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담이 개시된지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그 중대차한 기간을 셰이드를 하고, 종일 꿈속에서 놀다가 깨어나서 밥 먹고 다시 섹스…… 가 아니라, 셰이드를 하는 식으로 보냈다.
물론 틈틈이 엘리자베트나 유이링과 대화하고, 영지 업무를 보며 보내긴 했다.
‘그래도 남들이 보면 거의 한량인데.’
내 영지에서 세상의 앞날을 좌우하려는 회담이 벌어지는데, 윗사람인 공주한테 업무를 던져놓고 왼종일 아내들이랑 섹스하고 뒹굴다 처자는 백작?
“그냥 한량도 아니고 니미 쓰레기 귀족이네?”
아, 존나 단두대 마렵다.
사실 탄핵이라는 말은 탄환+핵폭탄의 약축어가 아니었을까? 그 백작이란 새끼는 공주님이 망나니 입에서 지옥참마도를 뽑아내도 묵묵하게 목을 내밀어야 할 것 같은데?
엘리자베트가 몰래 뒤에서 살생부에 내 이름을 올려둔 건 아니겠지.
나는 끝을 모를 공포에 그만 벌벌 떨고 말았다.
─벌벌벌!
뷰루루루룻─!!
“꺗?! 야!! 쌀 때는 말을 하라니까!!”
“아니 씹, 미친 누나야 ‘으윽! 싼다!’ 같은 말을 쪽팔려서 어케 함.”
“‘테에엥. 눈나~ 정액 마려워~’ 같은 개소리는 하면서? 수치심의 기준이 다릅니다. 염병을 떨면 되는데 왜 매너를 차리냐는 식이죠.”
“언니. 눈에 정액 들어가면 실명하지 않아요?”
“누가 왜 짝눈깔이 됐냐고 물으면 남편 새끼가 눈알까지 임신시켰다고 하자.”
“치료를 해 미친 수녀년아.”
아무튼 공포에 떨었다. 절대로 다나루라 콤비의 따따블 펠라에 입싸하느라 떤 거 아님.
그렇게 내가 너무나도 행복한 울프헤딘 가문의 미래를 사전체험하고 있는 동안, 뭐 어떻게 굴러가는지 대충 귀동냥만 들었던 회담이 마무리됐다.
휴가가 끝난 느낌에 애석한 마음이 반이고, 이 영지의 방문객들이 꺼져주면 치안 유지가 쉬워질 거라는 안도감이 반이다.
사절단을 거하게 대접하고 ‘자 이제 꺼지렴’하고 쫓아내고 나자, 휴스로이트에는 개인적인 용무가 남은 사람들만이 잔류했다.
나는 그들 중 일부── 아셰라드 파티와 엘리자베트의 부름을 받고 영지의 해안으로 향했다.
쏴아아아─.
늦봄의 바다가 썰물처럼 몰아든다.
암무나 호의 수선에 좆빠지던 전대 영주 중 누군가가 ‘너희들 어업은 끝났어! 여긴 이제부터 관광업이 지배한다!’라며 좆빠는 소리를 했다가 방치된 바닷가.
그 로맨틱한─사람 손길을 안 타서 대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니까─ 해변에서 기품 있게 파라솔을 깔고 체스를 두는 미친 년놈들이 보였다.
님들 내 영지에서 뭐해요 시발.
“아, 오셨어요? 울프헤딘 백작.”
손을 흔들며 말하는 엘리자베트.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일까. 오늘은 공주님 모드였다.
“예. 공주님께서 부르셨다기에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왔나이다.”
에르제 모드일 때가 대화하기는 편하지만, 딱히 이 상태라고 말 못할 사이도 아니다. 호위로 남은 기사단+궁중 마법사들이 있길래 예의를 차리면서 말을 나누다가 착석.
“경께서는 반상놀이에도 소예가 있으신지요?”
─딱! 체스 말 비슷한 말을 놓으며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아뇨. 부끄럽게도 룰조차 제대로 모릅니다.”
“후후. 의외라고 하면 실례일까요?”
그런 엘리자베트의 상대를 하던 아셰라드의 말이었다.
내가 체스 마스터가 아니란 게 뭐가 신기한 것? 카이바는 체스를 졸업하고 듀얼을 익혔으니 나는 월반해서 듀얼리스트 테크부터 탔을 뿐인데.
내가 감히 저작권을 무시하고 듀얼리즘 전파에 힘 쓰면 이 아줌마들 대가리를 함정 떡칠 덱으로 깨부숴줄 수도 있겠지만, 여기선 내가 꼴마초답게 참아야지.
“머리 쓰는 게임이 싫으면 이쪽에 끼지.”
듀얼만능주의 콩키스타도르가 될 뻔했던 나에게 길다트가 말했다. ─착착! 그의 손에서 카드들이 셔플되면서 매끄러운 소리를 냈다.
“마침 둘이서 하는 게임에도 질리던 참이었다.”
“그거 감사하신 제안이십니다.”
나는 냉큼 패를 받고 판에 꼈다. 길다트랑 이세계식 카드 게임을 하던 키아라가 킥킥 웃었다.
이세계에서 몸을 쓰는 스포츠는 종류 불문 거의 사장된 문화다.
이유? 왜긴 왜야. 신체능력 차이가 크니까지.
우리 팀을 NBA 레전드 선수로 꾸려서 상대 팀원들이 당신들 전재산을 훔쳐갔다고 세뇌해서 팀워크까지 완벽하게 맞춰놔도, 건너편에서 농구 조끼 걸친 캡틴 아메리카랑 토르가 나오면 그냥 개같이 멸망이다.
그런 세태 때문에 이세계의 놀이는 99%가 보드 게임이었다.
머리나 운이 승부를 좌우하는 놀이.
주로 체스를 닮은 보드 게임이나 카드 게임이다.
실제로 이 조합에서도 고능아 마법사(+정령사) 팀과 저능아 전사 팀이 극명하게 갈린 모양새다. 머리 쓰는 걸 좋아하는 여편네들과 그렇지도 않은 남정네들이라고 말해도 좋다.
사실 나도 따지자면 후자에 가깝다. 대갈 텅텅 가챠 존나 개꿀잼.
뽑기는 좋은 문명이다. 내가 남들을 기만할 수 있는 동안에만.
“아니, 뭘 어떻게 하시면 첫판부터 패가 그렇게 나오죠? 울프헤딘 경, 저 몰래 카드 빼돌리셨죠?”
“마스터 클래스 도적 분을 밑장빼기로 속여요? 귀족이 아니라 타짜가 됐어야 했군요. 키타이의 도박장은 아쉬운 인재를 잃었어요.”
“내가 봤을 때 도박장에서 첫판 패가 이따위로 나왔으면 네 손목에 망치가 꽂혔을 거다.”
“제 손모가지를 따고 싶으면 묠니르 쯤은 갖고 오셔야 할 겁니다.”
쏘리 아임 스트롱.
나는 운빨로 판을 휩쓸었다. 이 새끼들 말대로 이게 진짜 도박이었으면 ‘최후의 타짜는 너 자신이 카드가 되는 것’이라며 버드나무 밑에 묻혔겠지. 장차 카드가 될 나무의 양분로서 자연의 순환에 일조하는 에코이즘 엔딩이다.
하지만 이 자리는 도박판이 아니다.
정치라는 더 굵직한 보드 게임의 복기(復棋)지.
“아틀란티스 조약의 내용은 무척이나 재미있게 잡혔답니다.”
파라솔이 박힌 테이블에서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탁자에 놓인 손은 기품이 넘쳤지만, 살짝 밀리는 상황인지 모래사장을 헤집는 다리는 분주했다.
─딱!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비서로 보이는 남자가 와서 조약 내용을 읊어줬다.
그런데 거 시발, 게임하는 사람 뒤에 서시지는 맙시다. 나 똥패 걸린 거 댁 주인님 남편 분한테 꼰지르면 뒤지는 수가 있어요.
조잘조잘, 재잘재잘.
“──이므로, 조약의 내용은 이상입니다.”
다행히 안경을 쓴 문관은 개씹 FM으로 설명만 하고 물러났다.
평민보다 쪼끔 나은 변방 귀족 가문의 삼남으로 태어나서 빡공으로 출세한 타입으로 보인다. 개씹편견이지만 대충 그런 느낌.
“흠.”
카드를 양손에 들고 이리저리 옮겨들던 나는 그 조항을 곱씹다가 픽 웃었다.
“확실히 재미있군요. ‘아틀란티스는 타국의 영해/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조항은 해석의 여지가 좀 많은데, 각국에서 이걸 넘어가 줬습니까?”
막말로 어느 나라가 내전이나 침략으로 좆망한 무정부 상태가 되면 ‘엄맛! 이 땅은 이제 특정한 나라의 영토가 아니네?’하고 아틀란티스 어택땅도 가능할 것이다.
─톡! 아셰라드가 엘리자베트의 말을 넘어트렸다.
“그래서 조항마다 각각 세부 부록까지 붙었죠. 가장 많은 부조항은 3-13까지도 있어요. 지나치게 세세한 조약이 되지 않도록 저희도 힘 썼지만요.”
“조항만 들어도 알겠더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부록 내용을 보기 나름이지만, 나름대로 엘리자베트가 그녀나 그녀 이후의 치세를 감안해서 짠 듯 보였다. 아셰라드랑 키아라는 그걸 도와줬고.
실제로 유희왕 마스터 룰과 수능 영어지문으로 단련한 내 비문학적 독해능력은 조항들의 헛점을 몇 개씩이나 후벼댈 수 있었다.
나라를 말아먹은 외국 왕이랑 마법소녀 계약을 맺고 대륙 해안지방 영토 일부를 할애받아서 ‘이제 여기도 우리 영토니 브리타니아행 고속 터미널을 세우겠사와요’라며 아틀란티스로 들이박기.
브리타니아를 가짜 내분으로 쪼개놓거나 한 번 망하고 새로 세운 나라라며 구라핑을 박고 ‘네오 브리타니아는 브리타니아랑 다른 나라에요! 아틀란티스 조약에서 자유롭죠!’라며 언플 박기.
그것 말고도 몇 개인가 씹쌉 사악하고 사기치기 좋은 안들이 즉각 떠오른다.
혹시 내 천직은 역사학자가 아니라 매드 문과티스트가 아니었을까?
“예에. 하지만 중요한 건 거기가 아니죠.”
신음을 흘리며 반상을 노려보던 엘리자베트는 웬 음료수로 목을 축였다.
인성파탄자나 짤 법한 사기극을 구상하던 나는 한 발 늦게 현실로 돌아왔다. 세상에 시발, 나처럼 착한 꼴마초가 어쩌다가 이런 생각을 했지?
이 자리에 충만한 권력의 악취가 내 뇌수를 오염시킨 게 분명해.
자지 냄새에 발정하는 에로망가 여캐처럼 타락 풀코스로 전속전진하기 전에 어서 아내님들한테로 돌아가야 하는레후.
“백작이 오기 전에 이 분들의 사정은 들었어요.”
엘리자베트가 잡졸 말을 손에서 굴렸다.
아셰라드 파티가 내게 말했던 걸 그대로 들었던 모양.
“회담에서도 무척이나 적극적으로 저희들을 도와주셨죠. 이렇게나 저와 제 신하를 위해서 노력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멀리로 퍼지지 못하고 중간에 뚝 끊겼다.
인위적인 마나의 흐름. 바람의 정령이 만들어낸 방음 부스였다.
“별 것 아닙니다. 신뢰의 대금은 언행으로밖에 지불할 수 없기 마련이므로.”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아셰라드. 엘리자베트도 사람 좋게 웃었다.
“협력관계가 될 듯 하니 거두절미하고 말하죠. 이 섬을 어떻게 운용해 드렸으면 하시길래 그리도 많은 노고를 들여주셨는지요?”
이번 조약의 결과물 중 가장 큰 것.
그건 아틀란티스가 자위(自衛)를 위해서 무장을 용납받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결과에 일조한 게 아셰라드 파티인 듯 했다.
‘전설적인 고대의 전쟁병기도 병사와 무기 없인 그냥 병원선일 뿐이지.’
국력은 방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침략에 있다~ 같은 미친 소리까지 하지는 않겠지만,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게 옳다.
아틀란티스가 ‘저는 평화주의자에오’라며 완전한 비무장에 들어간다?
강간범으로 가득찬 방을 알몸으로 걸어들어가는 창녀도 그보다 불안불안하진 않을 것이었다.
‘사실 아틀란티스 조약 자체는 명분으로 쓰이기 위한 밑밥이긴 한데.’
브리타니아는 존버 성장세에 들어가고, 타국은 후대에 이 섬이 폭주하는 날에 창칼이나 숟가락을 들이밀 명분으로 내세울 수 있는 수단.
저번에도 말했듯, 그게 아틀란티스 조약의 실제 의의였다.
일주일을 넘는 회담이었지만, 우리 모두가 언제 조약이 깨지거나 무시당해도 이상하진 않을 거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해도 좋았다.
‘위정자는 거짓말과 통수를 식후땡 때리듯 치는 직업이고, 또 그래야 하니까.’
이건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먼저 치지 않으면 처맞는 게 외교판. 한 나라의 수뇌는 진짜 인간말종 사이코패스 급의 양심없는 사람이 아니면 하기 힘들거든.
민주주의라면 조금 다를 수는 있어도, 전제군주정이면 100% 그렇다.
권력자는 통수를 때리고 맞는 데 하도 익숙해서 사고회로와 뇌가 GTA식 날강도 플레이에 절여진 호모 캬루데스들에게나 적합한 전직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귀족&왕족인 사업가들만 봐도 일목요연하지 않은가?
창문의 지배자. 블리자드의 참된 주인, 아크데몬 오브 실리콘밸리.
코인의 지배자. 화성인과 보그다노프의 첨병, 느그콜라 테슬라.
감성의 지배자. 무정자증 비건, 애플 스컬.
유명한 사업가들의 레전드 썰들은 그들이 왜 그 위치까지 올라갔는지를 증명하는 일화다. 인성을 하나 버릴 때마다 기업가들은 성공에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다.
성공한 이들 중에 인성파탄자가 많다기보단, 그 자본주의 앞에서 양심과 도덕을 우선하는 사람은 억척스러움과 기업원리에서부터 밀려나는 구조다.
개인적으론 그들의 인품에 대해서 논할 생각은 없다.
결국 힐난도 성공도 자기들이 책임지고 해결할 문제니까.
하지만 고작 기업체의 주인들도 양심을 후기형 아크 리액터처럼 탈부착 식으로 바꿔끼고 살아야 호모 캬루데스의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법이다.
나라의 지배자인 국왕이라고 다르겠는가? 국왕 혼자 왕실에다 좆 박고 끝내면 몰라도, 국정에서 똥볼을 차대면 국민들이 뒤진다구요.
머리에 꽃밭을 가꾸는 평화주의자는 국가 간의 정쟁을 감당할 수 없다.
착하디 착한 내가 일정치 이상의 권력을 탐하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으으, 음습한 것 봐. 이래서 정치판이 싫다니까.
“저희의 바람과 제안은 명료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셰라드는 뚝심이 쌉오지는 아줌마였다. 공주님을 상대로 주눅든 쭈구리가 되는 일 없이 원하는 바를 논설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 섬, 아틀란티스를 아즈테카 원정에 빌리고 싶습니다.”
“……흐음?”
엘리자베트의 낯빛에 여러 감정과 가설이 스친 듯한 느낌.
왜 그걸 알았느냐면, 내 낯짝도 아마 똑같았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즈테카? 아즈테카 왜?’
댁들의 지상과제는 히타이트 찾기 아니었어?
“아즈테카 원정이라……”
─톡, 톡, 톡. 테이블을 두들기던 엘리자베트가 말을 움직였다.
“……아틀란티스 무장은 양동이었군요?”
“예. 영토/영해 침범 금지조항에 뚫어둔 빈틈을 활용 가능하실 겁니다.”
아셰라드의 대답에 나는 들고 있던 패를 놓았다.
─아틀란티스는 ‘타국’의 영해/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서방국가들 기준에서 아즈테카는 나라가 아니다.
이 서방국가의 대빵 놈들이 부랄에 제국주의의 씨앗이 빵빵한 놈들이기는 한데, 의외로 이 논리는 인종차별이 아니다. 오히려 인권증진이지.
저 땅의 주민들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한 순간, 사람을 처먹고 몬스터를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를 문화라며 존중해야 할지 모르지 않은가.
“북서부로 타국의 영해를 우회하면 아틀란티스 조약에 저촉되는 일 없이, 아즈테카 인근까지 이 섬을 몰고 갈 수 있습니다.”
─툭. 기사 말이 보드 위의 칸을 널뛰었다.
아셰라드는 구상한 콤보를 날리는 카드 게이머를 방불케 하며 말을 쏟아냈다.
“전투를 도와주시길 바라는 게 아닙니다. 식인종들에게 노려질 거리까지 접근하실 필요도 없고요. 단지, 망망대해에 보급의 거점이 있고 없고는 큰 차이를 낳습니다.”
“그래서는 어제오늘 맺은 조항을 무시하는 행보가 되는걸요? 그게 브리타니아의 외교 평가에 큰 누가 되리라는 건 아시고 하는 말씀이신가요?”
“그 점에 대해서도 대비를 해 두었습니다.”
지성인은 킬각 없이는 대가리를 박지 않는다.
당연히 엘리자베트의 의구심과 반론을 불식하는 준비를 해 온 아셰라드는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도 되겠냐고 물어보려는 듯 했다.
왕족 앞에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걸랑.
하지만 호기심을 자극당한 내 입장에선 굉장히 슬프고 빡치게도, 아셰라드는 자기가 챙겨온 준비물을 어필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학회장님. 잠시만요.”
왕족과 상의하는 자리에서 다른 테이블에 말을 걸 만큼 예의를 모르지는 않을 키아라. 그가 패를 내려놓으면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파라락! 테이블에 앞면으로 놓여지는 카드들.
이세계 포커에서 1순위를 다투는 최고의 손패, ‘황금향’이었다.
길다트와 엘리자베트도 들고 있던 걸 내려놨다. 키아라가 저만한 패를 내려놓아야 할 만한 일이, 오직 그에게만 감지됐다는 의미였으니까.
“여러분, 공주님을 물려주시길.”
키아라는 길다트에게 눈짓하며 손가락을 꺾었다.
“이 도박판에 뉴 페이스가 끼려는가 봅니다.”
쏴아아아아….
맑은 파도가 치는 휴스로이트의 해안가.
거기에 파도에 쓸려온 시체처럼 사람들이 떠밀려오고 있었다.
─철퍽!
시체처럼 해안가를 기어오던 사람들이 두 발로 일어섰다.
도마뱀 비늘과 손톱, 피막의 날개와 뿔을 기른 생물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운 좋게 난파선에서 표류해 온 사람으로 봐줄 여지도 있을까.
“Krwarararara──!!”
하지만 그들은 동정이나 도움을 바라러 온 것이 아니라는 듯 이빨을 드러냈다.
그들은 상당히 지역색이 강한 게르미니아 어로 외쳤다.
【우리들, 스콜라키체의 혈족!! 도난당한 신룡의 보옥을 되찾으러 왔노라!!】
나는 얌전히 의자에 앉아서 고민하다가 말했다.
“……혹시 빨랫대에 널어둔 건어물이라도 훔치신 분?”
그 왜, 외국인 제주도 관광객들이 해녀들이 캔 전복을 쌔벼가곤 한다잖아.
진주를 품은 조개 같은 거라도 도난당한 거면, 저 바다를 맨몸으로 건너올 법도 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