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십시오, 은인님.』
요정왕국 실리 코트에서 타타르니아로 복귀.
돌아오자마자 장로들을 만났다. 아직 공기 중에 긴장감이 흐르는 듯한 찌릿한 기척은 있었지만, 그 긴장감은 싸움을 극복한 직후의 것이었다.
『굴라나뢰크의 잔당을 완전히 근절하지는 못하셨나 보군요.』
『예. 타타르니아를 더럽힌 뿌리는 뽑았으나, 이 땅에 뻗은 뿌리는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압니다. 이 골육상쟁은 끝나지 않은 것이지요.』
장로들은 눈을 낮추며 말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앞으로 ‘갈 데 없는 엘프들은 여기여기 붙어라’하며 알프하임의 적통을 이은 신 왕조가 되는 게 그들의 목표 아니던가.
그런데 이제부터 찾아올 엘프들이 굴라나뢰크에 물들지 않았다는 보장이 있을까?
‘있을 턱이 없지.’
스파이처럼 침투해서 물을 흐리려 들 게 뻔했다.
나는 왠지 약간이나마 공감이 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막 새로운 시작을 내딛으려고 하는 나라에 침투하는 빨간물…… 음. 남 얘기가 아니군.
특히 같은 민족이 두 쪽나고, 한쪽이 빨간 맛의 변종 공산주의 겸 ‘신군님 텔포 쓰신다’거리는 국가가 돼 버렸다는 게 심히 동방의 어느 반도의 역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질문하기 어렵습니다만, 바이츠니아 쪽은요?』
『진정이 됐습니다. 그쪽에도 굴라나뢰크의 그 고독에 잠식된 선동꾼들이 적지 않았더군요. 발본색원이 가능해졌으니, 그 색출법에 대책이 서기 전까지는 문제 없습니다.』
『……바이츠니아에 있을 선동꾼들은 또 어떻게 제압을 하셨답니까?』
장로들은 하라는 대답은 않고 슬쩍 웃기만 했다.
그리고 그게 대답이었다.
‘엘프 무림인 암살단이라도 있나?’
타타르니아 당가라. 다크엘프는 잘 안 보이지만, 이미지로는 딱이네.
‘그러려니 하자.’
괜히 건드리지 말자. 남 일이다, 남 일.
나는 살짝 눈치를 줬다. 알았으니까 다음 얘기로 넘어가자는 사인이었고, 장로들은 눈치 빠르게 내 뜻을 알아들었다. ‘다음 얘기’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말이다.
『타타르니아의 엘프들이 은인님께 드릴 우애의 증표입니다.』
『우애의 증표 말입니까?』
장로들의 선물은 정성이 한껏 들어간 달필과, 그 서류에 세트로 붙은 휘장 같은 것이었다. 상자에 타타르니아 국기를 깔고 그 위에 서류/휘장 세트를 올려놓았다.
타국인의 선물을 자국의 국기 위에 깔다니?
엄청난 대우인 건 분명했다. 국기가 뭐 햄버거 세트를 올려두는 트레이도 아니잖은가?
‘우리 나라의 정치인, 아니 대통령 대리를 맡은 장관들이 태극기를 뽁뽁이로 써서 외국 사람한테 훈장을 주는 거랑 동급이잖아.’
그야말로 국가 영웅급 인사가 아니면 두고두고 지탄을 받을 것이다.
성조국처럼 국기를 비키니로 만들어갖고 섹시한 카우보이 그라비아를 촬영할 수 있는 나라도 아니니까, 상당한 영웅 취급이긴 하겠지.
『이 휘장이 있는 한, 앞으로 세계수의 아래에 세워질 새나라의 엘프들은 언제 어느 때라도 노르드님의 아군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상장하려는 회사의 대주주 권한 같은 거로군. 이 새끼들 보게.
‘머리 좀 썼는데?’
괜찮은 생각이었다. 생색은 충분히 낼 수 있으면서도, 당장 국운을 걸고 해야 할 사업들에 지장이 가지 않는 보상이니까 말이다.
‘말하자면 엘프 버전 스톡옵션인가.’
즉, 절대 좋은 보상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 좆프는 결국 좆프의 습성을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국운이 걸린 일이라지만 이런 순간까지 ‘정치질’을 시전하다니. 속세에 물들었군. 우화등선은 포기해야겠어.
양판소 엘프라고 하면 자고로 ‘인간 죽어 빼애액’ 거리다가 노예시장에 끌려가서, 동족들을 구해준 주인공에게 어맛 멋져라 하고 반해버리는 게 국룰이거늘. 이러면 그냥 귀 긴 좆간이잖아?
‘이걸로 입을 닦지는 않겠지만, 부담은 지울 수 있겠지.’
원래 나라의 기둥을 몇 개 가져가도 궁시렁대기 힘든 게 그들의 처지였다.
하지만 저들은 이 휘장으로 ‘오늘부터 우리들은 베프인 부분인 각이다’하고 어필한 셈!
이제 내가 나라의 국고를 탕진하려 들면 ‘아아니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나라 기둥까지 뽑아간다고???’ 하는 어필도 가능할 것이었다.
‘게다가 요정왕의 완드도 줬고.’
이미 값어치만큼의 대가는 받은 셈이었다.
‘하지만 인공 다이아랑 천연 다이아의 가치가 그 쓸모로 정해지진 않지.’
물건의 값어치란 때와 장소에 따라 바뀐다.
나한테는 세계수의 새순보다 요정왕의 완드가 더 낫지만, 저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산 정상에서는 300원짜리 생수도 3천원이 될 수 있었다.
3천원 생수……. 그 자본주의의 폐단을 상징하는 일산화이수소를 떠올려라.
약숫물도 아니고, 편의점에서도 1200원에 파는 생수가 3천원이라니? 저걸 갖고 올라오는 노력을 감안해도 아까워서 그냥 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는 날에는 나는 왜 가져온 물을 다 마셔버렸는가 하는 통렬한 후회를 하산하는 내내 반복하게 되고 말겠지.
그러다가 마침내 산 밑으로 내려오면, 거기에서 파는 물도 결국 1500원 선에서 시작하는 걸 보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그 부랄이 말라 비틀어져 곶감이 돼 버릴 듯한 갈증의 대가가, 꼴랑 천 얼마라니!
그런 후회를 남길 수는 없었다. 한순간의 판단 미스가 평생 남을 좆 같은 기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게 틀림없다.
그리고 지금은 틀림없이 가격을 후려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서만큼은 나 역시 생수 딜러인 것이다!
‘결국 가격 책정 승부로군.’
시장바닥에서 울 엄마랑 콩나물 파는 아줌마가 하던 입씨름을 퀄리티 업 한 것에 불과하다. 이세계에서 온갖 경험을 겪은 내가 쫄기엔 모자라지.
나는 픽 웃고서 겉으로는 그들의 포부에 감격을 받은 것처럼 말했다.
『엘프의 새로운 나라입니까……. 너무도 굉장한 위업이라,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련는지. 저로서는 상상이 잘 가지 않는군요.』
귀족 화법 일발 장전.
해석하자면 ‘느그들 새나라가 언제 만들어질지 알고?’ 쯤 되시겠다.
『머지 않을 것입니다. 길어도 10년 이상 들진 않으리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장로들은 사람 좋게, 아니 엘프 좋게 웃었다.
『물론 타타르니아의 계보를 잇는 엘프들은 노르드님과 그 후손 역시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 막 태어난 아이들도 노르드님의 위업을 듣고 자라나게 될 테니 말입니다.』
『그렇군요.』
그러니까, ‘님이 늙어서 께꼬닥해도 자식들한테 물려줄 수 잇서용’이라는 거지?
‘대충 알았다, 네놈들의 언플 수준…….’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
외교 상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떼먹히는 내가 기분 좋을 리가 없다. 내 표정이 별로 탐탁치 않자 장로들은 얼른 몇 마디 말을 추가했다.
『세계수의 부산물의 대가를 받으러 가시죠. 몇 가지 보물과, 말씀하신 룬 마법 탐지기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보물부터 고르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죠.』
아무튼 현물을 보는 게 먼저다. 나는 장로들과 함께 웬 천막 하나로 들어갔다.
내가 오길 기다렸는지, 원래는 유목민처럼 이동하면서 보안용으로 넣어뒀을 보물 상자가 전부 다 열려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슥 둘러보았다.
‘상태창!’
물론, 오딘의 눈으로 말이다.
개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집중하면서 살핀 끝에, 나는 숨이 멎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내 근처에 터무니없는 보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머리장식은?』
은색의 아름다운 여성용 머리핀이었다.
제대로 관리를 받던 건 아닌지, 지나간 세월의 풍파가 미약하게 묻어나오는 악세서리! 하지만 그 낡음이 오히려 앤티크하고 고즈넉한 맛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수수하면서도 기품 있는 생김새라서, 아마 우리 여신님한테 아주 잘 어울릴 듯 하다.
『그건…… 죄송합니다. 어떤 값어치의 물건인지까지는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장로들은 머리를 숙였다.
『유래도 불분명하지요. 양식을 보건대 아마도 타타르니아가 건립되기 전의 물건이겠지만, 저희 장로들조차 정확한 출처는 모르는 물건입니다.』
『과연…….』
1000살 언저리 쯤 먹었을 장로들도 모른다면야 아는 엘프는 없었겠지.
나는 허술한 상자에 들어있는 머리핀을 살폈다.
‘룬 마법의 위력 증가 기능. 범위 조절 기능.’
그게 머리핀에 깃든 마법의 능력이었다.
‘간단한 기능이지만, 절대 보통 물건은 아냐.’
룬 마법의 위력 상승치는 거의 2배에 가깝다.
‘범위 조절 능력도 장난이 아니고.’
같은 마법이라도 범위와 위력을 동시에 늘릴 수 있고, 오히려 줄일 수도 있다.
줄이는 것의 장점은 아군을 피해서 강력한 대마법을 쓸 수 있다는 점만이 아니다. 압축한 마법은 같은 마나로 더 강한 위력을 낼 것이며, 술식 출력 자체를 낮추면 빠른 발동도 가능할 것이었다.
‘마법의 난이도는 마나 컨트롤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좌우되니까.’
잘 하면 베로니카가 쓰는 긴 주문의 룬 마법을 연사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 작은 장식 하나에 마법을 강화하고, 범위를 조절하고, 무영창 기능까지 붙은 셈 아닌가? 쓰벌, 이게 인간의 기술로 가능해?’
지랄도 유분수다. 절대 불가능하지.
황금시대의 유물이라 쳐도, 저만큼 기능을 욱여넣으려면 탱크만큼 커져야 할 거다.
‘이건 100% 신대의 물건이다.’
신대(神代).
농부가 밥 처먹다가 쌀벌레가 나와서 항의하러 가면, 그 근처의 신전에서 신이 까꿍 튀어나와서 ‘병충해? 막는다고 막았는데 잘 안 되더라. 헤헤’ 하고 머쓱해하던 시대!
‘그런 시대에 만든 물건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
인류문명의 전성기는 고대지만, 신대의 물건은 진짜 신들이 만든 것들이 많았다.
이건 아마 게르마니아-아스가르드 신들의 손이 거쳐간 물건이다. 이거 하나면 저택, 아니 성이랑 바꾸고도 잔돈이 남을 것이었다.
그것도 새로 짓는 게 아니라, 유서 깊은 성이랑 바꿀 수 있겠지.
아마 엘프들은 참된 룬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 없었기에 이 머리핀의 정확한 효능을 알지 못했 것이었다. 알프하임 시절─고대문명 황금시대─에도 벌써 룬 마법은 실전된 기술이었으니까.
‘즉, 이 물건의 값어치는 나만이 안다.’
= 구매가에 장난질을 칠 수 있다.
엘리-트한 대갈통으로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내 신체조율 능력을 풀로 발휘하며 조금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선에서 그쳤다.
『아내들이 마음에 들어할 디자인인데, 아깝긴 하군요.』
예쁘긴 한데, 보상으로 받을 만한 물건은 아니다.
그런 속내를 담은 어필이었다.
‘여기서 이걸 냉큼 챙겨갈 수는 없지.’
이미 내가 한 발 양보한 상황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이걸 냅다 챙겨가면 어떨까.
장로들은 ‘흑우 인간쉑 에픽템 선택권 좆박았죠?’ 하고 비웃거나, 이 머리핀에 자신들이 눈치 못 챈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말 것이었다.
그렇게는 못 두지. 흑우는 내가 아니라 니들의 배역이여야 하거든.
『예. 전통성이나 역사적 가치를 제외한 가치는 높지 않습니다. 내포한 마나도 적고요.』
장로들의 그런 맞장구에 나는 입꼬리가 올라갈 뻔한 걸 힘겹게 참아냈다.
‘그야 당연히 내포한 마나는 적었겠지. 기술력이 차원이 다르니까.’
사람 머리통만한 다이아몬드가 은 10kg보다 더 무겁지는 않잖은가?
‘당연히 값어치는 이게 높고.’
마나야 시간과 기술이 있으면 얼마든지 모을 수 있다.
특히 나는 마나 부여 기술이랑, 마나를 저장할 옥새가 있다. 그냥 마나가 많기만 한 물건보다는 이 머리핀 쪽이 백 배는 더 가치가 있었다.
‘표정 관리하자, 강북호.’
나는 별 것 아니었구만~ 하는 동작으로 머리핀 상자를 내려놓고, 그 뒤로 몇 개의 보물들을 돌아보았다. 장로들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는데, 아쉽게도 그 뒤로는 전부 정확한 안목이었다.
‘아니, 머리핀 하나라도 건진 게 다행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적당히 밑밥을 깔 멘트를 칠까 하던 나는 열려 있지 않은 상자를 발견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왜 얘는 혼자 미개봉이야?
개봉하면 값이 낮아지는 물건…… 시발, 성인용품밖에 생각이 안 나네.
나는 별 생각 없이 그 상자를 집었다.
『이 상자는 뭡니까?』
『조심하십시오! 간단히 열리는 상자는 아니나, 함부로 개봉하시면 큰일납니다!』
장로들이 기겁하며 외쳤다.
아니 이 시발럼들이? 그렇게 위험한 물건을 왜 여따 뒀는데? 마, 니들 똘게이가?
『그 상자에 든 것은 바이츠니아에서 북상해 온 어떤 영물의 내단입니다.』
내가 얼척없는 눈으로 보는 걸 눈치챈 장로들은 변명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 변명은 설명으로 받아들여줄 수 있을 만큼 흥미로웠다.
『영물? 내단이란 건 또 뭡니까?』
『내단이란 일부 특수한 생물의 육신이 마나와 융합해서 만들어지는 마나 덩어리입니다. 보통은 소화해서 마나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만……』
여기 들어 있는 내단은 그게 힘들다 이거군.
나는 즐겁게 턱을 쓰다듬었다.
『흐으으음……. 어떤 몬스, 아니 영물이었죠?』
『바이츠니아에는 ‘극양지기’라고 하는 강력무비한 빛과 불꽃의 마나를 품은 물고기가 있습니다. 그 물고기가 폭포를 거슬러 오르며 용으로 성장한 영물이었죠.』
부르르….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떠는 장로.
‘천 살 먹은 내공 고수들도 저럴 정도인가. 진짜 괴물이긴 했나 보군.’
인간하고 다르게 태생적인 개체값이나 성장률의 한계가 천차만별, 미지수인 몬스터들은 가끔 무슨무슨 클래스로 정의하기 힘들 때도 있다.
이로치가이 갸라도스.
소위 말하는 돌연변이 개체다.
『용이라고는 해도 드래곤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못지 않은 괴물이었죠. 바이츠니아의 도시를 몇 개나 망치고 타타르니아까지 북상해왔으니까요.』
『그걸 저희 엘프족의 용맹한 전사들이 목숨을 걸고 물리친 후, 유실물처럼 남은 내단을 봉인해 둔 것입니다.』
메들리라도 부르듯 돌아가면서 설명하는 장로들이었다.
‘말하는 걸 들어보면 불 타입의 메가 갸라도스 같은 새끼였나 본데.’
그런 놈의 내단이라니. 스코빌 53만짜리 알사탕 같은 거잖아.
그 정도면 드래곤볼 사이에 하나 껴 둬도 신룡이 노력이 가상해서 못 본 척 그냥 강림해 주겠는데? 사람이 처먹으면 위가 녹아내려서 뒤질 거고.
‘근데 그럼 처먹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잖아?’
나는 논문을 쓰듯 서론/발달/결론으로 아가리를 털 코스를 짜고, 깊게 숨을 토해냈다.
『듣기만 해도 두려운 괴물이군요. 비록 보물들 중에 알프하임 시절의 강대한 유물은 없으나, 이 내단을 비롯한 물건들만 봐도 과거의 영광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충분히 알겠습니다.』
해석해 주자면, ‘다 좋은데 느그 전성기 시절의 유물은 웨 없음?’이란 뜻이다.
듣기에 따라선 비아냥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먼저 야바위 질을 걸어놓고 지들이 꼬와봤자 어쩔 것인가? 장로여, 비겁하다고는 하지 않겠지.
장로들은 움찔했다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오오, 이루 말할 수 없는 칭찬이십니다. 허나 알프하임의 기치를 계승하려 하는 저희들입니다. 이 정도의 능력은 갖춰야 하고 말고요.』
『타타르니아 천 년 세월의 산물입니다. 선조들 앞에서도 부끄럼 없을 보물들이죠.』
─인간적으로 좀 봐 줘라. 꼭 필요한 거 아니면 굳이 우리도 다시는 못 구할 것들에 눈독 들일 건 없잖아. 솔직히 여기 이것들도 존나 좋은 거야!
……쯤 되려나.
나는 말 뜻을 해석하고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물론, 의식적으로 지은 웃음이다.
『확실히 대단합니다. 타타르니아의 엘프 분들도 사용처를 찾지 못한 내단이라……. 게다가 이토록 엄중하게 봉인해두신 걸 보면, 잘못 다루면 무척 위험한 물건이겠군요.』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게 왜……?』
『애물단지로밖에 부를 수 없는 물건이기는 하겠습니다만, 저는 이 내단에 무척이나 마음이 동하는 중입니다. 제가 원래 천성이 이래먹어서.』
그렇게 ‘어쩌면 좋습니까~’ 하는 뉘앙스로 턱을 쓰다듬는 나였다.
수염이나 기를 걸 그랬나. 그랬으면 허허 웃어도 어울렸을 건데.
『하지만 그랬다간 자칫 ‘타타르니아의 엘프들이 나라와 일족의 은인에게 애물단지를 대충 처분할 심산으로 던져줬다’는 악평이 나돌까 무섭습니다.』
마나량이야 이 내단도 비슷하겠지만, 우라늄과 아크 리액터 정도의 차이가 있잖아?
안색이 파래지는 장로들. 나는 손을 들어올렸다.
『아, 결단코 제가 소문을 퍼트리겠다는 의미는 아니니 걱정 마시길. 저희 아내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죠. 하지만 소문이란 게 사람의 뜻으로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반박의 여지가 없자 장로들은 입을 다물었다.
어쭈? 들린다, 들려. 이 천 살 먹은 할배할매가 뱃속에 기르는 구렁이들한테 매질을 가하면서 ‘빨리 좋은 대답을 생각해내는데샤앗!’ 하는 소리가 들리는구만.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고, 너희는 고르기만 하면 된단다.
니들이 옛날에 섬겼던 주신의 후계자가 코스를 깔아주는데 외면하면 못 쓰지.
『……보수가 1개여야 한다는 약속은 없었죠.』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장로들은 기어이 눈을 질끈 감으며 그렇게 말했다. 당연히 나는 0.1초도 기다리지 않고 밝게 웃었다.
『그렇군요! 그러면 저기 있는 정령목의 정수와, 이 용의 내단을 받아가도 되겠습니까?』
정령목의 정수는 개인적으로 꼭 챙겨두고 싶은 물건이었다. 좀 쓸모가 있을 듯 하거든.
『……원하시는대로 하시기를.』
장로들은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있다가 떨떠름하게 승낙했다.
어어? 시발, 표정들이 왜 그러지? 지나가던 엘프들이 보면 내가 삥 뜯은 줄 알겠네.
나는 포기한 듯한 장로들의 표정을 보고 체증이 내려간 사람처럼 흐뭇해했다.
물론 장로들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하루 아침 사이에 요정왕의 완드랑 휘장에 이어서 온갖 보물들까지 대차게 삥 뜯기게 생겼으니 당연히 저렇게 표정 관리가 안 되겠지.
‘이해는 하겠는데…… 솔직히 느그들, 여기 있는 보물을 다 팔아서라도 세계수 이파리 하나를 사고 싶었을 거 아니냐?’
근데 갑자기 이러면 곤란하지. 나는 이제 와서 본전 생각이 나서 아까워 죽겠다는 듯 구는 장로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존경하는 타타르니아의 장로님들.』
『……예?』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아내들만 다섯 명 있는 몸이라서요. 선물이든 뭐든 가져가려면 각자 나눠줄 수 있게 5개씩 챙겨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런 보물을 그렇게 받아갈 수는 없으니──』
『……하나 더 가져가십시오.』
이제야 말이 통하네.
나는 미안해 죽겠다는 듯, 그러니까 댁들을 좀 배려해 주겠다는 듯, 장로들 보란 듯이 가장 허름한 상자에 든 보물을 챙겼다.
『아, 3번째 보상은 이 머리 장식이면 됩니다.』
룬 마법의 머리핀이 든 상자를 말이다.
『예? 정말 그거면 되시겠습니까?』
뒤늦게 안색이 펴지는 장로들. 아마 ‘쓸모 없는 오래된 장식 정도면 줄 만 하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나~ 싶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넹. 디자인이 아주 마음에 드네요.』
절대 머리핀의 성능 때문이 아니다. 이건 100% 애정픽이다. 아암, 그렇고 말고.
그렇게 보물을 바리바리 챙긴 나는 늦봄에 찾아온 엘프 산타클로스 할배할매의 선물에 그만 함박웃음을 짓고 말았다. 누가 노인 분들 아니랄까 봐, 손주 같은 애라고 바리바리 챙겨주시는 것 봐.
‘크, 이게 무협이지.’
은혜도 원수도 통 크게 갚아야 진짜 ‘협’과 ‘의’ 아니겠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깐프도 깐부만 맺으면 이렇게 선량해지는 거구나.
‘역시 사람은 인싸가 되고 볼 일이야.’
나는 인맥의 중요성을 다시 실감하며 말했다.
『그럼 이제 탐지기만 빌려주시면 되겠네요.』
『……아, 예.』
표정 펴. 나도 그것만 빌려쓰고 집에 갈 거라고.
‘프랑의 집밥이랑 가슴이 그립네.’
가는 길에 바이츠니아에서 선물이나 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