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친 물건이요?”
우습게도, 내 상황파악 못하는 농담에 서방국가에서 방귀 좀 뀐다는 분들께서는 진심으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고고학계나 모험가의 얼굴 마담들께선 직업 상 도굴꾼과 교집합이 있으니 당연히 ‘나나 우리 애들한테 하는 말인가?’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좀도둑과 세상에서 제일 거리가 멀 왕족 부부께서는, 사실 품격의 차이가 있을 뿐 눈 훤히 뜨고 있는 적대귀족한테서 약탈해 본 적이 굉장히 많을 것이고 말이다.
“아휴.”
그런 모오옷된 짓에서 가장 연이 없는 나만이 그 자리에서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여튼 내가 사귄 친구들이라지만 증말 납쁜 사람들이라니까.
백작답게 기품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젓는 나.
우리가 그렇게 약간 덜떨어진 반응을 보였던 건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지금은 발퀴리에를 시작으로 아틀란티스의 전력을 움직이기 편한 상황이다. 충왕대군 판데믹 당시랑은 다르게 운용할 병사는 많았다. 왕궁 기사단이랑 키아라도 있고.
그리고 어떤 의미로 저것보다 큰 이유가, 저기 저 양반들이 이빨을 드러내는 것 치곤은 살기랄 걸 뿜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파도 소리에 숨었다지만, 키아라 말고는 눈치채지 못했어.’
그만큼 몸을 숨기는 능력이 개쩌는 상대인데도 들키자마자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보기에 저 으르렁거리는 태도는 산책하던 강아지가 다른 강아지를 향해 짖는 거랑 같았다. 본능적인 행동이라는 뜻이다.
‘……숨어서 우리를 관찰하려고 했는데, 딱 들켜버려서 당황한 거군.’
얕보이지 않으려는 생각이었을까.
하지만 그 자세는 외교의 자리가 익숙하지 않은 걸 암시했다. 이 서방 귀족주의자들의 룰대로라면 방금 행동은 무력시위라고 꼬투리 잡히기 좋거든.
게다가 서방국가는 물론, 동방에서도 찾기 힘든 저 개성만발한 생김새까지!
몬스터처럼 생긴 여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환영할 법한 랩틸리언 사촌들.
출신지를 좁힐 단서는 발에 채일 만큼 많았다.
【거기, 태양 빛깔의 여자.】
해안가에 헤엄쳐 온 랩틸리언 사촌들이 말했다.
‘태양 빛깔?’
아, 머리색 얘긴가. 엘리자베트는 금발이니까.
【네가 이들의 우두머리인가?】
“……서방국가의 언어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엘리자베트는 사투리보다 훨씬 알아먹기 힘든─제주도 말 수준이다─ 게르마니아 어에 곤혹스러워 했다. 내가 번역해줘야 하나 했을 때, 키아라가 끼어들었다.
“공주님께서 저희의 대표냐고 물으십니다.”
“콜리도 경, 손님들의 말씀을 알아들으시나요? 어느 나라의 말이죠?”
공교롭다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는 키아라.
“아즈테카입니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그러고보면 키아라도 아즈테카랑 연이 깊었지.’
아즈테커의 말을 할 줄 알 만도 했다. 길다트는 고개를 저었다.
“나 참……. 우연치고는 절묘하군 그래.”
“키타이에는 ‘호랑이도 부르면 온다’는 속담이 있으요.”
“좋은 말이군. 마침 엘리자베트 줄 호피가 필요했는데.”
착호갑사쉑.
내가 길다트랑 떠들고 있자 키아라는 랩틸리언 사촌들한테 언어의 차이를 알리고서 이 자리의 통역가 역할을 자처했다.
【……좋다. 왜곡 없이 전해라.】
랩틸리언 사촌들은 납득한 듯 했다.
이지적이어서 그렇다기보다는 키아라한테 쫄고, 나랑 길다트한테 쫄고, 멀리서 달려와서 포위진을 꾸리는 왕궁 기사단한테 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차할 때 도주 정도는 가능하겠는데?’
랩틸리언들도 생각보다 강한 편이긴 했다.
키아라라도 전원을 잡지는 못할 것이다. 마스터 클래스는 자신 이하의 적들과 싸울 때 압도적으로 유리한 거지, 도망치는 걸 전부 잡을 수 있다는 건 아니거든.
통역가를 얻은 엘리자베트는 정중하게 말했다.
“평안하신가요, 멀리서부터 찾아와주신 손님 분들. 이 땅의 주인인 제 신하를 대신하여 환영드리겠습니다만, 어째서 저를 대표로 여기셨는지요?”
【전사에게 머리털은 방해물이다.】
랩틸리언 사촌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해 보이는 여인이 말했다.
원주민 같은 진갈색 피부에 도마뱀의 손발. 그 팔은 시조새로 진화 중인지 피막의 날개가 붙어서 헤엄칠 때 물갈퀴 역할을 해줄 듯 했다.
【머리털을 기른 인간은 싸우지 않는 인간이다. 싸우지 않는 인간은 가장 고귀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너는 이들의 우두머리다.】
덤덤하게 자기네식 논리를 설파하는 랩틸리언.
저들 중에서는 그녀만이 유일하게 우리들을 상대로도 쫄지 않았다. 전사의 직감이 말하길, 미스릴 클래스는 찍고도 남는 여인이었다.
“흥미로운 의견이에요. 저희 문명권에 온전하게 적용하긴 어렵겠지만, 못해도 이 자리에서는 나름 효과적인 결론이셨구요.”
모험가의 탐구심이라도 자극받은 걸까.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엘리자베트였다.
머리 길이로 보자면 공주님 코스프레의 달인인 그녀보다 머리가 긴 사람은 없다. 같은 여성인 아셰라드도 어깨까지밖에 안 오는데, 우리 공주님은 허리보다 밑까지 오거든.
나? 나야 짧은 편이지.
꼴마초에게 긴 머리라니, 말도 안 되는 일…… 도 아닌가?
‘원시고대 마초인 삼손은 장발쟝이었으니까.’
아무튼 그 납득이 가는 듯한, 이상한 듯한 이론대로 랩틸리언 여인도 머리가 짧았다. 거의 단발 수준이다. 보브컷 리자드맨이다.
“좋습니다. 장물을 되찾으러 오셨다고 하셨죠? 괜찮으시다면 창칼을 맞대기 전에 어떤 사정인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차, 창칼을 맞대?! 처, 천박한 계집 같으니!! 우, 우린 오늘 초면이다!!】
뭔 개소리지. 쓰벌, 내가 잠깐 잠들었나?
설마. 아내님들이랑 셰이드의 꿈에서 노느라고 너무 자서 머리가 띵할 정도인데. 뜬금없는 말에 중계해주던 키아라도 벙쪘다.
“……저 분이 뭐라고 하셨길래 그러시죠?”
말을 못 알아먹어도 표정과 물러나는 몸짓, 확 달아오른 홍조으로 대충 알아들은 걸까. 엘리자베트가 묻자 키아라는 얼떨떨하게 말했다.
“제가 번역을 잘못했나 봅니다. 아즈테카는 큰 대제국 외에도 소규모 왕국이 여럿 있으니, 단어 차이나 은유 같은 문제가 아닐까요.”
웅성거리는 랩틸리언. 나는 잠깐 고민했다.
만언신의 파파고 번역이 있끼에 별로 의식하지 않아도 뜻이 읽혔다.
보다시피 랩틸리언들은 저 도마뱀 같은 손이나 발이 주 무기다.
그렇기에 저들에게 창칼이란 다리를 은유한다. 저 손발 좀 봐라. 앵간한 금속 무기는 엿가락처럼 휘고, 비늘에 박히지도 않을 것 같다.
그 연장선에서, 번역 치트가 ‘창칼을 맞대다’는 표현의 뉘앙스를 해석했다.
‘……창칼을 맞댄다라는 말을 다리를 비빈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나 본데?’
하물며 단순한 성희롱도 아니고, 공교롭게 양쪽 대표 모두가 여성이었다.
말하자면 가위치기. 으아악! 미친 로열-보빔마다!
우리 공주님께서 첫 만남부터 ‘레즈섹스 한 판 뜨싈?’이라고 제안하는 미친년이 돼 부렀어야. 이 사실이 밝혀지면 번역을 잘못한 키아라가 알아서 곤장 좀 맞고도 남겠는데.
“크흠.”
나는 불편한 진실에 혼자 헛기침을 했다.
여기서 아즈테카 언어 실력을 까는 게 좋을까?
하지만 아즈테카는 전세계적으로 미지의 땅이나 다름없는 야만의 땅이다. 그쪽 나라의 말을 할 줄 안다는 게 나한테 이점이 될까?
‘경우에 따르겠지만, 아닐 것 같긴 해.’
난 키아라처럼 아즈테카를 탐험한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길다트. 창칼을 맞댄다는 표현이 뭐가 문제였을까요?”
“싸움 자체를 천박하게 여기는 이들로는 보이지 않는군. 창칼이라는 단어를 다른 뜻으로 쓰는 듯 싶다. 병사들은 입에 걸레를 물기 쉽고, 무기에다 음란한 별명을 붙이길 좋아하니.”
“문화 차이겠네요. 이문화 교류는 어려워요.”
다행히 비교적 고능아이며 마음이 넓은 부부는 흔쾌하게 오해를 정정했다.
【오, 오해? 그, 그랬군. 나는 또 철썩같이 근사한 제안을 받은 줄로만…… 아,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얘기는 피차 잊도록 하지.】
기껏 잡은 가오가 무의미해진 랩틸리언 여인은 다시 표정을 사납게 했다.
개그 콘서트를 찍다가 말고 그런들 딱히 카리스마는 없었지만 말이다.
【다시 말하겠다. 우리들 스콜라키체의 보옥을 돌려다오.】
“그리 말씀하셔도 보옥이라는 물건에 짐작 가는 게 없습니다. 아아, 시치미를 뗄 생각은 아니므로 그 점만은 안심해 주셨으면 해요.”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랩틸리언들을 진정하게 시키는 엘리자베트.
그녀가 우리에게 눈짓을 줬다. 아는 거 있냐는 질문이다.
─도리도리.
우리는 턱을 모아 고개를 저었다. 몰루겟소요.
신룡의 보옥이 뭔데. 드래곤볼인가?
드래곤볼이면 못 주지. 양심몰수하고 챙겨서 내 적들이 나쁜 짓을 할 때마다 치루가 2배로 커지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어야 한다고.
〈편찬대대〉나 굴라나뢰크가 몇 마리 남았는진 몰라도, 그 놈들도 나쁜 짓을 못하게 되면 네페르티티의 원한도 조금이나마 갚아줄 수──
‘──아.’
신룡의 보옥.
아즈테카의 도마뱀 랩틸리언들이 찾는 보석.
‘……니미 시부랄. 뭔지 알겠네.’
이 소동의 전말을 깨달은 내가 벙쪄 있자, 그새 엘리자베트가 말했다.
“찾으시는 장물이 저희 손에 있다고 여기시는 듯 한데, 그것을 돌려드린다면 저희들과 대화를 나눌 의사가 있으신지요?”
【……신룡의 보옥만 되찾는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은 없다.】
“아주 좋습니다. 일단 어떤 물건인지부터 들을 수 있을까요?”
【입 아프게 떠들 것 없다. 우리들 스콜라키체, 언제나 진실로 증명한다.】
─킁킁킁킁. 그렇게 말하고 코를 울리는 그녀.
랩틸리언 사촌의 대빵치곤 경박한 움직임이다. 냄새를 맡는다고 뭔가 알 수가 있는 것인가? 그럼 위험한데. 나 다나랑 라리루라한테 입싸하고 나서 향수 안 뿌렸다고.
‘염병. 그보다 이런 소리나 할 때가 아닌데?’
범인으로 색출되기 전에 자수해야 하나?
근데 그 보옥이란 게 내가 생각하는 게 맞으면 내 독단으로 건네줄 물건이 아닌데. 우리 아내님한테는 목숨만큼 소중한 유품일지도 모른다고.
【……티오틸리스틀리의 냄새. 너로군.】
냄새를 맡던 랩틸리언 여인이 나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존나 들켜버렸죠? 원콤났죠?
역시 나는 범죄를 저지르고 살 인간이 못 된다. 구라까면 바로 들키잖아.
“……증거는 있습니까?”
“티오틸리스틀리의 냄새가 나신답니다. 아, 티오 어쩌구는 마나라는 뜻이에요.”
대놓고 범인이나 할 법한 반론이었고, 번역을 해주는 키아라도 ‘진짜에오?’하며 쳐다보고 있다. 거 나보다 저 랩틸리언들 코를 더 믿으시는 것 같네? 열받네?
근데 정답이 맞다. 나는 한숨을 쉬고 나서 아즈테카 말로 말했다.
【바로 대답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어떤 물건을 얘기하시는 건지 상상이 갑니다만…… 그 조각상을 돌려드리기 전에 잠시 대화가 필요할 듯 하군요.】
네페르티티가 오빠에게 받았던 도마뱀 조각상.
최근 들어서 나한테 마나의 흔적을 남기고, 또 도마뱀이니 보옥이니 하는 묘사에 어울릴 만한 장물이라면 그것밖에 없을 것이었다.
마침 아즈테카에서 이집트인들에 가져왔다고는 얘기였고.
랩틸리언 대빵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틀라탈리 어를 쓰나. 너, 도굴꾼이 맞군?】
【아즈테카의 언어는 간단한 교양으로 습득했을 뿐인데요. 가 본 적도 없어요.】
내가 네이티브처럼 대화하자 의심의 눈초리가 더 강해진다. 거 쓰벌 믿어 좀 주면 어디 덧나나. 키아라만 천연덕스럽게 감탄했다.
“틀라탈리 어까지 할 줄 아셨습니까? 못 하시는 언어가 없으시군요.”
“제가 살던 곳에는 파충류 인간들이 인간사회에 숨어 살면서 중책을 맡는다는 괴담이 있어서요. 그 파충류 인간들과 만났을 때를 대비해서 배웠죠.”
“하하. 사실이라면 정말 무서운 괴담이네요.”
그래, 그래. 얼굴 책이라는 걸 만든 양반이 랩틸리언 아닌가 하는 음모론도 있었지.
이건 전부 CIA에게 개인정보를 유출하려는 프리메이슨의 음모다. 난 무고하다고. 아메리칸 윰묘룐쨔들, 당신들이 옳았어.
“울프헤딘 백작님. 의심받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정확한 상황전달 감사합니다, 학회장님.”
보면 알아요 시발련아.
랩틸리언들은 어느덧 대영박물관에서 파르테논 신전 기둥을 발견한 그리스인 같은 표정이 됐다. 아니, 저기요. 제가 훔쳐간 거 아니거든요?
이 선량한 눈을 보라고. 노르드는 착한 울프헤딘이에요. 석사는 도굴꾼 짓 별로 안 했어. 엘릭서 몇 병이나 금화 쪼끔 쌔벼본 게 전부야.
“크흠.”
나는 테이블에서 트럼프 카드를 얼른 치우고서 술병을 꺼냈다. 그리고 실수로 코르크 따개를 떨어트린 척 테이블 밑으로 몸을 숙였다.
‘변신.’
빠르고 정확하게 룬 마법을 발동.
간단한 변화면 충분하다. 나는 5초만에 테이블 밑에서 대갈통을 꺼냈다.
흥미진진하게 그 꼴을 구경하던 엘리자베트는 어색하게 웃었다.
“……경. 못 본 사이에 머리가 꽤 길어졌군요?”
“아뇨, 안 그래요. 전 원래 머리가 길었습니다.”
그 뭐시냐, 긴 머리가 좋으시다고?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신체발모 수지부모라고 들어보셨나 몰라.
사실 삼손도 그렇고 유교 정신도 그렇고, 진짜 남자는 머리가 길어야 하는 거 아닐까? 머리카락 기른 남자는 게이 같다는 건 현대적인 프레임이야.
【이 거짓말쟁이.】
랩틸리언 대빵은 속아넘어가지 않았다.
니미럴. 파충류면 시각이 아니라 피트 기관에나 의지하라고. 쓸데없이 마나-피트 기관 같은 거나 달고 있지 말고.
【제가 나고 자란 땅에서는 서먹서먹한 관계를 타파하는데 술판보다 나은 게 없다고 했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고 힘드셨을 텐데, 영주 대리인 제가 손님 대접이 허술했군요.】
나는 안 들리는 척 헛기침을 하고 고오급스러운 유리잔에 증류주를 따랐다.
또로로록─. 영롱한 술이 채워진다.
내 고향 지구의 전통설화식 레퍼런스에 따르면 뱀은 술이랑 불이랑 헤라클레스에 약했지, 아마? 그러니 랩틸리언도 알딸딸하게 취하면 금방 친해질 것이었다.
─찰랑. 나는 사람 좋은 미소로 잔을 내밀었다.
【우선은 친목이나 다질 겸, 술이나 한 잔 하실까요?】
자자, 얼른 한 잔 쭉 들이켜. 한국은 술에 취해 벌이는 범죄는 많아도 도난사건은 적기로 유명한 나라라고. 도굴꾼이라니 명백한 누명이에오.
솔직히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 보자고.
내 어디가 나쁜 사람으로 보이시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