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703화 (702/1,009)

〈일종의 평화조약인 셈이군요.〉

고르갈리아의 외무대신이 내 결론을 정리했다.

〈울프헤딘 백작의 논지를 보면, 대전쟁은 히타이트라는 나라와 아틀란티스, 그리고 에린이 얽힌 전화(戰火)가 전세계로 번졌다는 말씀 아닙니까?〉

〈여러분을 설득하고자 챙겨온 준비물들을 전부 떼고, 본론만 말하자면요.〉

〈그렇기에 아틀란티스를 전쟁병기로 쓰지 않으시겠다는 마음. 저는 평화를 사랑하는 개인으로서 아주 감명 깊게 생각합니다.〉

이번 회담에 임하는 목표가 ‘아틀란티스와 적대하지 않기’였던 고르갈리아 사람이서일까? 외무대신은 바로 내 편으로 넘어왔다.

대세와 이득 각을 따져본 선택, 아주 훌륭하셔용. 아저씨 장수하시겠어.

〈평화조약입니까? 브리타니아 측에서는 어떠한 조항을 생각하고 계신지?〉

〈섬의 안전을 위해서도 국방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단지, 아틀란티스가 타국의 영해를 항해하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없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말입니까?〉

〈예. 국가 간 교류나 운송을 포함해서요.〉

내수용 운송선 겸, 국내 귀족들 군기 잡는 수단.

그게 나랑 엘리자베트가 원하는 아틀란티스였다.

참고로 이래봬도 이거저거 많이 따져보고 내린 결론이다.

‘우리가 잠깐 물건 가져다줄게~ 하고 찾아와서 선빵을 칠 수도 있잖아?’

반대로 너희가 아틀란티스에 선빵칠 수도 있고.

나중에 나랑 아내들이 애를 낳았는데, ‘노르드의 자식들도 아틀란티스 조종 가능한 거 아님?’하고 외국에서 납치 쇼라도 벌이면 어떡하라고?

‘애미 시팔, 그랬다간 내가 라그나로크 시즌 2 터트리고 만다.’

남의 나라에 갔다가 나랑 내 가족들이 위험해질 거라면 안 가는 게 낫다.

이제와서 내가 돈이 부족할 일도 없을 테고.

‘어차피 브리타니아는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할 능력이 안 돼.’

가지고 있어도 뽕을 뽑을 방법은 잔뜩 있다.

남한테 주면 좆 되는데, 우리가 보유하면 좋게 써 먹을 수 있는 땅 아닌가.

‘그럼 우리가 꽉 붙잡고 있어야지.’

아틀란티스 1번 움직이면 존나 운송선 수십 척 상당의 이윤이 난다고.

‘연료도 감안하면 최소 100배 단위의 차익이지.’

국력 강화에 너무나도 개꿀인 선택지 아닌가.

그렇기에 엘리자베트 및 브리타니아 왕가는 반색하고 내 제안을 환영했다.

한 100년 쯤 지나면 엘리자베트 증손주가 대영제국── 아, 아니, 브리타니아의 황제를 자칭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체역사물의 조선처럼.

‘그리고 뭐, 대놓고 말하긴 좀 그런데……’

조약이란 게 사실 깨지라고 있는 거긴 하잖아?

지구에서도 핵폭탄, 독가스, 민간인 사살이 언제 합법이어서 저질렀냐고.

나중에 ‘브리타니아는 너희에게 실망했다. 암튼 유감을 금치 못함’ 하고 아틀란티스를 풀 무장시킨 뒤에 전쟁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은 게 외교의 음습함이었다.

‘거의 눈 가리고 아웅 같은 짓이긴 해.’

하지만 그 ‘아웅’이 1~200년이 된다면?

구라와 억지 명분에 시달리며 닳고 닳은 각국의 외교관들에게 있어서, 내 제안은 꽤 군침 도는 타협안으로 들릴 것이었다.

참고로 이건 엘리자베트 피셜이니깐 저는 믿을 수바께 없서오.

아마추어가 뇌피셜로 전문가를 의심하면 좆되기 딱 좋잖어.

〈……자세한 조항은 어쨌든, 방향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겠습니다.〉

〈회담이 길어지겠군요.〉

〈어차피 요양 때문에라도 며칠 머물러야 하지 않았습니까? 잘 된 셈 칩시다.〉

얘기를 주고받는 사절들. 전체적으로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당연히 ‘섬 자체를 파기하는 건 어때요?’ 하고 묻는 놈은 없었다.

‘어떤 미친 외교관이 남의 나라한테 영토를 버리라고 하겠어.’

내가 백작 신분만 딸랑 들고 왔으면 모를까, 이 자리엔 엘리자베트가 있다.

‘이 회담에 나왔을 정도면 외교관 짬밥을 상당히 먹었을 거 아냐.’

그런데 느그들 영토 위험하니까 버리세용 하는 개소리를 읊는다?

일본이 ‘거 이제 독도 갖고 싸우지 맙시다. 그냥 무주공산으로 냅두고 서로 손 떼면 되는 일 아뇨?’하고 말하는 거랑 똑같지, 이건.

〈저희가 제시한 방향을 납득해 주셨다면 몹시 다행이군요.〉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아~ 주 노골적으로 로마니아의 사절단을 바라보았다.

〈아니면 아직도 아틀란티스의 소유권을 원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나치 친구 재패니아로서 영토 야욕을 드러내려 한다면 그것도 좋다.

내 시선을 눈치챈 다른 나라들이 게거품을 물면서라도 막을 것이니까.

‘아니면 당장 내 주장을 반박할 자료라도 있나?’

있을 턱이 있나.

최소 몇 달 뒤에 2차 회담 자리를 마련한다면 또 모르지.

하지만 이번 회담에서는 물러나야 할 거고, 오늘 남은 기록은 전례이나 암묵적인 타협이 되어서 각 나라의 수뇌부로 퍼질 것이었다.

로마니아가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오해십니다. 저희는 따로 소유권을 주장했던 적은 없었지요.〉

로마니아의 외교관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저, 현대에 아틀란티스의 정통 후예가 남아있다면 그들에게 이 섬을 돌려줘야 하는 것은 아닐지 여쭤봤을 따름입니다.〉

〈인본주의적이시군요. 존경스럽습니다.〉

〈다 황제 폐하의 뜻이지요. 그러나 아틀란티스 인의 후손이 유산을 상속받긴 커녕, 발견한 즉시 원죄를 물어야 할 악인의 자손들이었다니……〉

나와 대표로 얘기를 나누던 그의 표정에 한순간 차가운 빛이 서렸다.

〈아틀란티스와 동맹을 맺은 지방의 귀족들이 한 번 물갈이 된 뒤인 게 아쉽군요. 아틀란티스도 그 동맹도 수백 년 전에 사라졌다면, 어떻게 책임을 물을 방도가 없겠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우리는 방긋방긋 웃으며 물 밑으로 비수를 주고 받았다.

‘외교관다운 꼬리 자르기군.’

솔직히 우리도 이걸로 로마니아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했다.

잔뼈가 굵은 놈들이 몇 주 동안 머리를 짜내서 만든 책략 아닌가.

일부러 고르갈리아까지 꼽사리 끼워서 ‘제 3자’ 포지션을 잡은 게 왜겠어. 좆 될 것 같을 때는 그 동맹이랑 우리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며 손절을 때리기 위해서지.

‘내 주장도 아직까진 고작 가설 단계일 뿐이고.’

역사적 증거는 적고, 교차 검증도 안 된 추론.

이건 명백한 약점이 아니라 이제부터 학자들이 증명해나가야 할 가설이다.

‘하지만 절대 불가능한 추론은 아니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어디 역사 교육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던가?

목적과 수단을 오해하면 안 된다.

이 회담의 주제는 고고학이 아닌 아틀란티스의 소유권이다.

로마니아 측도 말하지 않았는가. ‘이 이상은 고고학계 사람들이 논의할 일’이라고. 나는 내 가설로 이들을 감화시키러 나온 게 아니다.

로마니아를 내칠 명분과 다른 나라들을 설득할 논리만 구축하면 된다.

아틀란티스를 얻은 로마니아가 이세계 버전 2차 세계대전을 벌여도 이상할 것 없다는 생각이, 다른 외교관들의 대가리에 스며들면 충분하거든.

‘……이만 물러설 때인가.’

목을 축이던 나는 논쟁의 끝을 직감했다.

과욕은 접어둘 때다.

로마니아에게 한 방 제대로 먹이고 소유권 분쟁에서 완전히 배제한 참이잖은가. 욕심을 부리다간 방금 전에 전범 부역국 커밍아웃을 할 뻔한 로마니아처럼 제 풀에 나자빠지는 수가 있다.

내 노파심이 틀리지 않았는지, 상대는 차분하게 지들이 부른 학자에게 말을 걸었다.

〈롤랑시스 박사? 당신의 연구는 좀 더 개량할 여지가 있겠겠습니다.〉

〈아, 예. 예……〉

자기 연구가 미친 전범집단의 행적을 쫓는 일이었다는 걸 깨닫고 만 박사는 소심한 성격에 박차가 가해진 듯 쪼그라들었다. 살짝 불쌍하네.

그래도 후속연구 때문에 기존의 연구가 개똥이 되기도 하는 게 학자 아닌가.

공룡 연구처럼 완전히 철폐되는 건 아니잖아? 힘 내라고.

〈덧붙이자면 이 섬에 서식하던 어인들도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설마 그 어인들도 인간이었다는 겁니까? 아틀란티스 인들 사이에도 야수회귀가 퍼졌었다고요?〉

〈아니오. 시체로부터도 변이의 마나가 검출됐기 때문이죠. 야수회귀와는 다른 원인입니다. 이 점은 후일 차차 알아보셔도 좋습니다.〉

어인 건어물 몇 개 있으니까 챙겨들 가셔.

해안 지방에 놀러온 친구들한테 황태 몇 포대는 줄 수 있어야 인심이 박하다고 욕 먹을 일도 줄지 않겠어? 휴스로이트 이장님으로서 당연한 의무지, 이건.

왜 아틀란티스 인들이 어인이 됐는가는…… 좀 다른 가설이 필요하다.

아직 실루엣만 희미한, 신들의 과거사와 연관된 가설이 말이다.

〈혹시 어인이 아틀란티스 인이라는 증거는 또 없습니까?〉

그때 키아라가 손을 들며 물었다.

이 인간은 왜 이렇게 해맑지. 오우거=인간 썰이 별로 안 놀라웠나.

나는 헛웃음을 짓고 손을 흔들었다.

〈제 친구들인 바이콘 족은 지금까지 저주 탓에 세상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네. 그 얘기는 사전에 들었습니다.〉

〈바이콘들이 저주를 풀지 못했던 건 그 저주의 근원이 아틀란티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섬의 존재를 알아내고 건져낸 것도 그래서였죠.〉

선지자의 예언이 인간(아틀란티스 인)의 손으로 어긋나버렸던 것이다.

예언의 계도자는 안 나와, 저주의 근원은 애먼 섬 째로 바다에 가라앉아……. 이런 상황에서 베로니카 이전의 예지자들이 어떻게 해결법을 찾겠냐.

바이콘들이 눈 훤히 뜨고 수천 년을 성지에 갇혀살 만 했다.

〈말씀드렸듯 히타이트에서 전파된 야수회귀의 주술은 에린의 분노를 샀죠.〉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아틀란티스 인들에게도 어인화 현상이 발생했다면──〉

〈예. 대전쟁의 발발입니다.〉

이 얘기를 할 수 있도록 운을 띄워준 건가. 저 하프 드워프 모험가 마스터는 진짜 날 도와주러 온 게 맞기는 한 모양이었다.

〈군사력이 강력하던 에린과 아틀란티스가 주도하는 복수와 침략 전쟁. 거기에 나라 2~3개만 휘말리면 벌써 대전쟁이라 봐도 되겠죠.〉

〈그래요! 에린과 아틀란티스의 전쟁이 역사에 남은 대전쟁이 아니어도, 그 여파가 황금시대를 종식시켰던 대전쟁과 무관했을 리는 없으니까요!〉

어쩐지 흥분한 아셰라드가 기똥차게 받아줬다. 리액션 한 번 찰지시네.

〈……전쟁의 9할은 이해손실에서 발생합니다.〉

내가 혼자서 고개를 모로 꼬고 있자, 회담 내내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였던 게르마니아 측에서도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고대의 대전쟁은 대부분의 문명이 멸망해버릴 정도의 격전이었습니다. 보통은 전쟁 탓에 나라가 멸망하기 전에 합의를 맺고 종전하는 것이 상식인데도 말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동네 취객들도 배에 칼이 꼽히면 엎어져서 싸울 맘이 싹 가시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온 나라가 좆 되버릴 상황인데도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니?

오죽하면 고작 수백 년 전인 황금시대가 기록도 거의 없고, 현대인들이 당시의 기술을 재현하지도 못하고 있겠냐고.

진짜 개같이 번성했다가 개같이 멸망해버린 게 고대문명 황금시대다.

이건 뭐 거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데도 좆도 신경 안 쓰고 싸워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핵을 2방 처맞고도 전쟁을 계속한 수준 아니냐?

〈고대인들이 멸망을 예감하고도 전쟁을 못 멈춘이유가 있었다는 뜻이구려.〉

고개를 끄덕거리며 알아먹었다는 시늉을 해대는 니다벨리르의 외교관.

당시 국가들이 그런 미친 짓을 벌여야 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짝! 키아라는 그 이유가 실감이 가는 것처럼 손뼉을 쳤다.

〈그렇죠. 자국민이 몬스터로 변해가는 와중에 종전이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강대국이 전쟁을 멈춰도 멸망을 피할 수 없다고 보고 끝까지 싸움을 계속했다면, 돌이키지 못할 수준까지 멸망할 만도 하군.〉

〈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포기할 수 없는 적을 상대입니까. 다른 나라도 대전쟁 끝에 멸망해버릴 만큼 싸워야 했겠습니다.〉

경험한 바가 있었기에 사람들의 이해는 빨랐다.

아틀란티스에서 일어났던 몬스터 화 판데믹.

그 판데믹이 나라 전체에서 터졌다면?

뒷일을 잊고 전쟁을 일으킬 만 했다.

나는 사절들의 우려나 의심을 불식하고자 다른 증거들도 보여주고 설명하며, 그렇게 또 한참 입을 나불거려야 했다.

역사 자료만 전시하다 보니 세미나에 나온 기분이다.

중간에 점심 타임도 없더라. 한국인은 밥도 못 먹고 일하면 안 되는 민족인데. 하여튼 존나 나쁜 새끼들이다. 브리타니아 전통 짬식이 먹기 싫어서 일부러 저러는 게 분명해.

〈하여튼 대전쟁이 재발할 수 있겠다는 우려는 일리가 있습니다.〉

〈애당초 울프헤딘 백작이 아니면 움직이지도, 또 찾아내지도 못했을 섬입니다. 소유권자가 없고 바이콘처럼 실질적 피해를 입은 이들도 있어요. 저희는 고려할 가치가 있는 제안이라고 봅니다.〉

〈피를 흘려가며 얻은 영토는 당연히 그 나라의 권역이오. 이것을 부정한다면 게르마니아는 우리 니다벨리르에게 돌려줘야 하는 땅이 있지 않소?〉

〈……크흠.〉

그렇게 기다리고 있자 다른 사절단들도 상의를 마친 모양이었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자국의 상황이나 이점을 고려한 결론이었겠지만,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찬성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기울었다.

〈고르갈리아는 이번 합의안에 동의합니다.〉

〈니다벨리르도 그렇소,〉

〈나르메르-나일도요.〉

그리하여 모든 사절단이 내 제안에 동의했다.

내 예감대로, 사실상 회담이 마무리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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