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먹고 자며 움직인 날은 꽤 되는데, 가만 생각해 보면 아직 제대로 흉금을 터놓고 얘기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거는 베로니카.
앞서 말했다시피 네페르티티는 그녀들 근처에로 와서 앉았다. 아마도 그게 그녀 나름의 친밀감의 표시라고 생각한 듯, 질문하는 베로니카는 어색한 태도를 조금 벗어던졌다.
당연하지만 진짜 원인인 나는 미동도 하지 못했지만, 뿌린 대로 거둔 셈이었다.
“나르메르-나일 때야 목적을 공유하는 사이였으니까 넘어가더라도, 이 먼 곳까지 함께 와 주었던 것에는 감사인사를 해야만 하겠지.”
“네페르티티 씨 정도면 돈이 궁할 일도 없겠고, 우리 남편놈이 어떻게 꼬드긴 거에요?”
완전히 없어지진 않은 어색함을 타파하려는 듯 다나까지 가세하자, 목석처럼 빳빳하게 굳어 있던 네페르티티는 녹슨 호두깎기 인형을 방불케 하며 입을 열었다.
“……편하게, 하자.”
“편하게라뇨?”
“말투나, 자세나…… 그런 거.”
“아, 아아. 말 놓자는 얘기죠? 알겠어요.”
다나는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는데, 뒤에 있던 나는 그 속뜻까지 읽을 수 있었다. 저 제안은 누가 보면 판토마이머로 착각할 듯한 자세로 굳어버린 내게 건넨 것이기도 했다.
─주춤주춤. 조심스럽게 앉는 투명인간 강북호.
“으흠. 아무튼 웬만해선 시간낭비나 다름없었을 텐데, 일부러 고마웠어.”
장유유서는 존재해도 유교 같은 문화권이 아닌 탓일까. 따로 나이를 묻거나 하는 절차도 없이 다나는 원래 화제로 돌아갔다.
스우, 스으…. 내게만 들릴 정도로 얕게 호흡을 추스르던 네페르티티.
그러던 그녀는 다나에게 그건 착각이라는 듯 살며시 머리를 흔들었다.
“나도 얻은 건 있어.”
“얻은 거요?”
“……배움?”
브리타니아 단어가 익숙하지 않은 듯, 스스로도 미덥잖은 의문형이었다. 하지만 자기 어깨를 주무르던 베로니카는 찰떡처럼 알아듣고 웃었다.
“우리 주인님께서 노상 말하는, 그 깨달음인가 하는 것 말이군.”
“아하, 그건가. 표현은 걔한테 들은 게 처음이긴 해도, 그 ‘유레카!’ 인가 하는 느낌이라면 살면서 누구든 한두 번 정도는 경험하는 법 아냐?”
“우리 주인님이나 네페르티티처럼 싸움에서 삶의 진리를 깨우치는 이들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겠지. 이른바 전사의 지혜라는 것이다.”
“……왜, ‘주인님’이야?”
우리 아내님들은 어떤 깨달음이었는지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매너를 보여주었는데, 그걸 듣던 네페르티티는 불문율을 깨고 질문을 던져버렸다.
나 때문에 머리가 냉정하게 돌아가지 않기라도 했던 걸까. 본인도 입에 담고 아차 싶었던 듯 움찔하는 네페르티티였다.
“그, 그건……”
새삼 지적받자 부끄러웠던 듯 입을 뻐끔거리는 베로니카.
애당초 날 골려주고, 자기 흑역사를 농담거리로 승화시키고자 일부러 입에 담은 장난스러운 호칭이었다. 그 연원을 남에게 설명하는 건 여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으흠, 흠! 헛기침을 하는 베로니카.
“지금에야 영광스럽게도 부인으로 받아들여지긴 했다만, 나는 본래 신분 상으로는 주인님의 시녀나 다름없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
“이해했어.”
“……고맙구나.”
실수를 깨달은 네페르티티가 대충 수습해 주자 베로니카는 마음을 놓은 듯 했다.
“……………….”
“……………….”
“……………….”
하지만 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어보듯, 데면데면한 사이에서 어색함의 최대치를 찍어버리면 그 뒤에는 불편한 침묵만 남을 뿐이다.
씨발, 분위기 얼음장 같은 것 좀 봐.
이걸 깨버릴 인싸성(Nakadashi-性)이나 언변능력이 인생 절반을 공부에 손해보며 살아온 우리의 ‘찐’ 콤비에게 있을 리도 만무.
“스, 슬슬 일어날래? 좀 어지러운 것도 같고.”
“그, 그러자꾸나. 네페르티티야, 나중에 또 얘기 나누자꾸나.”
결국 그녀들은 ‘나중에 밥 한 번 같이 먹자’처럼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말만 남겨두고 적전도주를 선택하고 마는 것이었다. 이 찐따미… 우리 아내님들이 맞습니다….
그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혼자만 남은 욕탕에서 네페르티티는 어깨까지 잠수했다.
“……나와도 돼.”
“……옙.”
─슈르륵. 투명화를 해제하는 나.
신체가 나만큼 강건하지 않았으면 진작 위험해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탕에 들어가면 욕탕의 물 때문에 티가 날 테니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찰박, 찰박.
그때였다. 네페르티티가 베로니카를 따라하듯이 수면을 두들겼다.
“감기 걸려.”
“……그렇겠군요.”
이제 와서 빼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촌스런 변명이나 빤쓰런을 하는 껀 꼴마초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과 같다.
아니, 무엇보다 네페르티티도 용기를 내서 꺼낸 말일 터였다.
여기서 ‘아뇨 그건 좀’ 하고 튀어버릴 정도라면 훨씬 전부터 선을 그어뒀어야지. 지금 발휘하는 배려는 이타심이 아니라 치졸한 비겁함일 것이었다.
“잠깐 몸만 덥히고 일어나겠습니다.”
나는 소리도 내지 않고 입수했다.
거리를 두지 않는 게 차라리 나았다. 가까이로 붙으면 대갈통을 180도 돌리지 않는 한 애먼 델 보게 될 일도 없지 않겠는가.
네페르티티는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나도 되도록 그쪽을 보려 하지 않으려 하면서, 그 생각이 티나지 않도록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네페르티티가 중얼거렸다.
“……아내들이, 상대 안 해 줘?”
“아닙니다. 이 일은 전적으로 제 독단으로, 저희 아내들에게는 어떠한 잘못도 없습니다.”
아니 쓰벌, 내 입이 왜 이런 꼬리자르기용 말단 직원 같은 대사를 뱉고 있지? 여기가 기자회견 회장이라도 되나? 나도 아직 냉정을 덜 되찾았군.
“저희 아내들은 제가 여기 있었던 것도 몰랐을 겁니다.”
그러니까 너무 시간을 끌지 말고 빨리 돌아가야 하기는 했다.
그녀들이 방에 돌아갔을 때, 내가 거기 없으면 어떤 변명을 해야 할지도 골치 아프고.
“……그러면, 왜?”
네페르티티는 몇십 초의 텀을 두고 질문했다.
“왜 숨어 있었어?”
“……못난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늘 하는 것처럼 빤히 쳐다보는 걸로 내 대답을 촉구하려고 했던 걸까. 무심코 고개를 돌린 네페르티티는 화들짝 놀라서는 머리를 틀었다.
쓰벌, 한쪽 다리를 세워둬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풀발한 자지가 빤히 보였을 테니까.
“……이유가 신경 쓰여.”
“제가 그…… 변태라서 그렇습니다.”
그냥 자수하고 광명 찾자.
나는 솔직담백하게 고백하기로 했다. 뇌의 필터 정도는 걸칠 필요가 있겠지만, 궁색맞은 변명이나 주워섬기기엔 그녀에게 너무 미안했다.
쪽팔려 뒤지는 한이 있어도 자업자득일 테니까.
숨을 들이킨 네페르티티는 무릎을 문질렀다.
“변태인 게, 왜?”
“남자들의 70%는 여탕에 대해 호기심과 낭만을 품는 법입니다. 물론 관음은 범죄니까 하지 않는 게 맞습니다만…… 들켜도 혼나는 선에서 그치지 않을까 해서 숨어들었죠.”
“……무방비한 알몸이 보고 싶어서?”
“그, 그걸 그렇게 단정하는 건 쿨하지 않네요.”
씨발,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절로 튀어나오네. 허세 부릴 때가 아닌데.
억지로 냉정침착하게 엘리트 대갈통에 냉각수를 부으려 할 때였다. 나는 오감에 걸린 쿵쿵 거리는 진동에 아내들이 돌아오는 줄로만 알고 기함했다.
쿵, 쿵, 쿵…!
하지만 그건 심장 소리였다.
내 심장 소리인가? 아니,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쓰레기 같기는 하지만, 이 상황에서 느끼는 죄책감이나 긴장이랑은 별개로 내 가슴은 이 정도의 야리꾸리함에 터질 듯 박동치진 않는다.
“……나는?”
그 심장 소리의 주인은 네페르티티였다.
그녀는 앉은 채로 무릎을 쭉 펴고서는 심호흡 한 번 하고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내 몸도…… 보고 싶었어?”
몸 쪽으로 꽉 찬 직구에 합죽이가 되고 마는 나.
네페르티티야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며, 기척 같은 게 우리 아내들 뿐이라서 들어온 거였겠지. 자신의 감각을 의심하지도 않은 건 그녀의 실력을 생각하면 흠결이라곤 할 수 없었다.
설마 그녀의 감각을 잠시나마 빠져나갈 레벨의 달인이 기척을 한계까지 줄여서 숨어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심지어 다나랑 베로니카는 저렇게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네페르티티를 염두하지 못한 건 완전히 실책이 맞았다.
나라고 언제나 완벽할 순 없지 않겠는가. 씨발, 어? 남자가 되서 말야! 투명인간이 되면 생각이 좀 짧아질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단지 지금 그 말을 입에 담는 건 100% 오답이라는 점이 문제다.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솔직하게 ‘걍 우연이고 고의는 아니엇는대용’하고 말하기는 더 힘든,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선택지…!
아무 대답도 못하고 끙끙대고 있던 나는 불현듯 내게 꽂히는 시선을 눈치챘다.
“……읏.”
네페르티티는 감추기 힘들 만큼 발기한 자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홱!
고개를 돌려버리는 네페르티티.
아무리 유니콘 인증마크가 땅땅 붙은 그녀라도 남자의 발기가 뭘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성지식이 전무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백 번의 말보다 명백한 증거였다.
어떤 식으로 해석할지야 사람 나름이겠지만, 내 발기를 본 그녀는 그 그로테스크한 모습에 숨기지 못할 만큼 놀라면서도 어딘지 기쁜 듯 침을 꼴깍 삼켰다.
“……이해했어.”
아마 내가 발기한 걸 보고 질문의 대답을 들은 느낌이었던 걸까.
네페르티티는 그렇게만 말하곤 탕에서 일어났다.
찰박…….
재회했던 날에 버금가는 거리감으로 접근해 온 네페르티티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살짝 눈을 돌리면 그녀의 나체는 가감없이 훤히 들어왔다.
…꼬옥. 손깎지를 끼고 잠들듯 눈을 감은 그녀.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한순간 아쉬움을 느끼는 자신을 자각하고 머리를 두들겼다.
‘아쉬우면 뭐, 새꺄.’
네페르티티가 여기서 더 액션을 취해줘야 한다는 말인가? 그럴 필요도 없었다. 결국 이건 내게 주도권을 양보하겠다는 암묵의 사인이었으니까.
물론, 내가 지금 그녀에게 먼저 다가가면 당장 거사를 치르기는 어렵지 않겠지.
무드도 적당한 게 그야말로 절호의 찬스이기는 했지만, 문제는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선을 넘는 건 우리 아내님들에 대한 배신이라는 점이었다.
그 배신이 어쩌고 하는 기준은 완전히 개인적인 문제이기에, 오히려 나는 침착해졌다.
네페르티티가 상황을 여기까지 허락한 게 무슨 뜻이겠는가.
언제든지 내가 손을 잡고 이끌면 따라가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사랑 고백도 먼저 했던 게 네페르티티다. 이건 잠깐의 유보일 뿐이렀다.
‘좀 더 길게 봐도 되겠지.’
나는 그녀의 거침없는 과감함에 쓰게 웃었다.
양보를 이끌어냈다기보단 농구의 패스 같았다. 안 받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 내 손바닥을 힘으로 쫙 펼치고 주도권을 쥐어 준 듯한 느낌적인 느낌.
초일류 전사답게 망설임이라곤 없는 대쉬였다.
아내들은 이렇게까지 빠르고 적극적으로 대쉬를 해 오지 않았기에 나까지 서두르게 됐지만, 늦지 않게 그녀의 마음에 답하도록 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래도 차마 지우기 힘든 진한 아쉬움에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네페르티티는 바짝 굳었지만 부위가 부위였던 만큼 금방 힘이 풀렸다.
보통 정신머리로는 스스로를 몰아세워서 달인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동작 하나에도 의지와 깨달음을 깃들게 하는 초일류의 전사들. 상대의 뜻과 진의를 빠르게 간파하는 건 무엇보다 쉬운 일이었다.
내가 네페르티티의 무표정에서 감정을 읽듯, 이 사차원 아가씨도 내 뜻을 알아차렸겠지.
“……시간 낭비가 중요하다는 걸 배웠어.”
네페르티티는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만족한 듯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지는 않았다.
내가 아슈카트와 싸우면서 얻은 깨달음과 같은 것을, 그녀도 얻었던 것이다.
“네가 말했던 것처럼,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는 힘은 덧없는 거였어.”
“그런 꼴로는 복수를 이뤄내지도 못할 거고요. 황야나 사막이나 다를 바 없죠?”
“응.”
복수에만 눈이 멀었던 건 기존의 네페르티티나 아슈카트나 도토리 키재기다.
하지만 모든 걸 버리고 갈고 닦은 강함은 절대 마스터 클래스 같은 강인함을 얻지 못한다는 걸, 그 틀딱 엘프는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다양한 경험과 인간의 시답잖은 마음이 제대로 된 강함을 만든다니.
현실 얘기라기보단 꼭 이야기 속 교훈 같았다.
‘그래도 괜찮겠지.’
착하게 살기가 이토록 좆 같은 세상 아닌가.
가끔씩은 그런 얘기가 있어도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