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665화 (664/1,009)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감정에는 신선도가 있어서, 희망회로를 활활 태우다가 물 같은 걸 끼얹어지면 정신이 나가버릴 수밖에 없다는 뜻의 이야기였던가.

그런 의미에서 어인들의 빡침은 이루 형언하기 힘든 것이 아니었을까.

‘탈출 각을 잡았다가 놓쳤으니까.’

아니지. 빡친 정도가 아니라 억울해서 밤잠까지 설치고 있지 않을까?

어인들이 잠을 자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적성존재의 수면활동을 확인했습니다.】

【……아, 그래. 수고했어.】

적들을 염탐하다 온 발퀴리에의 말에 나는 퍼득 정신을 차렸다.

앞서 벌인 작전과 볼가 1호의 거룩한 희생으로 퇴로는 막았다. 적의 사기를 꺾고 전략적 요충지를 뺏은 정도는 될 것이다. 반격의 시작으론 괜찮은 승전이었다.

‘그래도 아직 정보가 부족해.’

아틀란티스에 정말로 결계가 있을까.

정말 있다면 어인들은 섬에서 얼마만큼 떨어질 수 있을까.

어인의 이동속도는 어느 정도이고, 생활 패턴은 또 어떨까.

그런 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었기에 발퀴리에를 파견시켜서 정보를 모으는 중이었다. 베로니카의 손에 아예 훌드폴크의 옥새를 맡겨놨을 정도로.

“이러쿵저러쿵 해도 염탐한 보람은 있었네요.”

티르시가 종이에 붓을 놀리며 말했다. 나는 그 종이에 정리된 조사결과를 읽었다.

“결계는 존재하고, 빠져나가는 건 거의 불가능. 다만 해안선 바깥으로 뻗어 있기에 어인들이 해변 근처에서 식량을 구할 가능성은 있음. 좋은 소식 반, 나쁜 소식 반이군요.”

“그치만요~ 해변에서 매일 생선을 몇천 마리씩 낚지는 못하잖아요~?”

몰려오는 졸음을 참듯 눈을 비비던 라리루라는 그 손을 그대로 V자로 만들었다.

“……아핫♡! 이대로 내버려두면 어인들도 배고파서 픽픽 쓰러질 것 같은데요!”

“적들을 약화시킬 수만 있다면 당연히 장기전도 고려해야지. 하지만 굶어 죽기를 바랄 수는 없어. 원래 물고기들은 동족상잔이 특기거든.”

“동족상잔이요? 으엑, 상상했어…….”

혀를 빼물며 질색하는 라리루라. 나는 낄낄대며 그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흐흐. 어쨌든 저만큼 지능이 있으니까 모랄 빵 정도는 나고도 남았을 거야.”

조사 결과가 그랬다.

초보를 서던 어인들에게서 강렬한 무력감이 엿보였다는 발퀴리에의 보고가 있었거든.

‘상상력은 높은 지능을 가진 생물의 전유물이지.’

전역일이 미뤄진 병장(20호봉)이 저런 꼴일까. 발퀴리에들의 구두 보고를 들어보니까 묘하게 생동감이 있어서 웃길 정도였다.

경계심이 태만해진 않았다는데, 그래도 엄청난 정신적 타격을 받긴 했을 것이다.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의 마음을 꺾어버리는 건 섬에 표류한 직후의 허탈함이 아니다. 기적적으로 발견한 비행기가 섬 위를 그냥 지나쳐버릴 때지.

특히 가볍게 쫓아냈다고 여긴 적들에게 제대로 역습을 당한 것 아닌가?

본의 아니게 제대로 가스라이팅을 먹여버렸군. 트로이의 목마 해군 버전이로다.

【본 개체 및 자매기의 손상 경미. 추가 지시를 하달 바랍니다.】

물론 우리 발퀴리에들한텐 피로도, 불만도, 모랄 빵도 없었다.

진짜 군대의 지휘관이라면 위에선 침을 흘리고 아래에서 오줌을 지리며 부러워 할 병사들이었다. 슈퍼솔져 혈청을 양산하려던 하이드라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너희들 일은 끝났으니까 가서 마나 충전하고 잠깐 쉬어. 시차를 고려해서 아틀란티스가 심야가 되면 볼가 2, 3호를 보내줄 예정이니까.】

막내 아내님의 어깨를 마사지하면서 발퀴리에들한테도 휴식을 지시하는 나.

현대인으로서 말하건대, 공습은 언제나 옳다.

특히 하늘에서 떨구는 것도 아니고, 적 시가지 안에서 뿅 튀어나와서 터지는 폭탄이라니!

식량 사정도 평소보다 더 곱창났는데 새벽이란 새벽마다 폭탄이 떨어진다? 어인들도 스트레스로 암 정도는 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공습작전은 돈 많은 공격자의 특권이지.”

햇볕에 쨍쨍 마르고 있을 아틀란티스의 바닥을 노릇노릇 달궈서 생선을 구워주도록 하자. 반격을 시작하기 전에 내가 한 말을 떠올렸는지 티르시는 픽 웃었다.

“그리 생각하면 아틀란티스를 부상시킨 건 진짜 최선의 선택이었네요.”

낯뜨거운 칭찬에 나는 어깨만 으쓱했다.

좋게 봐 주는데 나쁜 말을 하긴 어려웠지만, 이 결과는 진짜 말 그대로 결과론이었으니까. 노려서 한 게 아닌데 행운을 칭찬받아도 대답이 곤란하다.

“흐아아아……♡”

라리루라는 엘프의 점혈법을 배우고 브리타니아 최강의 마사지사로 각성한 내 손길에 등골을 떨어댔다. 티르시가 부러워하니까 너무 그러진 마렴.

“흐으…… 근데, 어인들이 섬의 위치를 옮기진 않을까요?”

“그러면 오히려 좋지. 아직은 어인들이 아틀란티스의 항해기능을 컨트롤할 수 있는지도 불명인데, 위치 이동이 가능하다는 게 밝혀지잖아.”

라리루라의 걱정을 불식시켜주자 티르시가 바로 동의했다.

“비장의 무기는 되도록 아끼다가 가장 효과적인 상황에 쓰는 법이에요. 골렘 폭탄을 못 버티고 섬 위치를 옮기는 편이, 저희가 싸우는 중에 갑자기 섬이 잠수하는 것보다는 낫죠.”

“아핫♡! 듣고 보니 그렇네요?”

“멀리 튀어버려도 괜찮게 수신기도 숨겨뒀고.”

물론 이세계의 매지컬 GPS는 거리가 멀어지면 좆도 의미가 없지만, 우리한테는 사티스 여신의 화살촉이 있지 않은가?

방향만 알면─어렵긴 해도─ 도망치는 어인들을 쫓아갈 수 있었다.

“사실 어인들이 도망칠 리는 없지만요.”

“오히려 우리가 쳐들어오길 오매불망 기다리면 기다리지, 튈 일은 없을걸.”

물고기 새끼들이 자유의 몸이 되려면 우리의 〈공간이동〉 지식만이 유일한 희망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생포해주겠지?’하는 마음가짐은 도를 넘은 낙관일 것이었따. 내가 어인들이면 한 10명만 빼고 전부 물회로 만들어버렸을 것 같거든.

착착 진행되는 작전에 걱정을 덜었던 걸까? 라리루라는 박수를 쳤다.

“과연! 선배랑 언니들은 다 생각이 있으시네요!”

“후후. 고마워요, 라리루라. 그래도 이런 군사작전은 절대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는 법이죠.”

─호로록. 홍차를 마시는 티르시. 카페인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이세계다. 홍차랑 녹차 정도가 그나마 흔히 손에 들어오는 각성 음료였다.

역시 커피콩을 구해야 하는데. 요정왕의 완드도 있는데 보물을 썩힐 순 없잖아.

“장군들의 회고록을 읽으면 전시에는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보다 평정을 유지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해요. 그도 그럴게, 싸우기도 전부터 지쳐버리거나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런 거에요?”

라리루라가 고개를 들면서 물어보았다. 아마도 내심 긴장하고 있던 모양.

이런 쓰벌. 우리 막내의 딱딱해진 어깨도 혹시 긴장감 때문이었던 걸까? 지휘에 정신이 팔려서는 눈치채는 게 늦어지다니, 꼴마초 실격이었다.

“그래. 문제가 생겨도 내가 다 해결해줄 테니까 나만 믿어.”

오만방자할 정도의 자신감을 드러내며 그 얇은 목을 주물러 주는 나였다.

“아하하하! 선배, 간지러워요!”

라리루라는 허벅지를 비비며 발을 동동 굴렀다. 마사지 의자에 앉으면 못 버티는 타입이군.

아무튼 이럴 때는 진짜로 가능한지를 시시콜콜 따지는 것보다 안심감을 주는 게 더 중요하다. 중대장이 ‘싸우다가 뒤질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파이팅!’하고 떠들면 어디 불안해서 살겠는가.

“앗, 히얏…♡ 거, 거기 꾹꾹 누르는 거 어쩐지 좀 기분 좋아요….”

목덜미 마사지를 반복하자 라리루라는 이젠 두 손을 꼭 쥐고 목을 움츠렸다. 마사지가 기분 좋긴 하지. 나는 일부러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낄낄댔다.

“크크크. 목이 예민해졌나 봐? 어째 약점이 더 늘었구만.”

“제 약점은 목이 아니라 선배 손길인데요?”

“어허. 귀엽게 굴어봤자 국물도 없어, 인마.”

“에~. 쪼잔해~♡”

─까르르. 천진하게 웃은 라리루라가 만세하며 내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은근히 커다란 미성년자 졸업 0년차 소녀의 찌찌가 융기하며 출렁거렸다.

‘존나 나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 했네.’

티르시의 뚱한 눈초리가 무서워서 참았다.

딱히 화를 내진 않지만 내가 양심 상 찔린단 말이지. 만질 거면 두 사람 다 만져줘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살짝 시기상조였다.

‘몇 시간만 더 참자.’

어차피 셰이드도 해야 하니까.

“어쨌든, 결계를 발견했을 때부터 우리는 어인 놈들을 포위망에 몰아넣은 거랑 똑같아. 지는 게 더 어려운 상황이지.”

눈물을 삼키고 설명을 계속해주는 나.

“남은 건 얼마나 피해를 덜 입고 이기느냐야.”

지구의 역사를 보면 완전하게 포위당한 도시가 승리한 경우는 거의 없다.

애초에 어인들은 지원군을 바랄 수도 없는 몸!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보면 저번 기습의 중요성과, 암무나 호 및 볼가 1호의 거룩한 희생의 가치가 새삼 확실해진다. 영지에 위명패라도 만들어줘야 하나?

‘뭐, 승부에는 이기고 싸움에서는 지는 꼴이 될 수도 있긴 한데.’

아틀란티스를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만들어놔도 우리 아내들이 털끝 하나라도 다치면 손해다. 그렇다고 집에서 기다리라고 시킨들 내 말을 들어주진 않을 거고.

‘문제될 거야 없지.’

나도 아내들도 같이 싸우고 멀쩡하게 이겨내면 그만이었다.

─톡톡.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가슴을 두드리는 터치를 느끼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미스릴 메달에서 발퀴리에의 손이 툭 튀어나왔다.

시발, 이런 야만스러운 진동벨이라니. 내가 무슨 손목 페티시 연쇄살인마가 된 것 같네.

메달을 귀에 대고 발퀴리에의 전언을 들었다.

“선배, 무슨 일이에요?”

룬 어에 약한 라리루라가 고개를 모로 꼬며 질문했다.

나는 대답하기 전에 저택 창문을 내다봤다. 전 영주가 죽고 메이드나 집사는 다 퇴직했기에, 이 저택에 남은 하인은 웨스턴 뿐이었다.

그 웨스턴도 휴가라는 명목으로 물려놨다.

이젠 저택 안을 누가── 아니, 어떤 생물들이 돌아다녀도 안심이라는 의미다.

“바이콘들의 상의가 끝났대.”

더 완벽한 승리를 위한 준비를 할 시간이다.

어디 보여주도록 할까. 수의대 중퇴생의 수술 솜씨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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