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츠니아는 내전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이산가족 자매상봉과 왕자보다 먼저 말을 건 사람은 그…… 뭐더라? 장츠췬이었나? 아무튼 유이링의 보모 역할인 천문관 남자였다.
소식을 들은 프랑이 찾아온 뒤,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나는 팔짱을 꼈다.
【내전 상태라…….】
그럴 만도 했다.
충왕대군이 뒤지고, 그놈이 바이츠니아 국내에 심어두었을 심장 빨갱이 사상충은 사멸했다. 시간 경과+조종자의 부재로 세뇌가 풀린 것이겠지.
‘차라리 내전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지.’
샤오라이였나? 우리가 세뇌를 풀어준 그는 자기 기억과 인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저는 헤니르 님을 위한 병기에욧!’하고 굴라나뢰크의 따까리 노릇을 하던 인물들이 최면 해제를 당했다면 사회의 혼파망도 마땅한 수순일 것 아닌가.
자신을 극렬 PC주의자이자 비건으로 여기면서 시위하다가 갑자기 세뇌가 풀린다?
모든 사람들이 세뇌에 당한 게 차라리 낫겠다.
누구는 룰루랄라 오늘의 시위를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지들 대장이랑 채식주의 특공대가 ‘이런 건 현실이 아니야!’거리면서 탈주하는 꼬라지.
혼파망을 커버할 고위층들이라고 심장에 빨갱이 벌레 한 마리 기르지 않았을 거란 보장이 없으니, 그 광기와 현실부정과 권력욕이 휘몰아치는 중원 마경은 개판이 날 수밖에.
【국내의 혼란은 극에 달했노라고 이야기를 전해준 사절은 말했습니다. 유이링 황녀님의 귀환계획조차 불분명한 게 황실의 실정입니다.】
【그걸 외국 귀족인 제게 말해주셔도 됩니까?】
【제가 말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유이링이?
그녀는 언니와 아이 컨택트를 나눴고, 메이링이라는 이름의 황녀는 몇 번째인지 세기도 귀찮아진 감사인사를 오지게도 박았다.
몸에 자라났던 비늘은 내가 없애주었다. 변신의 마나였기에 제거하긴 쉽더라.
【울프헤딘 경. 거듭 베풀어주신 은의에 감사드리며, 저 리앤 메이링은──】
이어지는 인사를 대충 받아주었다. 황실 출신인 탓일까. 장황한 미사여구를 포함해서 ‘고마워욧!’ 한 마디로 끝낼 인사를 길게도 포장했다.
내가 지루해한다는 걸 눈치 빠르게 깨달은 유이링이 중재해주고, 다시 본론.
【내전 상태라고 하면, 황제께서는……?】
【충격이 크셨는지, 오랜 지병으로 승하하셨다고 합니다.】
예상한 질문이어서일까? 대답은 빨랐다.
그래도 말을 머뭇거리지 않았을 뿐이지, 황제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황실 관리의 안색은 어두웠다. 친자식인 유이메이링 자매가 더 차분할 정도.
【황녀님들께서도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황실의 일원으로서 통곡할 만한 일입니다만, 울고만 있을 수도 없겠죠.】
어떤 감정을 감춘 표정일까는 모르겠다.
황제는 세뇌되었던 걸까? 그녀들을 고달프게 한 게 바이츠니아 황제의 본성이었는지, 혹은 굴라나뢰크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가정해도 별로 파고들 만한 화제는 아니었기에, 나는 그녀들의 무표정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또한, 황제는 정말로 병으로 죽었는가. 암살당한 것은 아닌가.
그 점 역시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나한테 있어서 이 사건의 본질은 저 내전의 그림자에 꼽사리 낀 굴라나뢰크가 있는가 없는가였다.
‘사상충을 조종할 수 있는 인간이 아예 없지는 않을 테고.’
그리고 유이메이링 자매에게 있어서는, 내전을 좌우하는 세력이 누구이며 자신들이 어떤 처지와 입장에서 살아가게 될지가 중요할 것이었다.
【두 분, 귀국하실 건가요?】
그때 프랑이 질문의 요지를 바꾸며 물었다.
【혹시 돌아가지 않고 남으시겠다면,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을──】
【아니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귀국하고자 합니다.】
【언니?】
유이링이 놀라는 걸 보면 상의하지 않았던 얘기였던 모양.
【저는 이 아즈테카에서 사람의 탐욕과 광신이 어디까지 인륜을 저버릴 수 있는지 봤습니다. 이 땅의 식인종들에게 몬스터의 피가 흐른다곤 하나, 같은 피를 잇고도 인간적인 분들도 계셨죠.】
【이스테틸 씨 같은 분 말씀이신가요?】
프랑이 대답하자 메이링은 작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프란체스카 백작 부인. 인간성을 잃고 인간의 거죽을 쓴 괴물은 어디에나 있겠죠. 단언하건대, 도망치는 건 어리석습니다.】
【……언니.】
【유이링. 도망칠 수 있는 건 우리 뿐이야.】
메이링은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을 어색하게 쓰다듬어주었다.
【너와 친한 병사와 시녀들, 그리고 여기 계신 천문관님들께는 고향의 가족이 있어. 우리가 황실로부터 도망치면 저들의 가족이 위험하잖니?】
【그 정도는 알아요! 그치만, 언니는 괜찮잖아요! 언니를 찾지 못했다거나, 아니면 아즈테카에서 시달린 끝에 쇠약사했다거나, 그런 변명을 대면!】
【사람은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 해. 살아있는 한은 말이야.】
동생을 달랜 그녀는 단호한 눈빛으로 날 봤다.
【저는 아무 것도 맺고 끊지 못한 채로 이곳에 도달했습니다. 저희가 살아서 재회한 것은 경에게 받은 은의이며 기적이지만──】
【살아서 다시 유이링 황녀님과 재회한 것처럼, 지금 도망치셔도 언젠가 바이츠니아 황실과는 맞닥뜨릴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싶으신 거군요.】
【기만으로 만든 평화와 안전만큼 허무한 것도 없죠.】
메이링은 아즈테카의 수도를 눈짓했다.
제물로 뽑힌 이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간 도시. 아즈테카에게 사육당한 도시국가 사람들이 그때를 평화와 안전으로 여겼을까? 자유로워진 지금도?
90% 이상의 시민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니 내 개혁안이 먹인 것 아니겠나.
【이 내전은 기회가 될 수도 있어요. 상명하복 체제의 황실에선 저희도 처분을 기다려야 할 황녀지만, 이만큼 혼란스러우면 얘기가 다르죠. 몸을 지킬 힘도 남 부럽지 않을 정도론 얻었고요.】
─슈칵. 그녀가 힘을 주자 손톱이 자라났다.
용이나 도마뱀처럼 사나운 손톱이었다. 그녀는 나한테 장난스레 윙크했다.
【게르마니아 여자라면, 원하는 건 싸워서 쟁취해야 하잖아요?】
【흐흐흐. 그도 그렇습니다.】
모계는 니다벨리르 쪽 출신이겠지만, 뭐 뿌리를 따져보면 비슷하니까.
토나슈일루카틀의 화신으로 숭앙받으면서 그에 걸맞은 의식의 밑준비를 오랜 기간 받아온 메이링 아닌가.
진짜 우신은 커녕 군단장 급보다 살짝 더 강한 정도긴 했는데, 그녀에게 깃든 마나와 육체능력은 일반인과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우신의 육체로 쓰일 무녀로 점지받은 건데, 충왕대군 수준은 되겠지.’
그만한 스펙이 없으면 우신의 힘을 감당 못 할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결국 그것 뿐이기도 해.’
메이링은 딱 봐도 전사가 아니다. 납치당한 뒤 악착같이 살아남으면서 처세술과 풍파를 겪은 듯 보여도 저 힘을 활용할 능력은 아직 모자랄걸?
…힐끔.
프랑이 저도 모르게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건 그래서겠지.
본인은 자각도 없는 모양이지만 나한텐 이만큼 효과적인 애원도 없다.
‘꼴마초 특) 아내의 소원은 곧 죽어도 들어줌.’
이대로 돌아간 유이링이 허무하게 죽어버렸다간 우리 프랑이 최소 1~2년은 죄책감으로 잠을 설칠 것 아닌가. 남편으로서 좌시 못할 일이지.
【그 싸움, 저도 한 몫 끼도록 하죠.】
【네?】
─휘리릭. 마나가 깃든 소재로 만든 잉크가 내 펜촉을 따라서 룬을 그렸다.
몇 줄의 전언을 쓴 나는 불의 마나로 말리고서 내밀었다.
【타타르니아의 엘프에게 보여주십시오. 내전이 심화되고 있다면 그들도 국가의 향후를 고민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뒤는 황녀님의 몫입니다.】
엘프는 시간 관념이 널널하다.
그런 종족이 세계수의 씨앗을 곧바로 심었을까? 절대 아니지. 100% 신중에 신중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며, 내전이 발발한 지금은 골치가 아프겠지.
【내전의 결말은 예상 가능합니다. 중원이 찢어져서 5호 16국이 된다. 내전을 제압한 이에게 통일된다. 다음 왕조가 들어선다. 어느 쪽이든 제 전서가 도움이 될 겁니다.】
타타르니아에게는 비옥한 토지가 필요하겠지만 내전에 개입할 명분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황녀와 충왕대군 사건을 적당히 버무려서 언플을 털면?
‘충분히 가능하다.’
내전을 양분하는 세력에게 ‘타타르니아+황녀 둘인데 합류하싈?’하고 제안해도 좋고, 아예 쪼개진 바이츠니아의 일부를 야금야금 먹어버려도 좋다.
방법은 많았고, 이런 정쟁과 전쟁을 도울 이들도 내전 상황이니 구하기 쉽겠지.
여기 있는 장즈췬부터가 황녀 코인이 떡락하면 목숨이 위험한 엘리트니까.
【이 이상 경에게 호의를 받을 수는 없어요.】
【저희 까놓고 말합시다. 그 은혜라는 거, 갚고 싶으셔도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메이링은 입을 다물었다.
말이 좋아서 은혜지, 진짜로 무언가를 돌려주고 싶어도 지금의 그녀들이 그럴 능력이나 되나? 이대로 돌아가면 자기 앞가림도 힘들 텐데.
【……좋아요. 어차피 뭉개지고 흠집난 금화, 잘 녹여서 재활용할 수만 있으면 손해볼 것 없겠죠. 투자라고 생각하고 감사히 받을게요.】
【운 좋게도 금가락지가 갖고 싶어서 손가락만 빨던 엘프들도 있고요.】
【듣는 금화로서는 무척 기뻐지는 소식이네요.】
메이링은 내 서면을 보물지도 챙기듯 간직하며 물러났다. 먼저 쉬러 가는 그녀를 배웅한 유이링 황녀도 프랑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고마웠어요. 백작님과 프란체스카 백작 부인께 신세를 졌던 나날을, 전 죽는 날까지도 절대 잊지 못할 거에요.】
【……프랑.】
【네?】
눈을 깜빡이는 황녀에게 프랑은 작게 웃었다.
【이제 슬슬, 프랑이라고 불러주셔도 되요.】
【……아!】
유이링은 감격한 듯 끄덕이고서 프랑의 손을 꼭 쥐었다. 하프 드워프 여인들이 그러고 있자, 어린 소녀들이 작별하는 모습 같았다.
【그럼 나도. 나도 유이링이라고 불러줘, 프랑!】
【……응! 유이링!】
【또 만나자! 그때는 꼭, 프랑이 부담스러워 할 만큼 휘황찬란하게 대접해 줄게!】
체통도 잊고 손을 저으며 황녀들은 길을 떠났다.
엘프랑 드워프는 사이가 나쁘단 편견이 있는데 잘 되려나? 걱정이 들기는 했는데, 어째서인지 잘 풀릴 것 같다는 막연한 기분도 들었다.
어째서일까. 예지가 발동한 것도 아닌데.
나는 혼자 그 이유를 고민하다가 눈치챘다.
이세계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한.
중원 황실을 상징하는 건 황금색의 용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황룡포를 걸친 하프 드워프 여제인가.’
건국신화가 흥미롭긴 하겠군.
나는 한시라도 바삐 떠나가고자 후속 선박들에 올라타는 그녀들을 배웅하고, 메이링이 가기 전에 남겨준 메모를 따라서 아즈테카 황궁으로 향했다.
우르릉─ 쾅!!
─달칵, 탁!
프랑의 자물쇠 해체 솜씨와 골렘 마법, 그리고 내 번역 치트를 발휘하길 잠시.
아즈테카의 수뇌부밖에 존재를 알지 못한 비밀 창고에서, 우리는 먼지에 쌓인 채 방치된 유물급 매직 아이템의 산을 발견했다.
흑요석 소태도를 내밀던 프랑이 얼굴을 밝혔다.
“노르! 이것 좀 봐! 이 작은 검에 깃든 마나가 나보다 많아!”
“그래. 보물 산이네, 아주.”
훌드폴크의 옥새에 버금가는 유물만 최소 4개.
이 정보를 알려준 것만으로도 목숨값의 절반은 쳐 줘야겠다.
뭐, 파티 레이드 보상은 NPC한테도 받아내는 게 국룰이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