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시장들이 떠나가고 우리들만 남게 되자 파라오는 호방하게 껄껄거렸다.
〈으하하!! 무척 인상 깊더군. 혹시 정복군주의 자서전이라도 읽었나?〉
〈입만 산 교양이죠. 일이 이렇게 잘 풀렸던 건 행운 덕입니다.〉
〈겸손을 떨 때 행운이 어쩌니 얘기하는 녀석이 제일 웃기는 놈들이야. 왜냐고? 행운은 원한다고 오는 게 아니니까다! 자기한테 운이 따른단 말이 왜 겸양이 되리라 생각하느냐?〉
관점 보게. 아니, 그치만 그것도 그런가?
신이 있는 세상이다 ‘내가 좆빡세게 일해서 잘 풀림’보다 ‘적당히 했는데 행운이 따랐음’이 훨씬 으스대는 거라고 보는 관점도 있을까.
─쿵.
셰드멘호테프는 꿀걱거리던 물잔을 내려놓았다. 누가 보면 술인 줄 알겠어.
〈울프헤딘 백작이여. 잠시 허심탐회한 얘기를 나누고 싶군.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말씀하십시오, 파라오.〉
〈우리가, 아니지. 내가 선의로 저들을 돕는다고 생각하나?〉
시장들이 들으면 당황할 질문이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오. 당장 저부터가 그렇지 않아서.〉
〈그대는 이래서 좋아. 그대의 공방과의 계약은 내 최고의 치적이었느니라.〉
셰드멘호테프는 조용히 웃으며 잔을 기울였다.
〈내치가 안정되어도, 우신이 사라진 이 대륙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이 없어지지. 언제 어떤 이유로 외세의 칼이 꽂힐지 몰라. 내 말이 틀렸나?〉
〈아니오, 전혀. 자유만 주고 떠나는 건 책임의 방기(放棄)입니다.〉
우리가 볼 일만 보고 대충 빠빠이한다?
지금처럼 내정간섭과 다름없는 짓거리를 하는 데 비하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일 수도 있었다. 내가 지휘한 작업부터가 외부인이 할 짓은 아니었고.
〈그러면 그대는 이게 최선이라 보는가? 저들의 전통과 자주성을 존중하고, 자립할 때까지 적절한 도움만 베풀면서 나중에 건전한 외교관계를 맺는 것보다?〉
〈존중이 옳은 방식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현실이란 꽤 추찹하기 마련이고, 한 국가의 앞날을 그렇게 정하는 건 윤리에 준수한 비도덕입니다.〉
남의 집의 새끼 고양이를 ‘이건 동물권침해에욧!’하고 산에 풀어놓는 짓이지.
나약하고 사냥하는 법을 모르는 괭이는 산에서 강하게 살아갈 수 없다.
‘아니지. 돌봐줘도 문제네.’
우리가 친절한 마음으로 자유를 누릴 나이까지 보듬어줬다고 치자.
그런데 고양이가 갈 뒷산은 불곰이랑 호랑이가 맞담배를 피우며 ‘이 썅년을 족쳐놓고 환웅님이랑 결혼하고 싶은데’하고 킬각을 재는 인외마경이다.
〈저희가 떠난 뒤에 이 대륙에 온 다른 국가의 원정대가 이전 파라오 왕가보다, 저희들보다 더욱 악랄하지 않을 거라곤 단언 못 하잖습니까?〉
현지인들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서 맞서겠지만 존나 많은 피를 흘릴 것이다.
그리고 자유를 되찾고 벌인 첫 만남이 저렇다?
침략자들을 향한 복수심이나 증오는 저들에게 ‘역시 저 대륙 놈들은 다 야만한 식인종이야’라는 편견과 프레임을 스스로 짊어지게 만들 것이었다.
〈역사의 옳고 그름이란 단편적인 관점입니다. 아즈테카의 생존자들은 저희들을 침략자로, 다른 이들을 침략자에게 부역한 매국노로 치부하겠죠.〉
오늘 여기 없던 누군가는, 역사를 평가하는 누군가는 우리가 벌인 일을 ‘이러는 게 더 옳았다’면서 규탄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아니었고, 우리도 그들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저는 제가 역겹게 여긴 아즈테카를 치워버린 것에 아무 후회도 없고, 저랑 같이 싸운 사람들이 새로 빤 수건처럼 클린할 거라고도 생각 안 합니다.〉
〈최고의 대답이었노라. 그 의견, 브리타니아의 왕실에도 그대로 전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이 땅은 풍요롭다. 몬스터만 빼면.
나랑 파라오가 벌인 업적과 도시국가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브리타니아와 나르메르-나일은 계를 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내 통장이 투자한 돈 이상으로 윤택해질 예감.
엘리자베트로부터 ‘동생 놈을 배편으로 보낼게’란 연락도 받았다.
아마 따로 소유주가 없는 북방의 섬 등을 적당히 브리타니아령으로 삼지 않을까. 그 땅엔 원주민도 없고, 지배해도 윤리적으로 아무 거리낌 없다.
물론 그 과정은 나도 옆에서 조율할 생각이다.
몇 년 뒤 대충 핑계를 대고 아틀란티스 무역을 개시할 거 아니냐고. 그거랑 나랑 엘리자베트의 깐부 관계를 생각하면 내 의견을 씹진 못할걸.
‘끽 잘못 하면 빼박 제국주의자너.’
섬나라 브리타니아 인이 우가우가한 야만인들을 계몽한다는 명목으로 학살…… 원주민의 노동력을 착취…… 라틴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 으윽, 머리가.
식민지 같은 수탈방식은 미개하고 한시적이다.
전쟁이 개인의 힘으로 정해지는 이세계에선 더 병신같기 짝이 없는 짓이지. 언제 증오를 키우며 단련한 마스터-랩틸리언이 등장해서 브리타니아에 브레스를 시밤쾅할지 알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도시국가들.
연방의 형태를 띄게 될까, 통일국가가 들어서게 될까? 예지능력을 맘대로 다루지 못하는 이상에야 부질없는 예상이긴 했다.
걱정도 되고 고민도 되지만, 가능하다면 이 외교관계에서 3국 모두가 햅삐햅삐한 결말을 맞이하길 바라는 나였다.
못해도 내가 늙어 뒤지거나 할 때까지는 말이다.
나는 앞으로도 맘 고생 없이 아내들이랑 뒹굴고 싶은레후.
***
셰드멘호테프랑 잠시 빠빠이한 나는 키아라에게 병문안을 갔다.
국영 쪽은 대충 방향이 정해졌고, 나처럼 정치 노름에 전혀 조예가 없는 말단 백작은 앞으로 더 꼽사리 낄 여지도 없지 않겠는가.
“몸은 좀 어떠십니까?”
“매우 아픕니다. 육체의 통증이 아니라서.”
침대에 묶인 투탕-드래곤카멘이 말했다. 창백한 안색 때문에 마지막 잎새를 새고 싶을 텐데, 이걸 어쩌나. 이 동네 나무는 침염수라서 이파리 세기 존나 빡세겠다.
“그 변신이 콜리도 경의 권능이십니까? 대답이 곤란하시면 안 하셔도 되지만요.”
“서슴없이 물으시는군요. 네, 뭐 그렇습니다.”
다행히 암막결계 때문에 트윈 드래곤 트위스트 전투를 본 사람은 한정적이었다.
마스터 클래스의 모험가이자 모험가 길드 연합총장의 정체는 아직 간당간당하게 비밀로 남은 것이었다. 우리도 굳이 밝힐 생각도 없고.
근데 씨발, 모험가 길드장이 폴리모프한 드래곤이었다니. 양판소 그 자체네.
“제 권능은 피에 흐르는 우신의 권능을 최대한 일깨우는 것입니다. 강하기는 하지만, 거대해진 그 몸은 제 영혼이나 다름이 없어서요.”
─까딱. 깁스를 찬 팔을 가리키는 키아라.
“덕분에 경에게 엘릭서까지 사서 마셨는데 몸이 꿈쩍도 안 합니다.”
“토나슈일루카틀한테 물리셨다면서요?”
“이빨을 가진 동물은 새끼일 적에 어미에게 사회화를 받는다더군요. 남을 물면 똑같이 물어서 못 하게 말리는 교육이죠. 그걸 좀 늦게 받았습니다.”
토나슈일루카틀을 섬기던 게 아니라서 그런지─혐오하면 혐오했지 그 반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키아라한테서는 후련해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키아라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아셰라드 학회장은 아틀란티스에서 빈둥거리던 학자들을 데리고 유적 탐사를 향했습니다. 호위는 붙였으니까 조만간 결과를 가져오겠죠?”
“예. 저도 관심은 있었는데 유감이네요.”
“귀찮은 일을 짬처리 가능해서 너무 기쁘신 건 아니고요?”
“아아니! 어떡게 아랐지!”
내가 익살맞게 질겁하자 낄낄대는 키아라.
시바, 깡스탯으로 마스터 클래스를 딴 거나 마찬가지면서 안목이 이상하게 예리하구만. 웃어대던 키아라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음. 그래도 비밀을 공유할 사람이 있으니 무척 좋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옙. 그래야죠.”
키아라의 목적은 가족을 만드는 것이랬던가.
반인반룡. 아니지. 드워프 2 드래곤 8의 비율로 태어난 키아라는 인간에게서 아이를 볼 수가 없었댄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히타이트의 유적을 찾는 거였고.
불가능하다곤 보지 않았다나. 만약 절대 안 될 일이라면 토나슈일루카틀도 인간과 아이를 만들지 못했을 거니까 말이다.
‘마침 나도 생각해 봐야 할 문제긴 했고.’
지구인인 내가 이세계인인 아내들과 자식을 볼 수 있는가.
볼 수 있다고 치면, 바이콘인 베로니카랑도?
그 의문의 답을 찾으며 이 마스터-하프 드래곤이랑 친해지는 건 손해볼 게 없는 일이었다. 존나 ‘이겼다! 피임 타임 끝!’하고 자식을 만들 결심을 했는데 내가 씨 없는 수박이면 어쩌게.
뭐든 도와달라곤 못 하겠지만, 육체만은 우신급으로 강한 키아라다.
친목을 다져두면 아마 여러모로 도움이──
“아. 말하는 걸 잊었는데, 저는 최소 반 년은 못 싸울지도 모릅니다.”
“뎃?”
이 시발, 뭐라고?
기껏 친해진 달인들을 전부 로마니아 쪽에 꼴박한 나다. 그래서 ‘와! 이제야 둥지 짓는 드래곤 쌉가능!’이라며 기뻐하고 있었는데 이게 왠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어머니한테 깨물린 데미지가 커서요. 마나 운용에도 제한이 걸렸고, 싸우다 죽으려고 해도 마스터 클래스만큼의 강함은 못 내겠죠. 저는 육체 빨로 강한 거라.”
키아라는 싱글벙글 쪼개기 시작했다. 씨발 연속 딱밤 머신건을 놔주고 싶네.
졸라 꼬왔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이를 못 볼 정도로 인간의 근친종에서 멀다면 인간다운 깨달음과도 거리가 멀 것이었다.
20%의 인간 성분으로 미스릴까지는 가능해도, 인간형 마스터 클래스의 경지는 못 찍었겠지. 권능을 뺀 초월종 몬스터의 한계는 우신들이 보여줬잖은가.
“그렇게 침통해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내가 세상이 무너진 듯 유능한 골든-흑우래곤의 상장폐지를 탄식하고 있자, 그 금색과 흑색의 마블링이 끝내주는 하프 드래곤께서는 말씀하셨다.
“하늘을 덮는 태양의 심장, 챙기셨잖습니까?”
우신에게서 얻은 드래곤 하트가 있지 않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