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704화 (703/1,009)

〈푸우우……〉

그렇게 회담의 방향이 확정되고 나서부터였을까.

사절단 외교관들의 어깨에서 힘이 살짜쿵 빠진 게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이 뒤에는 어떤 조약을 맺을지만 정하면 될 일이어서일까. 사실 따지고 보면 그 과정도 엄청나게 꽤 중요하긴 한데, 내 쇼크 요법보다는 안심되는 모양이었다. 국제조약은 그들의 홈 그라운드니까.

암튼 이제야 편하게 농담도 주고 받을 수 있을 법한 분위기가 됐군 그래.

저렇게 살벌하게 혓바닥 오러 소드를 휘두르다 부랄친구처럼 낄낄깔깔 떠들 수 있다니, 역시 외교관도 보통 정신머리로는 못할 짓이야.

할 일 끝냈다고 생각한 내가 한가로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하지만, 이렇게 자료로 정리해놓고 보니 울프헤딘 백작님께서 영위하신 삶의 궤적도 어렴풋이 보이는 듯 하네요.〉

독을 마시는 새 초반본을 손에 넣은 소설 마니아처럼 내가 뿌린 자료에 코를 박고 있던 아셰라드. 그녀가 무척 흥미로운 듯 다른 화제를 꺼냈다.

〈경께서는 현장직 고고학자답게 역사의 진실을 탐구하는 일에 매진하셨군요. 그 과정에서 에린의 후예와 바이콘의 진실을 알고서, 그 진실과 엮인 사모님들과도 사랑을 나누신 겁니까?〉

〈어……〉

……그게 그렇게 되나?

나는 예상 밖의 관점에 입을 뻐끔거렸다.

인과관계가 정 반대였지만─아내들이랑 사귀게 된 후에야 그녀들의 뿌리를 찾아낸 거니까─, 저 말대로 생각하면 노르드 울프헤딘이란 새낀 존나 유능하고 착실한 꼴마초인 모양이었다.

자기 본업에 충실하며, 1년 사이에 아무도 찾지 못한 역사를 발굴해낸 상남자!

그리고 기세를 몰아서 픽트 인과 바이콘/유니콘 족을 구원한 끝에, 그 부족 출신의 아름다운 미녀들을 부인으로 들이기까지 하다니?

딱 정통적인 영웅담의 주인공 같은 행적이구만.

니다벨리르의 외교관 페를로가 혀를 내둘렀다.

〈맙소사……. 백작은 정말 요즘 같은 세상에는 보기 드문 의인이셨구려.〉

〈그렇지만 그런 의인이시면 아틀란티스를 찾아내신 것도 이해가 가요.〉

〈저주로 고통받던 이들을 구원하려는 일념으로, 누구도 찾지 못했던 해저의 섬을 건져내서 바이콘들의 저주를 풀었단 말입니까? 그거 참……〉

사절들은 키아라의 얘기를 듣고 눈치챈 것처럼 놀라움에 빠졌다.

그러자 하이로메인이 뜬금없이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물론입니다! 백작님께서는 픽트 인과 알윈의 영지민들을 구해내시고자 당당하게 적군의 중추에 잠입하고, 당당하게 승리를 거뒀던 전적도 있으시니까요!〉

아냐. 당당이고 지랄이고 팔 짤려서 의수 달고 몇 달을 빌빌댔어.

오러 각성하고도 끽 하면 메가 진화한 트롤 킹 새끼한테 대가리 깨질 뻔 했다고. 실제로 오딘이 교수 슬레이어가 되서 기절할 뻔한 나를 깨워주지 않았으면 졌을걸?

〈겸사겸사 얼스터의 감춰진 역사까지도 밝혀내셨고요! 아! 그리고 제가 타고 다니던 말도 사실은 유니콘이라는 종족이었는데, 백작님의 은혜로 제 모습을 되찾았답니다!〉

당신, 내가 고용해준지 얼마나 됐다고 충성심이 너무 넘치는 거 아냐?

내가 마음 속으로 아무리 부정해도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뱉지 않았기에, 하이로메인의 고용주님 찬양은 멈추지 않았다.

‘이래서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는 거구나.’

평생 후원금 한 푼 못 받으며 연구하던 노처녀 교수한테 유니콘 친구랑 연구비랑 논문감을 던져주니까 몇 주만에 옐로 몽키 예찬론자가 돼 버렸네.

앞으로는 영지민들 입 단속도 더 철저하게 시켜야겠다. 무슨 민간신앙의 탄생 같잖아. 임모탄 강 같은 취급은 사양이라고. 모유통! 모유통!

〈그, 그게 정녕 고작 한 사람의 위업이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감염자들을 구하고 대가없이 상처의 치료까지 홀로 도맡으신 울프헤딘 백작님이라면, 능력이나 성품 면에서도 이상할 것 없기는 해요.〉

〈어…… 그런데 저희 측 자료에 오기가 있는 것 같네요. 논문 연구나 유적 탐사, 트롤 군대 토벌 등 업적의 텀이 고작 1~2달인데요?〉

〈……설마 이 업적들을 고작 1년만에 해내신 건 아니죠?〉

사절들은 점점 이게 사람 새끼인가, 사람 탈을 뒤집어 쓴 몬스터인가 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거 시발 왜 사람을 폴리모프해서 유희를 즐기는 양판소 드래곤처럼 보시나 몰라.

나를 바라보는 각국 사절단. 그들은 모두 같은 대답만을 바라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눈치챘기에, 어쩔 수 없이 부들거리며 대답했다.

〈바…… 로, 맞추셨, 습니다…….〉

노르드의 양심에 크리티컬 히트!

노르드(은)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역시!!〉

아셰라드는 자기가 돈을 건 말이 1착으로 들어온 도박 중독자처럼 기뻐했다. 존나 당신은 아까부터 리액션이 왜 그래. 보는 석사 불안하게.

후우…. 종이를 뒤적거리던 키아라가 세상이 떠나가라 한숨을 쉬었다.

〈백작께서 모험가가 아니신 게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공적만 따지면 저랑 어깨를 나란히 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요. 제 1왕녀님이 부럽군요.〉

〈후후. 사람의 능력을 알아보고 등용하는 것도 통치자의 덕목이니까요.〉

〈그렇습니까? 왜 제가 총장 체질이 아닌지 한 번 더 알았습니다.〉

약간 이상한 말투로 납득하는 키아라. 갈 데도 없이 앉아있던 나는 슬슬 뻘쭘해졌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직업은 자아실현의 수단이다.

명예욕이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나도 일단 사람인지라 아부기 뺀 칭찬을 받으면 어깨가 으쓱거리기는 한다. 와! 이게 관종의 뽕맛이구나!

하지만…… 니미 쓰펄, 정말 이래도 되나? 이건 거의 쌩구라를 치는 수준인데?

결론은 엇비슷해도 내 표면적인 약력과 진실은 키스하고 입싸하기랑 입싸한 다음 키스하기 정도로 다르지 않은가. 난 성인군자가 아니라 하렘성애자 꼴마초일 뿐인데.

지금 내 손에다가 거짓말 탐지기 달았으면 기계 폭발했다, 진짜루.

〈크흠. 이야기가 마무리 되었으면, 이제부터는 조약에 대해서 논의할까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엘리자베트와 교대했다. 이 본격적인 정치 노름은 그녀의 일이다. 나야 그냥 앉아있다가 대답-봇 노릇이나 몇 시간 하다 퇴근하면 끝이니까.

그렇게 사절단들이 이제서야 활발하게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나와 로마니아의 이름 모를 외교관은 눈을 마주쳤다.

집행관이라는 호위와 대화를 나누던 그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팔짱을 꼈다.

그 찰나, 우리는 직전까지 토해냈던 열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차분해졌다.

저 남자와 나는 여타 외교관들이랑은 열과 성을 올리는 부분이 달랐다. 마치 우리들만이 별개의 관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아틀란티스의 조약 따위에는 일체 흥미 없는 것처럼 눈을 반개했다.

그리고 사고력과 본능을 총동원하여 깨달았다.

‘너희들, 실은 알 만큼 알고 있지?’

말하면 불리해져서, 설득할 근거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뿐── 저들이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주제에 굳이 침묵을 견지했다는 것을.

우리는 겉으로는 무사태평하게 눈빛을 부딪혔다.

저들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이 자리에서 밝혀지지 않은 황금시대의 마지막 진실들.

언젠가 그걸 밝히는 날, 우리는 또다시 만나게 될 것이었다.

***

“다녀왔스요!”

회담 첫 날이 끝나자, 내일부터는 지지부진하게 토의가 진행될 테니까 빤스런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은 나는 얼른 프랑한테로 달려갔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까 내일 설명을 해 주게 될 텐데, 굳이 프랑한테만 찾아간 것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절대 차별 대우가 아니라구요.

내가 방에 들어가자 검은 머리의 황녀가 고개를 숙였다.

【오셨어요? 울프헤딘 백작님.】

【예. 황녀님도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프란체스카 백작 부인 덕에 즐거웠죠.】

오늘 바이츠니아의 사절단은 식객처럼 저택에서 휴양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틀란티스 회담에 낄 명분도, 의욕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이링은 충왕대군 사건의 멘탈 케어와 프랑 본인의 뜻으로, 우리 천사 같은 아내님이랑 방에서 얘기를 나누던 차였다.

내가 굳이 찾아온 것도 그래서였고 말이다.

【저희 일은 대충 마무리가 됐습니다. 별 문제 없었으니 편히 머물러 주세요.】

【어머나? 저희 같은 볼모는 눈칫밥을 먹는 게 예의 아니에요?】

【흐흐. 눈치 줄 사람도 없습니다. 이 저택에는 저랑 저희 가족을 빼면 출입하는 사람이 한 손에 꼽거든요.】

나랑 농담을 따먹던 유이링은 표정을 가다듬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거의 절하는 모양에 가까웠다.

【여러모로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옙.】

내 나이의 절반 정도인 애한테 극진하게 감사를 받는 게 유쾌하진 않은데, 그래도 여기서 겸양을 떨면 그녀의 부담과 죄책감만 커지겠지.

【황녀님. 저도 오늘은 즐거웠어요.】

신분도 무색하게 절하듯 인사하는 유이링의 손을 프랑이 붙잡았다.

프랑의 귀여운 얼굴에 무구한 웃음이 피어났다.

【그러니까 저희, 앞으로도 더 많이 얘기해요.】

【……그래도 될까요?】

지금까지는 속을 터놓고 대화할 사람도 적었던 걸까. 눈가에 물기가 고이려는 유이링에게 프랑은 장난스럽게 웃음지었다.

【당연하죠. 언니한테 놀러오는데 격식 차리실 것 없어요!】

【……고마워요, 프랑 언니.】

유이링은 프랑과 포옹하고 떠나갔다.

가족을 잃은 혼혈이란 점에서 동변상련을 느낀 걸까.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스스로 턱을 갈겼다. 그런 갬성 없는 이과 같은 식으로 분석할 필요가 없는 광경이었다.

웃으며 속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

겉으로 보이는대로, 그거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저기 있지, 노르.”

프랑은 황군들과 떠나가는 유이링을 배웅하고서 말했다. 그녀와 나의 키 차이 때문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때도 있는가 봐.”

“……그래.”

프랑과 유이링에겐 가장 소중한 가치인 가족.

그것도 충왕대군 같은 씹새들에게는 그저 이용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살면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힘든 일일 수밖에.

바이츠니아 황제에게도 벌레가 심어져 있다면, 그 벌레가 죽은 뒤에는 유이링을 사랑하는 부모가 되어줄 것인가?

우리로서는 알 방법이 없는 일이었다.

하프 드워프인 키아라가 첫 만남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는 가끔 아무리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것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더 소중히 해야 하는 거겠지.”

기적적으로 손에 넣은 행복을 말이다.

“……응. 나두 그렇게 생각해.”

프랑은 날 보며 웃었다. 프랑다운 미소였다.

…포옥.

미소로 나를 안심시킨 그녀는 말없이 내 가슴에 안겨들었다. 체온이 조금 차다.

“프랑?”

“잠깐만…… 딱 오늘밤까지라두 괜찮아.”

내게 안겨든 프랑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냥, 조금 어리광 부리고 싶은 기분이야.”

“……바보 같은 소리 말고, 지쳤으면 언제든지 말해.”

따로 일정도 없다. 나는 사랑하는 가족의 등을 마음껏 토닥거려주었다.

“나는 아무 데도 안 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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