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770화 (769/1,009)

─쿵! 유적이 흔들렸다.

바깥과 격리되고 공간 마법이 봉인된 유적에서,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공간을 다뤘다.

〈먹다 남은 잔반이라 죄송합니다.〉

스무 장도 안 되는 얇은 마법 서적을 팔랑이며 지팡이로 머리 위에 둥근 원을 그리는 셀루스티아 남작. 차원문이 열리면서 보이지 않는 이계의 존재들이 쏟아졌다.

벽이나 천장을 불문하고 공간을 둘러싼 상태로 정지하는 망령의 기척!

마치 방에 갇혀서 벽과 천장에서 구더기가 솟는 걸 보는 듯한 역겨움이었다.

나는 감각을 키우며 눈을 굴렸다.

‘물량이 많다. 마법으로 쓸어버릴 수도 없고.’

고수 간의 싸움은 보드 게임을 닮았다.

얼마나 효과적인 수로 적을 약하게 만드는가에 승패가 좌우된다는 점이 말이다.

‘잡몹을 상대로 마나를 낭비할 순 없다.’

가치가 적은 폰으로로 나이트나 퀸을 잡으려는 개수작. 메인 딜러인 내가 잡몹 웨이브에 마나를 써대면 남작은 누가 잡겠냐고.

〈히이이!! 왠지 기분 나빠요─!!〉

그때 라리루라는 울상을 지으며 펼쳤던 역장을 확장시켰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저 불쌍한 양반들, 전부 실로 붙잡아버려!〉

〈알고는 있는데 닭살이 돋고 토할 거 같애요!〉

─꽈드득! 라리루라는 오두방정을 떨면서도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폐막 유희〉의 역장이 발현했다. 보이지 않는 망령을,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실 수천 가닥이 붙잡았다. 입구가 막히자 더 나오지도 못하는 듯 했다.

〈마나의 실? 마치 그물이로군요. 하긴, 그물을 발명한 건 유희신이었죠.〉

남작은 좆도 신경쓰지 않고 주문을 외웠다.

술식의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다. 에퀴녹스보다 마법 지식만은 더 뛰어난가.

‘오딘의 눈의 분석이 따라잡지 못한다.’

날 노리는 공격마법이라는 건 알겠다.

그리고 그게 의문이었다. 대가리가 안 굴러가서 기술과 신체빨로 싸우는 놈도 아닌 듯 한데, 내가 달려드는데 잡졸부터 꺼냈다.

무슨 이유로? 내 마나를 낭비시키려면 공격하는 게 공방 면에선 나은데?

‘라리루라의 행동을 억제한 거다.’

실에 구속되는 걸 피하고 싶었나?

라리루라는 실전에서 쓸 만큼 저 기술에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했는데, 그래도 저런 숫자를 제압하려면 남은 처리능력으론 자기 몸을 지키는 게 고작일 것이었다.

마법사가 몸을 좀 붙잡혔다고 싸우지 못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살기등등하게 달드는 나보다 먼저 라리루라부터 봉쇄했다면──

‘마도서나 지팡이.’

라리루라의 마법에 유물을 빼앗기는 걸 꺼려서. 그 이유밖에 없다.

전투가 격해져서 의식이 쏠렸을 때 무기를 빼앗기는 게 제일 안 좋다고 여긴 것이었다. 결론에서 짐작해 보면 남작의 전투력은 무기에 많이 의존한다는 뜻!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는데 남작은 다 안다는 듯 끄덕거렸다.

〈이심전심이군요. 이거 귀한 물건입니다.〉

〈어! 죽이고 루팅해 갈게!〉

〈마도서 쪽엔 관심 없으신지? 제 저서인데요.〉

무슨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다 말고 말을 걸어?

나는 어이가 없어서 들려오는 주문에 집중했다. 남작의 뺨에 입술이 없고 동그란 입 같은 게 자라나서 주문을 대신 외우고 있었다.

【적성존재의 소질을 확인합니다.】

【종족 판단 무의미. 에인헤리 적성 전무.】

【외적으로 규정. 소멸시키겠습니다.】

〈이크. 이건 또 그리운 병사들이네요.〉

발퀴리에들이 던진 빛의 창을 어렵지 않게 피해내는 남작. 【게르튀르】의 초식에다 시간차 공격까지 걸자 3번째 창은 그의 옆구리를 스쳤다.

치이이이익…!!! 스친 상처는 끓는 기름에 물을 부은 것처럼 불타올랐다.

남작이 처음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추억은 없군요. 너희는 방해됩니다.〉

─딱! 남작이 손가락을 튕겼다.

발퀴리에들의 몸에 룬이 떠올랐다. 남작이 뭔가 한 게 아니라는 걸 오딘의 눈으로 이해했다. 저건 발퀴리에가 태어날 때부터 가진 룬의 마나다.

남의 마나를, 그것도 룬 자체를 통제해서 몸을 구속한다고?

〈오딘의 노이로제에서 태어난 장난감 주제에, 위대한 분과의 유희에 초를 치면 곤란하죠.〉

〈그런 말투라면 저도 방해꾼처럼 들리네요☆!〉

망령의 일부를 억지로 잡아끌어서 남작한테 떨어트리는 라리루라.

파격적인 공격도 아니었기에 남작은 지팡이에서 어둠의 파동을 쏴서 자기가 부른 망령들을 소멸시켰다. 나는 신경을 집중했다.

‘쯧, 아쉽군. 저 영혼들의 힘은 못 빌리나.’

소체는 인간일 텐데도 아예 다른 생물처럼 변해버려서일까.

〈오해 마십시오. 귀하라면 이 유흥에 함께하실 자격이 있지요.〉

그 변이를 집행한 남작은 라리루라에게 자상한 삼촌처럼 대답했다.

〈왕의 곁에는 그를 기쁘게 하는 광대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위대한 분이시여. 대부분의 재주꾼은 기만자이자 배신자입니다. 언제든 경계하시길.〉

〈씹놈이 누구 사이를 이간질해? 라리루라가 내 뒤통수를 퍽이나 때리겠다!〉

〈저는 때리는 쪽이 아니라 맞는 쪽이니까요!〉

〈충신을 못 알아보시니 가슴이 아프군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창을 휘둘렀다.

─까아앙!!

룬 문자가 휘몰아치는 지팡이가 브류나크를 막아냈다. 희박하긴 했지만 경악의 감정이 솟았다. 이 미친 새끼가 한팔로 막고 지랄이네.

〈놀라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는 겁니다.〉

─휘리릭! 남작의 왼팔에 룬 문자가 떠올랐다.

【ᚴ(Kaunan)】, 【ᚹ(Wunjo)】, 【ᛏ(Teiwaz)】.

감각 강화, 신체 강화, 축복.

오딘의 눈과 만언신의 권능이 문자열의 의미를 파악한다.

룬의 강화 효과를 왼팔에만 집중한 남작이 지팡이를 후려쳤다.

─투웅!!!

나는 완력에 튕겨져서 천장으로 날려버려졌다. 손아귀에 잠깐 감각이 사라졌다.

〈씹새가 힘 좀 쓰네! 남자 값 하는구만!〉

〈따지자면 마법 덕분입니다만.〉

〈헬스도 흑마법의 일종이야!〉

뼈와 살을 깎아서 힘(근육)을 키우니까 올바른 흑마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증기를 뿜으면서 존나 개판이 된 자세를 공중에서 틀었다.

〈네게 타락파워마초의 칭호를 내려주마!〉

〈다음 세대의 ‘셀루스티아 남작’부터는 그렇게 자칭하죠.〉

공중에서 몸을 돌리고 천장의 망령들을 짓밟고 점프. 남작에게 도약하면서 【게르튀르】의 공격식 3개를 물 흐르듯이 연발했다.

남작은 한손으로 지팡이를 회전시키면서 신사의 호신술처럼 봉술을 펼쳤다.

봉과 창을 부딪히면서 우리는 일렬로 내달렸다.

타타탓─!

채채채채챙─!!! 콰과과광─!!!

보폭을 맞춘 것처럼 무기를 부딪히자 초월적인 완력으로 공기가 터져나왔다.

범상한 전사는 접근하지도 못할 경지의 근접전. 하지만 그것은 어딘가 고명한 무술가끼리의 대련 같기도 했다. 오러를 견디는 지팡이의 강도는 좀 소름 돋았지만 말이다.

지팡이를 부숴버릴 생각이었는데, 오러도 감지 않고 내 창술을 버티다니.

〈느긋하게 즐기십시오. 광대 아가씨는 되도록 노리지 않겠습니다.〉

남작이 지껄였다. 나답지 않게 견제나 간을 보지 않고 공격일변도로 덤비드는 이유를 다 안다는 듯 말이다. 정답이라서 빡침이 2배인 건 덤이다.

‘이 새끼가 라리루라를 본격적으로 노리기 시작했다간 귀찮다.’

방어 면에선 뛰어난 우리 후배님도 이런 미친놈 앞에서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다. 그러니까 내가 마이클 조던 마크하듯 계속 따라붙을 수밖에.

그래도 꼴받는 건 꼴받는 거다. 나는 면면부절 밀어붙이며 으르렁댔다.

〈떠보는 듯이 지껄이는 남자는 인기 없어!!〉

〈신분을 바꾸면서 결혼만 20번은 했는데요.〉

〈개씹 바람둥이 새끼였네!! 마누라한테 칼빵은 안 맞아봤냐!!〉

〈동족혐오입니까? 귀하께서 동질감을 느껴주시다니, 더없는 영광입니다.〉

그렇게 56번째 격돌이 찰나의 틈을 낳았을 때.

─번쩍.

남작이 오른손에 장비한 마법 서적이 시꺼멓게 빛났다.

모순도 뭣도 아니다. 검은 빛이 페이지를 저절로 넘기면서 빛나는 것이었다.

순간 곁눈질로 훑었지만 해석 불능의 언어였다. 남작의 눈썹이 즐겁게 굽이쳤다.

〈자, 영창해둔 마법은 있으시겠죠?〉

〈씨발. 마법 공부 좀 열심히 해둘 걸 그랬네.〉

선빵 필승이다. 나는 근접전 틈틈이 주문 없이 자아냈던 술식을 냅다 해방했다.

뇌전이 튀면서 들이닥쳤다. 하지만 남작은 서두르지 않고, 마법을 쏘기에 앞서서 과정을 1개 더 추가했다. 칠흑의 룬 만다라였다.

〈【ᚨ(Ansuz)】.〉

참된 뜻을 깨우친 마법 강화의 룬.

츠즈즈즈즈즈…!!!

마도서에서 뿜어진 마나가 뻥튀기되며 내가 쏜 번개를 압도하고 들이닥친다!

까맣기만 한 어둠과 다르게, 별빛을 품은 촉수 다발. 빛과 어둠, 어느 쪽도 아닌 혼돈의 색채였다. 촉수 같은 게 무질서하게 뻗어왔다.

〈다 아는 촉수로구만!〉

나는 내면세계에서 퍼올린 기운을 브류나크에다 실었다. 브류나크는 불만스러운 듯 진동하면서도 하얀 불꽃을 오러에 추가시켰다.

혈수마공(血手魔功)

피닉스 윙 Ⅱ(Phoenix Wing Ⅱ)

촤아아아악─!!

창으로 사용한 혈수마공의 절기가 촉수 다발을 쓸어버렸다.

얼음이 녹는 것처럼 증발하는 혼돈의 기운! 이 느낌은 나한테도 익숙한 것이었다.

‘내가 분노에 휩쓸리거나 뒤지려고 할 때마다 튀어나오던 손길과 닮았다.’

정정하자. 닮은 게 아니다. 아예 똑같다.

예르나 때 처음 보고, 호르샤 때 다시 느꼈으며 에퀴녹스 때는 역으로 활용하기까지 성공했던 그 폭주 상태의 마나랑 말이다.

‘천공신의 신관장이라더니, 쌩 구라는 아니었나.’

광기를 구현화한 듯한 마나가 갈라졌지만 나는 더 파고들지 않고 거리를 뒀다.

나를 발기부전으로 만들었던 검은 마나와 매우 흡사해서 불쾌했지만, 교수 슬레이어의 권능으로 물리치면 그만인 문제다.

불 타입에 하이드로펌프. 얼음 타입에 불대문자. 효과 직빵이다.

〈역시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기입니까.〉

안 통할 줄 알았던 걸까. 남작은 지팡이를 허리 뒤로, 마법 서적을 앞으로 돌리고 가오를 처잡는 전투 자세로 흥미를 드러냈다.

〈헌데 왜 룬을 더 쓰지 않으시죠? 자엘 군에게 들은 바로는 봉인된 룬을 진언(眞言) 상태로 해방하실 줄은 아시는 듯 합니다만……〉

〈적성이랑 재능이 딸려서 그렇단다. 재능충인 금수저 새끼야.〉

〈……참고로 연세가?〉

〈내년에 서른.〉

〈……귀하께선 인간의 수준 낮은 마법을 배울 시간에 룬을 더 탐구하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좀 전의 번개는 창술이나 보유하신 마나에 비해 많이 모자랐습니다.〉

어쩌라고 병신아. 남작은 내가 시큰둥하다는 걸 눈치챈 듯 한숨을 쉬었다.

〈‘마법사 길드’라는 집단은 로마니아의 황실이 만든 겁니다. 뒤에서 유도한 거긴 합니다만, 제가 인류의 방향성으로서 제시한 것이죠.〉

〈미친 틀딱쉑. 그러는 너는 몇 살인데?〉

흐르듯이 좀 충격적인 사실이 나왔지만, 전투의 집중을 풀게 할 정도는 아니다.

남작은 어깨를 움츠렸다.

〈보통 사람보다는 오래 살았지요. 예를 들어보자면, 시구르드가 마기도라와 결별하고 〈강림〉 마법을 처분한 이유를 가까이서 본 정도로는요.〉

〈……누구라고?〉

〈아스토리아 마기도라. 바이콘 신족의 선지자 말입니다.〉

이번엔 당황하는 감정을 숨기기 힘들었다.

‘베로니카네 대선배가 〈편찬대대〉의 수장이랑 인연이 있다고?’

둘 다 똑같은 예언자.

활동한 시기도 겹친다. 같은 미래를 보고 마주쳤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다.

그래서 선지자가 바이콘과 유니콘들에게 〈편찬대대〉를 경계하도록, 얌전히 살라고 조언을 남기고서 떠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별’이라니?

그래서야 꼭 ‘결별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다는 것 같이 들리는데.

그들이 동지였고, 시구르드가 선지자를 떠났다?

시간을 끌려는 수작일지도 모르겠지만 구라라고 치부하고 씹기도 저어됐다. 내가 대갈통을 굴리자 남작은 들으라는 듯이 딴 소리를 했다.

〈그 갑옷, 무슈흐렐리틀의 가죽입니까?〉

〈……어. 벗기느라 고생했지.〉

〈이상하다곤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 위대한 신의 말로(末路)들이 둥지를 벗어나려 했다면 그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시구르드도 행동으로 나섰어야 할 텐데요.〉

남작이 지팡이를 벽에 겨누자 공간이 찢어지며 벽 건너편에 있던 유적의 유물 하나가 날아왔다. 그는 유물을 낚아채서 손바닥에서 굴렸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히타이트는 로마니아에겐 검은 역사이자 터부이죠. 귀하께서도 잘 아시는 〈편찬대대〉라면 아틀란티스 회담 당시에 나타났어야 이치에 맞습니다.〉

나는 놈이 계속 나불대도록 대답을 삼갔다.

그렇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룬 스톤을 연구하기만 해도 잡아 죽이던 놈들이 아닌가. 전세계에 히타이트의 존재를 공표하려는 자리에 왜 오지 않았을까?

우신이 세계를 멸망시키는 예지는 나조차 봤다.

네페르티티의 고향을 불태우던 날, 수십 년 뒤 나랑 네페르티티가 에퀴녹스의 영혼에서 그 등을 훔쳐보리라는 것마저 예지했던 놈이 그 미래를 못 봤다고?

시구르드가 나보다 더 멀리까지 봤다면.

내가 예지를 비트는 것까지 읽고서 방치했다면, 놈이 나한테 뭘 바라는 걸까.

〈초대 원로원 가문이 만든 〈강림〉 마법에는 진짜 신의 신좌를 찬탈할 가능성이 있었죠. 현재 〈인신〉으로 불리는 인간들은 그 마법의 발전형으로부터 탄생했습니다.〉

그 푸념을 듣고 떠오르는 건 프레이야의 신좌로 가는 열쇠다.

─콰직. 남작은 골동품을 박살냈다.

〈하늘과 땅, 세계수의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는 막혔고, 권좌를 가진 채 라그나로크에서 살아남은 신들은 현세에 내려오지 않거나 살해당했습니다.〉

〈……………….〉

〈통로가 막혔다는 건 찾아오지도, 돌아갈 수도 없게 됐다는 말입니다. 안에 갇힌 저희가 이 땅에 존속하려면 그에 걸맞는 자리가 필요했죠.〉

……알 것 같다.

스치듯 보았던 광경이나 의문들이 뒤섞이는 것 같았다.

─짝눈 할배 신이라…… 이거, 오딘일까요?

─……신의 존함을 그리 경망되게 부르셨다간 천벌 받아요, 노르드 님.

하토르 교단의 여신관으로 위장한 레티티아가 내 말에 보였던 떨떠름한 반응.

─천공에 거하는 위대한 광기시여!! 당신의 에인헤리가 공물을 바치오니, 비천한 혈육을 불사를 가호를 바라나이다!!

타뷸라도 사용했던 【광화(Hamask)】 마법.

생각해 보면 당연한 문제였다.

‘사냥의 여신 사티스는 살아있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축복을 내릴 수 있었다.

신으로 추앙받은 고대 로마니아 인, 풍요신 포모나와 마도신 아르마슈나스는 자의였건 강요였건 그 마나를 명계에 안치해뒀다.

그래서 풍요신의 신자들은 힘을 빌릴 수 있고, 티르시도 여신이 될 수 있었다.

힘을 빌려오며 자신을 성장시킬 근간이 있었단 뜻이다.

‘그러면 오딘은?’

오딘은 죽었다.

후계자인 나에게 분신으로 말을 거는 것조차 꿈 속의 어머니나 교수 슬레이어라는 환상의 ‘배역’을 빌리지 않으면 등장하지 못했다.

최대의 모순은 여기 있다.

그녀가 라그나로크로 죽고, 힘을 잃었다면── 그 축복은 누가 내리는가?

‘애초에 오딘은 공물이 싫어서 셀프 인신공양을 하던 신이야.’

기도하면서 눈깔을 뽑아다 바쳐?

그래봤자 공물을 받을 오딘은 죽었는데?

‘죽은 신한테는 축복을 받을 수 없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후계자인 나부터가 오딘의 힘을 받던가 했겠지.

그렇지만 내가 오딘의 눈이라고 명명한 이 눈은 셰이드의 꿈에서 마주쳤던 늙은 마법사를 죽이고 얻은 것이었다.

내가 아는 그 오딘과 만나서 얻은 게 아니라.

‘앞뒤가 안 맞아.’

타뷸라를 괴물로 만든 광기의 축복은 진짜였다.

천공신의 신관장이라는 셀루스티아 남작도, 내 이세계 인생에서 처음 만난 강적이었던 타뷸라도 똑같이 새까만 광기의 마나를 사용한다.

나도 그와 동일한 마나의 힘을 빌려가면서 몇몇 강적들을 물리쳤다.

진실에 모순은 있을 수 없다.

모순이 느껴진다면 전제가 틀린 거다. 나는 그 이유를 눈치챘다.

신대에 살아 있던 오딘은 여자였지만.

그 후, 인간세계에 알려진 오딘은 늙은 노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내가 그 검은 마나에 지배당할 뻔 했을 때, 오딘과 그녀가 남긴 안배는 검은 마나를 튕겨냈다. 내게 침범하려는 힘을 막고, 나를 지켰다.

─잊지 마. 광기에 물들지 말고 분노를 길들이렴.

─우리의 것이 아닌 광기에 지배당해선 안 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지킨’ 것이다.

〈……이런 시발.〉

강렬한 예감이 내 눈동자에 살기를 지폈다.

예지의 힘? 틀렸다. 이건 마초의 직감이다. 나는 웃는 남작을 쏘아보았다.

‘──이 새끼다.’

저쪽 바닥에 굴러다니는 집행관 새끼가 아니다.

‘이 새끼의 기억을 엿봐야 해.’

로마니아 황실의 비밀, 대전쟁의 진실를 안다는 황실의 개.

히타이트를 멸망시키고, 모든 인류가 합심해서 맞서다가 괴멸하고 말았던 ‘외적’의 정체를 밝히고 숨겨진 역사를 알아낼 최고의 기회.

그 기회조차, 이 놈이 아는 것과 비교하면 아무 가치도 없다.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을 때, 나는 무아지경으로 마법을 발동했다.

흡성대법(吸星大法)

스킬 캡쳐(Skill Capture)

촤아악─!! 〈임모르탈리스〉의 멤버로부터 습득했던 스킬 카피 마법이 펼쳐졌다. 팔뚝에 꽂히는 두꺼운 형광색 마나의 실에 남작은 쓰게 웃었다.

〈이런. 지식욕이 지나치시군요.〉

〈튈 생각은 마라. 네 입으로 들어야겠으니까.〉

나는 우리의 목숨 바로 아래에 저 놈의 생포를 두고서 오러를 일으켰다.

〈네가 말하는 ‘천공신’이, 대체 누구인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