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656화 (655/1,009)

얘기라.

브리타니아 왕가와 협력해서 로마니아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말하는 거겠지.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 〈편찬대대〉의 단서도 찾고, 티르시의 가문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만 이유도 알아내는 것.’

엘리자베트의 제안이며, 티르시의 목표였다.

이미 어르신의 협조도 받아냈던 사항이다.

‘괜히 내 성을 울프헤딘으로 정한 게 아니지.’

이 성씨는 일종의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어차피 바이츠니아가 그랬듯, 조금만 수색해도 나에 관한 정보는 들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편찬대대〉의 행동을 되려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이 정도의 잔재주는 부려둬야지 않겠는가.

울프헤딘. 오딘의 후계자를 가리키는 말.

‘아마 〈편찬대대〉도 뜻은 알고 있을 거야.’

모르면 모르는대로 상관없지만, 알면 더 좋다.

‘놈들은 어지간하면 대놓고 활동하진 않는다.’

행동 패턴이 그렇다.

인간 사회에서 움직일 때도 그랬었고, 유니콘의 성지나 알프하임을 멸망시킬 때도 최대한 역사의 뒤편에서만 움직였다.

‘그러니 대놓고 행동하진 않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너무 시간을 주면 안 돼.’

놈들이 나타나는 건 알프헤임 때처럼 확실하게 죽일 수 있다고 봤을 때다.

즉, 반격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전법은 악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행동을 억제하거나 방향을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첩자를 심지 못하는 적은 동향을 읽을 수 없으니 대처하기 곤란하다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행동 패턴을 누를 유인책 정도는 필요하다던가.

‘내 성씨에 반응하는 놈들은 그 새끼들과 연을 맺었다는 심증을 매길 수 있다.’

그 반응을 확인하는 절차야 전문가인 어르신과 엘리자베트가 해 줄 것이고.

‘〈편찬대대〉의 대장 격인 시그룬드의 능력을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어.’

예지능력이 한 번이라도 제대로 터지면 정체를 숨기는 의미가 없다. 수세를 갖춰서 대처할 수가 없는 적이라면 공세에 나서는 게 옳았다.

그리고 이 면면은 그걸 위한 만남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본인의 의사도 있고, 로마니아에서 활동하는 건 티르시의 귀족 취임식 때 이미 얘기가 끝났죠. 때가 되면 갔다 오자는 얘기는 나눴습니다.〉

〈흠. 아직 공식적으로 결혼한 사이는 아니었지? 잘 하면 내가 후원하는 뛰어난 명예귀족 여식이란 기반을 다질 수 있네. 2~3달이면 되겠군.〉

〈2~3달이나 걸립니까?〉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더욱 기반이 다져지고 나서일세. 지금은 와 봤자 할 일도 없어.〉

〈그나마 다행이네요.〉

스파이 티르시.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그냥 다녀오십셔 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였다. 솔직히 내가 출장 다닐 때보다 위험도가 노골적이잖아.

‘아마 나도 은밀하게 따라가긴 할 테지만……’

아무튼 지금은 아직 시기상조다.

그리고 안전하다고 쳐도 몇 달씩이나 티르시랑 떨어져 있어야 한다니, 너무 싫거든.

내로남불이라고 하면 그건 맞지만, 나도 출장이 잦은 남편인데 티르시도 해외지사에 장기 발령이 나면 1년에 얼굴을 몇 번이나 보겠는가.

〈자네도 미리 알고 있어야 하니 말했네. 그럼 일단 이쪽 얘기는 대충 정리가 됐군.〉

후─. 담배연기를 뿜어낸 어르신은 스위치라도 켰다 끄듯 얘기를 전환했다.

1분 1초를 아끼며 사는 부자라서 그런가. 게임 보스몹처럼 페이즈를 휙휙 바꾸시는군.

〈그건 그렇고, 자네 이제부터 어쩔 건가?〉

〈저야 할 일이 하도 많아서 콕 찝어주시지 않으면 무슨 얘기신지도 모르겠는데요.〉

〈거처 말일세. 귀족이 됐는데 그…… 죠테루? 인가 하는 친구네 영지에서 더부살이를 할 수만도 없잖은가. 양해를 받았어도 내가 좀 보기 그런데.〉

〈으음. 그 얘기라면 애초에 나가기로 협의하긴 했습니다.〉

헨네시스 영애한테는 저번부터 얘기를 했고, 요 3주 동안 브리타니아 귀족 예법 특강을 받으면서 쇼부를 봤다. 일이 어떻게 되든 되도록 나가도록 하는 걸로 말이다.

‘귀족끼리 룸 셰어나 홈스테이? 쌉에바죠?’

나를 밀어주는 엘리자베트랑 어르신의 위신에도 관여된 문제니까.

〈클라라 양은 어떻게 할 건가?〉

〈듀나미스 길드 친구들은 절 따라서 이사를 갈 생각이긴 합니다.〉

〈어디로? 흠. 영지라도 받았나?〉

시선을 받은 엘리자베트가 움찔했다. 그녀는 좀 말하기 불편하다는 듯 눈을 피했다.

〈저번에 말했지? 나 아직 공주야. 영지 하나 뚝 떼서 줄 능력까진 없다고.〉

〈허어……. 흐으으음…….〉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침묵 잠깐이 더 불편할 때가 있다. 지금이 딱 그랬다.

〈……아아악!!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어르신이 ‘세상에 통제라. 솔직히 고작 이 정도 페이로 이 친구를 고용하려고? 양심 도꼬?’라는 듯 쳐다보자 엘리자베트는 끝내 빼액 소리를 질렀다.

〈안 그래도 내 나름대로 후보지를 좀 알아보긴 했어! 자! 여기 후보로 괜찮을 듯한 목록이야! 내 친필이지! 왕녀의 손글씨니까 가보로 삼도록 해!〉

〈흐음. 어디 저한테 먼저 보여주시겠습니까?〉

〈캬악!! 꼰대 컷!!〉

─홱! 어르신의 손에서 서류를 지켜내는 에르제.

음. 이건 엘리자베트 공주님이 아니라 내가 잘 아는 그 에르제가 맞다.

〈아아니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노르드 경의 후원자로서 괜찮은 후보지를 골라줄까 해서 좋은 뜻으로 한 일인데?〉

〈누가 그걸 믿어요! 읽는 내내 ‘허어어 흐으음 커어어 코오오’ 거릴 게 뻔한데! 말했잖아요! 아직 내 권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라니까요! 이건 전반적으로 하자가 많은 영지들이에요!〉

그녀는 어르신을 피하며 나한테 서류를 주었다. 난 쓴웃음을 지으며 그걸 펼쳤다.

〈근데 하자 많은 영지면 존버── 그러니까, 더 기다렸다가 멀쩡한 영지를 받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아요?〉

〈인근 영지를 흡수할 게 아니고서야 그러는 게 낫긴 하지. 그래도 일단 읽어나 봐. 나 없이도 네 능력으로 살 수 있는 땅 위주로 몇 개 골랐어.〉

〈사요? 돈으로 영지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땅을 사고 파는 게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데다, 선조 대대로 땅부자가 최고 부자였던 한국인으로서 땅의 매매는 좆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귀족이 자기 영지를 판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이 나라는 말하자면 소국 연합체 같은 거라, 지 영지를 판다는 건 나라가 모라토리움 선언을 하고 청와대를 매물로 내놓는 수준인데?

담배를 피우던 어르신이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진짜 약소 영지 중에, 다른 영주들이 탐도 안 내거나 영지에 묶인 빚이 영지 자체의 채산성보다 높은 땅이 위주겠군. 후계자가 요절하거나 하면 꽤 자주 있는 일이야.〉

〈에베베베~. 안 들려요, 안 들려~.〉

팩트였던 걸까. 휘파람을 부는 에르제였다.

나는 실실 웃으며 대충 이해해 줬다. 그녀한테 더 바라는 건 양심없는 짓이긴 하다. 백작 직위로 스타트한 것만 해도 존나 많이 받은 건데.

에르제랑은 투자자와 신하 N 정도로 남는 편이 옳을 것이었다.

‘더 이상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다 염문설이라도 나면 좆 되니까.’

울 공주님 왜 간이고 쓸개고 다 퍼주냐~ 하는 소리가 나오면 존나 피곤해질 거고.

둘 다 남편하고 아내가 있는데 무슨 염문설이냐고는 묻지 마라. 등산 친목회 불륜 머신들은 어디 자기 짝이 없어서 불륜을 하던가?

돈 많고 타락한 부유층이 교미의 왕국 찍는 건 일상다반사다. 이런 건 동서양 불문이지.

쥬지 크고 아내 다섯을 만족시키는 노예 출신의 외국인 전사.

존나 시발 무슨 중세 야설에 나올 것 같은 설정이네. 그게 나라니 너무 서럽다.

‘……후계자가 요절하거나 빚이 많은 영지라.’

서류를 훌훌 넘겨보는 나.

빚 져서 사업을 키우던 아버지가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하고 미국이나 천국으로 떠나버린 뒤에 빨간 딱지가 붙은 영지라는 건가.

그야 애물단지일 만 하네.

〈우리 가문의 후계자 말인가? 아직 제 어미의 배를 뻥뻥 차기도 바쁘시더군.〉

내가 살짝 쳐다보자 어르신은 다 안다는 듯 픽 웃으셨다.

〈프리모르는 조만간 출산할 수 있을 걸세. 다 낳고 진정된 다음에 한 번 보러 오게. 대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자네도 삼촌 노릇 정도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아, 예.〉

이세계 재벌 3세아의 삼촌이라니. 듣기만 해도 까마득해지는 얘기일세.

그렇게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담화를 나눈 우리는 태연하게 헤어졌다. 와 시발, 저 얘기를 다 했는데 고작 1시간도 안 지났네.

‘영지는 따로 구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

혼자 남아서 대충 서류를 읽던 난 그런 결론을 내렸다.

내가 돈이 없냐, 가오가 없냐. 영지가 급한 것도 아니고 다른 귀족 관리들처럼 수도에서 집 구해서 살면 가오 깎일 일도 없을 것이다.

‘당장 급한 건 그 해저의 섬 쪽이야.’

배를 구해야 한다.

그것도 이 항해기술이라곤 허접한 세상에서, 저 망망대해에 출항하는 배를 말이다.

‘솔직히 갈 수는 있어도, 그 배를 회수할 가망이 없어.’

사티스의 화살촉은 일방통행이다.

이게 무슨 원피스에 나오는 나침반도 아니고, 그 장소까지 가는 건 가능해도 배를 몰고 내륙의 항구까지 돌아갈 방법이 없지 않을까.

‘항해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사실상 조난이나 다름없는 위치다.’

배를 타고 복귀할 수 있을 가능성은 0에 가깝지 않을까.

식량은 인벤토리가 있으니까 괜찮다.

단지, 사람이야 베로니카의 〈공간이동〉으로 다 돌아올 수 있어도 배는 포기해야 했다. 톤 단위로 재야 하는 배를 〈공간이동〉? 우리 여신님 죽일 일 있냐.

결국 먼 바다까지 갈 수 있는 배를 구하고.

그걸 운용해 줄 자살지원자급 선원들을 구하고.

그렇게 도착해서 일을 본 뒤에는 배를 버린다.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말이 되냐, 시발.’

솔직히 해구로 내려가는 것만큼 이 일도 존나게 까마득했다.

돌아오지 못 할 바다로 떠나는 선원들을 구하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데, 그들에게 들키지 않은 채 다 데리고 〈공간이동〉으로 돌아와야 한다.

〈공간이동〉을 알려주면 입 가벼운 바닷사람들 특성 상 뒷일이 감당이 안 된다.

안 알려주면? 항로도 없는 코스에 그들을 끌고 갈 방법이 없다.

다 끝나고 바다에 버려지는 배(존나 비싸다)는 또 어떤가?

이 정도면 거기까지 가는 것만도 앵간한 대항해 레벨이다.

‘어떻게든 적당한 방법을 알아봐야 하는데……?’

그렇게 나는 읽는 둥 마는 둥 목록을 넘기다가 눈을 깜빡거렸다.

어느 북서부 항구 영지의 옵션이 눈에 띄었다.

─영지에 고대문명 시절의 선박 존재. 자동항해 기능이 있다지만 현재 파손 중.

─가문의 보물이지만 복구에 큰 어려움이 따름. 대량의 희귀금속, 출처불명의 목재 등이 필요.

─원 주인 가문은 병으로 사망. 늙은 집사는 그 유언을 바탕으로, 그 선박의 관리/복구가 가능한 귀족에게 영지를 내놓고자 함.

─조건만 만족한다면 직접 영지로 삼지 않아도 영주 대리로 취임 가능.

부숴진 고대문명의 선박.

그걸 감당할 수 있으면 영지가 공짜.

나중에 좋은 영지가 생겼을 때 트집 잡히는 일 없게, ‘잠깐 의리로 관리해 준 거임’ 하고 주장할 수도 있는 개꿀 영지다. 돈이야 안 되겠지만.

물론 현실적으로 보면 선박의 복구는 꿈속의 또 꿈이다. 도저히 가성비가 안 맞겠지.

아마 영주 대리 운운하는 것도 제 발이 저려서 붙인 옵션일 것이었다.

당근마켓에 하자 있는 상품을 파는 사람이 뭐라 하기도 전에 가격을 내려치는 거랑 비슷한 이유로 봐도 되지 않을까.

그냥 관리하기로 하더라도 이런 작은 항구에서 거두는 세입으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거고. 그야 마지막 페이지에 있을 만한 영지였다.

“흠.”

하지만 나는 그 페이지에 눈을 고정하고 석판을 뒤적거렸다.

필요한 것. 대량의 희귀금속와 출처불명의 목재.

내가 가진 것. 인공 미스릴이랑 요정왕의 완드.

─와직!

별 것 아닌 캠핑용 싸구려 의자를 꺼낸 나는 그 의자 다리를 부러트려 보았다. 당연히 내 힘을 못 견딘 나무 의자는 놀부 손을 거친 제비처럼 다리 하나를 잃었다.

“칭카라 호잇.”

그 부러진 다리에다가 요정왕의 완드를 사용해 보았다.

콰드드드득…! 의자 다리는 아메바가 재생하듯 부러진 다리를 새롭게 키워냈다.

단단하게 자라난 걸 점검한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분의 기적으로 목재를 재생할 수도 있네.’

그것도 부품의 모양만 알면 원래 모양 그대로.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다시 한 번 해당 영지의 조건을 읽어보았다.

─영지에 고대문명 시절의 선박 존재. 자동항해 기능이 있다지만 현재 파손 중.

“흠.”

턱을 쓰다듬던 나는 픽 웃었다.

“운이 좋군.”

역시 내가 상사를 잘 고르긴 한 것 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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