였다.

혈수마공(血手魔功)

캘러미티 엔드: 리믹스(Calamity End: Remix)

창을 사용해서 펼치는 푸른 불꽃의 공격!

전혀 틈을 내주지 않고 사용되는 연계였다. 흑마피아 코뤤투스와는 달리, 내가 이 기술을 완전히 대성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츠팟!

하지만 아슈카트는 머리를 젖히며 창을 잡았다. 그것도 창대도 아니고 날 부분을!

『불을 두려워 하기엔 900년 정도 늦었구나.』

움켜쥔 주먹이 번개처럼 내 관자놀이를 노렸다.

씨발, 저기 맞으면 최소 안면함몰이다! 즉각적인 판단으로 창을 놓고 가드를 올리려고 했을 때, 내 시야에 오러 채찍이 뻗어왔다.

『우웃!』

파사사사사삭─!!

채찍에 감긴 오러는 닿자마자 사라졌지만, 채찍 자체는 틀딱 엘프의 몸에 감겼다. 네페르티티가 몇 발짝 뒤에서 길게 호흡을 뱉었다.

“……하압!”

간결한 기합을 내지르며 채찍을 휘두르는 그녀! 엘프 틀딱의 몸이 스프링처럼 튕겨올랐다.

내가 마법이 파훼되고 마는 기상천외한 상황에 기세에서 밀린다는 걸 눈치채고, 장소를 바꿔서 내 숨을 돌리게 해 줄 생각인 걸까.

하지만 그 대범함은 네페르티티에게 적지 않은 빈틈을 만들었다. 옆구리에 노출된 빈틈은 우리들 수준의 싸움에선 치명적이었다.

─부릅!

그런 만큼 나는 아슈카트의 행동에 집중했다. 네페르티티는 내가 그녀의 빈틈을 커버해 주리라고 믿은 것이었다.

쓰벌, 그럼 거기 응하는 게 꼴마초로서의 의무 아니겠는가!

‘생각 가능한 대처는 셋.’

네페르티티의 빈틈을 원거리 공격으로 찌른다. 근거리의 나를 권각술로 견제한다. 완전히 날려버려지기 전에 채찍을 끊는다.

일의 우선순위도 저 순서대로였다.

『귀찮게 구는군!』

나는 틀딱이 어떻게 나오든 대처할 수 있도록 했는데, 놀랍게도 그가 선택한 건 가장 비효율적인 선택이로 생각한 3번이었다.

『당신을 사기와 기물파손죄로 고발합니다!』

채찍을 끊으려는 틀딱에게 창을 찔러넣었다. 그 공격을 피하고 다시 낚아채는 틀딱. 하지만 이번 금나수는 나도 알고 당해준 것이었다.

─쐐애애애애액!!

네페르티티는 달인급 전사의 힘으로 우리 둘을 모닝스타처럼 휘둘렀다.

공중에 띄워진 나는 창대를 놓았다.

이미 몸에 가속이 붙었다. 공중부양은 아직 힘들지만, 나도 추락에는 일가견이 있는 몸!

내 양팔 팔꿈치에 증기가 응축됐다.

『뭉게뭉게── 개틀링건!!!』

압축 증기를 폭발시키며 마법을 섞은 주먹질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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