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다보면 예기치 못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확률의 무작위성은 어릴 적에 가위바위보만 해 봐도 일찍히 습득하게 되는 만고불변의 사실. 머리 좋기로 유명한 사람들도 주식을 말아먹는 이유가 그것이다.
우연이나 운명의 장난 같은 것은 행운의 형태로 찾아올 때도 있지만, 역시 불행일 때가 더 많다.
내가 위험을 백 번 인지하면서도 돌격을 감행한 건 그것 때문이었다.
‘간을 보다 타이밍을 놓치는 건 불운이 아니라 능력의 문제라던가.’
시험에서 도저히 못 풀 것 같은 문제를 붙들고 있다가 후반의 고득점 문제를 타임아웃 당하는 건 사양이다. 내가 회귀자도 아니고 모르는 건 모르는 거지, 쓰벌.
도전은 늘 많고 적은 좆망의 가능성을 동반한다.
예기치 못한 사태를 얼마나 예기할 수 있을까.
부족한 시간과 자원을 어떻게 분배해서 문제를 해결할까.
그 점에서 사람의 능력이 갈리는 것이었다.
“큐루루루루루루!!!”
“씁.”
그래서 시야가 순간적으로 암전되었을 때, 나는 반격을 생각하기보단 온 신경을 회피에 투자했다. 투자 대비 위험성을 생각하면 이게 나았다.
뭔지도 모를 상황에서 킬각을 잡았다간 망한다. 액션 게임만 해 봐도 아는 사실이다.
콰르르르륵─!
석유가 뭉친 슬라임처럼 검은 파도와 일체화한 촉수 어인이 나를 스쳐지나갔다.
정말 간신히 피했다고 생각했을 때, 검은 파도 안에서 물갈퀴 달린 손이 튀어나왔다. 징그럽게도 굵직한 손가락이 내 옆구리를 후려갈겼다.
─쩍!!
“악!! 어깨빵 씹새야!!”
부숴진 도로 타일 파편에 형광색 마나의 조각이 뒤섞였다. 야수회귀의 마나 코팅이다.
방금 맞은 공격이 내 몸을 감은 오러의 방어를 뚫고, 그 밑의 마나까지 베어낸 것이다. 달궈진 프라이팬을 맨손으로 쪼개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파팟─! 달려서 위치를 옮기면서 옆구릴 잡았다.
상처는 얕다. 하지만 피하지 못했다는 건 좋지 않은 징조다.
피하려고 해도 못 피할 만큼 적이 빨라졌는가?
답은 ‘그렇지 않다’였다. 이건 내 움직임이 느려졌다고 말하는 게 맞았다.
“냉탕에서 달리기를 하는 것 같군.”
심해의 수압 같은 게 공간을 둘러싸고 있다.
─부글부글. 귓가에 공기거품 같은 게 일어났다. 입을 열었지만 공기가 없지는 않았다. 여기 환경 자체가 이질적으로 변한 것일까.
‘호흡이 가능한 건 그나마 다행인가.’
하지만 이 안에서 움직이기 힘든 건 우리 인간 뿐이다.
꾸르르르르르륵…!!
촉수 어인은 공간이 어둠에 녹아들어서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았는데, 헤엄치는 속도는 물장구치는 소리만 들어도 충분히 상상이 갔다.
씹새가 준내 빠르네.
‘상당히 강해지긴 했지만, 대처는 가능해.’
절대 못 이길 정도의 강적은 아니었다.
마스터 클래스 급의 강자라면 바로 베로니카를 지키면서 후퇴를 고려했을 것이었으니까.
‘다짜고짜 마주친 것부터가 예상 밖이긴 하지만.’
〈공간이동〉의 좌표 설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베로니카의 잘못은 아닌 게, 항해 중인 섬 정중앙에 정확한 텔레포트를 바랄 순 없잖은가. 어느 정도 고려하던 가능성이라 쫄리진 않는다.
─그대여!
베로니카가 심념을 쏘았다. 메아리 치는 것처럼 흐릿한 텔레파시다.
이 공간의 변질이 텔레파시에도 영향을 끼쳤나. 그래도 통신이 불가능하진 않은 모양.
─빛을 밝히마! 언제 켤지는 그대에게 맡기겠다!
─내가 셋까지 세면 밝혀줘.
브류나크를 겨누며 심념을 쏘아냈다. 물이 들어갔을 때처럼 먹먹한 귀가 물을 가르는 소리를 붙잡았다. 뭉쳐있기는 하지만 한두 개가 아니었다.
─3, 2, 1…… 지금!
번쩍─!!!!
눈을 감으며 지시하자 베로니카가 섬광탄 같은 빛을 터트렸다.
“쯔에에에에아아아악!!!!”
나랑 네페르티티는 섬광의 폭심지인 베로니카를 등지고 눈을 감았는데, 우리한테로 돌진하던 촉수 어인은 그러지 못하고 정통으로 눈뽕을 당했다.
저 새끼의 시력이 퇴화하지 않은 건 이미 봤다.
한순간의 틈만 벌면 되었다. 나는 눈을 뜨면서 창을 휘두르려 했다.
─멈칫!
【게르튀르】의 초식이 한 순간 멈춘 건, 주변 공간이 대낮처럼 밝아졌는데도 놈의 주변은 아직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쯔좌좌좌좍─!!
그것만이었다면 닥치고 공격했겠지만, 암흑 슬라임처럼 몽글거리는 놈의 주변에서 어인의 물갈퀴 달린 팔 같은 게 무수하게 돋아나고 있었다.
꼭 어인 수심 마리가 끈끈이에 얽혀서 덩어리로 뭉쳐버린 것처럼 말이다.
‘한 마리가 아냐?’
경계할 필요가 있는 섬칫함이었다. 창을 거두며 막힘없이 마법을 발사했다.
“아이스 블록 빨치산!”
얼음의 마나를 룬으로 변신시켰다.
창을 만들며 발사했지만 냉기의 유출은 없었다. 역시 수압 같은 압박감을 제외하면 진짜 물은 아니었다. 냉기를 뭉친 창이 쏜살처럼 날아갔다.
꾸르르르르륵─!! 촉수 어인은 파도에 넘실대는 해조류가 살아 움직이듯 창을 회피했다.
“츠스스스스슷!”
놈이 몸을 비틀며 물고기를 토해냈다.
피라냐가 벌크업한 듯한 물고기가 냉기의 창을 부수면서 나를 노렸다. 고작 물고기라고 얕보기엔 내 마법을 정면돌파한 놈들이다.
위력은 나무랄 데 없다.
즉, 맞으면 좆 된다!
“이 아저씨가 손이 쫌 크시네!!”
물고기들이 거의 장막처럼 펼쳐지며 모여든다!
살아있는 물고기라면 유도탄이나 다름 없었다. 피하고 자시고 걍 받아칠 수밖에.
마나를 끌어올렸다. 촉수 어인이 광범위 공격을 강요해서 마나를 소비시킬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대여! 정면으로 돌파해라!”
하지만 그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나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판단을 철회했다.
키잉─!!
짜낸 마나를 ᚱ(Raidō)의 룬에다 쏟아붓고 대쉬.
아공간을 열어젖히자 수압의 감옥이 사라졌다. 완숙한 보법이 내 몸을 탄환으로 바꿨다. 공간의 틈에 파고드는 룬으로 나는 식인생선의 포위망을 투과하듯이 돌파했다.
살벌한 열기 덩어리가 내가 뚫고 지나온 공간을 휩쓸었다.
화르르르르륵─!!!
베로니카가 만다라에서 발사한 열선이 피라냐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공기 중을 헤엄치던 물고기가 악취를 내며 쏟아졌다. 나는 픽 웃었다.
“베로니카! 선물은 쓸 만하냐!”
“아무렴! 그대가 준 물건 중에서는 가장 마음에 드는구나!”
베로니카가 다시 마법을 장전하며 외쳤다.
알프헤임의 보물이었던 머리장식의 효과는 끝내줬다. 저런 위력의 마법이 완성되는 데까지 5초도 걸리지 않는다니? 비약적인 전력의 상승이었다.
【별의 누름돌(Stjǫrnunnar Steinn)!!】
냉동 빨치산 투척이랑 비교하기도 무색한 중력 마법이 몰아쳤다.
공격력은 강해도 영창이 느려서 마무리를 짓는 역할이었던 베로니카. 그런 그녀가 이제부턴 거의 기관총처럼 마법을 연발해대고 있었다.
그것도 위력은 여전히 자주포 수준으로 말이다.
─찌이이익!!
중력권에 휘말린 촉수 어인! 살갗이 찢어지면서 먹다남긴 듯한 어인들이 패대기쳐졌다.
그리고 그 검은 파도도 중력에 붙잡혀 빨려들어갔다. 남은 건 촉수를 바닥에 박고 버티는 어인의 흉측한 본체 뿐이었다.
촉수 어인이 눈을 뒤룩거렸다.
“해. 신의 가. 호. 벗겨. 져?”
육신을 감싼 파도는 먹물 같은 것이었을까.
피부 껍질을 뜯겨진 듯한 촉수 어인의 징그러운 모습은 아까보다 더 끔찍했다. 몸통에서 어인들의 몸과 사지가 중구난방으로 자라나 있던 것이다.
“휴지이이─.”
“저. 기아. 침은 토스. 트로 하지 않.을 래?”
심지어 그것들은 자아가 남아있는 것처럼 버둥거리면서 인간의 말을 지껄였다!
“애미 씹, 바이오하자드!!”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할 수준이 역겨운 비쥬얼!
절대 눈을 떼서는 안 되는 적인데, 무심코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우리 중에는 그런 역겨운 적을 때려잡는 데 이골이 난 선수가 있었다.
─콰앙!!
전봇대처럼 두꺼운 오러 채찍이 놈을 후려쳤다.
“쀼잉?”
촉수 어인은 익살맞게 느껴질 정도로 생뚱맞은 비명을 내며 의회의 벽에 쳐박혔다.
출렁거리는 촉수 다발과 뽑혀진 어인의 대갈통! 그건 꼭 규제가 없던 시절의 아메리칸 TV 애니메이션처럼 소름 돋는 스플래터 무비였다.
나랑 달리 잠수 마법을 받은 네페르티티가 작게 중얼거렸다.
“……오러도 마법도 거의 데미지가 없어.”
그 말대로였다. 몸에서 자라난 살점은 뜯겨져도 몸통은 거의 상처가 없었다.
촉수 어인은 빨간마스크처럼 찢어진 입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길변의 젠틀맨~♪ 탯줄이 특주품이죠~.”
길쭉한 목에 촉수를 감고 벽을 짚는 어인.
─뿌지직! 그 새끼는 그리고서 구황작물 뽑듯이 자기 몸을 벽에서 뽑아냈다. 이 씨발, 하는 짓이고 말뽄새고 보고만 있어도 돌아버릴 것 같네.
네페르티티도 같은 생각을 한 걸까. 경계할 게 없어진 촉수 어인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그녀.
어인의 촉수 3개가 재빠르게 번뜩였다.
─쫘자작!!
네페르티티의 채찍이 요격당했다. 나는 그 스피드랑 위력을 확인하고 말했다.
“역할을 나누죠. 저 촉수에 붙잡히면 위험하니, 제가 방어를 맡겠습니다. 공격을 튕겨내는 사이에 채찍으로 계속 두들겨 주세요.”
붙잡혔을 때 덜 위험한 건 나고, 원거리에서도 공격력이 감소하지 않는 건 네페르티티다.
‘단단하긴 한 모양인데, 수백 번씩 맞고도 버틸 수 있나 보자고.’
높은 확률로 아틀란티스의 항해기능을 건드린 건 이 새끼다.
시간은 여유롭다. 단단한 몬스터들을 족칠 때는 그만큼 시간을 들이면 되는 것이었다. 벽에 못을 박듯이 뒤지게 두들기다 보면 언젠간 쓰러지겠지.
─쿠르르르르르르륵!!!!!
“CataiS Cll-us!!”
“CataiS Cll-us!!”
그때였다. 내가 의회 아래에서 어인이 몰려오는 걸 발견한 것은 말이다.
“……존나 만선이네. 올해는 고등어가 싸겠다.”
처음 봤을 때보다는 현격하게 줄었는데, 그래도 최소 2~300마리는 있을 것 같았다.
그 새끼들은 특수공간의 권역에 들어오자 땅을 박차고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다리를 꿈틀거리며 공중을 주파하는 놈들은 멸치 떼처럼 몰려다녔다.
저딴 것에 휘말렸다간 끓는 기름에 던져진 조기처럼 펄떡거리다가 뒤질지도 모를 일!
상황이 이렇게 될 경우에는 후퇴하기로 작전을 짜 놨지만──
“도망치.게?”
“……쯧.”
베로니카의 마법으로 도망쳤다간 저 새끼가 딴 곳으로 가 버릴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장소의 아내들이 위험해진다.
차라리 전원에게 지시를 내리고 후퇴할까? 내가 퇴각을 고민하고 있자 베로니카가 말했다.
“나의 그대여. 꽁무니를 빼긴 아직 이르다.”
“더 싸울 수 있어. 포위만 피하면 문제 해결.”
투쟁심으로 타오르는 눈동자들! 나는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대장인 내가 튈 생각부터 하고 있었는데, 우리 파티원들은 전혀 투지를 잃지 않았다니. 이래서야 꼴마초의 이름이 울겠다.
베로니카가 노이즈가 끼는 심념 대신 육성으로 작고 빠르게 말했다.
“내 마법 발동속도를 보았겠지? 〈공간이동〉도 짧은 거리라면 연발할 수 있다. 위치를 옮기면서 적의 숫자를 줄이자꾸나. 작전대로 발퀴리에들이 있는 곳에 가는 것도 좋고.”
나는 대답할 시간도 아끼고 대굴빡을 혹사했다.
‘합류는 악수다. 보고가 없다는 건 다른 방면의 전황은 안정적이란 뜻이야.’
저 촉수 어인이라는 막대한 변수와 이탈한 어인 군대를 이끌고 한 곳으로 갈 수는 없다. 그랬다간 아군을 죽이러 가는 거랑 뭐가 다른가.
‘복수의 분대와 합류한다? 논외지. 포위당한다.’
각개격파의 위험을 감수하고 아군 병사를 쪼갠 건 적을 산개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오히려 합류를 감행한다? 본말전도다.
“Kil Uearthy!!!”
어인들이 몰려든다. 촉수 어인은 뇌가 파먹히기라도 한 듯 자기 몸에서 떨어져나온 파편을 촉수 다발로 으깨고 있지만, 언제 공격하려 들지 모를 일이다.
고민할 시간도 사치였다. 타임 아웃은 빠르게도 가까워지고 있다.
눈을 굴리던 나는 문득 의회의 벽을 발견했다.
부숴진 벽의 내부 골조가 상당히 익숙했다. 저 색감, 질감. 오리할콘이었다.
‘의회의 구조물에 오리할콘을 썼어?’
표지판에도 오리할콘을 써먹더니. 아주 세금을 낭비하는군.
왜 나랏님들은 공사무소를 그렇게 으리으리하게 못 지어서 안달일까.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건가?
쓸데없는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한순간 생각이 팔리고 마는 나였다.
‘……잠깐.’
그 잡념이 찰나의 번뜩임으로 이어졌다.
나는 의회의 맨 위, 첨탑처럼 자라난 구조물을 보며 눈을 반개했다.
다수의 적과 싸울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동시에 상대하는 적의 숫자를 줄이는 거라던가.
─꾸르르륵!
베로니카가 내게도 잠수 마법을 걸어주었다. 내 주변의 압력 차이가 해소되자 평범하게 땅을 디딜 수 있게 됐다. 바이콘 신족이 개발한 마법답다.
‘……이 조합, 가능할지도 모른다.’
나는 백스텝을 하며 베로니카한테로 붙었다.
“다들 준비해. 재밌는 작전이 생각났어.”
올바른 아이디어인지, 해낼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시험에 앞서서 합격할 준비를 할 수는 있지만, 혼돈스러운 사람의 앞길에 유비무환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허황스럽고 허무한가.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신조차 모든 걸 알지는 못하는 세상이다.
‘완벽한 계획과 성공한 계획의 차이점은 1개.’
그걸 실행하는 자들의 능력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