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틀란티스 회담의 첫째 날 밤.
〈로마니아로 돌아갑니다. 준비하십시오.〉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사절단의 대표는 일행을 불러서 지시했다.
그의 말에 사절들은 일어반구 되묻는 일도 없이 귀환 준비에 착수했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질문한 것은 집행관 뿐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직 조약도 정해지지 않은 채입니다.〉
〈쌍방의 합의하에 채운 족쇄에 얼마나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절단의 대표는 칠이 벗겨진 기사의 기물(Piece)을 만지며 대답했다.
로마니아에서 유명한 보드 게임의 기물이었다.
〈팔에 채운 쇠구슬은 둔기가 되고, 발에 채운 족쇄도 기껏해야 평시에 조금 거슬리게 만드는 정도입니다. 브리타니아의 왕녀가 납득하고 수용한 조약에는 그 정도의 가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한 그도 조약의 가치를 경시하는 건 아니었다.
외교관들의 일은 그 족쇄를 치밀하고 은밀하게 적국의 목에 채워놓는 것이니까.
아틀란티스 운용에 제한을 걸고 국익을 지키려면 회담에 참여해야만 했다.
그보다 더한 단점이 있지 않는 한은 말이다.
─톡. 대표는 손에 쥐고 있던 기물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저흴 지켜보는 듯한 시선이 없군요.〉
〈예. 허나 아직 발퀴리에들의 감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명목 상으로는 호위입니다만.〉
감시가 치밀하다. 사절단에 참여한 집행관마저 은밀하게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얼핏 자유로운 듯 보이는 것이 더 악랄했다. 그 자유에 속아서 생각없이 바깥을 노녀도 감시망을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실제로 며칠 전의 판데믹에서 바이콘족 부대는 몇십 분만에 대처에 나섰다.
처음부터 각국 사절단의 행적을 모두 감시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물증도 남기지 않으면서 언제든지 적의 신변을 살필 수 있다니. 상대하다 노이로제에 걸릴 듯한 마법이군요.〉
아틀란티스에 상륙하기도 전, 그들은 노르드의 천리안을 감지했다.
그래서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면서 준비해왔던 책략의 복기조차 삼갔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했던 탓에 회담에서 실패를 겪었으니까, 애초에 패배가 정해진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면 국익은 모든 일에 우선합니다.〉
─톡.
기사 모양의 기물이 손가락에 밀려 넘어졌다.
〈그러니 양심으로 맺은 조약은 언제 파기돼도 이상하지 않죠.〉
그가 말한 것처럼 국제조약이란 합의를 맺고서 채워놓는 족쇄다.
브리타니아가 자신들을 노예 구속하듯 꽉 묶는 걸 허용할 리 있을까.
약조의 빈틈은 반드시 태어난다. 아무리 그라도 구멍을 메울 수는 없다.
국제 조약은─비난과 국제적 고립만 무시하면─ 여차할 때 풀어버릴 수 있는 족쇄다.
〈관념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오직 한 가지, 국운만이 국익보다 중시됩니다. 브리타니아도 그렇고, 저희 로마니아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맺은 국제 조약은 평시의 국익을 좌우하겠지만, 전시에는 무용하다.
나라가 망할 바에야 미래영겁 비난받더라도 조약 쯤은 무시해버리는 게 옳다.
그렇기 때문에 아틀란티스의 규제는 로마니아의 명운을 좌우할 수는 없었다. 이 조약을 리드해서 얻는 건 다소의 이익 뿐이었다.
〈……울프헤딘 백작의 수작을 경계하십니까?〉
〈고독술사가 사절단을 습격한 게 자작극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습니다. 그 남자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인물인지 모르는 한, 고집은 과욕입니다.〉
남아서 회담에 참석하는 장점.
이 감시망에 더 큰 빈틈을 드러내고 말지도 모른다는 단점.
어느 쪽을 골라야 할지는 고려해 볼 문제였다.
〈이미 한 번, 회담에서도 과욕을 부리다 실패했습니다. 두 번째 실패는 없습니다.〉
대표가 고려 끝에 내린 결론은 후퇴였다.
그는 국익에 눈이 멀어서 나라를 말아먹으려는 생각은 없었다.
〈예. 브리타니아 왕녀에게 전갈을 넣고 출항을 준비하겠습니다.〉
집행관은 인사를 남기고 문을 나섰다.
불이 꺼진 방에 혼자 남은 대표는 사색에 빠진 것처럼 탁자에 턱을 괬다.
생각을 정리하는 그의 자세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끝에 해안선으로부터 떠오른 태양이 아침을 밝혔다. 품행 바른 시종들은 소음을 내지 않고 노르드가 만든 숙박소의 문을 열었다.
〈……황자님. 출항 준비를 마쳤습니다.〉
사색을 멈춘 그는 한쪽 눈을 떴다.
〈얼굴도 안 팔린 사생아를 황자라 부릅니까?〉
〈예. 전하의 몸에 폐하의 피가 흐르는 한은.〉
〈영광이군요.〉
냉소적으로 대답한 그는 시종조차 부리지 않고 자신이 묵던 곳을 손수 정리했다. 황자의 손이 몇 번 걸치자 그가 있던 흔적은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황자는 섬을 떠나기 전, 잠시 멈춰섰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 하던가요.〉
창밖을 내다보던 그는 홀연히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아는 것은 독이라 함이 옳겠죠.〉
반석에 세운 제국도 한 방울의 독으로 무너진다.
따라서, 천하의 정점에 서고자 하는 자는 독을 경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
“영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영주 대리인데요.”
프랑이랑 오붓한 잠자리를 가진 뒤.
아침 먹고 양치하는 것처럼 숨 쉬듯 웨스턴이랑 대화를 주고받은 나는 그 손님이라는 사람을 보러 나갔다. 아직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데 누가 무슨 얘기를 하러 온 거래.
그렇게 응접실의 문을 열자, 그곳에는 아셰라드 학회장과 키아라가 있었다.
한 칸 떨어져서 그…… 이름이 뭐더라. 롤 뭐시기인가 하는 박사도 보인다.
아셰라드는 날 보자마자 일어서서 인사했다.
“울프헤딘 백작.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부터 실례가 많은 저희입니다.”
“……총장님.”
“네? 맞는 말이긴 하잖아요?”
고개를 모로 꼬는 키아라와 입을 꾹 다물고 불통스럽게 구는 아셰라드.
국제회담에 이름값만으로 참석한 남녀다.
각국에서 유능하고 중립적인 고고학자로서 인정받은 아셰라드 신시아와, 전세계 모험가들의 탑. 좀 언밸런스해 보이는 조합인데, 그렇게 별난 콤비는 아니다.
고고학자는 강함이 반쯤 필수다.
하지만 유적 탐사 같은 위험한 곳에선 모험가의 무력을 빌리는 일도 많았다. 당장 내가 카르미네 대학에 있을 때도 예르나가 모험가를 고용해서 이하생략.
그러니까 이 2명도 충분히 알고 지낼 만 했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자리에 앉으면서 질문.
어제는 회담이 밤 늦게 이어졌기 때문에 오늘은 점심부터 시작된다.
그러니까 밤잠을 줄여서 이런 아침부터 귀족(나)를 찾아온다는 무례를 저질러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라는 뜻일까. 귀족은 참 좆 같은 일이구나.
“개인적으로 잠시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 이런 아침부터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요?”
“다르게 말하자면, ‘학자로서’ 말입니다.”
쓰벌, 뭐길래 그러지. 사족이 긴 건 취향이 아니었기에 나는 얘기를 재촉했다.
“〈황금시대의 룬 어와 엘룬 어 사이의 비 유사성(非類似性)에 따른 역사의 재고찰〉. 천익상을 딸 수 있을 거라고 평가받던 예르나 그라시에 교수의 논문이죠.”
아셰라드는 내 뜻대로 했다. 차량추돌처럼 본론부터 갖다박은 것이다.
거짓말을 간파하려는 듯 그녀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거, 사실은 백작께서 쓰신 것 아닌가요?”
“뎃?”
나는 원래도 없는 귀족의 품위를 완전히 잊고, 멍청하게 대꾸해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그녀가 ‘이 씹새끼, 사실 다른 세상에서 온 외계 원숭이렸다!’하고 광선총을 꺼내서 갈겨도 이렇게 놀랍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직책 상, 많은 논문을 읽어보았습니다.”
아셰라드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다 보니까 알게 되더군요. 필체가 달라도 문맥의 끊고 맺음, 논리를 전개하는 과정, 목차를 나누는 형태의 호불호, 애용하는 단어 표현……”
손가락을 꼽던 그녀는 곧 포기한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그밖에도 말로 설명드리기 힘든 특징이 저자의 필체로부터 드러나는 법이죠. 그건 많은 글을 쓴 사람일수록 피치 못하게 몸에 배게 됩니다.”
“……예르나 그라시에 교수가 제출한 논문에서 그게 보였다고요?”
“당연히 그녀는 자신의 필적으로 고쳐썼죠. 단, 그 필기는 마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전 내심 논문 도용을 의심하고 있었습다.”
“예?”
마법으로 필기하는 거랑, 논문 도난이랑 대체 뭔 상관이지?
“글자를 쓰는 마법은 존재합니다만, 저희 같은 학자들은 논문 제출에서 그런 마법을 삼가합니다. 잉크를 수정하거나 남의 논문을 빠르게 베껴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죠.”
내가 어안이 벙벙해 있자니 롤뭐시기가 자기를 잊지 말아달라는 듯 끼어들었다.
그렇게 설명을 받고서야 깨닫는 사실이 2개.
하나는 카르미네 대학 시절, 나를 번역 노예로 부려먹던 교수들이 왜 그렇게 줄 간격, 글자 등을 깐깐하게 따졌는지에 대한 깨달음.
다른 하나는 몇 번인가 마법으로 서류를 쓰는 걸 본 적이 있는데도─크롬웰이 나한테 마법사 길드 준회원증을 줄 때도 썼었다─, 정작 나는 그걸 집필에 쓸 생각은 없었다는 점이었다.
존나 시발 콜롬버스가 달걀을 깨서 세워놓는 걸 본 도전자들의 기분이 이랬을까? 입을 뻐끔거리고 있자 아셰라드가 말했다.
“그렇지만, 의심을 지적하는 건 학계에서는 사실 불가능에 가깝죠.”
“논문을 도용한 학자가 한둘이 아니니까군요!”
키아라는 잘 알겠다며 손뼉을 쳤다. 아셰라드는 괜히 데려왔나 하고 생각하는 게 내 눈에도 훤히 보일 정도로 골치 아파하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예. 그래서 의심만 품고 있던 차에, 백작님께서 쓰신 논문을 보았습니다.”
“넹? 제 논문을요? 웨죠?”
존나 멍청한 질문에 아셰라드는 빙그레 웃었다.
“사르가디스의 유적에서 발견된 비석의 글귀, 《천공신께 기도하라(yáǵeswō deiwōm dyēus)》. 그 언어체계가 제가 남몰래 연구하는 언어와 적잖이 유사했거든요.”
“그, 그러셨군요.”
논문들을 찾아다니다가 내가 정기 보고용으로 쓴 논문을 읽었다는 건가.
꼭 중딩 때 쓴 독후감을 발견당한 것만 같다. 좀 쪽팔리네.
“그리고 어제 회담의 자료를 보고 확신했어요. 그라시에 교수의 필적으로 고쳐쓰기는 했어도, 그 느낌은 분명 백작님 특유의 논지라는 걸.”
“그래서 제가 지도교수에게 논문을 도용당했던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어쩌면 그냥 지도교수에게 영향을 받았을 뿐인지도 모르는데요?”
“아뇨,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라시에 교수가 갑작스럽게 엄청난 논문을 낸 뒤에 제출된 백작님의 학위논문이, 그…… 너무나도……”
내가 석사 동장을 받았던, 그 급조 논문 얘긴가.
적절한 표현을 떠올린 나는 눈을 피하며 말했다.
“……처참하다?”
“……예. 솔직히 그만한 언어능력을 갖춘 분이 몇 년을 들여서 자신의 학위를 정하는 데 사용할 논문이라곤 볼 수 없었죠.”
‘한국인은 마늘을 안 처먹으면 죽음?’ 수준으로 개씹 팩트라서 반박할 여지도 없다. 그 숨가쁘게 만든 논문의 완성도는 거의 낙제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고작 1~2달 뒤에 날아왔던 사르가디스 유적의 보고서와, 그 내용은 전혀 달랐죠. 수천 편 정도의 논문을 읽은 제 눈으로도 크게 흠 잡을 곳 없는 완성도였으니까요.”
공평하기로 유명한 아셰라드는 그 성격만큼이나 올곧는 시선을 예리하게 빛냈다. 미간에 난 주름 모양이 그녀의 인생사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그 짧은 시간에 급격하게 성장했을 가능성보다는, 백작께서 논문 도용의 피해자이시리란 게 훨씬 합리적인 생각이니까요.”
쓰벌, 어쩌지. 눈물 날 것 같다.
아무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논문을 도용당했다는 걸 눈치채준 사람이 있다니?
예르나 년에게 복수는 했지만, 내 걸작 논문을 되찾을 방법은 막막하다.
권력을 앞세워서 표절을 주장하는 것?
가능하긴 하겠지.
하지만 자칫하면 ‘저저 쓰펄놈이 자기 스승 뒤지지마자 업적 쌔벼갈려고 염병이네’하고 국밥집에서 쐬주 깐 아재, 할배들이 혀를 차댈 것이었다.
그래서 내심 포기할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다른 논문이나 마나 부여 기술로 업적을 충분히 쌓아나갈 수도 있고, 너무 옛날 일에만 얽매이지 말자~ 하고 자위(딸딸이 아님)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아셰라드는 내가 앞날을 향해 걸어가며 떨어트린 것들을 주워와 준 것이다. 아무리 내가 꼴마초여도 여기선 눈물이 나올 수밖에.
주사를 맞고 꾹 참고 있는데 엄마가 와서 많이 아팠지? 하고 물어보면 참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는 거랑 비슷하다. 솔직히 이건 불가항력이지.
하지만 남자는 살면서 딱 3번만 울어야 한다.
그 3가지란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했을 때다.
그래도 내 나라가 망할 일은 아마 없을 테니까, 나라가 망했을 때 흘릴 눈물을 지금 좀 흘려둬도 되지 않을까? 재테크 같은 느낌으로다가.
“……크흠. 만약 그렇다면요?”
눈물이 날 것 같은 눈을 깜빡이며 질문하는 나. 아셰라드를 향한 호감도가 눈 깜짝할 사이에 쭉쭉 올라갔다.
도르카나 호툴루실하고 아셰라드가 강에 빠졌다면 100% 아셰라드부터 구할 정도로는 씹호감이 된 것이었다.
아내들을 제외하면 이 정도 상승폭은 처음 만난 날 용돈을 5만원 주고 떠난 삼촌 이후 처음이다. 아셰라드 당신, 기네스 갱신이야.
─꿀꺽. 긴장한 아셰라드가 침을 삼켰다.
“백작님께선 누구나가 경시했던 언어적 사료를 바탕으로 히타이트의 존재를 추론해내셨습니다. 저희들은 백작님의 그 고명한 식견과 지혜를 빌리고 싶습니다.”
“어떤 부탁일까요?”
당신도 교수한테 논문 닌자당했읍니까? 그러면 얼마든지 부탁하시죠. 암살 의뢰라면 저, 노르드 ‘The 교수 슬레이어’ 울프헤딘이 물심양면으로 도와드리겟읍니다.
아셰라드는 내 목소리 톤에서 긍정적인 분위길 느낀 듯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라도 좋습니다. 저와 콜리도 경, 그리고 롤랑시스 박사와 함께──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히타이트의 역사를 복원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