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707화 (706/1,009)

“……제안, 생각보다 성공적이었어요.”

백작의 저택을 나선 아셰라드는 옷깃의 단추를 끌르며 말했다.

스스로 기억하기로 스토익한 그녀가 남이 보는 앞에서 옷 매무새를 흐트러트린 건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이 긴장감을 털어내려면 필요한 일이었다.

그녀가 노르드에게 제안했던 대가. 석사 은장과 학위논문의 명의 탈환.

개념을 따지자면 그 대가는 선금(先金)에 가깝다.

동맹 자체가 본론이자 대가이기에─아셰라드는 상호협력을 원하지, 한쪽이 다른 한쪽의 등에 업혀가길 바란 게 아니다─ ‘저희는 이런이런 일들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를 암시하는 권유였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동의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느냐면, 그건 글쎄올시다다.

지금보다 더 큰 대가를 치루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달인의 경지에 오르면 속세의 가치가 흐려지는 법이죠.”

그렇게 말한 키아라는 희희낙락 웃던 노르드를 떠올렸다.

오러는 육체의 마나 통로를 무기까지 뻗는 기술이다. 자기 몸을 무기와 일체화할 정도로 확고한 심상과 신념을 가진 사람이 삿된 가치에 휘둘리긴 쉽지 않다.

시원해진 목이 어색한 듯 옷깃을 매만지던 아셰라드가 말했다.

“백작님에겐 천익장 같은 명예가 더 중요하다?”

“단편적으로만 보면 그렇습니다만, 결론만 보고 답을 추리하는 건 섣부른 짓입니다. 원래부터 협력자를 구할 생각이셨을지도 몰라요?”

돈과 권력이라는 면을 보면 노르드가 지금 이상으로 큰 걸 얻기는 쉽지 않다. 그야말로 자기만의 나라라도 세우지 않는 한은 말이다.

하지만 모험가 길드의 대표로서 여러 인간상을 봤던 키아라가 여기기에, 노르드는 그런 쪽에 탐욕적인 인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의 위치에 만족하고 있다면 모를까.

사실 그에게 신분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가 아틀란티스를 타고─아니면 맨몸으로라도─ 타국에 몸을 의탁한다면 그 나라의 왕이 달려와서 내 딸과 결혼하면 어떻냐고 권해도 놀랍지 않다.

머리를 쓰던 아세라드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건 상관없습니다. 저희에게 중요한 건 목적과 이익, 두 가지의 측면에서 백작님과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게 가능해졌다는 점이죠.”

─울프헤딘 백작이 죽은 스승의 논문을 훔치려 한다!

그런 비방을 피하고 싶었기에 굳이 아셰라드를 거치려는 것 아닌가.

잡음이 나도 상관이 없었다면 백작은 진즉 자기 힘으로 논문을 탈환했을 것이다.

아무도 찍 소리 못하도록 정정당당하게 논문을 되찾는다.

이제부터 세울 연구단체, ‘히타이트 구교국(鉤校局)’은 그걸 위한 단체였다.

“학회장께서 입지를 공고히 하셔야 논문을 돌려드릴 때 편해지니까요~.”

펄쩍 뛰면서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키아라는 말 한 번 잘 했다는 듯 웃었다. 키가 작은 청년의 생김새가 무색하게 젊은이를 보는 노인 같았다.

“아, 이제부터는 국장님이라고 불러야 되네요?”

“학회장이건 국장이건 상관없겠죠. 무거운 책무지만 짊어지는 수밖에.”

“마스터 클래스의 암살자라. 두근두근하네요.”

깔깔대며 웃는 키아라. 〈편찬대대〉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노르드는 그들에게 ‘막대하게 위험한 적’의 존재만은 밝혀두었던 것이다.

그들 수세로 돌아선 상태로 싸울 수 있는 적이 아니란 것도 말이다.

“……더는 중립으로는 못 있으실 텐데요.”

어제부터 시종일관 낯빛이 안 좋던 롤랑시스가 말했다.

이번 협력이 아무리 정당한 윈윈이래도 학회의 규칙을 따른 건 아니다.

명백히 아셰라드 개인의 사적인 판단 가치.

노르드와 손을 잡고 얻는 이익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면, 아셰라드 신시아가 보유하던 ‘고고학계의 중재자’라는 중립의 기치는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더는 아틀란티스 회담 같은 자리에 자문 역할로 불려오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개의치 않습니다. 박쥐는 태양 아래에서 날기 힘든 처지니까요.”

아셰라드는 오르막길 위의 저택을 돌아봤다.

‘어차피 이대로여선 명찰 뿐인 학회장 자리다.’

노르드의 석사 은장 승급 때나 회담 때만 해도 사사건건 아셰라드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려던 학자들이 몇 명이나 되던가.

판데믹 사건이 있지 않았다면 그에게 은장을 내 주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회담에서도 나라에서 뒷돈을 받아먹은 학자들이 설쳐댔을 것이고.

명목 뿐인 학회장 자리.

일이 삐끗했을 때 책임을 뒤집어씌울 허수아비.

하지만 그 허수아비도 손에 쥔 칼만은 진짜다.

‘나한테 칼을 쥐어주고도 계속 얌전히 있을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학회에선 그녀가 권력을 휘두드려 해도 그러기 전에 막을 자신이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만 히타이트와 노르드의 등장으로 상황은 바뀌었다.

“새로운 고대문명 국가의 등장으로 학계와 세상이 흔들릴 겁니다. 혼란과 난세가 일어나면 기존의 권위는 때때로 무의미해지죠.”

고착화된 학파를 부수고 그 위에 새로운 깃발을 꽂을 기회.

이제 남에게 지혜를 빌려주는 박쥐로 살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찾아헤매는 꽃은 태양 아래에서만 피는 모양이었으니까.

노르드는 학자로서의 능력을 증명하고, 아셰라드는 권위를 강고히 한다.

“그 뒤에 학회장의 권한으로 논문의 저자에 이의제기를 하겠습니다”

그라시에 교수가 실종됐기에, 노르드의 논문은 천익장 후보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올해의 천익장 수여식은 아직 멀었다.

학위논문을 돌려받고서 히타이트를 찾아냈다는 업적을 어필하도록 하자.

히타이트 탐사에서 노르드와 아셰라드가 성과를 보이면, 노르드가 금년의 천익장을 수상한대도 그 어떤 학자가 불만을 공론화하겠는가.

“그러려면 일단 남들보다 앞서나가야 하는데요.”

롤랑리스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히타이트의 위치나 유적을 밝혀낼 방법이라는 거, 저도 들어볼 수 있나요?”

“권하진 않는데요. 이야기를 들은 시점에서 못 빠지게 될 겁니다.”

“제가 로마니아에 일러바칠까봐서요? 여러분을 배신해도 토사구팽당할 게 자명한데요. 혹시 제가 스파이 짓을 할 만큼 대단한 놈으로 보이시는 건 아니죠?”

아셰라드와 키아라는 눈빛을 교환했다.

행선지 정도는 알려줘도 될 것이다. 위치만 알아가도 방도가 없는 곳이니까.

행선지의 경험자인 키아라가 대표로 말했다.

“아즈테카에 갈 겁니다.”

“아아, 아즈테카에…… 예?”

롤랑시스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아즈테카? 그 미친 식인종들이 살인 정글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몬스터들을 신으로 섬긴다는 미개한 악마의 땅?

“자, 어서 가죠. 곧 있으면 회담 시간입니다.”

“가능하다면 아틀란티스가 ‘공식적으로는 어느 국가의 영토도 아닌 신대륙’까지는 갈 수 있도록 조약의 빈틈을 만들어봅시다.”

“어렵지는 않겠네요. ‘공식적으로’, ‘나라로 인정받지 않은’ 같은 조항 회피의 상투구는 만들기도 편해요. 이걸 못하면 저희끼리만 가야 하잖아요?”

“저는 양심이 찔려서 울프헤딘 경더러 아즈테카까지 같이 가 달라곤 못 합니다. 식인 곤충도 몬스터도 보급 걱정도 없는, 움직이는 섬이라도 있다면 또 모릅니다만.”

유적 발토도 안전 제일로 강대국 로마니아에서 가까운 지역만 탐구하던 학자가 넋을 놓던 말던, 두 사람은 회담이 예정된 아틀란티스 방향을 향해갔다.

“자, 잠깐만 기다리십쇼! 아이에에?! 아즈테카?! 아즈테카 왜?!”

“싫으면 남으시겠습니까? 아, 곁에 안 계실 땐 안전은 책임 못 지지만요.”

“갸아아아아악──!!!”

고고학계의 암살자냐, 아즈테카의 식인종이냐.

도망칠 곳도 없이 극한의 이지선다를 선물받은 롤랑시스는 애통하게 절규했다.

***

“로마니아 사절단이 돌아가고 싶다는데?”

아셰라드와 친구들이 떠나고 나서 찾아온 엘리자베트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도대체 언제 아침을 먹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제정신인 판단으로는 안 보이네요.”

“그러게나 말이야.”

외교관이 조약 체결 현장을 떠난다? 그게 어디 정상적인 사고방식인가.

내가 밤 일을 원하는 아내님들을 쫓아내는 수준으로 어불성설이다.

“찔리는 게 있다는 거겠지.”

자기 아내를 철통경비 중인 길다트가 말했다.

그렇겠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아틀란티스에 제약을 거는 일보다 내가 안면몰수하고 자기들을 습격, 납치해서 심문하지 못하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뜻 아니겠는가?

“……잡아볼래? 돌아가는 길에 실종되면 로마니아가 따져도 바다에서 폭풍이나 몬스터를 만난 거 아니냐고 둘러댈 수 있어.”

“관둡시다. 저쪽도 눈 뜨고 당해주진 않을 테니.”

배를 타고 가면 100% 증인이 생길 것이었다.

〈공간이동〉을 쓰면 시도해 볼 만은 하겠지만, 적의 전력도 모르고 꼴박했다가 좆될 뻔한 경험은 아틀란티스 어인 파티 때의 악몽으로 충분하다.

‘텔레포트 빤스런이 우리만 가능한 것도 아니고.’

상대는 세계 유수의 강대국 아닌가.

〈공간이동〉이 가능한 유물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무시 못 한다.

놓치면 국제문제. 회담에서 거둔 승리가 싸그리 무의미해질 정도의 패착이다.

“알겠어. 그럼 얼른 꺼지라고 하고, 로마니아가 쌍욕이 나올 정도로 걔네들을 배제한 조약으로 짜 두지 뭐. 으흐흐, 나중에 후회나 하라지. 다 끝나고 불평해도 소용없는데!”

“사절단의 대표가 뎅겅 날아가지 않게 명복이나 빌어주죠.”

“난 몰라! 자기가 보낸 사절이니 황제가 알아서 빌어주던가 말던가 하겠지!”

그렇게 엘리자베트는 지각하지 않도록 회담하러 떠났다.

‘흠. 그럼 이제 드디어 자유로운 시간인가.’

아침부터 손님이 와서 훈련을 걸렀으니까, 잠깐 네페르티티나 찾아보자.

아직 단련을 안 했다면 잠깐 한 판 뜨자고 해도 될 것이었다. 마나통을 살짝 다쳤으니까 과격하게 싸우지는 못하겠지만, 훈련으로는 딱 좋다.

훈련하고 샤워하고…… 안전 점검을 한 다음엔

‘오래간만에 내 쪽에서 아내들이랑 섹스하자고 해야징!’

한가한 아내들을 권해서 아침부터 4, 5P를 하며 보내는 해피해피한 라이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피임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니까 그야말로 책임 없는 쾌락 섹스다.

뭐 시발. 어차피 이세계엔 놀 것도 별로 없다고.

‘아니면 탈의 포커나 젠가해서 옷 벗기 시합도 괜찮겠는데.’

왕 게임 같은 것도 재밌을 것 같지 않은가? 나 혼자만 남자라는 점에서 휴스로이트 일부 지방에 극한의 개꿀잼 각이 예상되는 바 있다.

─웅웅!

그렇게 내가 룰루랄라 복도로 나섰을 때, 팔찌 모드 브류나크가 몸을 떨어댔다. 가깝게 느껴지는 이 기척, 네페르티티였다.

나는 복도 끝에서 하늘색 머리를 발견하고 얼른 달려가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네요!”

“……안녕.”

오늘도 멍한 무표정으로 대답하는 네페르티티.

─웅웅웅!!

“응. 브류나크도 안녕.”

팔찌의 진동에 대답할 때는 또 희미하게 웃는 게 은근 아름다웠다. 미녀의 다소곳한 미소는 남심을 자극하는 법이지.

그녀는 내 손을 잡으며 팔찌를 쓰다듬어주고서 말했다.

“안 그래도 찾고 있었어.”

“넹? 얘를요?”

“브류나크 말고, 너를.”

미동도 없는 눈동자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듯 보이는 건 착각인가.

“크흠, 정말요? 마침 저도 그랬는데요.”

“……정말?”

“네, 정말로요.”

“……그래.”

네페르티티는 그런 데 관심 없다는 것처럼 눈을 돌렸다. 표정은 꿈쩍도 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발끝을 세운 샌들은 바닥을 베베 꼬아대기 바빴다.

그 뭐시냐, 말 몇 마디 갖고 그렇게 좋아하시믄 제가 많이 양심이 아프거든요?

‘대체 왜 순진한 시골 처녀를 꾀어내는 기분이 드는 것이지.’

무안함을 떨치려는 마음으로 헛기침 한 번.

그렇게 ‘바쁘지 않으면 훈련이나 같이 할래요?’ 하고 물으려고 했을 때였다. 내가 그녀가 가슴에 품고 있는 조각상을 발견한 것은.

커다란 보석을 물고 있는 도마뱀의 조각상.

그녀의 오빠가 남긴 유품이었다.

─총총.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다.

뺨에 분칠을 해 본 적도 없을 듯한 네페르티티로부터 향유 냄새 같은 게 났다.

드물게도── 아니.

아마 나랑 만나고서 처음으로 말이다.

“노르드.”

그녀는 수줍은 향기를 풍기며 속삭였다.

“잠깐, 따라와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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