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라리루라는 도끼를 내려놓았다.
〈솔직함이 늘 미덕은 아니에요, 윈스턴 씨.〉
〈이 근육이 안 보이시오? 근육이 우락부락한 놈 치고 똑똑한 놈 별로 없소.〉
〈……그건 편견이야.〉
〈내 경험 상으론 그랬소. 꼴에 머리를 굴리는 척은 하는데 가만 보면 생각이 단순하거든. 하는 짓도 그렇고. 아, 덕분에 고집이 세고 목표의식이 확고한 건 나름 장점이라오.〉
시발.
라리루라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을 무시한 나는 짧게 물었다.
〈용건은?〉
〈우리들 모두 유적에 가고 싶다는 목적은 일치하는 듯 싶은데.〉
〈우린 귀족의 사병을 쫓아낼 방법이 없어.〉
〈나한텐 있소.〉
─바스락. 목패를 꺼내는 윈스턴. 천에 감싸여져 있어서 문양은 안 보였다.
〈로마니아 원로원 가문의 문장이오.〉
……데뎃?
‘노빠꾸로 숨겨둔 패를 꺼내들었군.’
뒷배란 게 원로였던 모양.
코르넬리우스 어르신이랑 같은 급의 스폰서라? 생각보다 대단한 양반이셨네.
‘윈스턴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나.’
계속 시간을 끌면 후속 하이에나들이 오리라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가문의 이름은?〉
〈아직은 못 밝히지.〉
아, 그러셔요.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천리안 ON.’
투시로 천을 뚫고 문양을 살폈다.
당연하지만 내 이전 물주님이랑 동격인 원로들 이름이나 가문 정도는 공부했다. 나는 그 문양을 대충 훑고서 가문의 정체를 파악했다.
이름은 말해봤자 라리루라는 모를 테니까 생략. 아무튼 가짜는 아닌 듯 했다.
〈좋아. 믿을게.〉
〈음? 싹싹하구려. 나야 고맙소만.〉
〈예전부터 감이 좋은 편이라.〉
〈허허. 여자의 감이라. 멋지구려.〉
죽일까? 좋아, 죽이자.
라리루라가 어깨에 손을 얹어서 강제로 앉히지 않았으면 살인이 날 뻔 했지만, 윈스턴은 ‘자연사’ 당할 뻔 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껄껄 웃었다.
‘씨발, 빨리 이 얼굴 가죽을 벗기 위해서라도 더 서두르든가 해야지.’
셀루스티아가 뭐하는 남작가인가는 그다지 관심 없지만, 신분제 국가의 국법을 좆깔 수도 없으니 유적 입구의 불법 통제는 뚫을 수 있다.
‘고작 몇 시간이다. 아직 내 정체를 파악하지는 못했겠지.’
하지만 이미 한 차례 교전을 벌였다.
시간을 끌면 들키고도 남는다. 활을 쓴다는 것 하나만 알아도 금방 찾아내겠네.
〈출발은?〉
〈록스가 협력하는대로.〉
〈사람을 보내. 서편을 쓸게.〉
〈밑에서 준비해두지.〉
윈스턴을 돌려보냈다. 필적부터 숨기지 않으면 안 되니까 라리루라가 〈꼭두극〉을 써서 쓴 편지에다가 황금 목걸이를 도장처럼 찍을 생각이다.
라리루라는 꼭두각시에서 나오며 말했다.
“유물을 회수한 다음 용병단을 데리고 돌아가면 이 잠복여행도 끝이겠네요♡!”
“어. 혹시 모르니까 탐사단 본부에도 연락을 좀 넣어두고.”
본부를 이리로 옮기게 하면 된다.
어그로가 저쪽으로 끌리면 만점.
‘안 끌리면 〈공간 이동〉으로 유적 앞에까지만 온 다음 안에서 포위하면 차점.’
천리안과 동물 드론들로 감시하다가 부랴부랴 날 죽이러 들어오면 그때 일행과 떨어져서 전투하면 된다. 이 레이더 달린 눈깔은 정말 씹사기가 맞다.
‘괜히 능력치 후달리는 탐사단원들이 휘말리게 할 필요도 없고.’
바로 움직이면 정체를 들킬지도 모른다고?
신중하게 움직여봤자 아까 한 판 싸웠으니까 〈편찬대대〉건 로마니아 황실이건 내 손이 진짜 유적까지 뻗었다는 건 눈치 깠을 거다.
싸워본 바, 두 놈들 다 감지능력이나 대가리가 딸리는 놈들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아예 브류나크까지 손목에 차며 웃었다.
“프리실라. 미스릴 클래스가 최소 여덟 명은 될 텐데, 자신 있어?”
“아핫♡! 선배답지 않은 질문이시네요~?”
얼굴은 달라도 라리루라는 라리루라였다. 세상 발랄하게 V자를 날리는 그녀.
“우신이나 되살아난 언데드 술사랑 비교하면 한 급 떨어지는 적인걸요? 이제 와서 쪼~끔 강하단 이유로 같은 사람한테 겁 먹을 이유가 없죠♡!”
“웬일이야? 자신만만하네.”
“선배도 곁에 있겠다~ 오늘의 라리루라는 공포 따위 모르는 여자랍니다!”
용의 심장을 몇 점 먹더니 새가슴을 졸업했나. 나는 살짝 웃었다.
“시간 승부야. 서두르자.”
“넵! 편지 갖다주고 올게요!”
라리루라가 내려간 사이에 나는 침대에 앉아서 눈을 찌푸렸다.
‘놈들의 실력이나 움직임은 봤다.’
각 잡고 싸우게 된다면 이길 수는 있다.
애초에 킬각이 보이지 않았으면 들이박았을 리 없지.
‘유적에서 본 것 외의 변수가 없다면 문제없다.’
하지만 변수가 있다면?
‘……아내님들한테 발퀴리에의 마나를 충전시켜 달라고 편지를 보내둘까.’
시간을 벌어줄 정도는 될 테니 말이다.
그렇게 내가 잉크가 덜 마른 깃털 펜을 들었을 때였다.
─뚝, 뚝.
“응?”
빨간 뭔가가 편지지에 떨어졌다. 콧망울을 대충 훔치자 코피가 묻어나왔다.
“……피로가 쌓였나.”
대학원생도 아닌데 코피가 다 터지네.
나는 반사적으로 컨디션과 몸 상태를 진단하며 휴지를 뽑았다.
아까 맞은 마법에 독성이 없다는 건 확인했고, 포션도 잔뜩 마셔댔으니까 괜찮겠지. 그래도 혼자 가능한 범주에서 맥 등을 짚어보는 나였다.
‘별 일 아니네.’
오딘의 눈으로 보기 싫은 얼굴까지 거울로 존나 살펴봤지만 변화는 없었다.
약간 뱃속이 간질거리긴 하네.
“……아, 맞다.”
아침부터 이것저것 하느라고 굶었구나.
시간도 없겠다, 대충 육포나 뜯자.
─꺼억~ 까악~.
왠지 브류나크가 고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
〈실패했습니다.〉
저택 지하의 공방에서 셀루스티아 남작은 아주 산뜻하게 말했다.
쿰쿰하게 습기가 가득한 지하실을 불쾌해 하던 자엘은 눈을 찌푸렸다.
〈……실패했다?〉
〈예. 저주를 거는 데 실패하다니. 이게 대체 몇 년 만일까요. 아, 저주를 거는 것 자체가 10여년 만의 일이었던가요? 아하하! 놀라셔도 됩니다.〉
남작은 어쩐지 몹시 즐거운 듯 말했다.
다시 해 보시오. 그렇게 말하고자 했던 자엘은 입이 잘 열리지 않자 멈칫했다.
대신 그는 다른 질문을 꺼냈다.
〈……왜 실패한 거요?〉
〈바다에 소금물을 부었습니다. 사람이면 백 번 죽고도 남을 농도였는데요.〉
─달그락, 달그락.
은유 같은 말로 대답하면서 남작은 선반이나 그 주변에 마구 널브러진 마법 시약 같은 것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자엘은 혀를 차려다가 자제했다.
〈유물이나 그런 종류요? 남작의 저주마저 견딜 정도라니.〉
〈모를 일이죠. 그런 체질일지도.〉
〈체질? 말이 되는 소릴 하시오.〉
〈여하튼,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굉장히요.〉
그때가 되서야 자엘은 이 공방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던 머리로 남작의 말투나 행동거지가 표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쭈뼛대던 소심한 모습은 일말도 보이지 않았다.
저주를 걸기 전과는 사람이 달라진 듯한 말투.
혈액의 주인에게 저주를 거는 데 실패한 게 심금이라도 건드린 것일까?
‘그때 보여주던 모습이 연기였을 수도 있겠군.’
자엘에겐 상관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더듬으며 눈치를 살피는 것보단 편하지 않겠나.
─툭, 데굴데굴.
그의 발에 어인 머리 박제가 굴러왔다. 자엘은 한 걸음 왼쪽으로 이동했다.
〈아까부터 무얼 그리 찾고 있소?〉
〈결원이 1명 나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생뚱맞은 질문. 하지만 대답이기도 했다.
〈설마 남작도 함께 갈 심산이시오?〉
〈목숨을 잃은 분의 빈 자리를 바로 보충할 순 없으실 줄로 압니다.〉
〈우리는 여덟 명으로도 충분하오.〉
〈아홉은 완전한 수입니다. 여덟은 아니죠.〉
─파라락. 고문서를 훑던 그는 대충 던져버리고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꺼냈다.
〈99대대 여러분의 전술에 참가해서 방해하진 않겠습니다. 가까이에서 쏘면 저주도 조금은 효과적일지도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
〈……원하는대로 하시오.〉
이득과 손해를 따져보고 자엘은 수락했다.
방해되지 않는다면 상관은 없었다. 남작의 몸을 지켜줄 용의도 없을 뿐이다.
〈감사합니다. 아, 여기 있었군요. 그리워라.〉
─흐물텅. 남작은 표정근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웃으며 상자에서 책을 꺼냈다.
마법 서적이다. 자엘은 시계를 살폈다.
〈시간 승부가 될 거요. 이만 움직이지.〉
〈저희가 서둘러 봤자입니다. 말씀을 들어보면 그 습격자는 구신의 룬을 쓰는가 보더군요. 아마 신변이 위험해지면 도망칠 겁니다.〉
〈구신의 룬?〉
자엘의 눈이 부릅뜨였다.
〈그 기이한 차원도약이 뭔지 안단 말이오?〉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남작에게 분노가 쏟아졌다. 하지만 남작은 살기와 거의 차이 없는 위압에도 짐을 뒤지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떠올라서 말이죠. 차원의 빈 틈을 열어젖히는 마법입니다.〉
〈……내가 아는 룬은 그렇게 강력하지 않소.〉
〈당연합니다. 룬을 베푼 천공신은 인류에게서 도로 룬 문자를 앗아갔으니까요.〉
자엘은 침묵했다.
집행관 특수부대의 수장 쯤 되면 알게 되는 것 역시 많았다.
〈룬의 진정한 힘이란 말인가.〉
〈가장 뛰어난 신의 권능으로 창조한 현실개찬 도구(Tool)입니다. 그쯤은 가능하겠죠.〉
잘 모르는 표현이 나왔지만 같은 마법사끼리도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니면 자주 있는 일이었다. 자엘은 그런 것보다 충성심을 우선했다.
〈폐하께는 알렸소?〉
〈이미 아실 테지만 무의미합니다. 현생인류는 쓰지 못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남작은 룬의 진짜 힘이 봉인당한 이유도 아는가 보군.〉
자엘은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 섬뜩한 차원도약능력. 인간이 아니라면 그게 더 납득이 갈 정도였다.
남작은 손가락으로 공중에 룬을 적었다.
〈룬 문자는 말입니다. 오염된 겁니다.〉
〈……오염되었다?〉
〈문자는 의지를 전하는 수단입니다. 힘을 가진 문자가 오염되면 듣고, 쓰며, 읽는, 자들의 정신과 영혼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천공신은 살아 생전 그걸 우려했다더랍니다.〉
〈……영향을 끼치면 어떻게 되오?〉
〈어떻게 되냐뇨? 뻔한 질문을. 문자는 지식을 얻는 수단이기도 하잖습니까.〉
남작의 머리가 빙글 돌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영혼이 계몽됩니다. 눈이 트이고 지혜를 얻게 되죠.〉
자엘은 바닥을 구르는 박제를 바라보았다.
장식처럼 굴러다니던 어인의 머리 박제를.
〈위계가 상승한 영혼은 습득한 지혜에 걸맞도록 육신를 진화시키고 말입니다.〉
〈……아즈테카의 거짓 신들처럼?〉
〈금지된 지식을 탐닉한 아틀란티스 인들처럼. 아, 적성이 잘 맞으면 아예 변화가 없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신족이라거나 뭐 그런 종족이라면요.〉
남작은 활짝 웃고 찾아헤매던 지팡이를 들었다.
〈잡담이 길었군요. 이만 가시죠.〉
지팡이의 보석 안에서는 수십 개의 룬 문자들이 쉴새없이 소용돌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