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655화 (654/1,009)

***

거듭 말하는 바지만,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이다.

인간의 성장은 적자생존의 다른 표현!

적응하고 진화하는 건 생물과 사람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전설의 포켓몬 쯤 되는 존재들과 만나거나 싸워보기도 했던 내가 새삼 개체값 300따리 300따인 인간/왕 타입 포켓몬에게 쪼는 건 무척 어불성설 아닐까?

“그대, 브리타니아와 명운을 함께 할 붕우로서 왕가에 충직할 것을 맹세하는가?”

“예.”

응~. 좆도 어불성설 아냐~. 존나 심장 떨려~.

엘리자베트의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은 나는 등허리에서 식은땀을 흘려댔다.

‘브리타니아식 취임식은 주인공이 최대한 늦게 참석하는 게 예의’라는 헨네시스 영애님의 조언에 따라, 한참 기다리다 귀족이 가득한 홀에 들어온 나.

사람들 눈총을 받으면서 무릎을 꿇은지가 대체 몇 분째일까.

시간은 전쟁터에서 부랄에 총 맞은 병사의 체감시간처럼 느리게 흐르고, 브리타니아 왕의 훈사는 끝날 기미가 없다. 엘리제 아버님이 낮부터 약주 한 잔 걸치고 오셨나 싶다.

‘전하, 나 죽어…….’

씨이발, 우리 왕님 훈사 너무 긴 거 아니냐?

심지어 나는 빡집중하고 귀를 기울이다가 멘트 칠 때마다 대꾸도 해 줘야 했다. 어쩌면 왕이라는 생물은 교장 선생님의 변종 아닐까?

진짜 이게 전혀 다른 생물속이라고? 사람을 세워놓고 세월아 네월아 가오 잡는 멘트를 읊는 탈모 노인이라는 점에서 98%쯤 일치하는데?

안 그래도 왕 앞이라는 점에서 긴장되는데, 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그야 씹, 싸워서 조지면 땡인 적이랑 국가원수는 장르가 좀 다르잖냐고.’

어느 정도로 다르냐면, 바이오하자드의 좀비랑 아오오니 정도로 다르다.

아오오니가 설정 스펙으로는 엄브렐라 사 특제 울끈불끈 좀비 브라더즈한테 후달려도, 주인공이 총만 찾으면 뒤지는 좀비들이랑 잡히기만 해도 즉사인 푸르딩딩 대가리는 천지차이 아닌가.

누가 더 쎈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아오오니는 싸워서 이기는 대상이 아닌 게 문제지.

나라 하나를 통째로 적으로 돌릴 것도 아니고, 승산도 없는데 눈앞에 있는 건 브리타니아가 사람 형태로 나타난 듯한 존재다.

왕이 잘났다기보다는 이 양반이 짊어진 권력과 의무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것이지.

‘시발, 파라오 때가 후딱 끝나서 좋았는데.’

역시 그냥 내가 로마니아 명예귀족 할 걸.

“이상, 경을 우리 조국의 백작이라 천명한다.”

잡념에 정신을 빼앗겼던 나는 드디어 끝났음을 알고 기쁘게 머리를 낮췄다.

앞서 말한 것처럼 권력과 무력은 불가분이면서 장르가 다르다. 미스릴 클래스라고 귀족 뚝배기를 후려갈겨도 된다고 넘어가면 나라의 위신이 똥통에 처박히니 말이다.

권력이란, 수많은 이들의 금전관계와 신뢰── 즉 무력과 재력이 융합한 어보미네이션.

“그대, 노르드에게 브리타니아 왕실의 이름으로 가문의 이름을 내린다.”

그리고 이제 그 아오오니는 제 겁니다.

왕은 가보로 쓸 만한 보검─사실상 장식용─을 건네면서 말했다.

“울프헤딘 가문의 초대 백작, 노르드 울프헤딘. 명예를 잊지 말고 긍지를 실천하라.”

나는 보검을 받으며 왕에게 한 번 더 대갈통을 박고, 몰려든 좌중을 둘러보면서 겸양과 품위 그 사이 어딘가 쯤 되는 인사를 날렸다.

이제야 끝났네. 역시 이세계는 전이 말고 전생을 해야 한다. 처음부터 어디 후작가 귀족 장남으로 태어났으면 이 지랄 안 해도 됐잖아?

그래도 드디어.

전혀 상상해 본 적도 없었지만, 나도 이세계에서 자리 하나 꿰찬 기분이었다.

***

“울프헤딘이라. 좋은 이름이네.”

취임식이 완료되고, 이제 정식으로 ‘충성스러운 귀족과 상의할 것이 있다’며 나를 부를 수 있게 된 엘리자베트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늑대를 가문의 문양으로 삼는 북부의 무가(武家) 같은걸. 몬스터나 가혹한 추위에 맞서 싸우는 냉정함이 느껴지는 성씨야.”

“않이 어째서 저를 척박한 북쪽 땅에 보내려는 것이죠.”

잠깐만. 북부라도 다나네 친정 근처라면 괜찮지 않나?

……아니, 역시 좀 아니다. 장모님 부부가 연락 없이 찾아왔을 때 내가 다른 아내들이랑 알몸으로 뒹굴고 있었거나 했다간 대참사잖아.

“아무튼 마음에 들어? 미리 말한대로 취임식은 화려하게 했는데.”

“왕녀님도 앞으로는 선물하실 때 받는 쪽도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서 한 건데? 부담 쩔었지?”

“이 공주님이 진짜.”

화려하게 한다더니 진짜 화려하긴 했다.

브리타니아의 취임식에서 3주 간의 여유는 거의 최대의 공경이라고 한다.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한테 이 자리에 참석하려면 기본 3주 정도는 준비해야 돼~ 하고 암시할 만큼 중요한 이벤트란 것이지.

하지만 그걸 평민의 귀족 취임식에 적용시킨다?

브리타니아 특성 상 불가능하지는 않은 일이고, 내 오러 뿜뿜이 가능한 달인이라는 타이틀이 저항감을 낮추긴 했겠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눈총을 받지 않으면 그게 더 신기하겠다.

‘솔직히 이 정도만 아니었어도 내 부담이 훨씬 덜했을 걸.’

교장한테 훈사 듣는 운동회로 알고 왔더니, 어멋 시발 올림픽 개최식이었네?

덕분에 국내외에서 몰려온 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저 새낀 뭔데 저렇게 대우받음?’이라는 질투나 불만 어린 시선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굴러들어온 돌이 경계받는 건 어쩔 수 없지. 로마니아에서도 명예귀족이 너무 능력이 줄충하면 종종 있는 일일세. 그럴 때의 대처도 결국 하나로 요약되는 법이고.〉

그리고 국외의 저명인사 C씨는 제 1왕녀조차도 아끼고 아끼다 내놓은 비장의 찻잎을 호로록 거리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더한 권력으로 불만을 억누르는 것. 그것만이 답이라네.〉

〈……예를 들면요?〉

〈로마니아의 원로에게 ‘이 자는 내가 후원하는 인물이다’ 하고 공언받으면 되겠지.〉

그렇게 말하고서 히죽 웃는 노신사.

맞다. ‘코르넬리우스 이 시발 님이 왜 여깄어요 폰 아르마알스’ 씨, 즉 C.I.A.씨다.

〈와 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어르신 바쁘신 거 아닙니까?〉

〈아무리 바쁜들 내 최고의 피후원자의 취임식 일정에 못 맞출까. 3주나 시간이 있었는데 이틀 쯤 시간을 내는 건 어렵지 않지.〉

그러시군요. 덕분에 ‘으딜 백작 따위가 깝치냐?’는 식으로 좆 같이 굴던 병신들이 일가실각 빤쓰런하는 꼴을 볼 수 있어서 즐겁긴 했습니다.

이것이 빽의 참맛……! 5급 공무원(친척이 국무총리) 같은 느낌이라 솔직히 권력 뽕에 살짝 취할 뻔 했다. 돈에 힘, 권력에 빽, 없는 게 없네.

〈솔직히 저로서는 무척 놀라웠답니다.〉

그리고 엘리자베트는 원치 않게 초대한 손님을 상대로 귀족다운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취임식에 오실 줄은 몰랐거든요. 그것도 설마 저희 나라의 관리들과의 인연으로 초대장을 받아내셨을 줄은.〉

〈다망하신 공주님께서 깜빡 저를 초대를 하는 걸 잊으셨던 듯 하기에, 다소 연을 맺었던 친우들에게 질문을 좀 해 봤을 뿐이죠. 허허, 감사하실 건 없습니다.〉

이 어르신 초대도 안 했는데 돈과 권력을 써서 초대장 뜯어낸 거야?

존나 대단하네. 그 관리라는 양반은 또 어떻게 부려먹었대? 100% 왕녀한테 찍힐 텐데, 공직생활 쫑내거나 절대 안 들킬 자신이 있어야 가능한 짓 아닌가.

아니면 왕녀한테 찍히는 게 이 어르신한테 잡힌 약점을 들춰지는 것보단 나았다거나, 그런 걸까? 귀족사회 정치판은 무섭구만.

엘리자베트는 진짜 공주다운 품위를 갖춘 채로 말했다.

〈네에. 아르마알스 원로님 덕분에, 노르드 경을 위해 다방면으로 손을 쓴 저는 큰일이 났답니다. 로마니아 원로의 수하를 백작으로 들이다니 제정신이냐며 뭍밑에서 아주 난리에요~.〉

〈그 불만을 잠재우거나, 반대로 외국의 중추에 충직한 귀족을 심어놓았다고 할 수도 있죠. 그런 여론을 어떻게 다루는가로 개인의 능력이 갈리는 법 아니겠습니까?〉

〈맞아요~. 그런데 하필 아직 신분이 공주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적어서 아쉽네요~.〉

〈하하하! 걱정 마시길. 제 처지도 모르고 저희 노르드 경을 귀찮게 하는 날파리는 제 선에서 잘 쳐내겠습니다. 공주님께선 걱정 말고 본연의 일에 집중하시면 되겠죠.〉

그만! 둘 다 나 때문에 싸우지 말아줘!

나는 00년대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처럼 외치고 싶은 걸 참아야 했다. 시발, 차라리 멱살을 붙잡고 싸우지 그래. 댁들 말투에 내숭이 제대로 안 들어가 있잖아.

─후루룩!

싱글벙글 웃던 엘리자베트는 여태까지의 내숭을 기어이 벗어던지고 차를 원샷했다. 얘 남편 어디 갔어. 너희 집 말괄량이 관리 제대로 안 해???

〈후. 피차 알 만한 건 다 아는 사이고, 터놓고 말할래요?〉

〈좋습니다, 공주님. 그려려고 오기도 했으니.〉

〈저는 가 봐도 되나요?〉

〈협의점을 찾죠. 지금이 아니면 시간을 내기도 어려운 사람들이니.〉

분위기를 전환한 둘은 내 간곡한 탄원을 노룩-패스해 버리고 대화를 시작했다.

〈저희들은 〈편찬대대〉의 정황을 찾기 위해서 협력할 수 있는 관계에요.〉

〈예. 그걸 위한 협력체계를 갖출 필요가 있죠. 노르드 경을 두고 적대적인 듯 구는 저희가 설마 물밑에서 긴밀한 동맹관계라곤 아무도 생각 않을 것입니다.〉

〈로마니아 내부에서 활동하는 일의 어려움은?〉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우선 노르드 군이 보내준 오프툼이라는 인재가 있는데, 그밖의 몇몇 수하나 자원자를 붙여서 꾸린 제대가──〉

시녀 한 명 없는 방에서 어려운 대화가 빠르게 오갔다. 엘리자베트는 혀를 찼다.

〈행동하기 어렵군요. 원로급 인사의 대대적인 협력을 받고도 이 정도인가요.〉

〈귀국의 첩자들은 제 밑의, 아니 저랑 아무런 연관이 없는 상회나 길드를 통해서 로마니아에도 침투시킬 수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감사한 제안이지만, 아직 기반을 다지지 않은 상태라면 가나 마냐에요. 차라리 제가 당초에 생각했던대로 명예귀족을 통한 정보활동이 낫죠.〉

〈티르시 양 얘기로군요. 흡연 괜찮으십니까?〉

〈싫지만 양해해 드리겠어요. 담배 냄새는 생각보다 자주 맡는 편이라서.〉

〈……공주님이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어르신이라도 에르제의 두근두근 모험가 생활은 상상도 못 하신 듯 고개를 모로 꼬시다가, 뭐 어떠랴 하는 느낌으로 담배를 물었다.

─화륵. 잽싸게 붙어서 불을 붙여주자 고맙다는 듯 눈짓하는 어르신.

〈그래. 티르시 양과 얘기는 해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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