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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선대련이 진행되는 와중, 나는 원로님들에게 붙잡혀 응접실로 끌려갔다.
나는 우리 아내님들이 파이팅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는데 왜 노친네들 상대를 해야 하는 것이지. 응원 못 받아서 다나가 혼자 울면 댁들이 책임질 거야?
〈소개하지. 오델리아 폰 아우렐리우스일세.〉
〈사석에선 편할대로 불러도 돼.〉
〈예. 변경백님.〉
〈……너, 성격 참 끝내주는구나?〉
〈인성이 훌륭하단 소리는 종종 듣죠.〉
데프프. 꼬우면…… 아시죠?
모인 장소는 개인공간인 집무실이 아니라 손님 맞이용 응접실이다. 이거 어르신이랑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닌가? 나는 일단 예의를 차렸다.
〈……제겐 또 어떤 용무신지요?〉
〈이 친구는 기억하지?〉
속 편하게 가르킨 사람은 윈스턴이다. 탐사대를 이끌던 노인 말이다.
─꾸벅. 말 대신 머리를 숙이는 그.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긍정할 뻔 했다가, 겉으로 드러나기 전에 자제했다.
〈글쎄요. 저와는 초면이네요.〉
윈스턴을 아는 건 니르바나다. 노르드가 아니다.
시발, 편하게 있으라며? 지체없이 낚시를 거네. 정치질 쌈박질 모두 마스터한 슈퍼 달인의 페인트 솜씨 실화냐? 노인네 양심 어디?
〈아, 미안. 지레짐작이었어? 내 나쁜 버릇이야. 사과할 테니 용서해 줘.〉
〈상관없습니다. 저도 실수는 하는데요 뭘.〉
〈음음. 남자답네. 시원시원해서 참 좋다, 너.〉
친근한게 웃던 오델리아는 그렇게 넘어갔다.
자주 생각하는 화제지만, 그녀 같은 대귀족들의친밀함은 화술의 일종이다.
많은 사람이 대기업 회장 같은 돈귀신 자본가를 욕하지만, 정작 그들이 친근하게 말을 걸고 존중해주면 그것만으로도 호감이 펑펑 샘솟곤 한다.
대단한 사람이 동등하게 대해주면 내가 뭐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거든.
내 체험담이고, 호텔이나 명품 브랜드에서 쓰는 판매전략이기도 했다.
〈자네가 오기 전에 얘기를 좀 나눠두었네.〉
손님인 오델리아 앞에서 대놓고 담배를 태우던 어르신의 말씀이었다.
〈자네도 납득했을 테니까, 뻔하기만 한 얘기는 내 선에서 끝냈지.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 꼬마 노파는 히타이트 연구에 숟가락을 꽂고 싶어 하는 모양일세.〉
그래 뭐, 뻔할 뻔 자지.
어르신 말마따나 귀찮기만 한 대화였을 것이다. 생략해줘서 고마워용.
〈연구에 돈줄을 대주고 싶다는 건 사실이지만, 네가 새삼 돈이 필요하진 않잖니? 네 사업장은 몇 정도지만 다 알짜배기고, 이 늙은이도 있고.〉
‘꼬마 노파’라는 정중한 놀림에 턱에 힘을 주던 오델리아가 말을 받았다.
─뚝. 그녀는 맨손으로 초콜릿을 뽀갰다.
〈하지만 다음 탐사를 도와줄 여지는 있단다.〉
〈다음 탐사라뇨?〉
〈으음~ 우리 너무 시치미 떼는 대화는 관두는 게 어떨까?〉
몇십 년씩 칼밥 먹고 살던 사람은 남의 생각을 읽는 것도 능숙한 걸까. 초콜릿을 먹던 그녀는 참 곤란하다는 것처럼 손을 휘저었다.
〈셀루스티아 남작령의 유적이 진품이었다는 건 윈스턴이 가져온 유물로 확인했어. 하지만 그걸로 전부일 리가 없지. 정말로 중요한 정보나 기술이 잠든 유적이었다면.〉
─까드득. 오델리아의 이빨이 초콜릿을 부쉈다.
〈관리하는 게 아니라 묻어버렸겠지. 유인하는 함정을 팠다는 건, 함정이 실패했을 때의 부담이 적었단 거잖니? 당연히 다음 유적으로 넘어가야지. 동방에선 기호지세라고 하나?〉
〈그렇긴 합니다.〉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굳이 부정할 것도 없다.
나는 깃털의 존재를 밝히진 않아도 ‘이제 연구 끝! 해산!’은 아니란 걸 인정했다.
‘하지만.’
이 대화의 진의는 어느 사실을 시사했다. 나는 어르신의 안색을 살피고 말했다.
〈변경백께선 황실과 히타이트에 대해 얼마나, 아니.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우드득. 우드득.
내가 ‘우유 드릴까요?’하고 물어본 것처럼 세상 태평하게 초콜릿을 씹는 그녀. 하지만 이 질문은 이번 대화의 본질에 가까웠다.
‘이 사람은 황실의 더러운 면에 대해 알고 있나?’
알고 있다면 그에 대한 스탠스는 무엇이지?
당연히 이렇게 대범하게 나온 이상에야 ‘황실은 신이고 역사말소는 진리이다! 황실에 거역하려는 반역도당 놈들은 뒤져랏!’하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
그보다 원로원은 ‘황제 좆까’를 위한 모임.
변경백도 황실에 충성을 바치는 이는 아니겠지.
〈로마니아는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니?〉
오델리아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본심을 토로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집단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를 가늠하지 않아. 집단의 크기가 커질수록 책임도 커지지. 그 집단의 대표는 어깨에 걸린 목숨 때문에 얼마든지 비정해질 수 있고, 그래야만 해.〉
〈군주의 자질입니까?〉
〈그렇지.〉
현대적으로 바꿔 말하면 리더의 자질이다.
아니지. 보스의 자질인가?
더러운 내용이라서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 이 사업/경영이라는 건 총칼만 없는 전쟁이다. 피도 흐르고 사람도 픽픽 죽어나간다.
그건 현대 지구나 이세계나 똑같고 말이다.
‘Q. 통수를 맞지 않는 최고의 방법은?’
A. 뒤통수를 지키면서 남의 통수를 먼저 깐다.
이게 정답이다.
물론 이걸 실생활에다 적용하면 소시오패스다. 존나 마키아벨리스트신가? 부자한테는 돈을 보고 꼬이는 사람만 남는다지만 그러다 진짜 친구 1명 안 남는 수가 있어요.
그래도 나라와 가문의 대표는 그렇게 해야 한다.
나무위키에 사업가 이름을 쳐서 ‘사건/사고’나 ‘인품’ 등의 항목에 5줄 이상 갑론을박이 없으면 그 사람은 덜 유명한 거라고. 거 좆소기업 사장만 해도 싸패가 한둘이야?
이상론은 이상론이고 현실은 현실.
전쟁터에서 ‘살인은 나빠욧’하고 외치는 이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는 법이었다.
〈나는 이 나라가 좋아. 평생 국경을 지켜왔던 아우렐리우스 가문에 대한 자긍심은 내 깨달음의 근간이고, 평화로이 사는 시민들의 행복에는 내가 그 고생을 한 가치가 있었어.〉
〈그 점은 존경합니다. 이건 진심이에요.〉
나도 로마니아를 덮어놓고 싫어할 수는 없다.
라리루라와 티르시, 그리고 그녀들의 가족. 베로니카를 도와주던 소녀 로잔나.
이 아르마알스 가문 사람들.
전부 로마니아 인 아닌가. 감정과 이성을 따로 분간하지 않아도 이렇다. 감정끼리도 부딪혀가며 로마니아에 대한 호감과 역겨움을 오고 간다.
〈역사를 왜곡하는 게 보기 좋지는 않지만, 그 짓거리를 막겠다고 설치다가 내 본분을 그르치고 나라를 말아먹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어.〉
오델리아는 다리를 꼬았다.
변경백은 후작의 한 부류를 말한다.
외국과의 국경. 말하자면 최전선.
그런 땅을 지키는 수호자이기에 변경의 뛰어난 영주 가문은 이세계에서 후작으로 우대한다. 그런 그녀가 대놓고 황실에 의문을 제기하면 반기까지 들면 어떻게 될까?
‘휴전 직후의 대한민국에서 GOP 사령관이 정부 지침에 반발하는 느낌이지.’
간첩도 막 침투하고, 근대의 한국보다 국지전이 자주 터지는데 그럴 여유가 있나.
〈그래서 네게 감탄한 거야.〉
오델리아는 눈을 빛냈다.
놀랍게도 이런 대화의 한창인데, 자기보다 여러 모로 떨어진다고 여겨도 별 수 없을 내게 순수한 존경심마저 느끼는 듯 했다.
〈사람은 이익으로만 움직여. 내 머리로는 절대 승냥이 떼를 몰아서 음험한 양치기를 노리도록 할 수가 없었어. 그놈들을 회유할 고기가 부족했지.〉
내가 하이에나라고 부르는 한입만 숟가락충들을 부려서 히타이트를 찾아다니게 만든 걸 은유하는 거였다. 와! 여론전 모르시는구나!
‘아아, 이건 「언플」이라는 것이다.’
아틀란티스 회담부터 좆빠지게 빌드업한 것이지.
〈그래서 놀라웠어. 승냥이 떼한테 양을 노리게 하고, 양치기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그 녀석들이 숨겨둔 금화를 파내버리다니? 세상 어느 누가 그런 방법을 상상이나 해?〉
현대인의 언플에 익숙하지 못한 이세계인들한텐 내 찌라시가 참신했나 보다.
〈들개를 불렀다가 호랑이까지 꼬였지만요.〉
〈어흥~.〉
변경의 호랑이는 장난치듯이 깔깔대다가 물었다.
〈노르드. 거짓말의 제일 가는 단점이 뭐게?〉
〈거짓말을 반복하게 된다는 점이겠죠. 아니면 결국 들키기 마련이란 거.〉
〈맞아. 거짓말을 숨기려고 다시 거짓말을 하게 된다는 거야. 들키는 날까지.〉
등을 펴면서 눈을 감는 오델리아.
〈이 나라는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돼. 업보를 치르고 홍역을 치러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강하게 자랐어. 언제고 맞을 돌팔매라면 돌이 더 쌓이기 전에 미리 맞아두는 게 옳지.〉
〈제가 문학적 소양이 없어서요. 화끈하게 말씀해 주시면 기쁘겠습니다.〉
〈우리 같이 황실이 숨겨오던 터부를 까발리지 않을래?〉
오델리아는 비유는 관두고 뻔뻔하게 말했다.
뭐 눈사람이라도 만들러 가자는 듯이 즐겁게.
〈거짓말이나 비밀은 남이 숨겨둔 걸 폭로하는 게 제일 재밌잖니.〉
어휴 시발, 이 여고생 할머니 말하는 것 좀 봐.
절대 여장하고 돌아다닌 거 들키지 말아야지.
***
‘예상치 못하게 동료를 얻은 셈인가.’
먼저 응접실을 나온 나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나쁘지는 않다. 적의 강함이 손에 잡히지 않고 내 성장이 무언가에 발목을 잡혀버린 상황에서 나 이상 가는 싸움꾼의 합류를 사양할 이유가 없다.
의심할 이유는 없다.
다시 말하자면, 굳이 의심하려 들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오델리아의 검을 보았다. 깨달음을 보았다는 건 그 사람의 본질을 봤단 뜻이다.
그녀에게 음흉한 면이 있다는 건 팩트다.
그래도 그건 내가 진짜 적으로 보고 있는 놈들의 좆 같음과 비교하면 눈 감아줄 만한 문제였다. 이 문제는 강함이 아니라 적대성의 차이걸랑.
오델리아가 곧 죽어도 날 없애지 않으면 안 될 처지는 아니잖아?
‘깃털이 가리키는 유적이 당첨이라면 싸움은 더 격렬해질 거다.’
그게 내가 이 제안을 수락한 가장 큰 이유였다.
셀루스티아 남작령은 내 영지로 비유하면 아틀란티스를 정도.
중요하기는 한데, 아내님들의 안전 같은 최우선 순위와 비교하면 중요도가 낮다.
대응하고 지켜야 할 곳이 많으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장소에는 그만한 부하를 보낸다. 발퀴리에 1마리와 바이콘 마법사단 정도를 배치하고 ‘오는 놈이 있으면 막아줘’라고 시킨 느낌.
내게 있어서 바이콘들이 로마니아 황실에게는 99대대였다.
황실에겐 달인급 미스릴 클래스 9명이 그 정도 입지인 것이다.
‘다음에야말로 99대대와는 비교도 안 될 진짜가 올 가능성이 크다.’
그런 격전을 감당해내려면 우리 가족의 강화가 시급했다.
나 자신도 깨달음이랑 별개로 어떻게든 강해질 방법을 찾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팔찌를 쓰다듬었다.
“브류나크. 너 효과 쩔더라.”
─웅웅. 기쁘게 떨리는 팔찌.
룬 지팡이를 흡수한 브류나크와 베로니카가 준 깨달음 덕분에, 나는 【게르튀르】의 위력을 존나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게르튀르 푸타르크】.
찐퉁 마스터 클래스의 안목으로도 ‘맞으면 뒤짐’ 소리를 들은 기술.
내 넘쳐나는 마나통을 편하게 강함으로 바꿔낼 새 스킬트리였다.
‘제일 좋은 점은 이제 와서 새롭게 뭔가를 배울 필요가 없다는 거지.’
몸으로 말해요 룬 문자 편.
조합만 체득하면 원래 써대던 기술에서 위력만 올라가잖은가?
게임으로 빗대면 창술 데미지를 존나 올려주는 패시브 같은 것이다.
‘오러까지 더하면 우신의 가죽도 찢을 수 있다.’
처음부터 그 도마뱀들을 기준으로 잡고 설계한 기술이었는데, 목표치는 달성한 셈.
〈어? 아직도 여기 있었어?〉
그렇게 멈춰서 생각하고 있자 집무실에서 나온 오델리아가 말을 걸었다.
우두커니 서서 고민하고 있어서 눈에 띄었나.
〈예. 잠깐 생각을 좀.〉
〈그래?〉
오델리아는 어째선지 집무실을 살짝 확인하고서 팔찌를 벗었다.
그 팔찌는 손을 넣는 방향이 정해져 있는 매직 아이템인지, 역방향으로 팔을 집어넣자 커지면서 오델리아의 손을 팔뚝까지 삼켰다.
〈받으렴.〉
낡은 책자를 내미는 오델리아.
할머니가 엄마의 눈을 피해서 손주에게 용돈을 쥐어주는 것 같다고 하면 맞겠지?
〈……웬 겁니까?〉
〈스쳐지나가는 인연을 붙잡는 덴 선물만한 게 없잖니?〉
그래서 〈아공간〉 유물에 명함 대신 바리바리 집어넣고 다니신다?
잘 나가는 왕족이나 대귀족 쯤 되면 몸에 달고 다니는 장비에 유물 1~2개는 있는 법인가. 하긴 빈익빈 부익부인데 에픽템을 둘둘 두르고 다닐 법 하지.
나는 일단 책자를 받아들고 질문했다.
〈주신다니 받겠습니다만, 무슨 책입니까?〉
〈황금시대의 마스터 클래스 어쌔신이 사용하던 단검술.〉
〈……예?〉
멍청하게 되묻자 오델리아는 연무장을 눈짓했다.
〈네 짤막만한 아내한테 선물로 주렴. 잘 맞을 걸? 재능 있어 보이던데.〉
〈……………….〉
그, 뭐냐.
어른이 주는 건 순순히 받아야 착한 어린이라고 그랬어요.
하여튼 0티어 권력자들은 참 통도 크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