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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탐험이 즐거운 건 스쿠버 다이빙까지다.
그것보다 더 깊은 수심으로 들어가면 즐겁다곤 할 수 없게 된다. 어두운 바다나 징그러운 해산물, 이세계에만 있는 심해 몬스터 따위는 둘째 문제다.
가장 큰 문제는 수압(水壓)이다.
당장 나도 해저 수천 미터까지 내려가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
수압이 뭐가 그렇게 무섭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왜 바다 깊이 들어가면 물의 압력을 고려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실제로 아직 중삐리, 그러니까 공부는 좀 하는 편이었어도 학교 자체는 흔한 일반교에 다니던 무렵의 14살 강북호도 비슷한 의문을 품었다.
그 호기심이 해소된 것은 어느 데스게임을 하는 도중이었다.
샌드위치…… 일부 지역에선 햄버거라고도 불리우던 잔혹한 유희(Duel)!
가위바위보를 하며 진 사람이 바닥에 엎드리고, 그 위에 다음 사람이 순서대로 엎드린다는 간단한 게임이다. 내가 중학생일 시절 그 게임은 전국구 레벨의 폭 넓은 플레이어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플레이어의 숫자만큼이나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다.
“오랜 상처가 쑤시는군…….”
“……노르가 또 이상한 소릴 해.”
섹스를 마친 나는 프랑의 가슴 밑 갈비뼈를 간지럽히다가 문득 그때의 유희생활에서 얻은 늑골의 환통에 눈을 찌푸렸다.
이름에 마녀(Witch)가 들어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샌드위치는 도저히 아직 한창 클 때인 어린이들 사이에서 유행해도 될 놀이가 아니었다.
만약 내놓으라 하는 대부호들이 사람을 모아서 추억의 놀이를 재현하는 데스게임을 실시해도 샌드위치만은 후보로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게임은 별다른 개량을 거치지 않아도 충분히 죽음의 유희이니까.
낯선 사람이 ‘저랑 게임 한 판 하십시다’ 라면서 샌드위치나 하자고 바닥에 드러눕는다? 씨발 그게 공유여도 도망간다. 으아악 김지영 남편이다!
배우는 배역에 따라서 역할이며 이미지가 바뀌겠지만, 데스게임인 샌드위치는 누가 깔리듯 똑같은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다.
샌드위치 게임의 잔인함.
그것은 가장 밑에 깔린 패배자가 견뎌야 하는 무게를 말한다.
아직 뼈도 단단해지지 않았을 중학생이, 자신의 위에 올라타는 친구들의 무게를 오롯이 견뎌야만 한다는 참혹한 실태!
초딩 키가 180cm를 찍고 발육이 미쳐돌아가는 현대에서 그것은 사실상의 사형선고였다. 맨 밑에 깔리는 소년소녀 중에 사망자가 나왔다는 끔찍한 뉴스도 있었으니까.
많은 사람이 학교는 사회의 축약판이라고 한다.
사회생활을 미리 배우는 공간…… 그런 곳에서 ‘바닥에 깔리는 패배자’와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승리자’를 양분하는 게임이 퍼지다니?
뛰어난 식자들 중에 그 통계에서 프리메이슨의 음모를 느끼지 못하는 자들은 없었고, 결국 죽고 죽이는 사망유희의 첨병 ‘샌드위치’는 머지 않아 제재의 철퇴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개헌이 실행되기 전.
개헌 소식을 듣고 더욱 샌드위치에 열을 올리던 남학생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어린 소년은 ‘담임이 벌점 주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하자’며 아이들을 선동했고, 그리 말하는 그의 몽롱한 눈깔은 마치 마녀에 홀린 듯 했다.
─아, 씨발! 또 졌어! 내가 맨 밑이지?
이제 와서 보면, 그렇게 연패하면서도 샌드위치라는 이름의 마력에 빠졌던 그 소년은 분명 다른 이들이── 어쩌면 소년 자신도 이해 못할 충동에 지배당했던 것이리라.
가위바위보에 져서 맨 아래에 누울 때마다, 그 소년은 늘 웃고 있었으니 말이다.
“……호흡곤란에서 쾌감을 느끼는 성 도착증인 거였겠지.”
“서, 성 도착증 아닌걸!! 의외로 흔한 취미라고 그랬는걸!!”
“않이, 딱히 네 얘기는 아니었는데. 그리고 그런 낭설은 어디에서 들었대?”
“……베로니카가 준 소설.”
“야설이 세상의 중심을 지키고 있어욧!”
“알았으니까 놀리지 마!”
질식 플레이. 압박 축제.
테크노 브레이크─딸딸이사(死)─의 주 원인.
내 품에서 입술을 삐죽대는 프랑도 가지고 있는 그 성적 취향을, 소년은 마녀님의 압박 축제라는 공공 야외 플레이에서 찾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남녀공학이었던만큼 남학생 위에 여학생이 눕는 경우도 있었기에, 샌드위치 금지법의 소식은 소년에겐 마녀의 마법이 풀리는 것처럼 느껴졌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마녀에게 홀린 대가는 너무나도 참혹했다.
─……뷰룻뷰룻!
─어? 야 이거 무슨 냄새야?
─어? 어어?! 야, 이 새끼! 바지 젖었다!
─꺄아아아악!!
도내의 흔한 남녀공학에서 일어나고 만 사건은 인간의 존엄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담임의 입에서 전해진, 그 소년이 다신 학교에 오지 않고 멀리 전학갔다는 소식과 함께 소년소녀들은 샌드위치의 두려움을 몸에 익혔던 것이다.
‘애미 씨부랄, 생각하니까 또 토 나오네.’
속이 안 좋아서 구경만 했기에 망정이지.
아무튼 그런 사건을 거친 끝에, 어린 날의 박사 꿈나무 강북호는 깨달은 것이다.
‘바다의 수압도 샌드위치와 같다.’
해저 100미터라고 함은, 100미터 높이의 물이 그 사람을 짓누르고 있다는 것!
워터-샌드위치. 그게 수압의 정체다.
유체역학 상 실제로 견뎌야 하는 압력은 무게에 비해서 낮겠지만, 수압이란 바닷물에게 샌드위치 가혹행위를 당하는 듯한 짓이었다.
바다는 만물의 어머니라고 하던가.
그렇다면 해저의 수압은 마망 플레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결국 본인이 감당 못 할 레벨까지 선을 넘으면 골로 가고 마는 것이지.
젖에 얼굴을 묻고 복상사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이상적인 죽음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일본의 유명 레슬러 카이도가 말했듯이, 죽음은 사람의 완성이니까.
─그, 그래서 저희가 뭘 어떻게 하면……?
─잠수 마법 술식을 몇 개 구해왔으니까 개량 좀 해 줘. 맨몸이나 실드 마법만 믿고 내려가면 너희 종족의 구도자가 민찌까스 되게 생겼거든.
─앗, 넵. 알겠습니다.
귀족 취임식이 있기 3주 전, 내가 성지의 바이콘들을 찾아가서 마도서 몇 권과 진심 어린 응원의 멘트를 던져준 건 그래서였다.
미리 말해두겠지만, 결코 하청이 아니다.
킹치만 직접 연구하려니 할 일이 넘모 많은 걸?
***
마차를 타고 항구마을에 도착했다.
바이콘들에게 짬 처리, 아니 상호협력을 요청했으니 이젠 선박 차례다.
“괜찮은 느낌의 마을이군.”
고대문명의 선박이 있는 영지 휴스로이트는 꽤 목가적인 시골이었다.
이름만 듣고 치안이 박살난 공업지대에, 골목이란 골목마다 안에 들어가면 흑인들이 와썹맨? 하면서 반겨줄 줄 알았는데. 반성해야겠군.
“울프헤딘 경을 뵙습니다. 집사인 웨스턴입니다.”
시골에 어울리는 작은 저택에서 노쇠한 집사는 울먹이며 말했다.
“저희 영지에 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임시적인 영주 대리니까요.”
나는 집사에게 받은 서류를 넘겨보다가 말했다. 솔직히 봐도 잘 모르겠더라.
“이런 일은 제게 맡겨주세요.”
그래도 귀족으로서 교육을 조금이나마 받은 티르시가 자처했다. 수녀원 출신이라서 완벽하진 않겠지만, 그건 관리인들과 협력해서 해낼 생각일까.
‘원래 내 영지는 엘리자베트가 눈여겨보던 부패 영주들한테서 뺏어다 줄 예정이었지.’
하지만 거듭 말했듯, 그러려면 엘리자베트가 그 권력을 공고히 해야 했다.
숙청 빔이란 권력에서 나오는 것.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있다면 아직 왕녀인 엘리자베트도 귀족을 숙청해댈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그녀의 지지세력이 무너질 게 뻔했다.
‘건물 값, 토지 값 잡겠다는 정치인이 거의 없는 거랑 같지.’
정치인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의 밥그릇이 땅인 마당에, 그걸 건드리고도 자길 밀어주길 바랄 수는 없다. 엘리자베트가 그렇게 멍청한 사람도 아니고.
‘단지, 여왕이 된 뒤엔 왕권에 반대하는 귀족을 쳐낼 명분이 있지.’
그게 지금은 시기상조일 뿐이다.
나도 무모하게 내 영지를 주려다가 엘리자베트 여왕 코인이 떡락하길 바라지는 않는다는 게 거짓없는 본심이고 말이다.
‘지금은 그냥 커리어 관리에 집중하는 게 낫다.’
인맥은 〈편찬대대〉와 굴라나뢰크를 대비하는 것에도 꼭 필요한 일!
‘그런 의미에서 저 해저의 섬을 탐색해서 고고학계에 인맥을 넓히고, 이 휴스로이트를 관리해서 내 업적을 늘리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고고학계는 〈편찬대대〉의 개입을 받는다.
‘룬 스톤 연구가 좌초된 것처럼 말이지.’
그러니까 고고학계에 오래 몸을 담근 학자라면 혹시 어떠한 외부세력의 개입을 눈치채고 있을 수도 있다. 같은 연구를 하던 친구들이 똑같이 돌연사하다니? 누가 봐도 수상하잖은가.
그런 이들한테서 획득할 수 있는 단서는 놓치기 아깝다.
씨발, 혹시 누가 알아? ‘제 두 눈으로 톡톡히 봤슈!’ 하고 〈편찬대대〉의 행적을 목격한 학자가 튀어나올지.
‘바이콘의 저주가 아니어도 해볼 가치가 있다.’
또 휴스로이트 관리도 만만치 않게 중요하다.
귀족 노르드 울프헤딘은 말하자면 전쟁영웅이랑 준하는 입장이지만, 그게 귀족으로서 뛰어나다는 뜻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장 백작위를 받고 사르가디스에서 아무 것도 안 한 채로 더부살이를 한다?
그건 군대 전역 후에 3년 정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놀고 먹는 거랑 똑같았다.
‘이력서에 공란은 좋지 않지.’
지구에서도 취업하려고 할 때, 많은 자격증이나 스펙이 있어도 ‘노르드 씨는 전역하고 3년 동안 뭘 하고 다니셨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좆 같잖아.
그만큼 귀족에게 영지 관리는 중요하다.
세금을 걷는 그들에게 땅이란 사업체 겸 사무소니까.
‘백작 이하의 남작, 자작은 가끔씩 부백작이라는 직위로 활동하기도 하고.’
부백작.
다름 아닌 영지를 가진 백작의 대리인이다.
‘남의 영지를 관리하는 직위.’
그러니 영지 관리능력은 귀족의 주 스탯이었다.
이 휴스로이트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내 귀족 커리어에 큰 영향을 줄 게 틀림없다.
말하자면 나는 휴스로이트 사의 대주주인 집사로부터 회사 운영권을 받은 CEO였다. 이 회사를 잘 키워내서 영지를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면 그게 내 평가를 좌우하겠지.
‘좆망한 사업체를 멀쩡하게 살려낸 CEO가 고평가를 받는 거랑 같은 맥락인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냥 이직하기 전에 잠깐 몸 담은 회사 정도로 여기는 게 나을지도 몰라.’
나는 티르시랑 서류를 읽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내 얼굴을 본 티르시가 픽 웃기에 그냥 어깨를 어깨를 으쓱했다.
“썩 좋은 영지라고는 말하기 힘드네요. 애초에 좋은 땅이었으면 손해를 감수하고 장기적인 투자를 감행하는 귀족이 있었겠지만 말이에요.”
“후후. 브리타니아는 국법 상, 인접하지 않은 토지를 자기 영지로 삼을 수 없어요. 이곳을 영지로 삼으려면 이 근처의 영주여야 한다는 거죠.”
“아, 그래요? 북부 귀족이 여따 알박기를 하진 못하겠네요. 어쨌든 투자 가치는 낮으니 별 의미는 없는 일이긴 합니다만…….”
서울 사는 부자가 강원도에 땅을 수천 평 사고 방치하는 일은 없다는 건가.
듣고 보면 다행인 일이기는 하군.
“그나마 사르가디스랑 가까우니 다행이에요.”
그러게. 같은 서부라서 마차로 얼마 안 걸리는 거리더라.
내가 눈두덩이를 주무르자 티르시는 서류를 내려놓고 슬며시 웃었다.
“우리 서방님이 많이 피곤하신가 보네요. 잠깐 쉴까요?”
“좋죠.”
잠깐 집사에게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묻고, 우리 손으로 직접 차를 탔다. 늙은 집사는 기겁하면서 자기를 시켜달라길래 발퀴리에를 몇 마리 불렀다.
“이 애들에게 차를 타는 법이나, 메이드 교육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또 고대문명 선박의 설계도가 있다면 가져다 주십쇼. 그게 당신의 일입니다.”
“예, 예!”
웨스턴은 당황하는 한편으로 발퀴리에들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위이잉….
집사의 눈은 저택을 청소하는 골렘들에게 다시 움직였고, 곧 희망으로 차올랐다. 평범한 귀족들에게선 볼 수 없는 특이한 기술의 연속에 선박 복구에도 희망을 품은 것이었다.
“선박에 관한 자세한 얘기는 추후 나누죠.”
─후루룩. 차를 마신 내가 말했다.
“일, 맡겨도 되겠습니까?”
“예!! 제 남은 목숨을 다해서라도 반드시!!”
“의지가 충만한 건 좋습니다만, 건강도 생각하시면서 하세요.”
집사는 발퀴리에들을 데리고 떠났고, 그리 둘만 남은 나는 티르시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는지 아세요?”
“아마 저택 청소랑 잠수 마법 실험일 거에요.”
티르시는 품위 있는 다과회의 예의를 지켜가며 대답했다.
‘잠수 마법 실험이라.’
이름은 실험이지만 사실 하는 건 간단하다.
아직 개발 중인 마법의 실전 테스트를 위해서, 항구와 가까운 바다에 꼭두각시를 강하하는 실험. 그걸 위해서 라리루라와 베로니카가 잠깐 영지의 평범한 배를 타고 나갔다.
‘수심 몇 미터에서 어느 정도의 압박을 받는가 하는 실험이랬지.’
라리루라가 최대한 〈꼭두극〉의 실을 늘려서, 잠수 마법이 걸린 꼭두각시를 해저에서 활동시킨다던가. 꼭 자동차 추돌사고 마네킹 같다.
‘그나저나, 새삼스럽지만 발퀴리에가 좋긴 좋아.’
내가 따라가지 않더라도 왠만하면 믿고 맡길 수 있으니 말이다.
‘당장 혹시 먹을 거에 독이라도 탈까 봐 걱정될 정도고.’
일부러 웨스턴에게 일을 주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솔직히 신경과민이라기엔 내 적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 판국 아닌가.
독살은 암살의 상투구였다. 상황이 정리되면 이 주변 동물들을 고용해서 감시망도 구성하고, 그런 다음에는 클라라랑 오드리, 캐서린도 불러야 한다.
‘청소도 그렇지만, 저택 넓이나 귀족이란 입장 상 가정부는 반드시 필요해. 발퀴리에들한테 맡길 수 있어서 다행이네.’
슥─. 사무실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쓰는 나.
닦는다고 닦았는데 먼지가 남아 있다. 행보관이 봤으면 연병장에 집합시켰겠지.
“저택 자체는 진짜 괜찮은데 말이죠.”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이만한 저택은 로마니아에서도 찾기 힘들어요. 연식이 오래됐는데 관리까지 잘 된 저택은 드물거든요. 상당히 좋은 저택인 셈이죠.”
티르시는 만족한 것처럼 끄덕거렸다.
아마 이전 영주는 나름대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으로, 단아한 느낌의 진갈색으로 통일된 인테리어는 썩 괜찮았다.
저택 자체도 별의별 저택과 성을 봐 왔던 내가 봐도 그렇다.
저택 자체도 너무 넓지는 않으면서도 적당하게 품격을 갖췄다. 백작의 저택, 이라는 느낌을 건물 형태로 만든다면 딱 이런 느낌이 아닐까.
‘마당도 넓고 배치도 좋으니 장소만 수도였으면 금화가 두 자리로 깨졌겠지.’
노르드 환율로 수십 억 짜리 건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자면, 이 저택의 이용권조차도 선박 관리비 하나에 묻힌다는 건데.’
일단 이 저택은 영주 대리의 소유는 아니다. 찐 영주가 된다면 모를까.
소유권이 아니라 이용권.
매매가 아니라 월세에 가깝지만, 그래도 귀족의 절반 이상은 영지가 없는 처지다.
대부분은 공무원처럼 각 영지나 수도에서 일을 하는 자작/남작으로, 자기 집은 있어도 저택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집에 사는 귀족은 적다던가.
그러니가 영지 대리 CEO로 취임해서 커리어도 쌓고, 이런 저택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면 그 TO에 자원하는 사람은 많아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도 다들 손절할 만큼 선박 관리에 드는 돈이 크단 거지.’
애미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일이긴 하다.
아직 선박을 보러 가진 않았지만, 진짜로 고칠 수 있긴 하려나 몰라.
“대체 예전 영주는 어떻게 이 영지에서 그만한 수익을 냈을까요?”
“노르드처럼 이 영지와는 별개로 굴릴 수 있는 사업체가 있었던 것 아니겠어요?”
“아하.”
그렇다고 치면 진짜 유능하고 바쁜 사람이기는 했겠지.
‘하긴 능력이 없으면 저 선박을 관리 못 했을 게 뻔하고.’
그러다 스트레스로 병을 얻고 죽을 만큼 말이다. 워커 홀릭의 슬픈 이야기다.
그리고 이건 사족이지만, 이름과 성씨 사이에 ‘폰’이 들어간 귀족들은 ‘영지가 있다’는 뜻이랜다. 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존나 신경도 안 썼는데.
그래서 사르가디스 영주는 죠테루 ‘폰’ 헨네시스지만, 영애는 마리아 헨네시스.
나도 아직까지는 영주 대리 신분이기에 ‘노르드 울프헤딘’이다.
‘어쨌든 할 일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생각하기 나름으로는 손도 발도 못 쓰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보단 이렇게 바쁜 편이 낫다. 당분간 살짝 바쁘고 나면 다시 여유가 생기겠지.
‘티르시랑 로마니아에 가기 전까지는.’
후룩─. 다시 꿀을 탄 차를 마시는 나.
부모가 농약하고 쥐약으로 건배하고 뒤진 듯한 씹새들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하다니? 억울해서 야마 돌 것 같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간 나도 스트레스로 병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차라리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관점을 달리하면 이세계는 물론 지구 기준으로 봐도 성공한 셈이니까.
─톡.
그렇게 생각한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가만히 쳐다보자 티르시는 왜 그러시느냐는 듯이 고개를 모로 꼬다가, 금방 알아들은 듯 얼굴을 붉혔다.
“……아직 대낮이에요?”
“예전 집에서 로테이션 돌릴 때, 마지막 차례는 티르시였잖아요?”
참고로 네페르티티랑은 동침 못 했다.
자기가 해 줄 거냐고 물어봐 놓고는, 내가 찾아가니까 살짝 연 문 틈으로 새빨간 얼굴을 맹렬히 저으며 ‘아직 무리’라고 말하더라.
결국 아내들끼리 돌릴 로테이션 끝에, 티르시의 차례에서 이사가 확정됐다.
그 얘길 들었을 때의 아쉬움을 떠올린 것일까. 티르시는 조그만 앵두 같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주저하며 말했다.
“……제 몸으로 노시는 건 상관없지만, 처음엔 부드럽게 보듬어 주시기에요?”
“당연한 말씀을.”
나는 얇은 허리를 감으며 그녀와 입술을 포갰다.
처음에는 그녀와 다정하게 깊은 교류를 나누고, 그 뒤로는 내 자유.
이미 합의한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