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호적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난 아내님들이 있는 거실로 들어갔다.
“………볼 것도 많은데 우리 집에 데려오는 건 어떨까 싶긴 했는데…”
좁은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서 두리번거리는 저 모습을 보면 관심은 가는 모양.
생각을 해 보면 화려한 관광만큼 평범한 일상도 흥미를 자극하는 부분은 있을까. 물 한 컵 따라마시는 과정부터 다른 세상인데 신기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편하게 있어. 진짜 우리 부모님 집도 아니니까 어질러도 상관없고.”
가정집에서 난장판을 피워도 되는 경험은 얻기 힘들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테스트 서버지.’
여기선 문고리를 힘으로 잡아뜯어도 비명을 지를 사람도 없을 것이고.
나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깨달았다.
“……집을 좀 넓힐까? 의자도 없네.”
친가처럼 사람이 모이는 곳이 아니다 보니까, 이 집의 의자를 전부 끌어와도 우리 가족이 다 앉을 만큼은 못 되었다. 집도 약간 좁긴 하고.
“안 돼! 그럼 노르가 살던 곳이랑 달라지잖아!”
그러자 프랑은 터무니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그래?”
“그렇느니라. 집이란 크기 자체에도 설계사상이 들어가는 법이니.”
“언젠가는 정말로 오게 될 거 아냐. 그때 집이 좁게 느껴지는 건 싫다고. 우리 엄마아빠 집보단 넓은 모양이긴 한데.”
다른 아내들도 프랑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긴 뭐, 몇 달을 살아야 하는 곳도 아닌데 좀 좁아도 상관은 없을까.
“알았어. 뭐 관심 가는 거 있으면 만져봐도 돼.”
“으, 응!”
“여기가 주인님이 살던 집……”
베로니카는 던전의 보물방에 들어온 모험가처럼 신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뭔가를 집어든 라리루라가 나한테 질문했다.
“선배~ 이 세상에서도 독립하셨었어요~?”
“아니? 휴학하고 군대에 갔다 오면 독립하려곤 했지. 그런데 여긴 집값이 더럽게 비싸고, 2~30대 되서도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사람이 많아서 내가 나가고 싶어하지 않았으면 계속 여기 살았을 걸.”
“……노르드, 병사 출신?”
“제 고향의 군인은 병사라기엔 좀 애매한데요.”
유사 상비군 겸 노역자를 병사라고 쳐 주려나. 당장 간부급만 되도 전쟁이 터졌을 때를 가정하지 않고 돈 벌려고 임관한 사람이 꽤 될 텐데.
“흠흠. 그래요? 그렇다면…… 이게 선배의 부모님이시군요!”
─팟!
유리 액자를 내밀며 의기양양 웃는 라리루라. 그 매니큐어 발린 손에 우리 가족사진이 있었다. 이 녀석, 만져도 된다곤 했지만 진짜 거리낌이 없군.
어차피 진짜도 아니니까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이 녀석의 부모님?! 어디?!”
냉장고를 다른 방으로 가는 문이라고 생각하고 열었다가 당황하던 다나가 쏜살처럼 날아왔다. 이 누나는 오늘 하루 종일 한 박자 늦네.
“어머님이랑 아버님?! 나도 볼래!!”
“응. 흥미진진.”
“자, 잠깐만요! 돌려가면서 보면…… 꺄윽!”
그 뒤를 아내들이 뒤쫓아서 덤벼들었다. 라리루라는 인파에 깔려버렸다. 거의 무슨 미녀로 쌓은 탑 같은 꼴이다. 유부녀 피라미드인 것이다.
저 모습을 조각상으로 만들어서 영지에 세우면 나라가 마하의 속도로 발전하지 않을까? 아니지. 한창 부랄에 털 나기 시작한 사춘기 꼬맹이들이 저 아름다운 모습에 불끈불끈하지 않을 리가 없다.
영지민들의 사춘기 딸쟁이 아들들을 체페슈 공작처럼 꼬챙이에 꽂아버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참자. 피 빨아먹는 옐로 몽키라니, 그건 그냥 와패니즈 요괴잖아?
“와아, 어머님이 미인이시네. 아, 티르시 씨. 제 엉덩이 누르지 마세요.”
“죄, 죄송해요. 노르드가 지금보다 10살은 젊어 보이니…… 음, 학교에 막 입학했을 시기? 대학에 다니셨다고 했었죠?”
“언니들… 라리루라 숨 막혀요오…. 아, 그치만 꿈 속이니까 안 죽나…?”
“내 정수리에 빌어먹게 무거운 가슴 얹은 사람 누구~♡?”
개판이군, 개판이야. 내가 그녀들의 아웅다웅을 보면서 헛웃음을 짓고 있는데, 네페르티티가 몰래 움직였다. 암살자 같은 보법이었다.
특히 모험가 경력이 긴 그녀는─흑마법사 사냥 때문에라도 관련 활동을 했었으니까─ 우리 가족 사진에서 영감을 받은 듯 서랍을 뒤적였다.
“역시.”
그러고는 사진첩을 한 권 찾아내서는…… 뎃?
“초상화 수천 장으로 만든 개인 앨범……. 굉장해. 왕족도 못 누리는 호사.”
눈을 휘둥그레 뜨는─그녀 치고는 크게 뜬 거다─ 네페르티티.
사진이 없는 이세계에서는 왕족이라도 태어나서 자라기까지의 과정을 전부 그림으로 남기진 못할 것이었다. 사진기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촤악─. 네페르티티가 앨범을 펼쳤다.
모태에서 막 태어난 핏덩이의 사진이다. 다름도 아닌 베이비 강북호(나이 1일).
“……이거, 어릴 때의 너?”
“예? 아니, 맞긴 맞지만, 그 사진첩은 남 보여주기엔 좀 쪽팔리는데요.”
우리 가족 앨범이 저 선반에 있던가? 당황하고 있자 네페르티티는 자기 어깨에 앉은 브류나크랑 같이 앨범을 한 장 한 장 탐독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의 노르드, 귀여워.”
“깍깍 까악~.”
“않이 좀, 하지 말라며 하지 마십셔.”
의외로 욕망에 충실하네, 이 사차원 아가씨.
“꼬마 선배?! 그런 비인도적인 흉기가 존재한다구요?!”
그리고 그때, 네페르티티의 군소리를 들은 라리루라가 벌떡 일어났다.
“가정내 헌법에 근간하여 그 물건의 공동소유를 제안하는 바입니다!!”
“……찾아낸 사람이 주인. 모험가의 철칙.”
─휙! 앨범을 옆구리에 끼운 네페르티티는 언니들에게서 빠져나온 라리루라를 피해냈다. 같이 좀 나눠 봐, 이 여편네들아.
휙휙휙휙─!
체술을 발휘해서 피하는 네페르티티였지만 라리루라는 의외로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네페르티티의 눈이 조금 놀라움에 물들었다.
“광대 후배, 몸놀림 대단해. 조금 의외.”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지 마세요! 그리고 저도 꿈속에서라면 언니한테 꿀릴 것 없다구요! 마나만 쓰면 상상하는대로 움직이니까 신기하긴 하네요!”
머리맡에 두고 잠든 ᚦ(Thurisaz)의 룬의 효과. 타인의 꿈을 조작하는 힘.
그걸 응용해서 신체능력을 강화한 라리루라는 꽤 놀라운 접전을 펼쳤다.
신체 조율로 단련한 서커스 걸의 몸 재간이다.
“그래도 아직 미숙해.”
휘리릭─!
그렇지만 좁은 유적에서 전리품의 쟁탈전을 벌이는 데 이골이 난 미스릴 클래스 모험가의 상대는 아니었다. 네페르티티는 끝내 포위망으로부터 몸을 빼냈다.
“삐엑 삐삐. 까악~.”
브류나크가 네페르티티의 어깨를 부리로 콕콕콕 찔러댔다.
“……응. 지금은 후퇴해야 할 때.”
말이 통할 리도 없었는데, 그녀는 충분히 이해했다는 것처럼 동의했다.
그대로 등을 돌리고 문 밖으로 대쉬. 그야말로 달인의 전략적 후퇴였다. 티르시는 은밀하게 포획 각을 잡다가 경악하며 외쳤다.
“아아앗─! 네페르티티 씨가 도망쳐요! 프랑 씨, 골렘! 골렘!”
“이 녀석, 네페르티티! 약삭 빠르게 굴지 마라!”
“울프헤딘 가문에서 선배의 독과점은 종류를 불문하고 위헌이에요!”
“꼬마 노르? 어디? 꼬마 노르 어디? 꼬마 노르 어디? 꼬마노르어디? 꼬마노르어디꼬마노르어디꼬마노르어디꼬마노르어”
이런 시발. 셰이드 특유의 광기가 덜 빠졌나.
분명 아내님들의 베개맡에다가 정신을 지켜주는 룬 부적을 넣어뒀을 텐데, 거의 이성이 마비됐을 때랑 비슷한 행동거지를 보이는 그녀들.
“나는… 이 대화 자체를 못 따라가겠어….”
역시 인간의 꿈은 광기로 가득 차 있다.
잼민이 강북호의 사진에 정녕 저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은 필시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이리라……. 나도 아내들의 성장 과정에는 조금 관심이 동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르르르르─!!
아무튼 뭐시 그리 중허길래 우리 아내들은 도망치는 네페르티티를 쫓아서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사진접을 갖고 튀어라다. 무한도전이냐고.
존나 남들이 보면 분노 바이러스라도 뿌려진 줄 알겄어.
“……핸드폰은 나눠줬으니까, 이따가 전화하면 집에 돌아오든가 하겠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아내들 중에서 유일무이하게 침착함을 유지한 다나를 발견했다. 그녀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예전에 영화관에서 마셔봤던 콜라를 홀짝거렸다.
“역시 우리 누나야. 최고령의 품격을 보여주죠?”
나이 순으로는 어나더 클래스이신 모 펠라 핸들 여신님은 잠시 잊자.
다나는 날 보며 너무나도 청순하게 미소지었다.
“너 자꾸 깝쭉대면 나 앞으로 피임 안 한다? 30살 되기 전에 토끼 같은 자식 얼굴 보고 싶은 게 아니면 처신 잘 하라고.”
“미안합니다 내가.”
아무튼 그렇게 감탄하고 있는데, 콜라병을 내려놓은 다나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냈다. 보라색 눈동자가 현자의 지혜를 품고 크게 뜨여졌다.
“아저씨. 저 사진첩 1부 더 발행 되죠?”
“……그러고 보니까 복제하면 됐네.”
존나 발상의 전환이다. 쌉천재년.
어째 다나답지 않게 침착하게 있더니, 이 때만 기다렸던 것인가. 그 심계에 전율이 인다. 미희신 프레이야의 후계자다운 작전이었다.
“인구 수에 비해서 자원이 부족하면 부족한만큼 늘려버리면 되잖아? 사람 수만큼 자원을 늘릴 능력이 되는데 뭣하러 싸워, 힘 빠지게.”
“그만. 타노스가 듣고 울겠다.”
기억을 긁어모아서 사진첩을 늘렸다. 꿈속이면 리얼리티 스톤도 쌉가능이지.
─퐁! 내 손에 튀어나오는 사진첩. 나의 엘리트 두뇌로도 3페이지 이상 떠올리지 못하는 사진첩은, 신기하게도 원본 그대로 재현됐다.
“대체 무슨 원리인지, 원.”
진짜 신기하네. 내용을 보는 나도 ‘이런 사진이 있었나?’ 싶을 정도인데.
이게 그건가? 인간은 뇌를 10%밖에 쓰고 있지 못한다는 유사과학?
무의식에 잠들어 있는 기억이란 잠결에 잊은 줄 알았떤 흑역사가 불현듯 떠오르듯이 뇌나 영혼의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 받아. 다른 애들도 불러서 나눠주려니까.”
“아니, 기다려.”
나는 다나에게 복제본을 건네주고 전화로 아내님들이 돌아오도록 연락하려고 했는데, 페이지를 몇 장 넘기던 다나는 사진을 한 장 뽑아냈다.
10살 쯤 됐을까. 대충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강북호의 사진이었다. 피시방이나 문방구 게임기 코너를 행동반경으로 삼는 희소종이다.
다나는 게임기를 붙잡고 엄마가 주는 돈까스를 받아먹는 소년을 가리켰다.
“너 잠깐 이 모습으로 변신해 봐.”
“누나. 소아성애는 범죄야.”
역시 먹물 먹은 년은 발상도 남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