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783화 (781/1,009)

보석에 들어 있던 룬에 한해서, 적성의 한계마저 무시할 수 있는 비보!

안에 들어있는 룬의 갯수를 생각하면 이 힘은 ‘모든 룬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기능이라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이 씨빠!! 클라라 씨!! 존나 고마워요!! 나중에 뽀너스 줄게요!!”

“네? 아! 새 기술을 배우는 걸로 받고 싶어요!”

“거야 당연히 투자해드릴 거고, 돈도 드릴게요! 옷이건 밥이건 사고 싶은 재료건 좋을대로 살 수 있도록 잔뜩 드릴테니 기대하고 계십셔!!”

나는 그녀에게 말하면서도 빠르게 달렸다. 그새 뒤로 멀어진 클라라는 우왕좌왕하다가 허리만 푹 숙였고, 난 별관까지 원큐에 달려나갔다.

“지나가던 개털머리 발견! 씨발 머리 딱 대!”

“뭐?”

나는 눈을 비비며 벙쪄 있는 다나에게 손가락을 겨눴다.

“칭카라 호의! 토끼로 변해라!”

“으꺗?!”

날아간 룬의 마나는 다나에게 적중했다. 문자를 날리는 것도 예전에는 엄두도 못낼 짓이었으며, 또 다른 생물을 상대론 변신 마법을 쓰지도 못했다.

그러나── 보라!

─펑!

“어? 뭐, 뭐야?! 존나 갑자기 뭔데?!”

연기처럼 피어오른 뭉게뭉게-변신 이펙트가 싹 가신 뒤, 다나의 머리에는 깜찍한 토끼 귀가 1쌍 자라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템빨…… 아, 이 얼마나 감미로운 울림인가!”

나는 극한의 감동을 느끼며 부랄을 떨었다. 내 감동이 전해졌는지 다나도 떨리는 손으로 머리에 자란 토끼 귀를 만졌다.

장식이 아니라 변신이니까, 촉감마저 전해지지 않을까 싶다.

“나의 아내여. 이제부터는 나를 애니마구스라고 부르라.”

“뜬금없이 튀어나와서는 무슨 개지랄이야, 미친놈아!!”

─쐐액, 퍽!!

채찍처럼 휜 하이킥이 낭창낭창하게 내 팔뚝을 때렸다. 나는 가볍게 낚아챘── 낚아채려 하다가 방심한 탓에 야무지게 쳐맞고 훨훨 날아갔다.

“갸아아아악──!!”

“너로 변신한 적이 공격한 줄 알고 애 떨어질 뻔 했잖아! 뒤질래 진짜!!!!”

“아악! 때리지 마세오! 죄송해오! 넘모 신나갖고 그만!!”

확실히 듣고 보니까 다나가 기겁할 뻔 한 일은 맞네.

내 잘못이 맞아서 순순히 처맞는 나였다. 이게 백작의 위엄……?

“하아, 하아……. 하여간, 혼자 두면 꼭 염병을 떨어요.”

─펑! 숨을 고르는 다나의 머리에서 토끼귀마저 사라졌다. 쓰벌, 머지?

‘……마법이 풀렸어?’

내가 푼 게 아니었다.

다나의 마법 저항력이 내 마법을 풀어버린 거다.

‘와, 신좌 빨이 크긴 크구나.’

프레이야의 시련을 편법으로 뚫은 다나이니만큼 처음엔 〈인신〉급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자신의 대학원생-혹사 권능을 깨우치고 발퀴리에를 만드는 법마저 대강 눈치채가는 우리 눈나는 점차 신의 경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 야매 수녀 개털 박사님이 진짜로 여신급의 세레브한 휴먼-데미갓이 된 걸 새삼 실감하면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윈드밀 기상체조를 펼쳤다.

“미안. 우리 브류나크가 너무 쌉에져서 그만.”

“그건 대충 봐도 알겠네. 축하할 일이긴 한데, 너 사고치는 걸 보면 영 불안하다?”

다나는 미심쩍게 째려보다가 브류나크를 쥐었다.

“얘 좀 제대로 보살펴 줘. 우리가 없을 때는 너밖에 믿을 애가 없다.”

─웅웅! 브류나크는 작은 떨림으로 대답했다.

“흐흐. 걱정도 많으셔.”

나도 으쓱거리면서 낙관적으로 웃었다.

‘설마 어디서 날 줘패버리고 싶은 사람이 찾아오기라도 하겠어?’

이 템빨을 잘 소화하기만 하면 그런 놈이 떼를 지어서 몰려와도 된다.

그놈이 마스터 클래스라면 또 모르겠지만──

‘쉽게 있을 법한 일은 아니지.’

크헤헤헤헤. 나는 해피하게 웃었다. 브류나크도 기분 좋게 떨렸다.

어째 이거, 우신을 잡았을 때보다 신나네.

***

그날 점심이 조금 지나서, 먹은 밥이 소화됐을 쯤에 기사단장이 찾아왔다.

〈혹시 저희 기사들도 참관해도 되겠습니까?〉

〈넵. 상관없습니다.〉

자극제 역할이라도 되길 바라는 건가? 상관이야 없었다.

우리 전법을 드러낼 만큼 거창하게 싸우려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일종의 기본기 훈련인 셈이지.’

말이 대련이지, 기사단장이 프랑이나 다나한테 진심 빡겜을 하진 않을 것이다. 저번에 깝치던 그 견습 기사들만 봐도 훈련량은 적당한 듯 했고.

─따악!

“발이 빠르신 건 좋습니다. 하지만 보폭이 조금 넓으십니다. 방어가 다소 미흡하시니 언제든 회피 동작에 들어갈 수 있도록, 디딤발은 더 짧게.”

“네!”

아니나 다를까 처음으로 프랑을 상대해 주면서 오목조목 짚어주는 그였다.

그보다 브리타니아 어 할 줄 알았구나. 어색한 느낌이 있긴 한데.

아무튼 저 정도라면 다나도 별 문제 없이──

“아니, 누나 왜 갑옷을 입고 있어?”

버프 담당으로 온 다나가 평소에는 입지도 않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아까 너한테 1방 맞아보니까, 발퀴리에를 24시간 대동하고 다닐 게 아니면 기습을 피해낼 정도는 되야 할 것 같았다, 왜.”

다나는 꽁한 눈초리를 나한테 돌렸다.

“갑옷까지 입고? 그건 평소엔 못 입잖아?”

“시드나브, 아니지. 레티티아는 입었다며?”

─샤릉. 방울 소리처럼 다나의 손목에 건틀릿이 생겼다.

발퀴리에의 갑옷. 레티티아도 입었던 그거였다.

“나도 만들 수 있어. 안 어울리기도 하고 별로 입고 다닐 생각은 없지만, 입고 싸워야 할 때도 올 거 아냐. 이런 기회니까 연습해둘까 했는데. 꼽냐?”

“꼽기는. 누나 아직 화났어? 미안하다니까.”

“……시끄러.”

본인도 삐진 거라고 생각하는지 홱 피해버리는 그녀였다.

이럴 때는 또 욕을 안 하는 게 다나의 매력이지.

‘흐으으음…… 갑옷이라…….’

원래부터가 힐탱인 그녀다. 실드를 몸에 두르는 거랑 비슷하려나.

‘어차피 피하는 걸 잘 하는 타입도 아니고, 방어 면을 보강하는 게 맞지.’

MP랑 권능이 남아도는데 HP가 바닥나서 지는 건 억울하잖은가.

나처럼 우주방어가 되면 같은 레벨의 전사에게 몇 방 맞아도 버텨지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잘 생각했어. 응원해줄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법이라잖아.”

“……이제 와서 전사 노릇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게 낫지. 레티티아, 그년도 따지자면 지휘관 쪽이었거든.”

축복의 권능을 깨우친 다나 아닌가.

무모하게 싸우는 것보단 뒤에서 마법을 쓰면서 발퀴리에를 강화하는 게 낫다.

미스릴 상위급의 기술을 가진 발퀴리에들에다가 버프까지 걸면 무시 못할 전력이다.

마나를 풀로 충전하고 다나가 축복한 발퀴리에 집단은 국가 레벨 군대다.

그러다보니 알게 모르게 자만하고 있다가, 내가 벌인 장난에 당해버리고 나서 생각을 고친 걸까. 우리 누나도 선빵 필승의 진리를 깨우쳐버린 모양이었다.

과연 박사님. 습득력이 남다르셔.

“가진 힘을 다 발휘할 싸움보다 그러지 못하는 싸움이 더 많아. 그게 현실.”

네페르티티는 기사단장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말했다.

“아즈테카의 여황제도, 우신도, 질 때는 졌어.”

“알아. 그래서 물몸인 거 고쳐보려고 나왔잖아.”

“응. 좋은 자세. 남에게 맡겨도 되는 일은 맡겨. 훈련해서 강해지는 거, 다른 사람이 대신 해주지 못 하는 일이야.”

살짝 고개를 돌려서 다나를 보는 네페르티티.

“나도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강해지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어. 도움을 받을 때는 몰랐지만…… 신세질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야, 수녀 엄마.”

“……수녀 엄마는 또 뭐야? 브류나크도 아니고.”

“그러면…… 개털 엄마?”

“너랍시고 내 머리털에 꼽 줄 만큼 머리카락에 신경 쓰는 편은 아니면서!! 하여튼 찰랑찰랑하게 태어난 게 자랑이지 아주?!”

“으으, 에으으……! 어지러어…!”

네페르티티의 머리를 헤집어대는 다나. 그래도 조언은 솔직하게 받은 듯 했다.

‘남편놈은 아내님들 간의 케미에 흐뭇합니다.’

네페르티티도 좋은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고 말이다.

채채챙─!

그때 연무장에서 거친 금속 소리가 울렸다.

점점 자기 속도에 적응해가는 프랑이 스피드를 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반격의 부담이 적은 훈련이라서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단검을 2개나 취급하는 검술은 어렵습니다. 뛰어난 장비더라도 소유주의 발목을 잡으면 의미가 없죠. 교전 중엔 망치를 쓰시고, 허리의 그 칼은 마법처럼 일격기로 쓰시길.”

기사단장은 프랑의 단검을 전부 피하고 막으며 말했다.

내가 봐도 적절한 조언이었다.

왜 나는 프랑을 상대로 저런 말을 못했나 싶을 정도로.

‘……아니 거 씨발 뭐시냐, 가족끼리 막 섣불리 지적하고 그러는 건 좀.’

음. 그렇고 말고.

내가 저렇게 못해줬던 건 다 배려심이 많아갖고 그런 거다.

요리나 청소, 빨래 솜씨 갖은 걸로 뭐라고 했다가는 그 잔소리로 부부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프랑이랑 싸우라니, 차라리 〈인신〉 상대로 새우등 터지는 게 낫지.

“헤, 설명 잘 하시네. 사장님이랑 천지차이에요.”

“……오드리. 넌 또 왜 여깄냐?”

“구경 왔어요. 클라라 씨한테서 튄 건 아니고.”

“……………….”

“좀 믿어주실래요?! 쉬는 시간이거든요! 께윽…!”

외쳐놓고 내 궁술 훈련의 여파로 낑낑대는 그녀.

나는 눈을 찌푸리면서 불만스럽게 말했다.

“내가 남을 가르치는 걸 별로 못 하는 편이냐?”

“그 하드한 스케쥴을 거치고도 제가 일 하다가 힘이 풀리거나 하지 않은 건 분명 훈련량 조절은 신통방통한데,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편은…… 으흠.”

씨팔거 할 말 다 해놓고 끝만 얼버무리기 있냐.

“이과에게 예체능을 설명하라고 한 게 나쁨. 네 업보지 뭐.”

“어? 왜 내가 가르침을 바란 것처럼 됐지?”

“오프툼 씨 안 볼 거야?”

“싸장님!! 오늘도 훈련 부탁드려요!!”

싫어레후.

그래도 어쨌든 지식을 가르치는 거랑 몸 쓰는 걸 가르치는 건 꽤 달랐다.

사적인 복수심─날 여장하게 만든 것─에 대한 원한도 있었지만 말이다.

설명이 너무 구체적인 게 나빴나? 왼팔을 63도 각도로 비틀어서~ 란 설명은 좀 뇌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논리적인 것도 정도가 중요한가.

“감사해요! 많이 배웠어요!”

그러고 있자 프랑의 대련이 끝났다.

“아닙니다. 조금 휴식한 뒤에 저희 기사들과도 조금 겨뤄보시죠.”

“네!”

후반에 가선 잔상을 남기며 천하제일 무술대회 야무치 시점을 펼치던 프랑.

그런 프랑과 한 판 붙어보라는 말에 말귀를 알아들은 기사들은 푸르죽죽해졌지만, 프랑을 보면서 무섭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종족 때문이라곤 해도 작고 깜찍한 우리 프랑을 상대로 ‘못 이기게쓰요’라고 말한다? 이세계 마초 친구들의 장래희망 1위인 기사가 할 말인가.

전문직 선수가 여성한테 벤치 무게로 진다…… 헬창한테는 가장 큰 굴욕이지?

남자의 자존심이란 그런 것이었다.

〈내 차례.〉

〈……그러지요.〉

네페르티티의 등장에 자세를 바로잡는 기사단장 가이우스.

얕보지 못할 상대다. 가르치긴 커녕 뭔가 배워갈 수도 있고.

순서 상으론 다나가 나가는 게 맞지 않나 싶긴 한데…… 음?

나는 접근하는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아르마알스 가문 안이기도 하고, 살기나 적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멋진 솜씨였어. 아직 어린데 굉장하네.”

─짝짝짝.

연무장의 의자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던 소녀가 그런 칭찬으로 올라오는 프랑에게 갈채를 보냈다. 수건으로 땀을 닦던 프랑의 눈이 동그래졌다.

─누구?

그런 눈빛을 나한테 보냈지만, 난들 알리오.

프랑은 당황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 고맙…… 습니다? 그치만 하프 드워프라서 그렇지, 나이는 많아…… 요?”

“반말해도 돼. 하프 드워프구나. 국경엔 흔하지. 오히려 순혈보다 강한 경우도 많고.”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재밌어하는 소녀.

소녀라는 표현에 걸맞게 가녀린 체구였다. 이제 막 고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일까.

찰랑거리는 금발. 파랗고 하얀 정장. 슬랜더하게 평평한 몸은 나이 탓에 다나보다 더 유약하게 보였는데, 그래도 건강은 나쁘지 않은 듯 했다.

“인형처럼 예쁜 꼬마네요.”

오드리가 주책맞게 속삭였다.

확실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한테 예쁜 양복을 입히면 이럴 것 같은 아이였다.

‘……아니, 그런데.’

이 꼬마, 정말로 아이인가?

“하지만.”

내가 얼굴을 찌푸렸을 때였다. 소녀는 탄식하며 연무장을 내려다보았다.

“가이우스 녀석. 검에 망설임이 가득하네. 내가 가르침이 어설펐나.”

가르쳤다고?

내가 위화감의 정체를 눈치챘을 때였다. 소녀는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고, 사뿐한 디딤발로 날아 연무장에 한 달음에 착지했다.

네페르티티와 기사단장의 사이로, 우아하게.

〈……읍!〉

〈누구?〉

고개를 모로 꼬는 네페르티티랑 다르게, 칼끝을 겨누던 기사단장 씨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금발 소녀는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10년 하고 몇 개월만이네,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상원의원님.〉

……뎃?

의자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선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누구라고?”

세월마저 무릎 꿇린 달인이라는 건 예상했지만, 설마 엊그제 처음 들은 이름의 주인공이 느닷없이 이런 자리에 등장하다니?

〈무뎌졌구나. 비검(飛劍)은 결코 무거워지면 안 된다고 누누이 말했는데.〉

내가 당황하고 있자 그녀는 손을 들었다.

연무장 구석에 박혀있던 목검 하나가 떠올랐다.

쉬잉─ 착!! 빨려들듯 소녀에게 쥐여지는 목검.

목검을 낚아챈 그녀── 아니, 로마니아의 최고 원로는 건성으로 칼을 지었다.

〈덤벼보련. 이 아우렐리우스 변경백이, 제자의 성장을 평가해줄 테니.〉

후오오오오─.

산들바람이 소녀로부터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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