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이고 여행이고 제일 빡센 건 귀갓길이다.
일하고 놀면서 체력을 빼고 저 먼 길을 빠꾸쳐 돌아가야 한다니? 그야말로 보스방 직전에 궁극기랑 포션, 버프를 다 빼고 임하는 수준 아니냐?
“그래도 관광은 못 참지.”
귀를 가린 엘프들의 안내를 따라서 바이츠니아 입국 완료.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된 타타르니아와, 대놓고 〈공간이동〉을 쓰기 좀 그랬던 우리 가족의 극적 타협은 바이츠니아 불야성 관광 코스로 돌아왔다.
『자네 부모가 삼안성 사람인가?』
『아닌데요.』
『그럼 보부상이야? 뭘 그리 바리바리 사 가?』
『않이 이 아조씨가 사 줘도 난리네.』
『고마워서 그렇지 하하하.』
그날 우리 가족은 기념품 3박스를 받았다. 음. 집에서 기다릴 우리 가족들에게 괜찮은 선물이면 좋겠는데, 아내가 많아서 영 고르기가 힘드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그래, 고맙다.』
과감한 쇼핑 끝에 안내하러 와 준 마흐잔과 샤오라이에게도 인사했다.
이들의 앞날에도 좋은 일만 있기를. 나는 그리 기도하며 임시 가이드…… 아니, 파티원이었던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들겼다. 사람 좋은 미소는 덤이다.
─함부로 우리에 관한 얘길 떠벌리면 뒤진다.
『『옙!!!』』
해 봤자 베로니카의 뿔 정도밖에 문제가 될 게 있겠느냐만, 일단 경고는 해 뒀다. 사실 우리 여신님의 뿔도 들키면 귀찮을 뿐이지 큰 문제는 없고.
그렇게 황야까지 나와서 잠시 걷다가, 인기척이 없어질 무렵에 일시 정지.
“……네페르티티. 나는 이제 내 가족이나 일족 만큼이나 널 신뢰할 수 있느니라.”
믿음을 주는 말로 운을 뗀 베로니카가 말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펼칠 마법은 되도록 못 본 체 해 다오.”
“뭐를?”
고개를 모로 꼬는 네페르티티. 베로니카는 바닥에다 그린 마법진과, 순식간에 펼쳐낸 로스트 테크놀로지 마법 〈공간이동〉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빛이 잦아들고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자, 네페르티티는 잘 알겠다는 듯 말했다.
“이 마법이 알려지면 큰일. 노르드 아내가 다섯 명으로 줄어들지도 몰라.”
“원래 다섯이다만?”
“……………….”
“원래 다섯이다만? 응? 원래 다섯 명이잖느냐? 말해 보거라. 왜 내가 빠져도 다섯이더냐? 누구냐? 누굴 생각했지? 누가 여섯 번째길래 다섯이지?”
딱히 트러블 없이 브리타니아까지 돌아간 우리.
평소엔 입국 기록 등을 조작하기 위해서 일부러라도 시간을 맞추는 우리지만, 애초부터 출입국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니까 따로 문제는 없었다.
“존나 이제는 여기가 친가 같네.”
“시발,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울 엄마아빠가 저 골목길 뒤에서 튀어나올 것 같잖아.”
다나의 불평을 들으면서 집까지 돌아갔다. 귀갓길은 귀찮은 법이지만 여기까지 오면 딱히 힘들 건 없다. 이제 하루이틀 정도는 푹 쉬어야지.
“네페르티티는 어떡할래요?”
우리 사차원 아가씨는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나는 여관에.”
“갈 데 없으면 저희 집에 오세요.”
그녀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으려 했고, 그래서 나는 간만에 마초이즘을 전개했다.
이제 와서 빼지 마십시다. 이제부터 댁이 주민등록증에 등록해도 될 거주지는 내 집밖에 없다고. 뻘소리 집어 치우고 후딱 따라온나.
기쁜 듯 입을 우물거리는 네페르티티. 그렇지만 다나와 베로니카는 순간적으로 움찔하고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나의 그대여. 미리 말해두겠다만 결코 네페르티티가 싫은 건 아니다. 싫은 건 아니다만, 우리 집은 방이 6개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벌써 손님방으로 남겨뒀던 곳까지 꽉 찼는데 뭘 어쩌려고? 설마 거실에서 자게? 네가 귀족이 되서 새 집으로 이사갈 때까지만 기다려도 되지 않냐?”
말이나 표정을 보면 본인들 말마따나 거북한 건 아닌 모양이다.
‘아닌 모양이지만, 여심이란 복잡한 법이지.’
물론 나는 여심은 몰라도 우리 아내들 마음은 잘 안다.
“그럼 내가 너희 방에서 자면 되지.”
내가 얼척이 없는 제안을 선뜻 꺼낼 수 있었던 건 그래서였다.
“나는 개인 짐도 그다지 없고, 이사갈 때까지만 거실에 짐을 빼 두고 너희 방 좀 빌리자. 아니면 다나 니 말마따나 내가 잠깐 동안 거실에서 자도 되고.”
“거실은 무슨!! 그러지 말고 그냥 내, 아니 우리 방에 와서 편하게 자!!”
“순서는?! 동침의 순서는?! 로테이션이지?! 로테이션이렸다?! 한 사람의 방에서만 자겠단 소리는 말거라!! 누가 먼저지?! 순서를 정하는 기준은?!”
쓰벌, 효과 존나 직빵인 것 봐.
‘이게 통하네. 나는 내가 말하고도 쪽팔렸는데.’
이래서 섹, 아니 동침 당직은 피하고 싶었는데.
존나 이러다간 아내들이 일정에 맞춰서 당직을 바꿔가며 ‘12월의 노르드 동침표’ 같은 걸 만들 것 같아서 무섭다. 쥬지가 마를 날이 없겠네.
─저랑 월요일 동침 당번 바꿔줄 언니 구해요♡!
─나 줘. 이번 주는 주말에 출근하고 월요일에 쉬거든.
너무나도 쉽게 상상이 되는 미래로군. 뇌가 떨린다앗…!
그래도 아내가 다섯 명이니까 토/일은 쉴 수도 있지 않을까? 설마 주말은 다대 1 대장전 풀코스 같은 건 아니겠지. 그만큼 짜면 젖소도 우유 대신 피고름 나올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말없이 쳐다보는 시선을 눈치채고 헛기침을 했다.
“네페르티티도 대충 알아들었죠? 같이 가요.”
내가 멋쩍게 말하자 그녀는 심사숙고를 하다가 대답했다.
“……내 방에도 와 줄 거지?”
어머 시발, 주 6일제였네.
대학원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
귀가한 나를 반겨준 건 핑크 리트리버였다.
“어서오세요, 선배애애앳──!!”
“라리루라!!! 보고 싶었어어엇!!!”
─와락!!
달려드는 라리루라를 끌어안고 온갖 요란법석을 피우자, 그 소리를 듣고 프랑과 티르시도 모습을 드러냈다. 프랑은 신발도 신는 둥 마는 둥 해서 좀 미안할 정도였다.
“꼭 10년은 헤어졌다가 재회한 연인들 같네요.”
프랑을 안아주고 있자 한 발짝 늦게 나와서 칭얼거리는 티르시.
그녀는 삐진 듯 콧방귀를 뀌고서는 새초롬하게 팔을 벌렸다.
“……뭐해요? 안 안아주고.”
“티르시!! 누가 그렇게 귀여우랬어요!!”
“꺗♡!”
티르시까지 1달 정도 못 만난 아쉬움을 최대한 달래듯 살을 비볐다.
미녀를 보쌈해 가는 의적처럼 티르시를 드높게 들춰들고 거실로 돌아갔다. 지난 날에 있던 일은 편지로 충분히 주고받았기에 크게 보고할 건 없다.
네페르티티의 동거 소식을 빼면 말이다.
“네! 저요, 저요!! 라리루라 거수!! 동침 순서는 프랑 언니가 처음이고, 그 뒤는 나이 적은 순으로 로테이션을 돌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미안하다. 지금까진 함구해 왔다만, 사실 나는 17살이었느니라.”
“베로니카. 요즘 10대는 ‘함구(緘口)’ 같은 표현 안 써.”
“엣.”
“그보다 어딜 내 밑으로 내려가려 그래? 인간적으로 내가 30대 찍어도 너만은 나보다 연상으로 남아 있어줘야 하는 거 아냐?
“저도 사실 제 생년월일을 모른답니다! 그러니 혹시 아직 10대일 가능성 있음!”
“10대 소녀 2명을 아내로 들인 백작님께서도 한 마디 하시겠어요?”
“저 잠깐 자수하러 갔다 올게요.”
그 동거 소식도 동침순서 선발이라는 난장판에 묻혀버렸고, 잠깐의 소요 끝에 받아들여졌다. 아. 이젠 나도 내 매력이 무섭다.
사실 난 프레이야의 후계자였던 게 아닐까? 말 그대로 미남신 노르드다.
“아, 그리고 이건 선물.”
신빙성 있는 추리를 멈추고 일단 선물을 돌렸다.
우선 아내들마다 악세서리 하나씩.
아내들이 좋아할지는 몰라도 일단 사 본 바이츠니아 고급 장신구다. 지구에서처럼 명품 백 같은 게 있는 세상이면 좋을 텐데. 돈이 많아지니까 별 시덥잖은 고민이 다 드는군.
프랑 선물은 전통 자수랑 원예용 씨앗. 그리고 물뿌리개.
이세계의 물뿌리개는 플라스틱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철이나 나무로 만든다.
당연히 녹도 슬고, 곰팡이가 펴대서 관리하기가 좆빡세다. 하지만 바이츠니아에는 무려 금속에다 고무를 덮은 물뿌리개가 있길래 사 왔던 것이다.
“아침에 훈련하다가 보니까, 물뿌리개에 열심히 녹을 제거한 흔적이 있길래. 그거, 황실 정원사가 쓰는 명품이래. 무슨 마법도 걸려 있고.”
“노르……! 고마워! 잘 쓸게!”
프랑은 이국적인 예술미로 가득한 물뿌리개를 꼭 끌어안고 기뻐했다.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솔직히 사면서도 걱정 많이 했는데 잘 산 선물이었던 모양이다.
사실 이것저것 만지는 걸 좋아하는 프랑이라면 뭘 사주든 좋아했겠지만.
“티르시 건 향수에요. 이래저래 신경 쓰시는 것 같길래 종류별로 몇 개 샀어요. 가끔 제 방에 오실 때나 마차에서 저한테 올라탈 때만 해도──”
“고마워요! 원래 포션이 전공이라 향수에도 꽤 관심이 많은 편이라서!”
네, 네. 아가리 쌉치고 조용히 할 테니까 사람 입 틀어막지 마시고.
이제 다음은 라리루라다. 아닌 척 하면서도 날 힐끔거리며 기대를 만발하고 있는 귀여운 막내를 보면서, 나는 슬쩍 웃으며 솜 인형을 보여줬다.
“자. 이건 네 몫.”
“……인형, 이에요?”
“응. 귀엽지? 너 줄려고 샀어.”
동양 특유의 과장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쬐끄만 인형이다. 관절이 달려 있어서 움직일 수도 있고, 몸체는 솜과 천이라서 부드럽다.
그리고, 그것 뿐이다.
가격은 그 벌레 튀김 1그릇보다 싸더라.
“어…… 어……”
라리루라는 한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앗!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고마워요, 선배!”
고마운 것 치곤 평소와 달리 목소리에서 하트가 빠진 것 같은데.
하여튼 귀엽기는. 날 생각해서 억지로 밝게 웃는 라리루라의 배려가 귀엽길래, 나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라리루라가 당황한 듯 우물쭈물댔다.
“네? 왜, 왜 웃으세요?”
“농담이니까 그렇게 낙담하지 말고. 이거 받아.”
낄낄대면서 석판에서 책을 꺼냈다. 인형이 장난이란 걸 깨달은 라리루라는 잠시 넋이 나갔다가, 눈에 확 띌 만큼 토라졌다.
“……흐, 흥~. 저, 딱히 속지 않았거든요~?”
솜 인형을 끌어안으며 눈썹을 역 팔자로 만드는 우리 후배님.
“뻔하네요~♡ 별로 대단한 선물이 아니라서 제 기대치를 낮추시려고 일부러 이런 장난을 치신 거 맞죠~? 애초에 전 평소에 책을 잘 읽는 편도──”
책 제목을 본 라리루라의 입이 꾹 닫혔다가, 헤 벌어졌다.
당연히 라리루라는 바이츠니아 어를 못 읽는다.
하지만 이 책은 고대 로마니아 어로 된 것으로, 저자는 고대 국가 오르왈리아 인이다. 나나 티르시한테 종종 고향의 옛날 말을 배웠던 라리루라는 이 낯익은 제목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크라운 산도 씨의 사이어인도 할 수 있는 궁중광대. 2권이야.”
“크라운 크라운이에요!!”
벌떡 일어난 라리루라는 손떼 묻을까 무섭다는 듯 조심스럽게 책을 챙겼다.
“지, 진짜? 진짜 원본이에요? 선배, 동방에 가신 거 아니었어요? 앗! 혹시 오시는 길에 로마니아나 뭐 그런 데에 들리신 거에요?”
“아니, 요정한테 콩나무 씨앗 주고 받았어.”
“요정이 왜 이 책을 가지고 있었대요?! 그것도 원본을?!”
“몰? 루?”
그냥 어쩌다 구했다던데.
모니카 미리암이라고, 애도 낳은 유부녀더라.
‘생각해 보니까 이거 좀 동심파괴 아니냐? 요정인데 출산을 다 하고.’
종족 특성 상 어릴 적에 안 낳으면 어머니보다 애가 더 클 텐데.
혹시 갓 태어난 아기는 요정왕처럼 작나? 집에 오기 전에 물어볼 걸 그랬다.
“선배 최고♡!! 사랑해요!! 저희 가문의 가보로 간직할게요!!”
“놀랍게도 너랑 나랑 같은 가문이에요.”
강씨세가의 안부인이라는 자각이 없는 모양이군.
가장 겸 가주가 이 꼴이니까 어쩔 수 없나. 난 그렇게 선물을 다 돌리고─나랑 다른 일행은 직접 사서 챙겼다─ 시원한 음료수로 목을 축였다.
“앗, 맞다! 노르한테 보여줄 게 있었어!”
그러고 있자, 한 발 늦게 떠오른 것처럼 프랑이 달려갔다.
“왕실에서 나온 편지가 한 통 있었어요.”
뭘 굳이 달리기까지. 급한 일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보고 있자 티르시가 말했다.
“왕실요?”
“아마 귀족 취임 관련이겠죠. 마침 오늘 왔어요.”
그럼 〈아공간〉 편지 펜팔로 못 들을 만 하군. 나는 프랑이 가져다 준 편지를 개봉했다. 발퀴리에들한테 맡겨도 될 걸, 우리 프랑도 참 부지런해.
서론하고 미사여구를 넘기고, 대필한 듯한 글을 읽어내리는 나.
“노르, 무슨 내용이야?”
“3주 뒤에 취임식이 잡혔대.”
타이밍 귀신 같네. 할 일이 태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