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를 진 사람에게 보답하겠다는 마음가짐은 나쁘지 않다.】
나는 무릎 꿇은 바이콘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 보답이 맹목적인 충성이면 의미가 없지. 너희들을 구속하는 대상이 오딘과 로키의 저주에서 나라는 개인으로 바뀔 뿐이잖나.】
【저희 중에 그리 생각하는 자는 없사옵니다.】
【그건 의미 없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니까.】
시발거, 1초도 고민할 것 없는 결론 아닌가.
이건 예시를 하나 들기만 해도 이해가 갈 법한, 존나게 간단한 논의였다.
‘의사가 죽을병에 걸린 환자를 고쳐줬다고 해서, 그 환자의 남은 목숨이 의사에게 종속되는가?’
여기에 YES라고 대답하는 놈은 의사가 아니다. 그냥 미친놈이지.
세상에 시발, 목숨을 구해줬다고 남은 여생을 다 갖다 바치라니?
공갈에도 정도가 있다. 죽은 히포크라테스가 되살아나서 예수랑 같이 트윙클 채찍 어택으로 저 개소리를 읊은 새끼의 뚝배기를 깨버릴 발상이다.
물론 저 행위에도 정당한 방법이 없지는 않다.
내가 베로니카에게 그랬듯, 그녀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그만큼 보답해주겠다고 맹세하면 됐다.
그 절차를 결혼이라고 하는 것이고 말이다.
‘근데 니들은 베로니카가 아니잖아?’
나는 바이콘 신족 전체를 책임질 수 없다. 그럴 마음도 없고.
책임지지 못하는데도 받아들인다? 그럼 책임을 방기하겠다는 뜻과 뭐가 다른가. 저들을 구해준 걸 빌미 삼아서 노예로 부리는 건 교수나 할 짓이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서 아델라이데의 옆에 있는 어린 바이콘을 가리켰다.
【네 이름이 분명…… 엘카라고 했었지.】
【네, 넵! 엘카 아림모스입니다, 계도자님!】
예전에 한 번 봤었던 바이콘이다.
차세대 예지자, 그러니까 베로니카가 의무를 못 다했을 때를 위해서 교육받던 어린아이. 저주가 다 풀린 이제는 의무를 짊어질 일도 없는 소녀였다.
【예지자가 되지 못해서 아쉽거나 하진 않나.】
【터, 터무니 없습니다!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솔직해서 좋군. 그럼 이제부터는 자유의 몸인 셈인데, 개인적으로 가 보고 싶은 곳은 없나?】
약간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입을 벌리는 엘카.
【가, 가 보고 싶은 곳이요……?】
【너는 아직 바이콘의 성년도 못 채웠잖나. 내 나이가 곧 서른이니가, 인간의 수명대로만 살면 내 죽음 이후에는 너도 세상으로 나갈 자격이 있지.】
눈 하나 꿈쩍 않고 태연하게 밀어붙였다.
내 말을 반론할 논지가 없는 건 아닌데, 따지고 들 분위기도 아니었다.
엘카는 스승인 아델라이데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녀가 내 뜻을 존중하듯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조심스럽게 생각을 털어놓았다.
【요, 요정왕국에 가 보고 싶어요.】
【요정왕국이라. 좋지. 나랑 베로니카도 가 본 적 있어.】
─슬쩍. 눈치를 주자 베로니카는 당황한 속내를 숨기며 말했다.
【그렇지. 지맥에서 솟는 따스한 물과 눈보라가 칠 만큼 차가운 하늘에 피는 오로라, 그리고 요정왕의 힘으로 꽃피는 도심이 인상적인 곳이었어.】
【오로라…….】
눈을 반짝거리던 엘카는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낮췄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아델라이데한테도 물었다.
【아델라이데. 너는?】
【……만일 허락된다면, 게르마니아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싶사옵니다. 제게 허락된 남은 여명을 제 지식과 신대의 진실을 대조하고 수정해서 남기는 일에 쓸 수 있길 바랍니다.】
【멋진 꿈이군. 최초의 바이콘 고고학자는 네가 될지도 모르겠어.】
나는 그 뒤로도 바이콘들을 가리키며 질문했다.
이름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었지만, 바이콘들은 자기 속내를 털어놓거나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며 당황스러워했다.
【동쪽으로 향하면 나온다는 황야에서 달려보고 싶습니다. 저는 말의 모습이 조금 더 익숙하고, 또 편해서……】
【괜찮군. 그래도 위험한 곳이니까 안내인은 꼭 동반하도록. 마침 엘프들의 새 왕조가 세워지려는 참이다. 그들과 연을 트는 것도 좋겠지.】
【……드워프와 만나보고 싶습니다. 그,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결혼도요.】
【멋지군. 안목이 높은걸. 탁월한 선택이야.】
【예, 예지자가 말했던 바깥세상의 음식을……】
【미식은 추구하다 보면 끝이 없다지. 첫 시작 정도라면 나도 도와주마.】
나는 첫 수업에서 자기소개를 시키는 선생들의 마음을 약간 깨우쳤다.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건 내가 저들에게 있어서 권위가 높아서 그렇겠지만.
【거 봐. 한 번 말해 보니까 술술 나오잖아.】
【……………….】
【너희가 지금 입에 담은 것. 그건 저주 때문에 이루지 못한, 그리고 이룰 생각도 못했던 꿈이다.】
나는 그들의 얘기를 듣고 나서 흘리듯 말했다.
【그런데 내가 계도자라는 이름으로 너희에게 멍에를 씌우고 부려먹는다면, 그게 너희를 괴롭히던 저주랑 뭐가 다르지? 자비의 유무인가?】
【그것은──】
【내 신분이나 예언, 운명 얘기라면 관둬. 대신 그 밖의 다른 이유로 내가 너흴 부려먹을 이유가 있다면 말해도 상관없다. 듣고 나서 고민해보지.】
아니나가 다를까, 찍 소리도 못하는 바이콘들.
이 시바, 이러니 내가 어이가 없고 안 배기나.
이 녀석들은 베로니카의 친척이자 친가, 가족들이었다. 근데 그걸 몇 달 동분서주 좀 했다고 평생 부려먹는다는 게 말이나 되나?
【더는 얘기할 필요가 없군. 나를 따르겠다면야 말리지 않겠지만, 허락하는 건 어디까지나 너희 한 명 한 명이 고민해서 그걸 선택했을 때 뿐이야.】
나는 저들이 머물 곳을 자유를 억압하는 랩실로 삼지 않을 것이다.
이것만은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한 전제였다.
여기서 말로 굽힐 정도라면 애초에 이 깨달음이 내게 오러를 깨우치게 만들어주지도 않았겠지. 내 자아의 심지는 바로 거기에 있으니 말이다.
단지, 솔직히 이들을 마냥 세상에 풀어놓는 건 불안한 것도 맞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것도 이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다른 것이었다.
【꿈을 꿀 자격은 생물에게 있어서 가장 존귀한 자유다.】
손을 까딱거린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서 쉽게 위협받고, 희생을 치뤄가며 지켜내야만 하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다면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거야.】
말하다 보니까 동의어 반복이 돼 버렸는데, 좀 마음에 든다. 약간 명언 느낌.
나중에 자서전을 쓸 때 꼭 써먹어야지. 노트에 적을 상황이 아닌 게 아쉽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하는 말은 내가 너희에게 건네는 제안이다.】
【……제안이라고 하심은?】
【너희가 자유를 찾아 떠나겠다는 걸 말릴 수는 없다. 하지만 저주가 풀린 지금도, 세상에는 아직 너희들의 꿈을 두고 보지 않을 놈들이 많아.】
바이콘들이 표정을 다잡았다.
내가 꺼낸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지 구구절절 말 안 해도 이해한 것이었다.
‘막말로 각자 해산했다가 차례차례 살해당하면 어떡하려고.’
역사를 말소하려는 놈들이나, 미친 신을 따르는 광신자들이 자유를 찾아 떠난 바이콘들에게 마수를 뻗치지 않을 리가 없다.
유니콘의 성지와 알프헤임이 불타버린 게 고작 몇백 년 전 아닌가.
인간의 10배 정도는 가뿐하게 살 바이콘들한테 그건 수십 년 전의 실감나는 과거가 아닐까. 그야말로 노인 세대가 6.25 전쟁을 기억하는 것처럼.
【너희들의 저주는 새장이었다. 너희를 가두는 한편, 지켜주기도 하던 울타리였지. 새장을 부수고 바깥으로 나왔을 때부터 너희들의 투쟁은 시작된 거야. 너희가 원하지 않았어도.】
【자유를 위한 투쟁 말씀이군요.】
【산다는 게 다 그런 식이거든. 나도 마음대로 살 수만 있었으면 진작에 다 접고 울 아내들이랑 오순도순 살러 갔어. 세상 시발이지. 존나 맘대로 되는 게 없어요.】
【……큽.】
바이콘들은 입을 꾹 닫고 웃음을 참았다. 아니, 진심인데 왜 쳐 웃는 것이지.
【나는 충성이라는 부담스러운 걸로 너희 삶을 책임질 생각 없다. 대신, 너희가 하고 싶을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돕고 돕는 관계가 되줄 순 있지.】
─퍽! 손바닥으로 주먹을 쳤다.
【이 점에서만큼은 우리도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너희 의견은 어때?】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바이콘들은 의견을 나눌 것도 없다는 듯, 한결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의 뜻과 꿈을 위해 당신을 따르겠나이다. 예언의 계도자가 아니라, 저희들을 밝은 혼돈으로 이끌어주실 당신을.】
─척척! 그들은 발을 맞추며 일어나서 인사했다.
충성을 드러내는 동작을 그만두고 경의를 표해준 것이다. 나는 그 정도로 만족하면서 예전부터 몇 번인가 들어봤던 신대의 예언을 떠올렸다.
─이르기를, 짐승으로 영락하지 않는 광전사.
─야성과 분노에 잡아먹히지 않는 자로되, 몰락한 짐승에게 안식을 주는 왕. 그가 왕림하는 날에 모든 짐승은 권좌를 비우고 왕을 배알하라.
운명의 계도자, 울프헤딘의 존재를 예언하는 말.
바이콘의 선지자가 남긴 예언.
한때 빗나갔다가, 운명의 장난처럼 다시 이뤄져버린 예지였다.
멸망을 예지한 신들이 창세의 권능으로 새롭게 만들어낸 세상, 지구.
거기서 탄생한 ‘지혜를 갖춘 짐승’은 우연히 이 세상에 흘러들어왔고, 신들의 안배로 만언신의 권능을 얻고 천공신을 모방하는 마법마저 얻었다.
그렇게 해서 운명의 계도자가 비워둔 자리에 턱 앉아버린 게 나다.
이 정도면 그냥 운이 좋았다기보단 운명적이라 하는 게 맞았다.
‘……짐승의 왕이라.’
솔직히 존나 까리한 예언이라고는 생각한다.
왕이라니,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말 아닌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나라 정도는 세워야지 않냐는 마초적인 열변도 있었고.
‘근데 우리 집안은 대대로 무신론자거든.’
오딘도 말했잖아? 운명 따윈 좆까버리라고.
사람은 자기가 책임질 수 있는 한에서, 꼬우면 때려질 권리가 있으니까.
【사이 좋게 협력하자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되는 날까지.】
나는 바이콘들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러면 우선은…… 계약서를 쓰는 법부터 알려줘야겠군.】
울프헤딘 학원은 실용과목 위주로 운영하거든.
고마워들 하셔. 이세계에서 무료로 교육해주고 사대보험까지 보장해주는 직장은 흔치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