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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장님은 바쁘셔서 얼굴을 못 비치시겠다고 합니다.”
아직도 깁스를 풀지 못한 키아라는 그렇게 말을 꺼냈다. 붕대로 목에 팔을 걸고 다니지는 않지만 부목에 칭칭 감은 팔뚝은 여전하다.
나는 픽 웃었다.
“별 수 없죠. 히타이트의 유물을 대량으로 얻은 적은 처음이니. 어떤 게 차원이동 기술로 이어지는 단서인지도 불분명하고요.”
“예. 그래서 한가해 하던 학자들을 총 동원하고 계십니다. 다만.”
키아라는 아쉬워하면서 운을 뗐는데, 나는 그가 뭐라 말할지 눈치챘다.
“저희가 원하는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적다?”
“명료한 이치죠. 3천 년 뒤의 인류가 아틀란티스를 탐험한다고 울프헤딘 경의 강인함의 비밀을 알아내진 못할 테니까요. 지식과 기술은 아무 곳에나 굴러다니진 않는 법입니다.”
“기밀이면 그만큼 엄중하게 관리될 테니까요.”
얻은 물건들만 봐도 나름 값어치가 있긴 하지만.
‘유물과 기록들은 히타이트의 존재를 공고하게 하기에는 충분해.’
몽블랑 노랜드처럼 하늘섬은 있다! 거리다가 목 위가 뎅겅 날아갈 일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건 나름 준수한 결과 아닌가.
장대하게 시작한 유적 탐사가 허탕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은데 뭘.
‘내가 얻은 깃털이 가장 큰 수확이긴 하지만.’
나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말했다.
“오르왈리아. 로마니아. 게르마니아. 이 삼국과 국경을 맞댄 곳이 히타이트의 옛 국토입니다. 저 해도에 등록된 곳을 시작으로 주변 영지를 훑는 게 어떨까 싶군요.”
그러다가 깃털이 반응하는 곳을 찾아내면, 바로 거기가 당첨이다.
어떻게 아냐고? 당연한 일이지.
‘신의 권능이 깃든 열쇠다. 이렇게 감춰둔 곳이 아무 의미 없는 곳이겠냐고.’
그리고 차원의 틈새에 숨어들었다는 건, 그곳엔 나랑 학회장이 찾아헤매던 차원이동 기술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
대놓고 ‘차원이동 하는 법’하고 책으로 정리되어 있지는 않겠는데, 그래도 리버스 엔지니어링 시도가 가능한 매직 아이템(유물)이 드랍될 가능성은 크다.
당연히 유물 파밍이 곧 기술 습득은 아니다.
‘하지만 그 유물에 오딘의 눈이 통하면……’
차원이동 술식이 손에 들어올 것이었다.
지구로 돌아간다는 꿈이 막연한 몽상에서 실현 가능한 목표로 바뀐다.
내 첫 목표가 눈에 띄게 현실미를 띄기 시작한 것만 같았다.
“네. 그래서 학회장도 열을 올리고 계신 거겠죠. 제가 주워온 기록에서 히타이트의 다른 국토가 현 대륙의 어디 쯤에 있는지만 알아내면.”
나의 의견에 동조하던 키아라는 텀을 두고 피식 웃었다.
“기나긴 여정도 드디어 종반에 들어섭니다.”
듣기만 해도 속 편하네.
내가 웃자 키아라는 어떤 상자를 꺼냈다.
“그건 그렇고, 울프헤딘 경께 보여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으음. 무슨 상자입니까?”
철제 상자였다. 크기는 좆만하다. 카카오 99% 초콜릿 통 정도. 아니면 PX 달팽이크림 정도인가. 손에 넣고 굴려도 문제없는 스몰 사이즈.
‘마나가 느껴지는 것도 아닌데?’
이런 걸 굳이 왜?
“그거, 열 방법이 없어.”
내가 고개를 모로 꼬자, 졸린 듯이 꾸벅거리던 다나가 말했다.
아르마알스 가문의 별관에 따로 응접실이 있긴 했지만, 귀찮기도 하고 그럭저럭 친해졌으니 그냥 키아라도 거실에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나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못 연다고? 애초에 열리는 건 맞아?”
“클라라 씨한테 물어보니까 통짜 금속은 절대로 아니라더라. 상자 밑에도 봐 봐.”
시키는대로 봤다.
─HUGI: V Ⅸ.
음각으로 각인된 문자열이다. 만언신의 권능이 발동했다.
“……후기 9호?”
후기는 무슨 후기? 최신 스마트폰 성능 테스트 후기인가. 삼성이 보낸 암살자로부터 숨기려고 이 안의 USB에 은밀하게 봉인을…… 이건 뇌절이군.
“병신아, 게르마니아 어잖아.”
“흠…… ‘생각’이란 뜻인가.”
생각 상자. 꼰대 냄새가 나는 물건일세.
“후긴이라고 하면 천공신이 데리고 다니셨다는 까마귀의 이름이죠.”
모험자란 직업이 도굴…… 아, 아니 고고학자의 성질을 띄기 때문일까. 키아라는 그렇게 역사적인 지식을 틈새 어필했다.
“그밖에는, 조금 마이너한 설화지만 ‘우드가르트 로키’라는 거인이 뇌신과의 내기에서 불러낸 어떤 은유적인 생명체의 이름도 ‘후기’입니다.”
“뇌신과의 내기요?”
들어본 얘기군. 나는 분개하던 토르를 떠올렸다.
“번개보다 빠르고 공간마저 뛰어넘어 어디든지 순식간에 도착하는 것. 권능으로 구현화한 ‘생각’. 토르의 시종과의 달리기 내기에서 이겼다는 작은 거인.”
“현대식으로 말하면 골렘의 변종 쯤 아니겠어?”
“그거 참.”
설명이 차원을 누비고 다녔다는 로키의 권능과 상당히 흡사한데.
역시 그 우드가르트 로키가 진짜 로키랑 연관이 있는 거 아냐?
‘요정왕 말로는 오딘은 로키, 헤니르의 도움으로 인류를 만들었댔지?’
그럼 로키가 그만한 창조능력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 창세의 권능은 장식이 아니고. 고민하던 나는 별 생각 없이 상자를 투시했다.
그리고 놀랐다.
‘천리안이 안 통해?’
내 천리안은 술식에 의존하지 않는 초상능력.
다시 말하자면 권능이다. 권능이 안 통한다는 건 보통 상자가 아니란 거고.
내 엘리트 대갈통 속에서 이 상자의 상태창에 ‘등급: 레전더리 에픽’이라는 표기가 떠오른 것만 같았다. 앞의 부연설명과 합쳐지니 괜히 더 그렇다.
“지저의 탑에서 주운 지도의 전선기지에서 나온 물건이야. 혼자만 모색이 달라서 ‘원 주인이 두고 간 물건’으로 보이더라고.”
“확실히 일반적인 유물이란 느낌은 안 드네.”
“9호라는 걸 보면 신화에서 모티브를 딴 골렘, 아니면 꼭두각시의 코어라도 들어있는 게 아닐까 싶어. 유적의 위치가 로마니아 권이니까.”
이것저것 읽고 있던 다나는 나한테 스케치를 몇 장 던져줬다.
붓으로 묘사한 유적에 유독 눈에 띄는 게 있다.
“관?”
“효력이 다한 엘릭서가 한가득 들어 있는 관이 있었대. 이상한 건 분명 누군가가 들어있다 나간 듯한 흔적이 있는데, 정작 유적에서 나온 흔적은 없다는 거야.”
“유적 안에 관 안에 들어 있던 몬스터 같은 게 남아 있나?”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열심히 찾아봤는데, 별 수확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상처를 회복하고 황금시대의 기술로 〈공간이동〉해서 나간 거라고 추측돼. 너도 전에 지저의 탑이 포션 보급기지라고 추리했었잖아?”
그거랑 같은 맥락이란 거군.
나는 상자를 던졌다가 받았다.
“이거, 부숴봐도 됩니까?”
“내키시는대로 하시길.”
“천마대멸겁!!”
나는 지체없이 풀 파워로 상자를 내려쳤다.
─투캉!!!!
하지만 흠집도 나지 않는다. 내가 야수회귀까지 쓴 진심 펀치였는데 말이다.
“데뎃?”
이거에 맞으면 미스릴도 주먹 모양으로 뭉개질 텐데? 힘 조절은 하지도 않았다. 껍질만 부술 요량으로 타격점을 컨트롤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오러도 안 통합니다.”
“뭐하는 놈인진 모르겠지만 오마에는 와따시의 호승심을 자극한데스.”
─스릉. 상자에 브류나크를 겨눴다.
“도려내주는 데샤아아앗──!!!”
나는 지금의 내가 낼 수 있는 단일딜 0티어급의 절기를 펼쳐냈다. 형광색 오러가 번뜩이면서 브류나크의 창날은 상자의 끄트머리에 도달했다.
풀 버프를 더한 【게르튀르】 필살의 절기.
─까아아앙!!!!!
그럼에도 결과는 좆도 변함이 없었다.
상자를 후려친 손목만 더 아파졌을 뿐.
“내 손목 씨뺘야아앗!!!”
애미 뒤진 작용 반작용. 나는 격통에 나뒹굴었다.
아니, 존나 뭘로 만들었길래 우신의 가죽도 도려내는 창질에 흠집도 나지 않는 것이지? 나는 살짝 눈물을 찔끔거리며 손목을 호호 불다가 쌉정색을 했다.
“이거 물리적인 강도가 문제가 아니군요.”
“방금 막 니 추태를 봤는데 누군들 모를까.”
“마누라는 닥치고 가서 야근이나 해. 밤 새느라 못 씻어서 몸에서 숙성된 치즈 냄새가 날 때 쯤에 면회하러 가 주겠음.”
“우리네 선조의 땅 에린에는 치즈에 맞아 뒤진 여왕이 있단다.”
“계승되는 치즈의 의지 잘 들었고요. 장모님 댁 동네도 조만간 땀의 나라 아포크린 마을로 개명하시길 바랍니다, 호카게님.”
“치즈 크라이스트다 씹놈아.”
“아악!! 구둣발로 쪼인트는 에바지!!”
내가 다나한테 정강이를 까이고 있자 키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집조차 안 난다는 건 이 물건이 그만큼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열쇠로 열리는 자물쇠를 힘으로 비틀려고 한 듯한 느낌입니다.”
“어프로치 방법이 틀렸다는 겁니까?”
“상자는 넣고 꺼내기 위한 물건이니까요. 열지 못한다는 건 궤변입니다.”
그렇겠지. 아무튼 오딘의 눈으로 살펴도 알아낼 수 없어서야 원.
“느낌적인 느낌은 공간 마법 같은데.”
게임에서 벽에 대고 스킬을 난사한 촉감.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아보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일단 챙겨만 두자.
그밖에도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가 나는 문득 떠오른 의견을 말했다.
“이 가문의 기사단장님이 가르침을 원하신던데, 어쩌시렵니까?”
“곤란하군요. 아시다시피 저는 기술 면에선 경 만한 달인이 아닐 뿐더러, 몸 상태도 좋지 못해서 말입니다. 사양하는 편이 서로를 위한 일이겠죠.”
“……대련이라면 내가 할게.”
키아라는 쓴웃음을 지었는데, 거실에서 멍하니 놀고 있던 네페르티티가 말했다.
아니 근데, 저 고양이 우리집 테레사 아냐? 쟨 왜 또 여기까지 왔대.
아무튼 그런 대답에 다나도 반응했다.
“네페르티티가?”
“마나를 덜 쓰는 친선대련. 늘어난 마나에 익숙해져.”
듣던 나는 이해했다.
‘하긴 그렇겠네.’
마나가 급격하게 늘어나버린 아내들이다. 렙업 전의 감각으로 마나통의 10%만 짜내도 종래의 몇 배나 되는 마나가 나와버리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마나를 조금씩 쓰고, 그걸 몸에 체득하는 연습은 중요하다.
“……그래? 프랑이나 다른 애들한테도 한 번쯤 권유해 볼까.”
그래서일까? 희소하게도 다나가 몸을 쓰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
“누나가? 웬일임?”
“내가 하겠다는 건 아니고, 뒤에서 버프나 걸어주려고.”
아하. 깨우치기 시작한 권능 쪽 말이구나.
‘다나의 축복은 창세의 권능의 발전형이었지.’
신들의 권능이 거의 그런 식이겠지만.
권능은 마나에 의존하지 않기에 마나량이 늘게 된 거랑은 상관없다.
하지만 저것도 다 훈련이다.
기사단장으로서도 나랑 네페르티티, 그리고 발퀴리에랑 대련하는 대신에 우리 가족의 훈련을 봐 준다고 치면 마음의 부담도 덜하겠고, 딱 좋네.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
“응……. 돌아오면 물어볼게.”
“지금쯤 다들 프리모르 마님네 아들을 보러가서 정신없을 테니까.”
그렇겠지.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겠어. 나도 저녁 전엔 돌아올게.”
키아라를 보내고, 그대로 돌아나와서 뒤쪽으로.
호출을 보내고 잠시만 기다리자 그녀들은 금방 찾아왔다.
“노르드 님!!”
“부르셨습니깟!!”
촤촤악─! 보법을 전개해서 달려오는 쌍둥이들. 헤스왈드 자매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집 고양이가 있길래 있을 줄 알았다. 난 클라라 씨랑 동생 쪽만 불렀는데?”
“저도 듀나미스 공방의 대장장이로써 공부하러 따라왔습니닷!!”
검댕이가 묻은 오드리가 기립자세로 말했다. 거 갑자기 성실해지셨네.
“알겠다, 알겠어. 일단 이것부터 받아라.”
피식 웃은 나는 브리타니아에서 날아온 쌍둥이들한테 인피면구를 던졌다.
“이건 왜? 아! 새로 만들까요?! 이번엔 진짜 잘 생긴 남자의 얼굴로──”
“아니. 이제부터 그건 너희 거야.”
“……뎃?”
─툭.
나를 따라서 데뎃 거리는 자매들한테 활을 2개 던져주는 나.
“생각해봤는데, 티베리우스 용병단과의 연계를 생각하면 ‘니르바나’를 마냥 묻어두긴 아깝더라. 비밀이란 건 결국 언젠가 들키는 법이기도 하고.”
나중에 가서 내가 여장하고 다녔다는 얘기가 돌 바에는 수수께끼의 인물 ‘니르바나’를 완성시키는 게 더 옳은 선택이 아닐까?
즉, 이 양귀비 얼굴은 일종의 상징이 되는 거다.
“이제부터 니르바나는 단수가 아니다.”
이 인피면구를 쓴 사람이 ‘니르바나’인 것이지.
“정보상 일에도 도움이 되겠지. 원래 니들 나름 한 끗발 하는 괴도였잖아? 궁술만 좀 연습하면 돼. 일할 때 쓰는 활이 유물이라 화살 솜씨엔 보정이 들어가거든.”
나는 팔짱을 풀면서 말했다.
“준비해. 며칠 중으로 어디 가서 활 좀 쏜다는 소리를 듣게 만들어주지.”
“네, 넵!!”
이런 쪽이 낯설지도 않을 뿐더러, 실제로 이름 값이 있는 가상의 신분이 정보 활동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아서일까. 동생 캐서린은 곧바로 내가 준비한 활을 들었다.
“저, 저두요? 저는 대장장이 전문 아니었어요?”
하지만 언니 쪽은 조금 달라서, 듀나미스 공방 일과 병행할 자신이 없는 모양.
“낮에는 성실한 노동자. 밤에는 괴도. 전형적인 배경설정 아냐?”
어차피 거의 캐서린의 대타로 들어가는 게 대부분이겠지만 말이다.
손을 놀릴 만큼 듀나미스 공방도 한가롭진 않고.
“그, 그럴지도 모르지만! 좀 들어주세요! 클라라 저 사람 진짜 광기라니까요?! 와이번 급속편으로 이 저택에 오자마자 쉬지도 않고 공방에 달려가서 며칠째 일만 하고 있어요!”
“거 성실하게. 후원해줄 맛 나게.”
매달 꼬박꼬박 돈 내주는데 게으름을 피워대는 것보다는 낫지.
클라라 팬박스의 구독자는 기뻐요.
“히이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오드리. 하지만 연기다. 내 눈은 못 속이지.
단지 억지로 시킨다고 동기가 생기진 않는다는 것도 팩트. 강요했다가 원한이 생겨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통수라도 쳤다간 그것도 비극이다.
그래서 나는 오드리에게 의욕을 선물했다.
“너 오프툼 씨 기억하지? 사티스 교단의 사냥개 출신이신.”
─쫑긋. 오드리의 귓볼이 곧추선 것 같았다.
“그 사람, 지금은 나랑 이 집 어르신께서 맡긴 일을 하고 있거든? 주로 정보 수집이랑 뒷조사로. 다시 말해서 ‘니르바나’로서 활동하면 오프툼이랑 같이 일할 기회가──”
“이 화살을 어디에 쏘면 되겠습니까, 싸장님!!”
알기 쉬워서 좋구만.
아내를 잃은 요원과 섹시 스파이 간의 로맨스.
딱히 흥미는 없지만, 사원의 행복이라면 기도해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