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753화 (752/1,009)

***

“북쪽 섬을 브리티니아 령으로요? 설마요.”

아즈테카 왕가의 비밀창고를 깔끔하게 털어오고 나서 조지 왕자를 만나자, 그는 그렇게 말하며 픽 웃었다. 나는 조금 의외였기에 쓴웃음을 지었다.

“북쪽과 아즈테카는 현지 막시카 분들이 고유의 영토임을 주장하지 않는 곳입니다. 사실 무주공산이나 다름없기에 혹시나 싶었는데요.”

“상의는 나눠봐야겠지만 너무 멉니다. 브리타니아에서 보통 배로 몇 주일은 걸리는 곳인데, 이런 먼 땅을 영토로 선포하기는 어렵죠.”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역시 현명하시군요.”

지구 역사의 영국-미국 같은 관계가 되리라는 말이군.

조지는 고기를 썰면서 말했다.

“현실적으로는 현재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토지 소유권을 정돈하고, 도시국가들이 영지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겠죠. 저희 나라의 역사처럼요.”

“흠. 그러니 봉건제 국가가 될 것이다?”

“나라의 대표는 필요할 테니,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그들과 깊은 연을 맺어둬야지, 이 땅에 어설프게 뿌리를 박아서는 안 됩니다.”

“생각하고 계신 수단은 있으신지요?”

“결혼이겠죠. 누님이 자식을 보려면 멀었으니, 뭐 매형의 남동생 등이 현지민들과 혼약하거나 하지 않겠습니까? 피만큼 짙은 인연도 없으니.”

썩어도 왕족은 왕족인가. 아무렇지 않게 정치적 혼담을 얘기하네.

나는 감탄하면서 조지 왕자를 쳐다보았다.

“헌데 왕자님께서도…… 미혼인 줄로 압니다만.”

“……예?”

내 질문에 조지 왕자는 멈칫했다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굳은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시네.

“하, 하하. 설마요. 저를? 이 땅에? Why?”

“왜 아니겠습니까? 엘리자베트 왕녀님의 성격을 고려하면──”

“자, 잠시만요! 방금 말씀하신 참이지 않습니까? 아즈테카와 우신의 위협이 사라진 이상, 이 땅은 무서우리만치 비옥합니다! 어설프게 통치자를 선정했다간 반역의 우려가!”

“그러니 믿을 수 있는 왕족을 보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아무튼 아님. 저는 통치라던가 그런 거 정말 추호도 안 맞는다구요.”

현실을 부정하며 고기를 씹는 그였지만, 틈틈이 ‘사전답사라는 게 그런 뜻?’이나 ‘죽일까? 안 돼, 참아’ 같은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암튼 국익이 관련된 일 치고는 생각보다 역겹거나 애국심이 떡락하는 정책을 펼치진 않을 듯 하다.

‘그거면 됐지 뭐. 더 뭘 바라겠어.’

안심한 나는 사내 새끼와의 수더분한 밥 타임을 후딱 끝마쳤다.

“파라오와도 대화를 나눠봐야겠군요.”

식사를 마친 내가 떠날 준비를 하려고 했을 때 조지 왕자가 말했다.

“차기 파라오의 남동생, 그러니까 파라오 셰드멘호테프 님의 어린 아드님과 니다벨리르의 사절단 일행이 찾아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국제회의가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설마 저도 거기 껴야 하는 건 아니겠죠? 저는 일자무식한 창잽이인데요.”

“아니, 우리 브리타니아의 영웅께서 이리도 농담 센스가 없으시다니요.”

좆도 농담 아닌데, 쓰벌.

혹시 내가 ‘너 해외발령 될 듯?’하고 낄낄댄 걸 복수하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설마. 왕자님 씩이나 되는 분이 그런 졸렬하고 어리석은 짓을 하실라고.

또 귀찮은 일감을 받은 듯한 느낌에 한탄하면서 귀가하는 나였다.

***

“홈 스위트 홈.”

“응. 어서 와.”

으리으리한 아즈테카식 저택(핏기 빼는데 이틀 걸림)에 돌아오자 네페르티티가 반겨주었다. 다른 아내님들이랑 비교하면 살짝 어색하구만.

“미안해요. 기껏 고생하다 오셨는데 딴 일이나 보다 와서.”

“왕자랑 불장난. 안 돼. 절대.”

“그딴 끔찍한 소리는 생각일랑 마시고요.”

그렇게 돌아가자 오늘도 야근인 마법사 콤비를 빼면 전원이 집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테이블에 자료를 펼쳐놓고 끙끙거리는 다나를 빼면.

“이 누나가 이젠 집에까지 일감을 갖고 오네.”

“집에 안 들어오는 것보단 낫지?”

“퇴근해서 자택근무하기 VS 야근하다 안 오기. 대놓고 베로니카랑 티르시 저격하기 있음?”

“아니 시발,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사람 하나 쓰레기 만들기 더럽게 쉽네 진짜. 그보다 그 둘은 뭐하길래 안 와?”

“식인종 왕국 수도에 한약방 차렸대. 우리 개털머리 여신님 회춘 각 떴냐? 근데 10살 쯤 어려져도 라리루라랑 동갑인 거 실화?”

“혀 뽑아버리기 전에 너도 와서 앉아. 이거 니 전문분야니까.”

더 깝죽대다간 권능을 깨우쳐가는 여신님의 졸개들한테 먼지나게 맞겠다. 나는 대충 착석해서 그 자료를 몇 개 주워들었다. 유적의 글귀인가?

“번역해주면 돼?”

“읽혀져? 너 요즘 해석 잘 안 될 때도 많다며.”

“번역기능이 고장난 건 아니니까 문제 없음.”

대충 왜 그러는지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닌데, 뭐 아무튼.

“다행히 이건 아즈테카의 고유 언어랑…… 히타이트 어네.”

월척인가? 나랑 다나는 눈을 마주쳤다.

“해석해 봐. 1차 탐사에 참가한 학자들도 해석 못한 어휘만 모아놨어.”

“2차 탐사부터는 동행하는 게 나도 낫겠고만.”

“듣던 중 좋은 소식.”

─덜컹. 아무렇지 않게 의자를 끌고 와서 남의 어깨에 턱을 얹는 네페르티티.

팔뚝에 이런저런 말캉말캉함이 닿았다. 웜멤메 망측해라. 이게 뭐시여.

“유적, 몬스터 많아. 즐거워.”

“그럭군요.”

네페르티티의 감수성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즐겁다고 말할 정도면 그렇게 강력하진 않은가 본데.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뚱한 얼굴로 네페르티티의 스킨쉽을 쳐다보는 누나가 1명.

“우리 다나, 부러워? 이리 올래?”

“뭐래. 지랄도 정돈컷.”

솔직하지 못하시군. 그러자 무슨 이상하게 생긴 과일 같은 걸 킁킁대고 있던 라리루라가 귀를 쫑긋 세우고는 얼른 내 옆에 앉았다.

“그럼 하나 남은 옆자리는 제가 찜♡!”

“……그게 뭐? 별로 부러울 거 없거든?”

솔직하지 못하긴. 입술이 댓발 나왔으면서.

억지로 더 권할까 하다가, 자기가 못 참고 솔직해지길 기다리는 게 더 귀여울 것 같아서 존버에 들어가는 나였다. ─팔랑. 자료를 넘기는 나.

“일부분 이상하게 해독되는 부분이 있네. 낯선 문자라 그런지 제대로 안 옮겨왔나 본데, 문맥을 따져보면 대충 이런 내용이야.”

“유적 자체의 구조야? 쓸모 있겠네. 그리고 이 기록은……”

억지로 사무적인 사고로 돌아간 다나는 번역한 글을 읽다가 침음했다.

이 자료의 원본은 놋쇠로 된 철판을 긁어서 쓴 기록이었다고 한다.

“아즈테카에 원정을 온 이유에 대한 일지인가. 히타이트 인이 쓴 거야.”

“일지? 단서로는 좋겠지만, 히타이트의 위치를 찾아내긴 어렵지 않을까요?”

일하는 나한테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만 고개를 모로 꼬는 라리루라.

자료를 읽으며 비교하던 다나는 눈을 찌푸렸다.

“결국 개인의 기록일 뿐이니까. 우리도 여기로 오면서 ‘브리타니아는 어디어디에 붙은 곳입니다’ 같은 기록을 남기진 않잖아?”

“아무래도 정리한 자료와 샘플을 들고 로마니아 현지로 가야겠다.”

대조군을 만들어서 ‘이건 ○○의 양식과 비슷하니까 아마도 히타이트겠군’하고 분석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번거롭지만 보통 역사 연구란 게 이렇다.

예상하긴 했는지 다나는 한숨을 쉬었다.

“해도라도 찾을 수 있었다면 가능했을 텐데.”

“……해도?”

“그래. 나도 몰랐는데, 학회장님 말로는 그렇대. 해로에는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을 기록할 테니까. 하지만 가히 1천 년 전의 해도가 남아있을 리── 왜 그래?”

내 표정을 본 다나가 말을 멈췄다.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

“히타이트 인들은 뭘 타고 여기에 왔을까?”

“그야…… 선박 아니겠어? 하늘을 나는 유물을 탔을지도 모르지만, 우신이 통치하는 곳에 그렇게 눈에 띄는 물건을 타고 오진 않았겠지.”

“높은 성능의 배. 전투가 가능하고, 도망칠 때도 빠른 거.”

자기 의견을 말하는 네페르티티.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예를 들자면, 암무나 호 같은 배였겠네요?”

“……아, 그런가!”

─딱! 확 밝아진 다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평범한 배를 타고 가능성은 낮아! 이런 위험한 대륙에 올 정도라면 우리들이 유물이라고 부르는 소실된 기술력의 선박을 탔겠지! 암무나 호처럼!”

“암무나 호는 자동항해 선박이지. 그럼 그들이 타고 온 배의 해도는──”

“보통 종이는 아니겠지! 저장매체가 있었을 게 틀림없어!”

척하면 척이라니까. 3년을 같이 구른 짬은 어디 안 가네.

나는 히타이트 인의 일지를 가리켰다.

“현장에 일지와 흔적이 남아있었어. 아즈테카에 왔던 히타이트 인들이 돌아가지 못했다는 거야. 즉, 유적의 주변을 잘 찾아보면.”

“해도를 저장한 매체가 있을 확률이 높아! 또 그 해도도 암무나 호라면 해독이 가능할 거고! 군용장비의 철칙은 양산과 상호호환성이니까!”

“제작 시대가 상당히 다르지 않다면 말이지.”

해도를 배에 뒀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인다.

왜냐고? 이 대륙의 바다는 북쪽과 서쪽 외에는 무척 위험하니까.

‘북해는 오르틀라위퍼를 뚫었을 가능성이 없으니 논외.’

서쪽의 밀림도 몬스터가 많으므로 배에 귀중한 물건을 두고 내렸을 리가 없다.

“복사본이 있다 유적까지 갖고 왔을 거야. 들고 다녔다면 휴대성도 높겠지. 해도를 못 찾아도 이 일지의 남은 페이지를 찾으면 배를 어디 정박했나 하는 기록이 나올지도 몰라.”

“알았어. 다음 번에는 일지의 기록을 토대로 이 일지가 발견된 곳을 뒤져보자고.”

이걸로 대충 정리가 됐다. 나는 번역한 자료를 다나에게 돌려주었고, 일이 끝났다는 걸 눈치챈 듯 라리루라는 뭔가 호록거리기 시작했다.

“우엑.”

그래놓고는 맛이 별로였는지 혀를 쭉 뺐다. 거 귀엽네.

“라리루라, 뭐 마셔?”

“아으, 선배도 드실래요? 원기를 돋아주는 스태미너 음료수래요.”

“막시카들의 선물.”

한 곳에 쌓인 물건을 가리키는 네페르티티였다.

아, 우리한테 주는 선물인가. 별 걸 다 받았네.

“과일이나 꿀을 넣어 마신다곤 하는데, 막시카 분들은 없어서 못 넣으셨대요~.”

“대부분의 기호품은 아즈테카로 갔던가, 그 식인종들이 취급하지 않아서 전통이 끊겼겠지. 그런데 네 표정을 보면 별로 맛있어 뵈진 않는다?”

“그래도 남자한테는 좋다던데요♡”

“한 잔 줘 보련.”

거 뭐시냐, 내가 밤일이 후달리진 않지만 우리 한국인 수컷의 DNA에는 이런 걸 사양하지 않는 유전자가 새겨져 있단 말이지.

“욱.”

나는 한 잔 마시고 오만상을 썼다. 쓰벌, 쓴 건 둘째치고 맛 자체가 별로인데?

─꿀꺽. 억지로 한 모금을 삼킨 나는 물로 혀를 헹구며 말했다.

“이거 이름이 뭐야? 거의 독극물 맛인데?”

“그…… 뭐였죠? 네페르티티 언니.”

“……기억 안 나.”

“카… 커… 커 뭐였는데? 무지 귀해서 예전에는 화폐로도 쓰였댔는데.”

그래? 요정왕의 완드로 양산하면 아즈테카 경제 망가트리는 거 순식간이겠네.

내가 웃기지도 않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라리루라는 떠오른 듯 외쳤다.

“아, 맞아! 카카우아틀이요!”

“……카카우아틀?”

“네! 아, 가구로 빻기 전의 생 열매도 있어요!”

그렇게 말한 라리루라가 보여준 건 아까 그녀가 향을 맡고 있던 열매였다.

덜 익은 녀석은 불그스름하고, 잘 익은 녀석은 거뭇거뭇한 과육.

“……오.”

카카오잖아, 이거.

“……라리루라? 프랑 어딨어?”

“음. 빨래 중이실 걸요? 골렘이랑 하면 된다고 저희한텐 쉬라고──”

“알았어. 나 잠깐 프랑이랑 요리 좀 하다 올게! 좀만 기다리고 있어 봐!”

“네?! 선배?!”

카카오 열매를 바구니에 챙긴 나는 메다닥 프랑한테로 달려나갔다.

아, 카카오 토크는 못 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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