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지 않는군. 왜지?】
처음에는 괴수대결전에 압도당했던 이스테틸도 끝나고 나서도 미동도 하지 않는 무슈흐렐리틀을 보고서는 간신히 입을 열렸던 모양이다.
에볼루션을 컴플리트한 무슈흐렐리틀은 거기서 웅크리며 움직일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잠자는 밀림의 미녀가 된 건 아니고, 아즈테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나는 혀를 내둘렀다.
【기다리는 걸까요? 밤이 올 때까지?】
【아뇨.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대답하는 키아라. 그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마른 장작이 젖은 장작보다 타기 쉬운 것처럼 밤에는 ‘밤’을 불러오기 쉽습니다. 자신이 불리한 시간대엔 토나슈일루카틀도 나오지 않겠죠. 자기 아이들이 몰살당하더라도요.】
【그러면 저 새끼는 왜 저러고 있답니까?】
사람들은 지금 싸움을 보고도 무슈흐렐리틀을 ‘저 새끼’라고 부르는 나를 어안이 벙벙하게 쳐다보았다. 신의 위용을 보고 인간이 이따위로 나불댈 줄은 몰랐다는 투다.
오직 네페르티티만이 눈치챈 것처럼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을 뿐이다.
【모르겠군요. 그래도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단 건 확실합니다.】
키아라는 대륙의 동쪽에 있을 아즈테카를 노려보았다.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아직 무슈흐렐리틀을 쓰러트릴 수 있을 겁니다. 밤과 새벽을 손에 넣었다고 해도 낮을 지배하진 못했으니까요.】
【그렇겠죠.】
당연히 낮이 되어도 새벽이나 밤을 불러내기는 할 텐데, 그 정도라면 아직 방법이 있다. 우연히도 나도 본 적이 있는 어느 기적이 말이다.
【본국으로 돌아가서 준비를 하든 여기에 남든, 어느 한쪽만큼은 반드시 해치워버려야 합니다. 자, 복귀합시다. 선발대와도 합류해야 해요.】
항의하는 사람도 없이 우리는 서둘러 떠나고자 했다. 시장이라던 여인이 달려올 때까지는 말이다.
【자, 잠시만요!】
시발, 바쁜데 또 뭐야? 표정이 안 좋아질 수밖에 없는 우리였다. 그러고 보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가 까였었지, 이 사람?
그녀는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어떻게 할 거냐뇨?】
【저도 제단 위에서 목이 날아간 남자에게 조금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희로서는 상상도 못할 격변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이스테틸도 눈을 돌렸다.
【도와달라는 말을 할 거라면 미리 거절하겠다. 우리 앞가림만도 바빠.】
【아니오. 함께 싸우게 해 주세요.】
날카롭게 뜨여졌던 이스테틸의 눈매가 좁아졌다.
【전사도 없다면서? 길러봤자 저 놈들에게 잡아먹힐 뿐이니 당연했겠지만.】
【조금 전에 어느 시민도 말했듯이, 전사가 아니어도 싸울 수는 있습니다. 여기 남아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만 있기는 싫습니다.】
【너희의 뭘 믿고?】
【오랜 세월은 악습을 전통으로 만들기에도, 그 악습을 타파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에도 충분한 계기입니다. 저희들도 그렇고요.】
시장은 옷 안쪽에 실로 꿰매둔 문양을 드러냈다.
【죽음도 불식하고 반역을 꿈꾸는 바보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어스틀란 대륙은 넓죠. 저 폭정에 맞서고 싶어하는 도시국가의 시장은 무척 많습니다.】
【……하. 그건 또 처음 알았군.】
【심히 죄송합니다만, 여러분들을 믿기 힘들어 하는 시장들이 있었거든요.】
【정말 빌어먹을 태생이로군. 누군 도마뱀으로 태어나고 싶었는 줄 아나?】
한탄하듯 웃은 이스테틸은 다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들을 가치도 없다.】
【……어째서죠?】
【전투의 레벨이 너무 달라.】
이스테틸은 근엄하게 말했다. 반론하지 말라는 듯 말이다.
【너희들도 저 위에 올라가서 우신들의 격돌을 봤다면 그딴 안일한 말은 입에 담지 못했을 거다. 적군 졸병들도 못 당해내는 너희는 쓸모가 없어.】
【어차피 하늘을 덮는 태양이 대륙을 평정하고, 아즈테카의 군인들이 돌아오면 죽은 목숨입니다! 전사가 되고자 단련한 사람들은 다른 도시국가에 숨어 있고요!】
【그게 쓸모가 없다는 거다.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자살에 어울려줄 시간은 없어. 동료랍시고 받아들인 놈들이 죽어나가면 사기가 떨어진다.】
【그건……】
억지를 부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걸까. 시장은 분한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들은 제국의 사정만이라도 전해드리죠. 조금 전 저희 시민들이 저지른 잘못도 있습니다. 부디 들어주세요.】
【짧게 말해. 보다시피 바쁘다.】
【아즈테카가 신의 화신으로 무녀는 제물로서는 최상급의 존재라고 합니다. 그 무녀를 제물로 바친다면 ‘어머니’는 반드시 모습을 드러낸다더군요.】
시장은 시키는대로 따박따박 설명했다.
오랜 시간을 ‘토나슈일루카틀’이라고 취급하면서 대접한 무녀.
그 무녀를 제물로 바치면, 그들의 신인 토나슈일루카틀은 호응하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 불려나오게 될 거라는 게 그녀의 말이었다.
‘충왕대군 때랑 같군.’
신은 제물을 받고 모른 척하는 게 불가능하다.
대답해줄 수밖에 없는 대가를 제물이라고 선불 결제해 버리면 싫어도 나와야 한다. 반신으로 끌려왔다가 완전히 소환되기 전에 역소환된 무슈흐렐리틀처럼.
【듣던 중 나쁜 소식이군요.】
키아라가 오만상을 썼다. 저 인간 치고는 몹시 거친 리액션이었다.
【그렇다면 무녀는 지금 바로 제단에 올려졌을 겁니다. 무슈흐렐리틀이 접근할 낌새를 보이거나, 아즈테카의 제왕이 마음을 먹으면 신들의 결전이 시작되겠죠.】
【신들의 전쟁의 부싯돌이 인간의 손에 쥐어져 있는 셈인가.】
혀를 차는 이스테틸.
그럴 수밖에. 우리가 봐도 막막한데 아즈테카 인들은 빼박 ‘아 시발 이건 엄마 불러야 되겠다’하고 오줌을 지려대고 있을 것이었다.
테에엥 엄마에몽~ 거리며 학부모 강제소환권을 제단에 세팅해두고 있겠지.
【……무녀부터 구출해야 할까요?】
내가 흘린 의견에 사람들이 입을 벌렸다.
【진심인가? 돌고 돌아서 우신들을 내버려두고 아즈테카를 노리자고?】
【토나슈일루카틀이 소환되면 좆망 엔딩이에요. 저 뱀대가리 새끼들의 승패는 알 바가 아닙니다. 싸우다가 둘 다 무승부로 뒤져주진 않을 거고요.】
이긴 쪽이 경험치와 권능을 처먹고 환신야수족 호르아크티가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토나슈일루카틀이 튀어나와서 싸움이 벌어지지 않도록, 엄마 소환 버튼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있을 아즈테카부터 좆쳐두는 게 옳았다.
“……말다툼 하고 있을 시간 없어.”
네페르티티는 말이 통하지 않은 게 갑갑하지도 않은 것처럼 나만 바라보았다.
“어떻게 되든 합류는 필수.”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스테틸 씨.”
그녀를 불렀다. 혀를 깨물지 않고 가장 빠르게 말할 수 있도록 텔레파시를 우다다다 쏟아내주자 이스테틸은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 했다.
【진심인가?】
【없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동의하시죠?】
【……네 말이 사실이라면야 그렇겠지.】
【믿으십쇼. 양동작전과 야바위는 제 주특기니 말입니다. 이보세요, 시장님?】
내가 호출하자 손톱을 깨물고 있던 그녀는 깜짝 놀랐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그 저항세력이란 분들, 저희랑 같이 가시죠.】
안전의 마지노선은 챙기겠지만, 나라고 저들을 사지로 밀어넣는 게 즐겁겠는가. 가슴이 갑갑한 걸 숨기면서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신이나 괴물은 전문가에게 맡기시고, 인간은 인간끼리 붙어봅시다.】
***
〈이 몸은 곧바로 공세에 나서야 한다고 본다.〉
시장더러 도시국가의 저항세력이라는 사람들을 부르게 시키고 스콜라코로 돌아오자, 상황을 대충 전파받은 셰드멘호테프는 팔짱을 꼈다.
생각이 깊어지는 듯 하던 아셰라드가 뜨악하게 되물었다.
〈제정신이십니까, 파라오?! 아니, 제정신이랑은 거리가 멀다는 건 알았지만, 그 정도셨습니까?!〉
〈음. 심대한 무례지만 용서하지. 그러나 본국에 돌아가서 병력을 충당하는 건 악수(惡手)니라. 그 사이에 그 하늘을 덮는 뭐시기가 소환당할 염려가 크다.〉
〈실패할 가능성 때문에 승산 없는 싸움에 나설 수는 없습니다!〉
〈승산? 있고 말고. 우리가 신과 싸우려는 것도 아니잖으냐.〉
슬쩍 웃는 셰드멘호테프.
사회적인 목숨값은 우리 중에서도 탑급일 텐데, 이 파라오는 자기 목숨을 배팅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것 같았다.
〈무녀라는 여자만 구해내면 된다. 생각해 봐라. 후퇴하나 진격하나 리스크는 거기서 거기다. 그럼 우리들의 노력 여하에 결과가 정해지는 게 낫지.〉
지금 전력으로 맞섰다가 실패하면 사망.
하지만 도망쳤다가 삐끗해도 호르아크티 강림+사망이다.
예전 파라오 왕조의 기록과 우리를 향한 신뢰.
그걸 이유로 실제로는 보지 못한 우신들의 똥파워를 곧이곧대로 믿어준 파라오는 나를 바라봤다. 뭔가 생각해 둔 게 있냐는 눈치였다.
〈……저희의 공세는 속임수를 섞어서 3단계로 설계해 봤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고민했던 작전을 간략하게 읊었다.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는 설명이 끝났다. 아틀란티스에도 연락을 보내놨다.
하지만 작전을 조졌을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아줄 사람들이 여기 있다.
그래서 아까운 시간을 쪼개가며 열심히 설명을 했는데, 노력한 값어치는 있었다. 내 설명을 듣던 다나는 머리를 헝클어트리면서 인상을 썼다.
〈작전이 성공했을 때는 문제 없겠네. 실패해서 우신들이 물고 뜯고 싸워도 네 설계대로 굴러가면 어떻게 싸움 정도는 성립할지도 몰라.〉
〈……예. 그렇지만.〉
핏기가 너무 줄어서 손까지 하얘진 아셰라드는 고산지대에 오른 것처럼 헐떡였다.
〈그렇지만, 우신을 함정에 빠트리고 왕좌에서 끌어내려도 정작 그들을 죽일 창이 없습니다. 저 싸움의 여파는 스콜라코에서도 느껴졌다구요?〉
우신들에게 데미지를 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무적 패턴을 벗겨내는 걸로는 모자라다. 딜컷이 후달리니까 피똥을 싸 가며 딜 타임을 만들어도 그 불안정한 시간에 적을 죽이는 게 가능할까?
작전 입안자로서 ‘이렇게 하면 됩니다’라고 대답해야만 하는, 당연한 질문!
하지만 나는 입을 닫고 고개를 양옆으로 털었다.
〈방법이 없으니까 서브 플랜이죠.〉
〈……맙소사. 환장하겠군요, 정말.〉
〈흐흐. 성공시킬 방법이 있으면 그쪽을 주체로 굴렸을 겁니다.〉
사뭇 자조적으로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나를 뭐라고 탓하지는 못했다.
이것저것 작은 수정점은 있었는데, 내 의견보다 더 나은 생각을 내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대체 플랜이 없는 지적은 꼬투리일 뿐이다.
그 정도도 모를 만큼 지식량이 후달리는 사람은 다행히 일행 중에 없었다.
10년은 늙은 것처럼 뺨을 쓸어내린 아셰라드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좋아요. 신이 사는 땅에 와서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어요. 꿈에도 못 꾼 일이지만, 해 보죠. 성공하기만 하면 되잖아요?〉
〈암! 좋은 마음가짐이다, 신시아 박사. 무녀만 구출해내면 인간끼리 벌이는 전투로 수습되지. 그 뒤에 각자 나라로 돌아가서 전쟁의 준비를 하고,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하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경쟁이고 뭐고 각 나라에 타진해서 군대를 끌고 왔을 텐데……〉
그렇게 고고학 학회장과 파라오는 암무나 호로 한 발 앞서 떠났다.
아즈테카는 도보로는 너무 멀다. 아틀란티스를 타고 우회해서 들이박는 게 빠르다. 이미 며칠을 소모했기에 일각의 유예도 없다.
─경.
내가 눈을 감았을 때, 키아라가 텔레파시로 질문했다.
나랑 아내들에게만 들리도록 말이다.
─제게만 솔직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지금 그 작전, 잘 풀릴 거라고 보시나요?
─설마요. 100% 서브 플랜 단계로 넘어가겠죠.
나랑 그의 텔레파시를 들어버린 다나는 멘탈이 파사삭 나간 듯 했다. 입만 벙긋거리는 눈나의 등 뒤를 토닥여주는 나.
─소환을 막는 건…… 솔직히 어렵습니다. 블러프를 쳐서 저희가 공격하자마자 토나슈일루카틀이 두둥! 하고 나오진 않게 하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앞서 말씀하신 ‘인간 대 인간으로서 벌이는 싸움’은 무위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군요. 저 반란세력은 권능에 맞서려는 용도입니까?
─그렇죠. 가능한 전투에 나서도록 하지는 않을 겁니다.
눈치 한 번 빠르셔. 나는 새삼스럽게 이 모험가 대빵님을 돌아보았다.
키가 작고 창백한, 음울해 보이기까지 한 하프 드워프. 그가 물었다.
─그렇다면 경께서는, 저 우신들을 죽일 방법이 있으시다고?
─그거야 모르죠. 단지 싸워볼 수는 있습니다.
마스터 클래스와 신 사이에는 차원이 다르다고 해도 괜찮을 격차가 있었다.
그 격차가 무엇인지는 생각해 볼 만한 얘기인데, 그래도 우신들의 권능이 뭔지는 알아냈다. 싸워서 이겨낼 가망도 있다는 말이다.
키아라가 알려준대로, 초월종 몬스터의 권능은 영역의 지배에 한정된다.
일단 저 신의 위엄을 벗겨버리고 나면 내가 본 모 천공신이나 사냥의 여신처럼 마법 폭격이나 짱 쎈 화살의 천벌로 날 바짝 튀겨버리지는 못하겠지.
─이길지 질지는 붙어보기 전까지는 모릅니다. 저는 단지 싸울 준비를 했을 뿐이죠.
그래서 나는 키아라에게 말했다.
“──아마 당신도 그렇겠죠? 콜리도 경.”
“……예.”
그는 아주 오래 입을 다물고 있다가 끄덕였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신조를 가지고 살다 보면 지금처럼 대답이 궁해질 때도 많을 것이었다.
다행히 추궁하지 않아도 됐다.
말이 아닌 눈으로 전해지는 대답도 있는 법.
결말이 어찌 되건, 신들 중 한쪽만 이 대륙에서 치워버리면 우리의 승리였다.
시발, 상시 무적 패턴을 두른 궁극완전체랑 비교하다 보니까 옵션이 쬐끔 붙은 3분의 1 버전은 해 볼 만 해 보이네. 자동차 카탈로그만 달달 외워둔 무면허 백수가 된 기분이야.
【아즈테카 제국의 동부 해안선 지도를 가져다 주세요.】
우리는 그렇게 현지에서 끌어모은 협력자들에게 집요할 정도로 정보를 수소문해대고, 작전을 원형만 남을 정도로 끈질지게 수정했다.
그리고 마침내 원정대를 태운 아틀란티스와, 이 지긋지긋한 지배에 맞서며 목숨을 초개처럼 던질 마음의 반란세력은 식인종의 제국을 포위했다.
이제부터는 평소와 같았다.
신을 죽일 시간이다.
그 상대가 인간의 신이 아닌, 신이 되고자 하는 괴물이라는 게 달랐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