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651화 (650/1,009)

“로두르=로키요?”

예상 밖의 인명, 아니 신명(神名)이었다. 머리를 모로 꼬고 마는 나.

“제가 아는 그 로키 신이랑은 동명이인입니까?”

‘그 로키’라는 건 내 고향 지구에서는 북유럽의 신화로도 유명한 그 사고뭉치다.

신인데도 야바위와 사기로 더 유명한 신.

그 신과 로두르의 풀네임이 우연히도 비슷했을 뿐인 걸까?

내가 생각하기엔 네/아니오로 대답하기만 하면 되는 질문이었는데, 그 말에 요정왕은 눈을 감고 과자를 음미하기만 할 뿐이었다.

나를 무시했기에 나오는 행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단번에 핵심을 찔렀고, 또 그 핵심이랄 게 요정왕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인 듯 했다. 내 지레짐작이긴 하지만 말이다.

“……언어라는 건 뜻을 전달하는 능력이지.”

그래서였을까? 요정왕은 내가 아까 그랬듯이 빙 돌아가며 화제를 받았다.

“생물이 전하고 싶어하는 뜻은 결국 자신의 마음이야. 우리 요정족이 식물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건 그래서지. 타고난 성품도 그렇고, 우리 종족은 로두르=로키를 많이 닮았어.”

“구신(九神) 로키의 피휘자는 ‘유희신’이었죠?”

“그렇지.”

에둘러 말한 대답에 숨겨진 뜻. 나는 그걸 대충 이해했다.

‘……만언신 로키랑 유희신 로키는 같은 존재다.’

바이콘과 유니콘은 신마 슬레이프니르의 후손.

그리고 그 오딘의 자가용의 마망은 로키다.

‘따라서 로키는 베로니카의 먼 선조지.’

그렇게 가정하고 로키가 바로 만언신으로 치면, 유니&바이콘 신족을 구하고자 저주를 내린 신이 누구인지도 대충 알 만 했다.

‘……유니콘과 바이콘이 받은 저주는 타종족과 소통하지 못하게 되는 거였지.’

진짜 모습을 잃고, 분신이나 룬의 텔레파시로도 소통이 불가능해지는 저주!

‘대화가 가능한 건 나처럼 만언신의 권능을 빌려쓰는 놈 정도였고.’

소통. 대화. 언어.

다시 말해서 ‘말’이다.

유니콘과 바이콘은 다른 종족과 말하지 못하는 저주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말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

그것도 동일선상에 두고 볼 수 있는 문제다.

‘변신은 유희신 로키의 특기잖아.’

다른 생물한테 변신 마법을 거는 게 어렵다는 걸 생각해 보길 바란다.

신대에 건 저주가 수만 년 뒤까지 종족 전체를 계속 변이시킨다고?

그런 저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분야의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신들 사이에서도 변신의 대가로 불리던 로키라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말(言)’과 ‘말(馬)’의 저주라니?

좀 말장난처럼 들리는 게 웃기긴 한데, 생각해 보면 그 ‘장난’이라는 것도 로키의 인성── 아니, 신성(神性)을 상징하지 않은가.

‘……전부 연결돼 있었군.’

만언신 로두르=로키와 유희신 로키.

‘어쩌면 이 둘은 같은 신일지도 몰라.’

끼워맞추기 식이지만, 원래 역사적 진실을 발굴하는 가설은 이렇게 세우는 법!

‘……하지만 그렇다기엔 모순이 좀 있는데.’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기는 나.

반복해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이 이세계의 신비롭고 놀라운 비밀 이야기를 알아내고도 진심으로 경악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 비밀이 논문 거리로 좋거나, 내 인생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면 더 그렇다.

‘영화 속의 반전이나 흥미진진한 역사 이야기나 다름 없지.’

솔직히 남의 사정이나 옛 역사가, 아내님들이랑 뒹굴고 맛난 밥 처먹다가 논문이나 써놓고 지구에 돌아가려는 내 삶에 무슨 영향이 있단 말인가?

차라리 생판 남이라도, 똑같이 현재진행형으로 고통받는 이세계인들의 사정이 더 눈에 밟히는 게 정상적인 사람의 사고방식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런데 요정왕이 꺼낸 얘기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모순과 위화감. 나, 그리고 우리 가족들한테도 남 일이 아닐── 어떤 잃어버린 과거의 역사.

그것들을 망라해서 내놓을 수 있는 신화시대의 대답이 될 퍼즐 한 조각이 갑자기 손에 들어온 듯한 직감이 학자의 후각을 찌릿하도록 자극했다.

내 미래마저 좌우하는, 어떤 거대한 비밀의 끝자락에 손가락을 걸친 듯한 직감이었다.

“왜 그래?”

“아뇨, 잠깐 다른 생각을 좀 했습니다.”

단지, 요정왕은 내 의문을 해소해 줄 만큼 모든 걸 아는 입장은 아닌 듯 했다.

나는 손에 들어온 퍼즐을 잊지 않도록 복기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이름이나 신화를 보면 확실히 요정족 뺨치는 사고뭉치이긴 했는가 보더군요. 혹시 요정적의 그 성격도 권능의 영향일까요?”

“반대야. 요정족의 그런 성품이 마음에 들어서, 우리한테 권능을 내려준 거라고 해.”

그런 모양이었다.

천방지축 얼렁뚱땅한 요정족들을 보고, ‘새끼들 쫌 맘에 드네’ 하고 생각한 로키가 자신의 권능을 나눠줬다고 해도 앞뒤는 맞지 않을까.

“수분의 기적은 만언신의 권능에 기반해. 식물들한테 뭐가 힘들고, 뭘 잘 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내 마나로 기운을 복돋아주면 되거든.”

“그렇습니까.”

나도 스콘 하나를 가져와서 쪼깼다. 적당히 단단한 게 맛있는 냄새가 났다.

“저는 동물이랑 얘기할 수 있는데, 식물이랑은 영 안 되던걸요.”

그보다 시도해 본 적도 없었다.

식물한테 말을 걸었던 건 예전에 교실에서 생수통에 던져둔 양파한테 ‘허접♡ 뷰웅신♡’이라면서 학급 전체가 합심해서 놀려댔던 것 정도다.

아니, 어쩌면 그건 집단 따돌림의 예습과도 같은 교육절차가 아니었을까…?

식물한테도 마음이 있다면, 그때 양파가 느꼈을 마음의 상처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한테 회초리를 휘두르던 그 표독스러운 노처녀 교사는 자기 반 학생들을 학폭 예비군으로 기르고 싶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 너무 무섭다!

내가 뒤늦게 밝혀진 진실에 몸을 떨고 있는데, 요정왕은 킥킥 거리며 말했다.

“만언신이 그런 쪽의 권능은 주지 않을 걸지도 몰라. 인간의 언어만 해도 여러 개잖아? 동물이랑 식물의 말이 같을 리도 없고.”

“그렇겠죠. 사실 별 문제는 아닙니다. 지금의 이 번역능력으로도 불편하진 않아서.”

그렇게 말하고 입에 스콘을 털어넣는 나였다.

이세계 뉴비 시절에는 이 파파고 번역기로 마법천자문, 혹은 포켓몬 마스터가 되는 꿈도 꿨던가. 하지만 지금 와서는 굳이?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

‘아니, 그러고 보면 룬 문자가 마법천자문 아녀?’

나 강북호는 어느덧 천세마왕, 아니 천공마왕이 돼 버리고 말았던 것인가? 마초의 성장이란 그들 스스로도 자각하기 힘들 만큼 빠른 거구나.

물론 이 번역능력이 없었으면 내 인생은 송두리 째 바뀌었겠지.

번역능력이 없으니 다나랑 친해지지도 못했을 게 당연하고, 어쩌다 사르가디스에서 프랑과 만나서 모험가 일을 했어도 야수회귀의 주문을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내 이세계 드루이드 매지션으로서의 능력치는 대부분 번역능력에서 유래했다.

오딘? 그년 따윈 폐급 맞선임일 뿐이지.

걔한테 받은 건 마나 쪽쪽 능력이랑 위기상황의 조언 정도밖에 없다고.

역시 로키님이야말로 참된 신이시다.

“아빠아~!”

그렇게 웃기지도 않는 생각에 빠져 있으려니까, 뒤에서 창의 정령이 나를 불렀다. 손을 흔들면서 이리로 오라고 부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가 봐. 아니면 아직 더 물어보고 싶은 게 남은 거니?”

요정왕은 스콘을 두 손으로 들고 우걱거리면서 말했다.

“아뇨. 즐거운 담화였습니다. 증거만 있었더라면 인간 사회에서도 일대 센세이션이 될 텐데, 저랑 제 가족이 아니면 못 믿을 얘기인 게 아쉽군요.”

“아쉬운 일이네. 하지만 현명한 일이기도 해.”

스콘을 다 먹은 요정왕은 손을 크게 저었다.

“잘 가렴, 신기한 친구. 대지가 내 영면을 권할 날까지 너와의 만남을 기억할게.”

“영광입니다.”

간단한 목례를 하고 가족한테도 갔다.

창의 정령은 머리에 꽃관 같은 걸 얹고 좋다며 웃고 있었고, 그 순수한 폭력을 상대로 식물원을 지키느라 피곤한 듯한 모니카가 날아왔다.

〈혹시 저 애가 뭔가 실례되는 일이라도 저질렀습니까?〉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 자, 이건 선물.〉

휙휙─. 날아오는 책과 봉투. 봉투는 내가 건네준 씨앗 주머니였다.

〈이건 뭔가요?〉

〈인간 사회에서 희귀한…… 희귀하다고 들었던 책들이랑, 구하기 힘든 씨앗들이야~.〉

씨앗? 나는 실례인 걸 알면서도 봉투를 열었다.

반찬을 나눠줬던 사람한테 밀폐용기를 돌려주는 문화랑 비슷한 건 줄 알았는데, 받아보니 안에는 씨앗 같은 게 분류돼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우리 아내님들 중 한 명이 광희난무할 듯한 책도 있다.

〈나한텐 필요 없는 거니까 줄게~.〉

〈제 보수가 거스름돈이 남을 정도였나요?〉

모니카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네 가족한테 들었어~. 앤은 잘 지낸다며~?〉

〈네? 아, 옙.〉

……앤은 또 뉘겨?

〈너도 참 너무했다~. 거스름돈이 받기 싫어도 딸 소식 정도는 들려줄 수 있잖니~.〉

〈죄, 죄송합니다.〉

〈그래도 다행이다~. 네 아내의 스승님이랑 잘 지낸다고 하니, 걱정은 덜었네~. 그 선물은 같은 철부지 딸내미를 둔 부모로서 주는 동변상령의 정이니까, 잘 받아가렴~.〉

모니카는 그렇게 말하곤 살랑거리며 나무 위로 올라가버렸다.

지금 게 작별인사였던 모양.

“……아니, 그러니까 앤이 누구냐고.”

“베로니카 스승님 있잖아. 아델라이데라는 엄청 큰 바이콘 기억 안 나?”

“그쪽은 당연히 기억 나는데…… 아.”

생각났다. 아델라이데 말고도 다음 세대 예지자 교육을 받는 황금색 바이콘 망아지랑, 웬 요정이 한 명 정도 더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이 놈의 세상은 참 좁다니까.”

아니, 내가 너무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건가.

***

창의 정령의 손을 잡고 모니카의 식물원과 숙소 사이의 거리를 걸었다.

착한 아이들의 새나라인 요정 왕국은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대부분 꿀잠을 자러 떠난 듯 했다. 설마 모니카도 자러 간 건가. 존나 낮잠 타임이야?

“하아아암…….”

그리고 여기도 많이 졸린 듯한 꼬맹이가 한 명.

나랑 네페르티티의 손을 꼭 잡고 걷는 노르드 2세께서는 졸린지 앞으로 고꾸라지듯 걷고 있었다. 거의 엄마아빠 손에 체중을 맡긴 정도였다.

“졸리니?”

“응…….”

─비비적. 다나가 묻자 눈가를 문지르며 꾸벅거리는 정령.

나는 그 녀석을 번쩍 안아들었다. 창의 정령은 하품을 하고는 내 목에 팔을 감았다.

“졸리면 한숨 자. 재밌었지?”

“응. 다 같이 소풍 와서 즐거웠어.”

창의 정령은 수마에 빠져가는 눈으로 나랑 다른 엄마들을 쳐다봤다.

“그치만, 이제 헤어질 시간인 거지?”

“……음.”

알고 있었던 건가.

애들은 어른들의 분위기를 잘 알아차린다더니. 나는 녀석을 내려놔 주려고 했는데, 창의 정령은 싫다는 듯 오히려 더 내 품에 앵겼다.

그래서 별 수 없이 아내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베로니카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름은 정했느냐?”

“응. 아빠랑 엄마랑, 뿔 엄마랑 수녀 엄마랑, 다 멋진 이름을 생각해 줘서 고마워. 젤루 맘에 드는 걸로 골랐지만, 다 멋진 이름이었어.”

그렇게 말하면서 졸린 얼굴로도 헤헤 웃는 정령.

내 창이 가졌던 불만이란 건, 아마 자기가 소외받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었을까.

그야 이름도 안 지어주고 취급도 험하니 그렇게 생각할 만 했다.

잘못이 있다면 아마 전적으로 내 죄였지만, 이 며칠 사이에 불만의 원인을 해소하고 쌓은 앙금을 풀고도 남을 만큼 놀지 않았는가.

소녀의 모습은 나랑 화해할 때까지만 빌린 겉가죽이다.

신데렐라처럼 정오가 되진 않았지만, 요정왕의 기적이 풀릴 때가 온 것이었다.

“엄마.”

창의 정령은 일주일 내내 잠을 잘 때마다 계속 그래왔듯 네페르티티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가 그 작은 몸을 끌어안자 정령은 살포시 웃었다.

“엄마. 나 없이도 잘 지내기야? 약속.”

“……응. 약속.”

내 지식으로 배운 건지, 그녀와 손가락을 엮고 약속한 정령은 네페르티티에게 안겼다. 그리고 그 뒷머리를 어른 흉내내듯 쓰다듬었다.

“헤헤. 우리 엄마 착하다, 착해~.”

─팟. 웃으며 어머니를 칭찬하던 소녀의 모습은 순간 민들레 씨앗처럼 흩어졌다.

사라락….

바람 한 점 없는데도 그 씨앗들은 네페르티티의 주변을 맴돌았고, 그러던 끝에 소멸했다.

마지막 한 송이까지 소멸한 뒤, 그녀의 손 안에 남겨진 건 미스릴 장식이 붙은 팔찌였다. 네페르티티는 그 미스릴 장식을 쓰다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뿔 엄마, 울어?”

“……눈물은 마음이 건강하다는 증거니라. 나는 이별에 약하단 말이다.”

─훌쩍. 등을 돌리고 팔짱을 낀 베로니카가 코를 훔쳐다.

네페르티티는 베로니카와 그녀의 등을 토닥이는 다나를 보고, 나한테 다가왔다. 슥…. 그녀는 정성스럽게 내 손목에 팔찌를 채워주었다.

하지만 팔찌를 채우고 나서도, 그녀의 손은 내 손을 붙잡고 떨어지지 않았따.

“나도, 울었어야 하는 걸까?”

툭 하고 흘러나온 듯한 질문.

철이 채 들기도 전에, 평생 써야 할 눈물을 다 흘려버린 여인의 물음이었다.

“아뇨. 그건 좀 봐 주셨으면 하네요.”

나는 그런 그녀의 앞머리를 정돈해주었다.

“저희 딸이라면 분명히 또 한 소리 하러 돌아올 거라고요. 저 못난 아빠가 우리 엄마를 울게 만들었다면서.”

“……그러려나?”

한 걸음 물러난 그녀는 세상에 오직 나와 그녀 뿐이기라도 하다는 듯, 내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꼭 내 얼굴에서 다른 사람의 얼굴을 찾기라도 하듯.

문득, 그 굳어있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럼, 열심히 해야겠다. 우는 연습.”

─싱긋.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네페르티티는 이 날 내 앞에서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아무 것도 남기고 간 게 없다는 건 내 착각인 모양이었다.

누가 노르드 2세 아닐까 봐, 그 자칭 딸내미는 네페르티티의 말라붙은 마음에 작은 씨앗을 심고 떠났던 것이다.

언젠가 싹을 틔우는 날이 오기를 기도하면서.

─팔랑.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우리는, 방이란 방마다 굴러다니는 어설픈 그림 중에서도 몇 장인가 색다른 그림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어린애가 부족한 솜씨로 힘내서 그린 듯한 그림.

우리 네 명마다 하나씩, 가족의 모습을 묘사한 종이에는 또박또박한 브리타니아 어로 이 화백의 이름과 한 줄의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참, 골라도 하필이면 그거였어야 했는지.”

나는 창의 정령이 고른 이름을 보며 픽 웃었다. 내가 지어준 이름이었음에도 말이다.

원래 전설이나 신화라는 게 구전되면서 살이 덧붙어지는 법이긴 하지만, 애비고 자식이고 근본이라고는 없는 부모자식 아닐까 봐 작명 취향도 비슷했나 보다.

내 고향 지구에서, 신화를 옮기는 와중에 밑도 끝도 없이 태어난 수수께끼의 신화.

사람의 손과 우연으로 태어난 신화 속 무기.

창을 든 시꺼먼 남자가 그려진 그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아빠에게. 브류나크 올림.

***

──그리고 그날 밤.

“삐엑!”

아내들과 몸을 섞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들어와 버린 셰이드의 꿈 속에서, 나는 내 정수리를 둥지 삼아 파닥거리는 검은 까마귀와 만났다.

“삐엑 삐삐! 까악~ 까악~! 삐에~.”

내 머리에 앉아서 신나게 춤추는 새끼 까마귀.

이 낯익은 행동거지라니.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눈치채고 말았다.

“……아, 그래서 그렇게 웃어댔었구만.”

요정왕한테 창을 못 쓰겠다고 했을 때, 왜 그렇게나 처 웃어대나 했더니만.

다 알고 있는 입장에서야 웃겼을 수밖에.

그 양반한테는 내가 ‘컴퓨터가 고장나면 메이플 아이디가 없어질까 봐 게임을 못 하겠다’며 무서워하는 잼민이처럼 보였겠지.

이 까만 까마귀의 영혼이 저장되는 곳은, 창이 아닌데 말이다.

내 영혼과 일체화된 이쪽이 본체고, 창은 결국 분신에 불과한 것이었다.

망할 레고 요정왕 새끼. 말을 해 줄 것이지.

“삐에 뺘뺘?”

“암 것도 아녜요, 욘석아.”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한숨을 푹 쉬고서, 남의 머리에 둥지를 친 미스릴 부리의 까마귀를 얌전히 쓰다듬는 것이었다.

이제, 베로니카의 저주를 해주하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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