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639화 (638/1,009)

‘끝났군.’

창을 어깨에 걸치고 등을 돌렸다.

아슈카트는 무릎을 꿇었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마지막 자존심인가? 웃기지도 않는군.

‘이 새끼는 이래저래 아는 게 많아 보이던데…….’

하지만 지금까지의 패턴을 보면 이 새끼도 몸에 그 벌레를 심고 있지 않을까? 구갈명경은 마나를 고갈시키지만 벌레의 생존에는 마나가 필요 없을 것이었다.

‘씌불쟝…… 존나 아깝네.’

룬 스톤을 꺼내려던 나는 혀를 내두르며 네페르티티에게 말했다.

“물러섭시다. 이 새끼 곧 자폭할 것 같아요.”

원하는 걸 무엇 하나 알아내지 못한다는 건 좀 아쉬웠지만, 별 수 있나.

마나량에 비례하는 폭발 아니던가. 좆밥이라면 몰라도 이 새끼 만한 강자가 터지면 위력이 여만 위험한 게 아닐 것이었다. 우리는 빠르게 튀었다.

“다나! 베로니카!”

전투의 소란이 그친 곳으로 갔더니 아내님들이 지친 듯 주저앉아 있었다.

뒤진 엘프들은 팔이며 다리만 굴러다녔는데, 그 여파로 크레이터가 숭숭 뚫린 게 세계대전 시절에 폭격이 쏟아진 전쟁터 같았다.

다나는 다크서클을 문지르며 눈을 찌푸렸다.

“……이겼냐?”

“쓰벌, 그걸 말이라고 하냐. 멀쩡한 거 보이지? 너희는?”

“저 새끼들이 자폭하는 거 막느라고 발퀴리에들 마나를 좀 많이 쓰긴 했는데, 그것 뿐이야.”

발퀴리에들을 둘러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했어. 열심히 싸운 뒤에 미안한데, 아까 그 틀딱 엘프도 터질 것 같더라고.”

“시발, 진짜야? 보통 이런 건 간부진은 예외로 두지 않나?”

“그런 멀쩡한 이해득실이 되는 새끼들이면 저딴 짓도 안 하겠지. 폭발 범위가 어느 정도일지 감도 안 잡혀. 되도록 빨리 튀자.”

마나량이 많기 때문에 폭발까지의 선딜은 조금 긴 모양인데, 그만큼 위력도 클 것이다.

예술은 폭발이라지만 삶의 마지막을 행위예술에 투자하고 싶지는 않다. 실패한 예술가가 미치광이 같은 신념에 빠지는 건 국룰이지만 거기 어울려줄 이유는 없잖은가?

“……기다리거라. 그런 거라면 날 데려가다오.”

그러자 베로니카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너를?”

“즉시 폭발하지 않고 시간을 들일 정도다. 폭발 범위가 도망으로 해결되지 않을 수 있어. 차라리 날려버리는 게 낫다.”

날려버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대충 눈치로 알 수 있었다.

‘〈공간이동〉인가.’

보통 놈들의 자폭하고는 다른 만큼 건드리다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나도 생각해낸 걸 베로니카라고 모를까.

“알았어. 네페르티티는 여기 기다려 주세요! 혹시 모르니까 발퀴리에들로 방진 쳐 놓고!”

나는 마흐잔한테도 샤오라이를 챙기라고 시킨 뒤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 놈만 〈공간이동〉으로 날려보내게? 차라리 우리가 도망치는 게 낫지 않아?”

가뿐하게 안아들고 달리면서 묻자 베로니카는 픽 웃었다.

“비밀 엄수보다는 목숨이 소중하겠다만, 지금은 내가 그럴 여력이 없군. 1명이 한계야.”

“……씁,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프면 실컷 울고 불 터이니 염려 말도록. 네 마음과 심려를 독점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데, 내가 그런 소중한 기회를 놓칠 성 싶더냐?”

아이고, 잘나셨어. 누가 말려.

나는 웃으며 넌더리를 내고 아슈카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설마 그 사이에 튀진 않았겠지. 잠깐 동안 그런 불길한 생각도 들었는데, 다행히 놈은 그 자리에 변함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툭.

자리에 내려주자 베로니카는 군소리 않고 바로 주문영창에 들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좀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아슈카트는 빨개졌던 피부를 허옇게 바꾸며 자폭의 징조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삶이 황야 같다고 했나…….』

혹시 중간에 폭발하지 않도록 창을 들고 그녀를 지키는 위치에 서는 나였는데, 그때 갑자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슈카트가 뭔가를 지껄였다. 쓰벌 놀래라.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리는 틀딱 엘프.

『의미 없는 일이다. 제 아무리 꽃밭을 기른들, 파멸이 도달하면 황야보다 처참하게 짓밟힐 게야. 오직 천혜신군의 재림만이, 이 세계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테지…….』

『좆대로 지껄이렴. 뒤지기 전까지 켕켕대는 건 생물의 권리란다.』

천 살 먹도록 고이고 졸인 망상을 바꿔먹게 할 생각은 없었다.

수의대생으로서 중병에 걸린 동물을 치료해주기 위해서라면 그 새끼가 발톱을 세우고 성질을 내도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것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내가 좆도 관심을 보이지 않자 아슈카트는 조금 눈빛을 가라앉혔다.

『……왕녀는 마지막에 뭐라고 하던가?』

『우리 가족을 부러워 하더군. 우리 아내의 꿈이 좋은 가정을 꾸리는 거거든.』

『……그래, 그랬나.』

하이 엘프가 하프 드워프에게 대가리가 깨졌단 얘기일 뿐인데, 당사자에게는 조금 다르게 들리기라도 한 걸까. 아슈카트는 만감이 교차하는 한숨을 흘렸다.

…푸욱.

그러고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구멍이 나고 비틀려 꺾인 팔로 자기 혈을 짚었다.

애미, 자폭 버튼이라도 눌렀나? 존나 당황해서 창의 항마력을 증폭시키려고 했는데, 그건 자폭을 위한 혈이 아니었다. 반대로 마나가 뚝 그쳤다.

그가 자의로 자폭을 멈춘 것이었다.

『이 고독충은 충왕대군이라는 자의 작품이다.』

하나만 남은 눈을 감으며 아슈카트가 말했다.

『우리 굴라나뢰크의 이념은 천혜신군, 헤니르 님께서 세상을 평정토록 돕는 것이야. 허나 그걸 위해서는──』

『헤니르의 모가지에 붙일 몸통이 필요하겠지.』

리즈 시절의 그 놈이 얼마나 쎘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모가지만 남은 반 시체니까.

『……그래. 네가 가진 세계수의 부산물도 신의 몸을 만드는 데 쓰고자 했다. 지금 타타르니아에 있는 자들은 말하자면 후방부대니라.』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데?』

『모른다. 그저 세계수의 뿌리가 자라난 장소를 찾다 보면 만날 일도 있겠지. 우리의 신, 천혜신군께서는 세계수를 타고 강림하시니…….』

그 얘기를 듣고 떠오르는 건 예르나의 기억이다.

불타는 알프헤임에서 잼민이 예르나와 엘프들을 건져갔던 헤니르!

그 새끼가 세계수의 뿌리에서만 세상에 내려올 수 있다면, 알프헤임에 강림했던 것도 말의 앞뒤가 맞긴 했다. 앞뒤는 말이다.

『니가 왜 그런 얘길 우리한테 알려주는데?』

이해가 안 가는 건 그 점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회개를 했다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잖은가?

『늙으면 후회만 느는 법일세. 자네도 늙으면 알 게야.』

아슈카트는 꼭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웃는 것이었다.

『노인의 변덕이지. 노인의 변덕이야……』

쉭쉭 거리던 소리가 거짓말처럼 그치며, 늙다리 엘프의 머리가 앞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놈은 끝까지 쓰러지지는 않았다.

앉은 채 명을 다한 것이었다.

그렇게 죽은 엘프는 여전히 황야처럼 메말라선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지 좆대로 굴던 새끼한테 새삼 동정심 따위가 솟진 않았지만, 나는 코로 한숨을 쉬고 손가락 끝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불이 붙은 엘프는 고행승처럼 가부좌를 튼 채로 활활 타올랐다.

별로 높은 온도도 아니었는데, 그는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인 듯 금방 한 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그 새끼의 상처 구멍에서 빠져나오려던 벌레들만 꼴사납게 타 죽을 따름이었다.

별안간 옛날 생각이 났다.

처음으로 지옥에서 벌을 받고 환생한다는 동양 특유의 전생관을 알았을 때였나.

나는 그 사실이 무척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안심했었다.

“바이츠니아에서는 죽으면 지옥에서 신에게 그 죄를 심판받는다고 합니다.”

어깨에 칼침을 맞은 듯한 마흐잔이 걸어오면서 말했다.

잠깐 중독되었다가 해독을 받은 걸까. 안색은 썩 좋지 않았다.

과연 나라도 이 녀석이 다가오는 건 알아차리고 있었기에 놀라진 않았다.

저 새끼가 자폭하면 뒤질 텐데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죗값을 치른 뒤에는 다시 한 번 생애를 부여받고, 그 과정에서 업을 쌓으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더군요. 저는 그걸 듣고 참 자비롭다고 여겼습니다.”

“왜?”

“인간이 죄인들에게 줄 수 없는 회개와 천벌을, 신께서 대신 내려주는 것이니까요.”

이 새끼, 잼민이 강북호의 깨달음에 필적하다니. 생각보다 싹수가 있는 놈이었군.

나는 픽 웃었다.

벌로 죄를 갈음할 수 있다니? 그것 참 형편 좋은 얘기인 것도 같고, 잔인한 얘기인 것도 같았다. 그 중에는 영원히 지옥에 처박혀버린 씹새들도 있긴 하겠지만.

물론 이세계의 지옥에도 갔다 온 내게는 그다지 현실성 없는 얘기였다.

어쩌면 이세계에서는 바이츠니아의 신들이 그런 방식을 취했을 수도 있고, 순 망상일 수도 있었다. 저승이 있는 이세계에서도 ‘소멸한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화제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여지가 있으니까.

“그래서, 저 틀딱이 그랬으면 하다고?”

“아뇨. 그저 지옥의 구렁텅이건 어디건 떨어져서 영원히 고통받기 전에, 혹시 한 번 정도는 위대한 존재의 중재로 작은 자비가 내리진 않을까~ 하고 상상해 봤습니다.”

만난 이후로 줄창 쓴웃음만 짓던 마흐잔은 이날 처음으로 능청맞게 어깨를 으쓱였다.

“말로만 듣던 알프헤임의 여왕님을 다시 뵙고, 아주 호되게 혼났으면 하네요.”

“그건 그렇구만.”

나는 낄낄거리며 웃고 다시 베로니카를 안아서 들었다.

그렇게 내 목에 팔을 거는 아내님을 안고 등을 돌리기 전, 한 번 더 영혼도 남지 않고 불타버린 한 줌의 재를 흘겨보았다.

저 틀딱 엘프. 어디서 봤는가 했더니…… 그때 알프헤임의 기억 속에서, 날 이리저리 안내해주던 그 여왕의 친위대 기사와 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현실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인연이지만.

그냥 뭐, 그게 좀 기억에 남았다는 얘기다.

***

그 뒤의 여행길은 일사천리였다.

방해하는 놈도 없고, 며칠 내내 기절했던 샤오라이도 무난하게 일어났다. 컨디션이 나빴던 베로니카는 금방 나아서는 타타르니아가 가까워질 수록 마음만 앞선 듯 손을 꼼지락댔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타타르니아는…… 뭐, 유목 국가다운 곳이었다.

『오오! 이것이!』

니플헤임의 거인들도 들어갈 법한 커다란 천막 안에서, 내가 꺼낸 세계수의 이파리를 본 늙다리 장로들은 눈물 겨운 환희를 보여주었다.

『고맙네, 인간족 전사여! 그대의 호의는 그대의 이름과 함께 우리 타타르니아에 언제까지고 계속 남아 있을 걸세!』

『타타르니아의 벗에게 박수를!』

『와아아아아아아아!!』

여기서도 뭐 인종차별이나 트집 같은 게 터지면 귀찮겠네~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우리는 상상을 뛰어넘는 환영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뭔데? 이 깐프들, 왜 이렇게 말이 통해?

당연히 칼을 뽑으면서 ‘장로의 허가? 인정할 수 없어!’라거나 ‘보수가 없으면 말이 안 돼? 자네가 우리 장로를 죽인 건 말이 되고?’라며 토사구팽할 줄 알았는데!

이런 건 좆프가 아니야!! 내 구신의 마나 버닝 이벤트를 돌려줘!!

“저희가 고생 좀 했습니다.”

“니들이?”

“예. 의심하는 이들을 설득할 근거야 차고 넘쳤으니까요.”

─끄덕끄덕.

은근 자랑스럽게 구는 마흐잔과 샤오라이한테 뭐 꼽을 주기도 뭣할 정도였다.

현지 굴라나뢰크의 기억을 가지고 타타르니아에 협조적인 샤오라이의 보고와, 여기저기에서 신임받는 마흐잔의 경험담.

이들의 증언과 명백한 증거들─싸움이 벌어졌던 현장─까지 합쳐지니, 남은 건 엘프의 양심에 달린 문제였다.

남의 집에서 나온 개를 삶을까, 아니면 뼈다구를 물리고 보내줄까 하는 문제 말이다.

놀랍게도 이 나라 엘프들에게는 양심이 존재했던 모양으로, 내가 엘리자베트에게 받은 서류를 보여주기까지 하자 바로 환영식이 열렸다.

『세계수의 새순은 바로 사용하시죠.』

나는 축제로구나를 외치는 장로들을 다독여서 그 이파리부터 처분했다.

어느 정도 사정을 들은 장로들은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이파리를 갈았다. 그걸 약재와 조합해서는 비료에 묻고 작은 묘목의 화분에 부었다.

『이 묘목을 타타르니아의 상징이 될 나무로서 길러내 보이겠소.』

장로는 그걸 왕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레 챙겼다. 단호한 눈빛이었다.

『그 과정에서는 많은 고충이 있을 것이오. 나 역시 늘그막에 갈 날만 기다릴 일은 없겠군. 남은 여생을 이 한 몸 불태우고자 하오.』

『은인에게 이 이상 도와달라고는 않겠소. 남은 건 우리의 일이니.』

장로회의 엘프들은 나와 아내들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허나, 타타르니아의 엘프는 원한만큼 은혜도 잊지 않소. 충분한 대가와 우애를 증명하는 것이 우리의 긍지와 명예를 되찾는 제일보라고 믿소.』

『여려분의 뜻에 행운이 있길 바랍니다.』

나는 성호를 그으며 대충 알았다는 시늉을 했다.

장로들이 고개를 숙이는 것.

아마 국민들이 보는 곳에서는 못 할 짓이겠지.

리오스알프, 그러니까 하이 엘프가 아닌 그들은 왕을 자칭할 수가 없댄다. 옆집 다른 유목민족들처럼 우두머리 노릇을 하기도 힘들고.

그래도 엘프의 대표들이 머리를 숙이는 건 적지 않은 공경을 담은 의미였기에, 나는 그 이상 뭐라 하지는 않기로 했다.

아, 당연히 형식적인 면에서만 말이다.

『그래서, 부탁드린 건 생각해 보셨습니까?』

『보상은 유서 깊은 보물로 몇 가지 준비했소. 허나 탐지기 쪽은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오. 차마 대놓고 말씀드리긴 힘든 일이외만……』

『서두르다 실패하는 것보단 낫죠.』

어쩔 수 없다. 이건 진짜 성의 이전의 문제였다.

‘잠깐 생각해 봐도 문제가 한둘이 아니니까.’

굴라나뢰크의 사상에 동조하는 놈들은 몇 명에, 바이츠니아의 북벌군은 또 어떤가?

안팎으로 곪은 문제가 고름을 질질 흘리고 있는 중인 것이다.

『우리는 바이츠니아에도 그 몹쓸 놈들이 숨어 있을 거라고 보고 있소. 우리 쪽으로 전향한 샤오라이의 경우처럼 말이오.』

『국가 간의 분쟁으로 국력 약화를 유도한다는 겁니까?』

『그것만이 아니지. 혈기에 비해서 생각이 짧은 젊은이들은 손쉽게 증오를 쏟을 대상이 필요하오. 그 증오가 커진 나머지 인간족 전체에게 화살이 향하는 것도 시간 문제일 수 있고.』

『누가 뒤에서 그 방향성을 유도한다면 한층 더 그렇겠군요.』

이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21세기에서 인터넷 좀 해 본 사람은── 아니, 현실에 충실한 인싸들도 지역차별, 인종차별 같은 증오 범죄는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느 집단을 싸잡아서 증오와 배척의 대상으로 삼는 것!

그런 일이야 동물들 사이에도 있는 일이었다.

누가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분쟁을 유도해서 이득을 보는 놈들이 있다는 건 사실 지구에서도 주지의 사실 아니던가.

‘만악의 근원인 국방부를 냅두고 현역끼리 투닥거리던 게 하루 이틀 일이냐.’

말하자면 굴라나뢰크에게 동방 구주천지의 난세란 자기들의 뜻에 동조할 찬동자들이 주기적으로 자연발생하는 스포닝 풀인 것이었다.

또 신념적으로도 ‘좆간이 친구라고? 너 이 새끼 빨갱이냐?’라며 용납할 수 없겠고.

엘프 장로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끄덕거렸다.

『적지 않은 홍역을 치르겠지. 병을 고친다는 건 그런 뜻이니.』

『심려가 많으시겠습니다.』

저런… 좆됐나 봅니다…. 앞으로 어찌 될까요? 상상하고 싶지도 않네요….

나는 정성 가득한 착한 표정을 지으며 한편으론 그래서 보수는? 이라는 태도를 견지했고, 장로들은 그걸 눈치 못챌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이 상황의 안정과 안전화를 비롯해서 노르드 경의 보상을 준비하겠소. 점혈로 벌레를 짚어낼 수 있다면 색출하긴 어렵지 않지.』

『어디 멀리 가서 기다리고 있을까요?』

여기 있으면 또 귀찮은 일에 말려들 테니까.

우리 엘프 친구들이 어련히 엘프신공을 펼치며 빨갱, 아니지. 굴라나뢰크 색출 모드에 들어간 동안에만 어디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다 올까.

장로들은 당연한 이야기라는 듯 웃었다.

『그래 주면 고맙겠소. 은인을 위험해 빠트릴 순 없으니.』

『우리는 그 동안 경이 마음 놓고 탐지기를 쓸 수 있는 환경을 갖춰 두겠소. 마침 경이 요청했던 보수에도 비슷한 청이 있었지 않소?』

내가 요청한 보수?

내가 눈을 끔뻑대자, 할머니 장로가 대충 봐도 귀해 보이는 나뭇가지 완드를 가져왔다.

『이건 타타르니아에서 선물하는 우애의 증표가 아닌, 우리 장로회가 준비한 감사패요. 북방의 요정왕과 맞은 친분이며 신뢰의 상징이지.』

신묘해 보이는 완드를 받아들자 장로들은 다시 간단한 목례를 했다.

『타타르니아의 소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요정향에서 휴양하다 오시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요정의 나라로 떠나는 여행이라.

무슨 동화책 속 얘기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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