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만화나 소설도 아니고, 강해진 거랑 지 기척을 죽이는 능력이 비례하진 않는다.
무협지처럼 고수만 되면 저절로 발소리도 없이 움직이는 무음보법을 깨달으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난 그걸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고? 내 성장사를 돌이켜보면 침투와 은밀한 이동은 전투 경험만큼이나 풍부했기 때문이다. 날 캡틴 브리타니아라고 부르라.
게다가 상대는 유능하기는 해도 기척을 느끼는 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힐탱 수녀와 마법사! 지금 인생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나를 알아챌 수는 없으리라.
‘그때, 닌자가 나타났다…….’
나는 크게 우회하며 다람쥐보다 작은 발소리로 욕탕의 벽을 넘었다.
내 투명한 모습은 말하자면 투명 페인트와 같은 것이라서, 빠르게 움직이면 윤곽이 드러난다. 그런 이유로 나는 진급심사가 걸린 노땅 대령이 야간전술보행을 하듯 신중하게 이동했다.
“큼. 새삼스럽지만 또 신세를 졌구나, 다나야.”
베로니카의 말을 들으며 장식 뒤에 밀착!
숨조차 낮고 깊게 내쉬며, 자연과 나를 하나로 삼듯 고개를 내밀었다. 다나와 베로니카는 몸을 다 씻고 욕탕에 들어간 듯 몸을 담그고 있었다.
다나는 목 뒤를 마사지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얘기? 아, 간병?”
“……그래. 이 몹쓸 저주는 대체 얼마나 더 날 귀찮게 할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뭐 어때. 곧 나을 거잖아?”
“음……! 그렇지, 그렇고 말고! 저주의 근원만 찾아낼 수 있다면, 이제는 부수는 것 뿐이다! 우리 주인님을 만난 뒤로는 좋은 일 뿐이었으니 앞으로 조금이겠지!”
금방 기운을 되찾은 베로니카가 허리를 펴면서 아이처럼 웃었다. 오만방자한 말투랑 안 어울리는 동작에 커다란 가슴이 수면에 둥둥 떴다.
‘쓰벌, 꼴리네.’
그걸 구경하던 나는 슬쩍 걸어나왔다.
내가 있으면 아내들은 반드시 ‘나’를 의식하면서 행동하곤 했다. 그렇기에 아예 무방비하게 풀어진 아내들의 모습은 짜릿한 배덕감을 선사했다.
‘더 가까이 가 봐야지.’
나는 몸을 낮추고 걸었다. 포복전진은 발기해서 무리였다.
나를 빼고도 친밀한 사이가 된지 오래인 우리의 너드 미녀 콤비는 그럭저럭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러니까 포지션만 조심하면 가까이 가도 들키진 않을 것이었다.
“후우…….”
다나가 문득 한숨을 쉬었다. 당연히 나는 쓰벌 들켰나 하는 마음에 움찔했고, 베로니카는 신경이 쓰인 것처럼 고개를 모로 꼬았다.
“왜 그러느냐?”
“……아니, 별 건 아니고. 그냥 내가 죽게 만든 발퀴리에들이 생각나서.”
우리 박사님은 퇴폐미가 어울리는 미녀였다. 그 색기는 피로에 쩔어서 눈매가 살짝 처졌을 때나, 우울한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 가장 꼴…… 아니, 아름다웠다.
“내가 지시를 잘못해서 죽은 셈이잖아. 솔직히 골렘이나 다름없다고는 해도, 며칠 만났다고 그새 정이라도 붙었나 봐. 이렇게 생각나는 걸 보면.”
“그래서 외모를 통일한 걸지도 모르지. 병사의 죽음의 일희일비하지 않도록.”
입에 담을 단어를 고민하는 듯 베로니카의 말은 천천히 흘러나왔다.
“마음 쓰지 말거라. 너의 판단과 그들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필시 누군가가 크게 다쳤을 터다. 주인님도 너를 탓하지는 않았잖느냐?”
“감성적인 생각이랑 딱 구분해서 생각해도 역시 좀 그래. 얼마 없는 충직한 호위인데 그걸 3마리 씩이나 날려버린 거 아냐.”
그렇게 입술을 삐쭉대던 다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쯤 하자. 너한테 말해봤자 불평밖에 더 되겠어? 괜한 소리 해서 미안.”
“……네 말대로 감상을 배제하고 생각하면, 네 껄끄러움을 없앨 방법이 없지는 않지. 잃은 만큼 또 채워넣으면 그만이니.”
별안간 중얼거리는 베로니카.
다나는 그 의미를 곱씹듯이 말이 없다가 얼굴을 팍 찡그렸다.
“안 돼. 기각. 논외. 그건 아니지. 진짜 아냐.”
“왜? 잘 어울리던걸. 축복을 내리는 사제는 곧 전사들의 어머니 아니더냐.”
“아, 에바야. 차라리 네가 더 말이 되지 않냐?”
“나는 저주만 풀면 이러쿵 저러쿵 하지 않아도 어엿한 여신이지. 구신급 존재는 못 되고, 그저 옛 신화의 위대한 종족일 뿐이긴 해도 말이야.”
─씨익. 다나를 골리려는 듯 웃는 베로니카. 그에 다나도 따라서 웃었다.
“어쭈? 이게 까부네. 우리한테 사모님 사모님~ 거리면서 허리가 부러져라 숙여대던 게 몇 달이나 됐다고──”
“아아! 안 들린다, 안 들려!”
베로니카가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젓자 다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할 말이 없다기보단 수면에서 파도를 일으키는 한 쌍의 봉우리에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씨이……. 후, 아무튼 난 급에 안 맞아. 솔직히 내가 여신이라고 하면 지나가던 개도 웃을걸. 일단 나는 100% 빵 터질 자식 있어.”
“네 외모가 모자라지는 않다고 생각한다만…… 그리고 토르의 〈인신〉이었던 자도 전승되는 토르와는 닮지 않았잖느냐?”
“그 레티티아인가 하는 사기꾼은?”
“모를 일이지. 점점 아름다워졌을지도.”
“……그건 약간 혹하는데.”
“……나도 말해놓고 갑자기 끌리는군.”
저들끼리 얘기하던 그녀들은 미묘해진 분위기를 풀고자 화제를 바꿨다.
“그건 그렇고, 저주가 풀리면 너도 지금보다 더 대단해지거나 해?”
“〈인신〉 같은 급격한 변화는 없더라도 묶였던 날개를 푸는 정도는 되겠지. 가시적인 성장은 아니겠지만 적응한 뒤로는 아스가르드의 구성원이라는 명예가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될 것이다.”
“다들 아주 쑥쑥 크네. 나도 뒤쳐지지 않으려면 고생 좀 해야겠는걸.”
“주인님께 정(精)을 받으면 되지 않느냐?”
“……그 심법인가 하는 거 말이지? 나는 솔직히 그거 자신 없는데….”
내가 그녀들의 근처에 도착했을 때, 다나는 별 생각 없이 무심코 중얼거린 듯 내뱉고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팔뚝을 매만졌다.
“결국 그것도 자기 적성이 중요할 것 아냐. 난 잡아먹히면 잡아먹혔지, 그 녀석한테 마나니 뭐니 하는 걸 받아낼 자신 없어. 이미지가 안 떠올라.”
“그거야 뭐어…… 나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군.”
똑같이 귓볼을 붉힌 베로니카는 탕에 어깨까지 담그며 잠수했다.
“성행위라니. 주인님한테 반하기 전까지는 상상해 본 적조차 없었던 일인데, 나는 자신감이랄 게 생기기도 전부터 순종하고 굴복하는 법부터 배웠단 말이다…….”
“……잘도 그런 부끄러운 소릴 하네.”
살짝 낯뜨거운 듯 중얼거리는 다나. 베로니카는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눈을 피하는 다나한테 물을 끼얹었다.
“다, 다나 너도 고만고만한 거 다 안다! 어디서 자긴 아닌 척 빼고 있느냐!”
“누, 누가 뭐래?! 난 그냥, 굳이 그런 걸 말로 할 필요가 있냐는 얘기지!”
첨벙, 첨벙─!
꺅꺅 소리치며 두 미녀는 물을 끼얹어대다가, 좀 지나서 지친 듯 늘어졌다.
“난 이젠 교합이라는 말을 들으면 주인님 밑에서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깔아뭉개지는 이미지밖에 안 떠오르는 판국이다……. 이미 뿔도 바쳐버렸고.”
“뿔?”
“……우리 일족엔 부부가 서로의 뿔을 바치며 몸과 마음을 교환하는 혼약의 의식이 있다.”
“너야 어쨌든, 그 모지리한테 뿔이 어딨어서?”
“없지. 그래서 그냥 나만 뿔을 바쳤다. 받은 게 많으니만큼 후회되는 일도 아니다만….”
“……잘은 몰라도 고삐를 잡혔다는 거지? 말이 되는 저주에 걸린 여신님이 말하면 썩 웃기 힘든 얘기네.”
“그건 도발이더냐? 응? 도발이구나?”
칭얼대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머리만 내놓고 고개를 젓는 다나.
“……어쨌든, 너랑 난 그 채양보음의 방중술을 써먹는 건 꿈도 못 꿀 처지구나.”
“주인님한테 역으로 있는 마나 없는 마나 전부 퍼다 바치기 싫으면 일찌감치 포기하자꾸나.”
“시끄럽네……. 애초에 우리 중에서 그게 될 듯한 녀석이 있긴 해?”
“있지 않느냐. 나는 1명 떠오르는군.”
“……응. 나도. 왠지 귓가에 핑크핑크한 웃음이 아른거리는 것 같네.”
“머리에 열이 올랐나 보구나. 실은 나도 그렇다.”
탕에 엎어진 베로니카는 몸에 힘을 빼고 머리카락을 탕에 둥둥 띄웠다.
때마침 웃음을 참으며 그녀 가까이에 온 나는 그 끝내주는 절경을 가까이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 좀 색다른 성분이 들었는지 뿌옇던 온천도 가까이서 보면 물 속이 잘만 비쳤다.
‘쓰으으읍. 미치겠네.’
존나 딸 마렵다.
결혼하고도 남자는 딸을 치기 마련이라고 들은 적은 있다.
하지만 지금까진 우리 아내님들이 워낙 예쁘고 줄충해서 딸을 칠 이유나 기회가 없었다. 성욕이 쌓이면 아내들을 침대로 이끌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요 며칠 동안 아내들이 근처에 있는데도 본의 아니게 금욕적인 생활을 보내서였을까? 혹은 평소에는 시치미를 떼는 아내들의 꼴릿한 본심을 들어버려서였을까?
오랜만의 자위욕구에 시달리며, 나는 몰래 딸을 치면 들키지 않을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내 사정량이나 정액의 냄새도 문제고, 싸버리면 투명화도 적용되지 않는다.
싼 다음 거기에 새로 투명화를 걸자니, 가면에 걸린 은신의 룬의 적용범위 밖이라서 마나가 흘러나올 게 뻔했다.
결국 이 끝내주는 딸감은 그림의 떡이란 말인가?
─터벅.
차라리 얼른 밖으로 나갔다가 ‘꼴려서 왔음’하며 아내들과 온천 섹스를 즐기자는 생각에 도달했을 때였다.
사라락….
내 오감이 옷을 갈아입는 누군가의 소리를 들어버린 것은 말이다.
‘……씨발?’
엘프들과 따로 묵기로 했던 이 숙소.
우리 가족 외의 이용자가 누가 있을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 탈의하는 소리의 주인공이 누굴까 하는 건 의문으로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조졌다!!’
심장이 철렁하고 등골이 오싹해진 순간, 나는 그 즉시 이 자리를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상대 역시 미스릴 클래스의 달인.
그것도 흑마법사 사냥을 위해 나 이상으로 은밀한 걸음걸이와 추적을 갈고 닦은 여인. 당연히 내 오감이 그녀의 미세한 기척을 탐지한 건, 그녀가 탕에 들어오기 직전의 일이었다.
─찰칵.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내가 아내들 뒤쪽에서 일어나려고 했을 땐, 이미 그녀가 노천탕이 있는 공간으로 발을 디딘 뒤였던 것이다.
“아아, 네페르티티. 그대였구나.”
늘어져 있던 베로니카는 몸을 일으키며 반듯한 자세로 일어섰다. 가족이 아닌 사람한테 꼴사나운 꼴을 보여주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네페르티티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꾸없는 무뚝뚝한 모습은 평소대로라면 평소대로였지만, 그 눈이 정확하게 투명화 모드로 일시정지한 내 쪽에 꽂혀 있다면 좀 얘기가 달랐다.
이미 돌아가 있던 내 눈은 늘씬하게 뻗은 하얀 다리를 타고 요염한 골반 라인까지 올라갔다가, 그 모습을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꾹 닫혔다.
‘테에에에엥……!!’
나는 식은땀을 분출하며 비상구의 사람 그림처럼 바짝 굳었다. 늦었다는 건 알았지만 도저히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페르티티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대답이 없는 것도 그러려니 하고 여긴 듯, 베로니카는 수면을 통통 두드렸다.
“네 사정은 들은 바 없다만, 앞으로도 함께 할 듯 하니 친분 정도는 다지자꾸나. 요전의 싸움만 해도 우리 주인님이 적지 않은 신세를──”
…팟!!
번개처럼 움직이는 네페르티티의 손.
베로니카가 고개를 모로 꼬는 기척이 느껴졌다.
“……갑자기 몸은 왜 가리느냐?”
들켰다.
아니, 생각해 보면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네페르티티의 기척을 감지했다는 건, 그녀 역시 내 기척을 감지했다는 뜻.
게다가 네페르티티는 인간세상에서만은 천하에 내놓을 만한 달인급 전사다. 내 기척마저 감지한 이상, 얄팍한 투명화 마법 따위 간파하는 게 당연지사였다.
그래서 두 눈을 질끈 감은 나는 그저 불상처럼 멈춰서 땀을 흘릴 뿐이었다.
“혹시 네 고향엔 공중목욕 문화가 없느냐?”
베로니카는 이해하기 힘든 듯 갸우뚱거렸는데, 그러다가 인간 사회와의 문화 차이를 실감해오던 경험을 토대로 그럴싸한 결론을 내린 듯 했다.
“같이 있는 게 거북하다면 말하도록. 우린 이미 충분히 즐겼으니, 곧 자리를 비켜줘도 좋다. 다나, 너도 괜찮겠지?”
“아, 나야 상관없는데…… 비켜드려요?”
“……아니.”
─살랑.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 들린 소리에 나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쏴아아… 첨벙.
물을 끼얹어서 몸을 닦은 네페르티티가 욕탕에 들어온 듯 했다. 물살을 가르면서 조금씩 커지던 물소리는 몇 초 걸리지도 않아서 우뚝 멈추었다.
아내들 옆에서 음습한 욕망을 해소 중이던, 내 바로 앞에서 말이다.
그녀는 아주 잠깐 머뭇거린 끝에 돌아앉았다.
“별로, 신경 안 써.”
무심코 살짝 뜬 실눈에 희미하게 붉어진 귓볼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