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맛이 치명타랑은 거리가 멀다.
적의 생존을 눈치 채자마자 나는 만사를 제치고 용가리 새끼가 쳐박힌 제단으로 대쉬했다. 이스테틸도 나를 쫓아서 달렸다.
용가리 새끼는 그로기 상태로 자신의 모가지를 붙들고 있었다. 저대로 비틀어버릴 태세다. 개미친 새끼! 또 자살하려고 난리야!
【규토리볼 씹년아!】
【큭!】
마나를 투척해서 형태를 바꾸고 구속시켰다. 힘 하나는 강한 새끼였지만 명치에 오러빵을 맞고도 야수회귀의 마나를 뜯어낼 힘을 낸다? 쌉에바지.
나는 달려가서 그 새끼의 턱에 싸커킥을 갈기며 브류나크를 뽑아냈다.
─퍽!
턱주가리가 돌아가자 힘이 빠지는 용가리 새끼. 간신히 안심한 나는 한쪽 눈을 감고서 천리안으로 제단 밑의 전황을 점검했다. 문제 없군.
스릉─. 이스테틸은 주워든 흑요석 단검의 날을 세웠다.
【자, 일어나라. 이제부터 바빠질 테니.】
【……내가 죽으면 곤란한 모양이지?】
공룡 대가리가 점점 랩틸리언 사촌과 진짜 랩틸리언 사이로 돌아오는 병신.
이 야매 마초 새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가오를 잡아대네, 꼴받게.
─우드득! 용가리 새끼의 팔다리를 분질러놓고 드러눕혔다. 혀를 막을 것까진 없겠지. 그랬다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었고, 혀 좀 깨문다고 뒤질 생명력도 아니다.
고통에 거품을 문 용가리가 낮게 킬킬거렸다.
【끄윽…! 크, 크크크. 정성을 들이는 것 치고는 솜씨가 영 별로인걸.】
【뒤지지만 않으면 그만이지.】
【두려운가? 내 혼이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존재를 알릴까 봐?】
【빡대가리 치고는 머리가 굴러가는가 보군.】
이스테틸이 나를 툭 쳤다. 텔레파시로 말해도 돼, 이 년아.
역시 이번에도 뻥카가 필요하겠지. 하지만 내가 앞잡이 새끼를 홀렸던 구라를 까려 했을 때, 제단 바닥에 누운 용가리가 대뜸 지껄여댔다.
【하지만 벌써 늦었다. 네놈들이 내 부하들을 다 살려둔 게 아니고서야, 어머니의 품에 안기기 전에 우리 왕의 왕홀을 거칠 테니까.】
【왕홀?】
【어머니의 품에 들어가기 전에 전사의 영혼이 거치는 도구다. 짧게나마 생전의 기억이며 정보를 전해주지. 너희 존재는 본국에 알려진 뒤일 거다.】
【……지랄났군. 이래서 중간관리직이 유능하면 안 된다니까.】
미치고 팔짝 뛰겠네. 내가 혀를 차자 이스테틸이 텔레파시를 보냈다.
─스콜라코를 나온 이후에 죽인 놈들은 상관이 없다. 보옥에 갇혔을 테니.
─문제는 처음 마주친 놈들이네요.
신룡의 보옥은 영혼이 붙잡힌 이들에게 아늑한 소멸을 주는 유물이다.
그래서 여기 갇힌 혼의 숫자 등을 세는 기능은 따로 부여되어 있지 않다. 영혼을 몇 명 가뒀는지 알 방법이 없으니 우리도 어림짐작하는 수밖에.
‘스콜라코 진입 당시에는 보옥의 기능도 몰랐고 발동하지도 않았어.’
그때 죽은 새끼들은 아즈테카로 돌아갔을 거다.
우리 존재도 알려졌으리라고 보는 게 옳겠지. 그 왕홀이라는 곳에 잠깐 들른 척후 병신들이 왱알왱알거리며 미주알 고주알 다 일러바쳤을 것이었다.
이 고생을 하고도 얻은 게 없다니. 진짜 빡치는 결말이다.
【하. 시발, 그래. 알려줘서 고맙다. 개새끼야.】
【천만의 말씀.】
무슨 자신감인지 웃음기를 지우지 않는 용가리 새끼.
이스테틸이 신경질적으로 걷어찼지만 그 새끼는 각혈하면서도 킥킥댔다.
역시 미친놈들은 상종할 인종이 못 돼. 아픔을 좋아하는 건 우리 아내님들 때문에라도 욕하기가 좀 그런데, 뒤질 때까지 카운트다운을 세는 상황에서도 낄낄대고 자빠졌네.
이 새끼한테도 보옥의 기능을 밝히고 엿을 먹여줄까?
신룡의 보옥에 갇혀서 소멸한다는 것만 알아도 꽤 멘탈이 나갈 텐데.
나는 그런 시시한 걸 고민하다가 말했다.
【……이스테틸 씨.】
【알고 있다. 남아달라고는 하지 않으마.】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대답하는 그녀.
아까는 얻은 게 없다고 투덜댔지만, 사실 얻은 게 없지는 않다. 아즈테카의 위협이 가시화됐다는 건 우리로선 불행 중 다행이었다.
우리들 아즈테카 원정대는 저 식인종 제국과 박 터지게 싸울 이유가 없었다.
이스테틸은 씁쓸함을 가능한 숨기려는 웃음을 지었다.
【네 아내와 동료들과 합류해서 지체 말고 떠나도록. 돌아가는 길은 같으니 그 동안 내 동생들을 호위해 주면 더 고맙겠고.】
우리는 아즈테카의 병사들이 진군해 오기 전에 퇴각해야 했다.
이스테틸이나 복수에 불타오르는 이들을 두고.
그게 가장 이성적인 선택이었으니까.
【도망친다고? 어디로 말이지?】
우리 대화를 들은 용가리 새끼가 꼽사리를 꼈다.
착잡한 쓴맛이 좆 같은 기분에 밀려났다. 암만 그래도 이런 말을 텔레파시로 퉁쳐버리긴 좀 그렇다는 마음에 육성으로 대화한 게 좋지 않았을까.
나처럼 감성적으로 굴던 이스테틸도 바로 눈을 부라렸다.
【네가 우리 사정을 고려할 때인가? 네가 죽을 때까지 차분하게 고문할 텐데, 어떻게 애걸하면 더 빨리 죽을 수 있을지나 고민하는 게 나을 거야.】
【그러는 너희야말로 큰 착각을 하고 있군. 이 세상 어디에도 너희가 도망칠 곳은 없다. 우리의 어머니께서 머지 않아 완전하게 태동하실 테니.】
【머저리의 광신이군. 어울려주지.】
비명 외에는 관심 없다는 듯 단검의 날카로움을 확인하는 이스테틸.
너는 짖어라, 나는 찢으마~ 하는 리액션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차피 심문하기도 어려운 용가리가 제 잘난 맛에 떠드는 걸 놓치기도 아깝단 마음에 질문했다.
【태동은 또 뭔데? 설명이나 해 봐. 혹시 누가 아냐? 네 화술에 낚여서 우리도 느그 마망을 같이 빨러 가고 싶어질지도 모르잖아.】
【……흐음.】
용가리 새끼는 내 질문을 혼자서 지 좆대로 해석하는 듯 눈을 굴렸다.
그래라. 그 병신 같은 대굴빡을 굴려서 뭐든지 지껄여 보렴. 영 병신 같은 소리만 내뱉으면 그냥 보옥 성능을 알려줘서 멘탈부터 부숴버리고 세상 하직시켜주게.
【무녀를 구하러 왔나? 그렇다면 운이 좋았군. 그 여자는 아직 살아 있다.】
【땡. 헛다리야.】
시큰둥한 대답이 절로 나왔다.
무슨 무녀인지는 몰라도 아마 피해자일 게 분명했지만, 그 불쌍한 아가씨의 목숨이 내 아내님들의 안전보다 소중하진 않았다.
‘나 혼자만이라면 어쨌든, 아내들도 다 따라왔단 말이지.’
이스테틸조차 못 도와주고 떠나게 될 듯 한데, 얼굴도 모르는 무녀 씨 때문에 아즈테카랑 한 판 대차게 뜰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자 용가리는 아깝다는 듯 눈썹을 들었다.
【아니었나? 네 피부색 때문에 착각했군.】
【비늘 난 갈색 피부 인종한테 피부색으로 지적 받으니까 괜시리 더 꼴받네. 어차피 니새끼도 나도 피부 벗기면 밑에는 거기서 거기──】
어차피 들킨 거 아래 전투에서 사망자가 나오지 않도록 텔레파시를 쏘려던 나는, 전조도 없이 내 대갈통을 스치는 스파크에 말을 그쳤다.
이 새끼, 지금 뭐라고 했지?
【……무녀랑 내 피부색이 무슨 상관이지?】
【올해의, 아니지. 마지막 무녀로 선출된 여자는 바깥 세상의 하프 드워프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되도록 아무렇지 않은 투로 묻고자 노력해야 했다.
【내 피부색을 걸고 넘어졌지. 그 하프 드워프, 바이츠니아 인이냐?】
【황녀라더군. 본인의 주장이긴 하다만.】
【……후.】
지랄도 이만큼 뇌절을 해대면 포기가 앞선다.
‘오딘. 이젠 나도 니 맘을 십분 이해할 수 있어.’
운명이란 건 정말 시발맞은 거군.
나는 손으로 눈을 덮었다. 두통이 절로 인다.
‘……유이링의 언니.’
하필이면 실종된 채였던 그녀가 이 아즈테카에 와 있다는 말인가?
시계열을 고려해 보면 이 새끼들이 어린 시절에 납치해 온 건 아닐 것이었다. 설마 이 식인종들이 황녀라서 가진 기술력도 없었을 아가씨를 수십 년 씩이나 애지중지 했을까.
‘……혹시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
엘리트 대갈통을 풀 회전한 나는 말을 꺼냈다.
【그 무녀, 내가 아는 여자일지도 모르겠는데.】
【하하! 별 우연도 다 있군. 작별인사라도 하러 가지 그러나?】
【더 지껄여 봐. 내가 여기 남아서, 니 친구들이 니 복수를 해 줄 수 있게.】
스스로도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용가리 놈의 얼굴 앞에 창을 박았다.
지 딴에 대가리를 굴려본 것일까. 직책이 높은 용가리는 밑밥을 뿌리는 어부처럼 나에게 자신이 아는 내용을 그대로 불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혈맥이 개화하기 가장 좋은 모태는 드워프다.】
【그 미신은 들어서 안다. 다음.】
【신화 속의 우리 형제, ‘으뜸의 아이’만큼 능력 있는 자손을 보는 게 어머니의 뜻이지. 우리는 그 뜻을 존중하고자 여러 실험을 실시했다.】
【그래서 드워프가 제일이라고 믿게 됐다, 이거 아냐. 다음.】
【으뜸의 아이는 하프 드워프가 아니었지만, 그 못지 않은 형제를 낳는 여자가 드워프다. 하지만 이 대륙에서 드워프는 구하기 힘들지.】
【씨발놈아. 니들 사고관에는 관심 없다니까?】
─카각! 제단에 박힌 창날이 용가리의 얼굴에 한 뼘 더 다가갔다.
【이야기를 질질 끌지 마. 그래서 납치했나?】
【……올해의 무녀는 바깥에서 데려온 하프 드워프다. 바다를 반 바퀴 건너서 가장 가까운 인간의 나라가 바이츠니아지. 거기서 데려온 계집이야.】
반 바퀴인가. 우리가 온 방향이 아니라, 역방향 쪽으로 도는 건가.
이세계도 지구처럼 동그란 행성이라면 이상하진 않았다.
【좋아. 그게 몇 년 전 일이지?】
【흐. 멍청한 질문이군. 무녀는 매년 바뀐다.】
올해라는 뜻인가. 나는 혀를 찼다.
납치되고도 어떻게 살아남았다가, 장성한 후에 바이츠니아에 숨어 살다가 식인종들에게 붙잡혀서 여기까지 끌려왔다는 말인가?
‘기구한 처지에도 정도가 있지.’
키아라가 말해주긴 했다. 아즈테카 놈들은 납치 대상으로서 고귀한 혈통이나 드워프를 가장 선호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연결될 거라곤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무녀란 건 토나슈일루카틀에게 공양하는 제물이다.】
주저하며 입을 연 이스테틸은 내게 설명해줬다.
【년초에 선발해서, 몇 개월 가량 ‘하늘을 덮는 태양’으로서 융숭하게 섬긴다지. 그런 끝에 신과 배알하는 데 제물로 사용된다.】
【조금 보충하자면, 바칠 때는 가죽도 벗겨둔다. 어머니께서는 껍데기를 싫어하시거든. 그 껍질은 신물로서 왕이나 귀족의 망토로── 끅!!】
─움푹!
이스테틸의 단검이 기어코 나불대던 병신의 등 한복판에 꽂혔다.
그녀는 몸에 튄 피를 아랑곳 않고 말했다.
【이 놈이 말한 무녀. 너와 아는 사이인가?】
【……아니길 바라고 싶군요.】
하다 못해서 아즈테카에게 들키지 않았으면, 몇 km 떨어진 곳에서 천리안으로 확인했을 텐데. 이 눈이 볼 수 있는 거리까지 갔다간 군대를 피하지 못하게 된다.
바이콘과 유니콘의 저주를 풀 때처럼 수백 km 밖을 내다보긴 아직 어려웠다.
【크, 하하하…. 도망치지 말기를 권하지. 이건 선의에서 하는 말이야…】
약해진 상태로 등에 제물 해체용 단검이 처박힌 용가리는 힘없이 뇌까렸다.
【세상 끝까지 도망쳐봤자 소용없다. 이 늦봄이 끝난 후, 어머니의 날개와 다리가 닿지 않는 곳은 없을 거다……】
자기 눈에만 그려지는 광경을 묘사하는 것처럼, 피를 흘리는 아즈테카의 군인이 중얼거렸다. 흘러넘친 피만큼 저 새끼의 생각도 흐르는 것만 같다.
【지면에 뜨는 달이, 무슈흐렐리틀이 죽어가고 있다…. 어머니가 놈을 먹고 권능을 찬탈하면 개지 않는 새벽도 곧 죽게 될 거다…. 어머니께서는… 완전무결하신 존재가…】
──아니, 그 광경은 정말 저 놈에게만 보이는 것인가?
‘……시발?’
나는 싸움이 끝나고서 꺼 두었던 오딘의 눈이 저절로 켜진 걸 눈치챘다.
순간적인 위화감이 뒤통수에 아이스픽을 꽂아진 것처럼 뇌수를 관통했다.
푸확…!
환각의 송곳이 각막을 뚫고 시야로 튀어나왔다.
풍경이 바뀐다. 문명과 문화를 인신공양의 식인종들에게 정복당한 도시국가의 제단이 사라지고, 짓뭉개진 폐허가 비춰졌다.
천리안을 발동했을 때랑 비슷한 감각이었지만, 훨씬 강렬하고 욱씬거리는 시야였다.
셰이드의 꿈 속에서 이상한 광경을 봤을 때 같은 백일몽일까.
하지만 백일몽이라기엔 섬칫하리만치 처참했다. 나는 사방을 살폈다.
브리타니아가 폐허가 되어 있다.
사르가디스가, 휴스로이트가, 나랑 아내들이 잘 아는 건물들이, 우리 집이 불타오른 끝에 진화된 것처럼 폐허가 돼 있었다.
사람들이 노력해서 불을 제압한 게 아니다.
이건 멸망 이후의 광경이었다.
인간의 생활권이 아니게 된 도시가, 그 폐허가 유적지처럼 방치된 공간! 한때 찾아갔었던 게르마니아의 망령도시를 빼다 박은, 멸망한 도시였다.
──그리고 그 서쪽 지평선을 거대한 그림자가 걷고 있었다.
두 발로 걸으며, 산맥보다 커다란 뱀이었다.
예전에 꿈에서 본 슬레이프니르보다 몇 배는 더 크다.
육식류의 공룡처럼 짧은 턱과 날개에서 발달한 팔. 은색 비늘과 바다뱀처럼 늘씬하게 뻗은 꼬리. 자칫 잘못 생각하면 아름답기까지 한 몬스터였다.
우신(愚神).
하지만 내가 이야기를 듣고, 상상하던 3마리의 신들 중 어느 놈과도 달랐다.
하늘을 덮는 태양, 토나슈일루카틀.
지면에 뜨는 달, 무슈흐렐리틀.
개지 않는 새벽, 오르틀라위퍼.
이 대륙의 인간들에게 그렇게 불리우는 3마리의 악신들.
하지만 날개는 하늘을 나는 태양 같았고, 목과 다리는 땅을 걷는 달 같았다. 낭창낭창한 꼬리는 누가 봐도 바다뱀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3마리의 신들이 하나가 됐다고밖에 볼 수 없는 모습!
어떤 인간이 저것을 몬스터라고 여길까.
인간의 모습을 갖추지도 않았고, 우리가 섬기고 친근하게 여긴 신들과 전혀 다르지만── 저것은 분명히 신이라고 숭배받기 충분한 모습이었다.
【울프헤딘? 왜 그러지?】
【……………….】
갑작스런 예지는 그 시작만큼 갑작스레 끝났다.
어느덧 제단의 풍경으로 돌아온 나는 주저앉은 채로 눈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쓰벌, 대체 뭔데?’
착각이라고 치부하지 못할 만큼 뚜렷한 풍경.
설마 예지몽이라도 된단 말인가? 잠을 잔 것도 아닌데?
“……아즈테카로 오다가도 이상한 꿈을 꾸기는 했지.”
나는 눈을 문지르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대체 뭐가 원인일까. 천리안이 각성해서?
영적인 능력과도 밀접한 신룡의 보옥을 기동해 봐서?
신에 준하는 존재가 버젓이 남아 있는 대륙으로 발을 디뎌서?
모르겠다. 계기는 많았고 전례까지 있던 데다가, 갑자기 보여진 예지는 불쾌할만치 뚜렷해서 절대 내 뇌에서 없어져 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오딘이 자기가 라그나로크를 막지 못한다는 걸 알고도 앞날을 대비하면서 온갖 안배를 남겨뒀던 이유가 진심으로 이해됐다.
‘……그야 이딴 걸 보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겠지.’
그렇지만 유이링의 언니나 예지처럼 너무 많은 정보의 탁류에 뇌를 휘저어진 이때, 내 머릿속에 가장 뿌리박힌 생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브리타니아를 멸망시키고, 서방국가 전체를 소멸시키려던 우신.
그 백일몽이 예지였는지, 예지라면 진실인지는 아무래도 좋다.
그런 것보다 훨씬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그 예지 속 우신에게서 느껴진 기척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으니까.
【야. 용가리.】
나는 기분 더러운 예감을 느끼며 질문했다.
【그 지면에 뜨는 달이라는 놈, 무슈흐렐리틀이 반병신이 된 건 언제지?】
【……이상한 걸 묻는군.】
등에 단검이 박히고도 살아있는 용가리 새끼는 입매를 당겼다.
【내가 알기로는, 약 1달 쯤 전이다.】
……애미 시발. 나는 입 속에서만 중얼거렸다.
지금으로부터 약 1달 전. 아틀란티스 회담.
충왕대군과 그 녀석이 쓰던 아즈테카의 기생충.
신의 육체를 찾는 굴라나뢰크.
뒤지게도 커다랗던 예지 속의 신의 모습.
단편적인 퍼즐이 모여서 불편한 결론을 이뤘다.
명백한 증거라고는 전혀 없긴 한데, 이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좆 같은 예감은 몹시 익숙했다. 이건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 종류의 직감이었다.
‘충왕대군이 자기 몸을 제물로 소환했던 괴물.’
나랑 박터지게 싸운 끝에 소멸했던 거대 몬스터.
가진 힘과 권능을 거의 잃고, 제물을 받았기에 어쩔 수 없이 건네받은 육체만을 가지고 마지못해 강림했다가, 결국 패퇴해서 존재의 일부를 잃었던 강대한 소환수.
그 놈이 ‘지면에 뜨는 달’의 반신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