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733화 (732/1,009)

【같이 가자고?】

【네. 이 문제의 본질은 양보와 순서니까요.】

나는 무슨 개소리인가 하고 되묻는 이스테틸에게 설명했다.

타협이라는 과정은 보통 명쾌하기 힘들다.

어느 쪽도 많고 적게 양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양쪽 모두에게 불만이 남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 동년배의 K-잼민이들은 쌍쌍바 같은 반갈죽 초갈 아이스크림으로 선행학습하는 진리다.

【결국 여러분이 서둘러야 하는 안건은 끌려간 사람들의 구출이죠. 반면 다른 안건은 서두를 건 없는 문제입니다. 아니, 확실히 성공하려면 오히려 최대한 신중해야 하겠죠.】

그래도 이번만은 달랐다.

내 제안이 그럭저럭 명쾌했기 때문이다.

【납치된 스콜라코의 주민 분들. 일단 편의 상 볼모라고 부릅시다. 그 분들을 구조하고, 동시에 그 납치범 새끼들한테 내부 사정을 들으면 됩니다.】

【아즈테카 본국까지 쳐들어갈 생각인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설득하려고?】

그렇게까지 우리를 돕겠다는 제안을 저들에게도 납득시킬 수 있나?

대충 그런 눈으로 키아라나 다른 선발대 멤버를 보는 이스테틸.

나는 키아라의 용태를 살폈다. 그는 무표정하게─살벌하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눈을 껌뻑거리며 아무 감정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다─ 날 쳐다봤다.

그래서 나는 쓴웃음만 지었다.

【아뇨 뭐, 저도 그렇게까지 성인군자는 아니라서요. 하지만 마을의 참상이나 피난소를 보면 이 습격은 고작 1~2일 전의 일일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습격자들은 아직 귀환 중에 있을 것이었다.

앞서 말했듯 어스틀란 대륙은 뒤지게 넓으니까.

그리고 그렇다면야 뭐가 문제인가? 인육 쩝쩝충 새끼들이 아즈테카의 수도나, 뭐 그런 곳에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으면 되는데.

【중간에 따라잡으면 혹시나 하는 우려 때문에 저 미친 식인제국에 선빵을 갈길 필요도 없겠죠. 중간에 납치범들만 깔끔하게 지워버리면 돼요.】

이 작전은 스콜라키체들만 가지고는 힘든 일일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협력하면 가능하다.

승낙한다고 손해볼 제안도 아니다.

‘당연히 우리들한테도 메리트가 있고.’

이스테틸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틈에 얼른 딴 사람들에게도 내 생각을 들려주자, 파라오는 손을 옆구리에 두고 크게 수긍했다.

〈아주 좋은 의견이다. 심히 영웅적이고, 동시에 파라오답군. 즉, 감행하기 걸맞다!〉

〈동의한다고 알겠습니다. 학회장님은요?〉

〈훌륭한 타협안이라고 봅니다. 동시에 조금 전 싸움에서 잔당이랄 놈들이 도망쳤다면 십중팔구는 귀환 중이던 본대와 합류했을 테니까요.〉

〈그래. 본대 자체를 치는 건 괜찮은 생각이야.〉

알게 모르게 남편 바라기인 다나는 그녀답게 전 긍정. 그리고 네페르티티는 묻기도 전부터 고개를 위아래로 까딱거렸다.

─끄덕.

생각하던 걸 멈춘 키아라도 말없이 승낙.

복귀 중인 놈들을 갈아버리면 아즈테카가 옐로 몽키 두개골 선짓국을 맛보러 오지 않도록 미연에 차단이 가능하다. 우리 목적에도 합치한다~ 이 말이다.

‘이스테틸이나 다른 랩틸리언 사촌들이랑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장점이지.’

밀림… 적대적 현지인… 게릴라 전… 윽, 머리가.

지구의 역사를 좀 아는 사람이면 이런 환경에서 스콜라키체들을 적으로 돌리는 게 얼마나 개미친 짓인지 알고도 남을 것이다.

이 대륙에는 그밖에 도시국가도 많았다.

저들이 도주해서 우리를 원수로 대하면 밀림과 현지인들을 상대로 소모전 발발이다. 나는 자다가 독침 맞기는 싫다. 땅굴에 빠져서 꼬챙이가 되는 것도 싫고.

‘도주한 이스테틸이 아즈테카에게 우리 존재를 꼰질러 버리는 게 제일 최악이다.’

삼파전이 되면 가장 불리한 건 이스테틸 측이다.

그런데 어차피 좆된 거, 조금이라도 사태를 키우려고 하면 어쩌잔 말인가?

‘나라면 100% 그렇게 한다.’

차도살인지계는 못 참지.

쟤들 입장에선─내 제안만큼은 아니어도─ 손해볼 게 없는 선택이거든.

〈다만 우선 한 가지를 가정하고 움직여야 한다. 토나슈일루카틀은 아즈테카의 왕…… 지도자 같은 이들과 긴밀하고 잦은 연락을 벌이는 신인가? 그 옛날 신대의 신들처럼?〉

고능아 파라오는 거기까지 유추하고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파라오?〉

〈생각해 보거라, 아셰라드. 우신의 혈맥을 잇는 자는 죽은 후에 영혼을 탈취당한다 하였다. 비록 그들에겐 자의식이 없다지만 말이다.

〈……그랬죠. 품에 품은 영혼들이 늘어난다면 우신도 ‘자신의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차릴지도 모릅니다.〉

〈신답게 대범하게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쩔 거지?〉

아셰라드는 그가 하려는 말을 눈치채고 말했다.

〈토나슈일루카틀이 평소에도 숭배자들과 쉬이 대화하는 신이라면, 스코라코에서 병사들이 죽은 걸 전해들은 아즈테카 제국도 행동에 나서리라는 거군요?〉

〈왕이 병사의 죽음을 방관하지 않는 건 지당한 행위다. 어미라면 말할 것도 없고.〉

셰드멘호테프는 피난소의 천장을 가리켰다. 저 위에서 뒤진 식인종 새끼들을 가리킨 것이다.

〈심지어 저들 입장에서는 돌연사와도 같은 죽음이었다. 인명의 가치를 무시하는 이들이라도 어떤 연유인지 알아내고자 하겠지.〉

당연한 우려였다. 내가 그대로 전해주자 혼자서 고민하던 이스테틸이 답했다.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의례, 제례와 같은 과정 없이는 우신도 강림하지 않을 테니. 허나 일말의 불안요소가 있다는 건 부정하기 힘들군.】

【속전속결이 필요하군요.】

【그래. 고민에 탕진하는 이 시간조차 얼음보다 귀중하군.】

얼음이라. 아즈테카식 속담인가. 이런 밀림에선 금보다 귀한 물건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이스테틸은 간단하게 상의하고서 내 타협을 받아들였다.

【너희의 제안, 고맙게 수락하겠다. 우리가 달리 도울 게 있나?】

【개인적으로 염려되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

그밖에도 문제는 있다. 저 랩틸리언 사촌들의 마나-후각이 그것이다.

‘기습하다가 들키면 귀찮다.’

그런데 병사들까지 마나를 맡아대는 코를 갖고 있다면 큰 문제 아니겠는가?

우리는 바깥에서 온 사람들이다. 낯선 마나도 꽤 풍기고 있겠지.

서양인이 1달 안 씻은 겨드랑이만 빼고 두리안 비누로 뽀송뽀송하게 목욕한 다음 강아지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수준일 텐데. 못 알아차릴 리 없다.

【우려하는 점은 이해했다. 해결법도 있고.】

그러자 이스테틸은 금방 어떤 단지를 가져왔다.

【이 고약을 발라라. 마나의 유출을 막아준다.】

【마나가 새어나가지 않게 해 준다구요? 쓸모가 많겠군요.】

다행히 이런 문제와 그 해결법은 현지인인 스콜라키체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스테틸은 기절한 원로를 턱짓했다.

【원한다면 조제법도 알려주겠다. 원로가 그럴 여유가 된다면.】

개꿀이네. 일이 끝나면 적당히 받아가도록 하자.

우리는 고약을 몸에 바르며 정찰 멤버를 골랐다.

〈이 몸은 남지. 실패를 고려해서 골렘과 남은 원정대 멤버도 불러오마. 골렘들은 퇴각 시 후미를 맡겨도 좋은 병사들이니.〉

〈감사합니다.〉

전략게임에서 대충 드래그&드랍해도 되는 쫄병 같은 느낌이다. 믿음직스럽긴 하다. 나는 셰드멘호테프에게 뒷일을 맡기고 다나에게 말했다.

“다나, 미안하지만 너도 남아 줘.”

“뭐가 미안해? 어차피 다른 애들이랑도 합류할 거잖아. 여긴 치료할 사람도 많고.”

─힐끔. 부상자들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다나.

우리 눈나도 잽싼 이동에 걸맞지 않기에 대기다.

‘그보다 적성을 고려하면 이쪽이 맞지.’

골렘의 상위호환인 발퀴리에들은 전투가 벌어질 때는 엄청 도움이 되겠지만, 아즈테카와 전면전이 발생하는 케이스는 아예 고려하지 않는 게 낫다.

뭣하면 내가 메달로 불러내면 땡이고. 암행어사 출두다 이거야.

“울프헤딘 경과 네페르티티 씨, 이스테틸 씨와 스콜라키체 분들. 그리고 저.”

키아라는 손가락을 꼽으면서 설명했다.

“이렇게 3조 1팀이 정찰 및 유격, 볼모 구출을 맡게 된 급습별동대입니다. 목표의 우선 순위는 3단계로 제안하고자 합니다. 경청해 주세요.”

─까딱. 세운 손가락을 순서대로 접는 키아라.

“1: 소란을 피우지 않고 볼모를 구출해낸다. 2: 소란을 피우되 구출에 성공하고 침략자인 우리의 정체는 들키지 않는다. 3: 그밖의 모든 경우.”

“씁. 3은 사실상의 실패라고 생각해야겠네요.”

“토나슈일루카틀에게 잡힌 영혼들은?”

설명을 듣던 네페르티티의 질문. 키아라는 이스테틸에게 눈길을 주었다.

“1번의 습격으로 전부 해결할 건 없습니다. 이 구출작전은 후환 제거의 성향이 강합니다. 정체를 들켰는지 확인하고, 볼모로 협박당할 빌미를 제거하는 거죠.”

번역된 말을 들은 이스테틸과 스콜라키체들은 별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다.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협력이다. 우리들은 가족을 잃지 않기 위해. 너희는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놈들에게 쫓기지 않기 위해. 그 점만 확실하다면 반론은 없다.】

【아뇨. ‘너희’나 ‘우리’가 아닙니다. 저희 모두 ‘우리’입니다.】

단칼에 부정한 키아라가 고개를 숙였다.

바쁜 상황인 걸 감안한 몸짓이긴 했는데, 그걸 고려해도 꽤 정중한 사과였다.

【방금 전에는 실례했습니다. 저런 방법 외에도 요령 있게 만류할 방법이 있었을 겁니다. 무례한 표현을 사용하고 말았습니다만, 지금은 동료로서 신뢰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랬지. 미안하다, 말이 헛나왔어. 입장을 가르는 건 좋지 않겠지.】

【절 용서하시지는 않아도 됩니다. 단지 장소를 중재해 주신 울프헤딘 경의 체면을 좀 살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자칫 저희끼리 싸울 뻔 하던 걸 막아주셨으니까요.】

아아니, 거기서 날 물고 넘어진다고?

이스테틸은 약간 미안한 것처럼 나를 쳐다보고 헛기침을 했다.

【험악하게 굴었던 건 피차일반이다. 토나슈일루카틀에게 붙잡힌 영혼들을 해방하는 건 가족들을 구한 뒤에 우리끼리 알아서 하겠다. 그거면 되겠나?】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인사치례는 관둬라. 적대관계도 아니잖나.】

어색하게 어깨를 움츠리는 이스테틸.

이 별동대에 트롤이나 빌런이 없어서 다행이군. 나는 안심하면서 황량한 평원을 내다보았다. 보는 맛이 나는 지형이다. 유로트럭의 배경 그래픽으로 쓰면 딱이겠다.

“볼모들이 잡혀간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즈테카 제국령에 도착하기 전이라면 아직 따라잡을 수 있어요. 서두릅시다.”

내가 말하자 다들 눈빛을 날카롭게 했다.

간단한 협의를 마치고서 장비품을 조였다. 달릴 시간이다.

“이 이상의 작전은 울프헤딘 경이 새겨주신 룬 마법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이동 중에도 대화하게 되겠지만, 논쟁점은 중간중간 휴식을 취할 때 타협하면 될 것입니다.”

“작전이 실패했을 때는 어쩌실 겁니까?”

“예. 직전의 전투에서 이미 잔당을 놓쳤었거나, 구출 중에 발각당한 정체가 아즈테카의 수도까지 전파되었을 경우입니다. 이럴 때는 원정을 접고서 퇴각해야겠죠.”

납득하는 나. 확실하지도 않은 단서에 목숨을 걸 수야 없는 노릇이긴 하다.

히타이트의 단서를 좀 얻겠다고 살육을 부르는 우당탕탕 식인 대제국 전면전 같은 짱국 극장판을 찍는 건 매몰비용에 미쳐버린 허접 주식 투자자의 선택이다.

초창기 짱구처럼 청소년 관람 불가 딱지를 받을 생각은 없다.

“스콜라코를 노린 아즈테카 군이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끝내는 게 최선입니다. 언제 마주쳐도 싸울 수 있을 정도로만 이동 페이스를 조절하죠.”

…꽈과곽. 이스테틸은 말없이 손을 웅크렸다.

【그 개자식들의 동선은 예상이 간다. 족적을 되짚으면서 움직이자.】

경험자로서 말하건대, 복수는 언제 해도 달콤한 법이다.

빠르게 따냈을 때에는 사이다와 같은 청량함이 있고, 오랜 기다림 끝에 이뤄냈을 때는 버킷 리스트를 한 줄 긋는 듯한 달성감이 있었다.

─타탓!

무기를 챙긴 우리는 햇볕이 역겹게도 내려쬐는 평원으로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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