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단의 이동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쥐새끼처럼 움직이는 건 싫은데.〉
〈동의합니다. 어느 정도는요.〉
소멸했다는 초원은 내가 추측한 유적 위치와의 교집합이었다. 학계의 탐사단을 후발대로 두고, 또 오델리아의 기사단을 데려가려면 몰래 움직이기는 텄다.
〈이튿날에 바로 출발하겠어.〉
오델리아가 그렇게 말해서 나는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오늘 바로 프랑의 단검술을 봐 줘야겠군.’
일어난 프랑은 낯선 느낌에 놀라다가 내 얘기를 듣고 적응훈련을 부탁했다. 바로 무예의 진수를 체득하지는 못했겠지만 손에 익히긴 해야 할 것이다.
─챙!!
프랑한테 진검을 들려주고, 골렘까지 사용하게 시켜서 실전처럼 붙었다.
“노르, 미안! 사과는 끝나고 한 번에 할게!”
“안 다치니까 그럴 것 없어.”
채채챙─!! 단검을 받아치는 나.
내가 만든 기술이지만 파괴력이 대단하다. 브류나크가 아니었으면 창 째로 썰렸다.
‘위력이 높은 기술이라서 맞으면 야수회귀도 뻥 뚫리겠지.’
까짓거 안 맞으면 그만이지.
내가 만든 기술인데 예상이 안 될 리는 없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프랑도 내가 ‘내 실력을 못 믿는구나?’하고 울적한 척을 하자 넘어왔다.
“이제 어떻게 쓰는 건지 알겠어.”
땀에 젖도록 연습한 프랑은 물을 들이키다 기쁜 얼굴로 웃었다.
“내가 쓰기 편하게 만들어준 거지? 고마워! 나 진짜 기뻐!”
“흐흐. 프랑은 솔직해서 좋다니까. 말만 들어도 보람차네.”
“에헤헤. 그야 전부 진심인걸?”
한동안 상대해주고 있자 라리루라도 끼워달라며 나타났다.
“언니? 라리루라는 지금 귀여운 얼굴의 뒤에서 부러움에 시달리고 있답니다!”
“라리루라도 꼭두각시 많이 받았으면서.”
“아핫♡ 그렇게 말씀하시면 또 할 말은 없구요!”
농담을 나누던 아내들끼리 훈련 개시.
늘어난 마나에 맞춰서 개수한 링링이 6호과 한 손에 단검을 쥔 프랑이 맞붙었다.
라리루라가 쓴 〈폐막유희〉의 역장이 프랑에게 감겼지만, 프랑은 하프 드워프의 완력과 단검으로 찢으면서 응전했다. 보법도 능숙해졌고.
그렇게 앉아서 구경하고 있자 티르시가 말했다.
“단검술답지 않게 굉장한 위력이네요.”
“음. 프랑의 마나량을 살리는 기술이더냐?”
같이 찾아온 베로니카도 팔짱을 꼈다.
“나는 검술에는 조예가 없지만 급조한 기술답지 않은 완성도로군.”
“그렇게 말하면 표현은 좋지만, 연비를 낮추고 위력에 치중한 거지.”
“그게 어때서요? 프랑 씨는 늘어난 마나를 살릴 기술이 골렘 마법밖에 없었는걸요.”
마법사인 저희랑은 다르게요. 티르시는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손가락에 눈꽃 결정을 만들었다. 꽤 숙련된 완성도인 듯 보였다.
“기술의 위력만 늘어나도 싸울 때의 부담감이나 방법이 달라지는걸요.”
전사한테 신체능력은 강함의 절대적 기준이다.
반면 마법사가 강해지려면 마나량을 늘리는 게 제일.
티르시와 베로니카도 장비를 얻고 마법 연구를 거듭하며 어느덧 미스릴 클래스의 직전까지 왔다. 위력만 따지면 오러쟁이들보다 나을지도 모르고.
우리 아내님들의 강화계획은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좋겠지만…… 음.”
나는 말하다가 말고 곤란해졌다. 비검 기사단의 단원들이 일과인 단련을 실시 중이었는데, 몰입도가 내가 전에 몇 번 봤을 때보다 한참 모자랐다.
묵묵하게 체력단련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낯빛이 울적한 사람이 더 많았다.
거의 연휴 다음날 출근한 회사원 같았다.
‘저번 대련 때의 충격이 컸나.’
세상은 넓다. 그들은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기사단일지언정, 무적은 아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들에겐 제일 믿음직하던 기사단장이 스승에게 부족함을 과시당했으니 저럴 만도 한가. 오델리아더러 배려심이 모자랐다고는 할 수 없는 게 전사의 비애다.
그러던 나는 위화감을 눈치챘다. 연무장에 기사단장의 모습이 안 보였다.
물론 그도 매번 훈련을 주도하진 않겠지만……
“아, 그런 건가.”
고민 중에 기척을 느낀 내가 픽 웃었을 때였다.
뚜벅, 뚜벅….
키 작고 여리여리한 소녀가 입구에서 나타났다.
〈일동 차렷!〉
외부인인 변경백에게 경례하진 않아도 신분이나 실력을 보면 그녀도 존경받기 충분한 인물이었다. 대표인 상급기사의 지시대로 멈춰서는 기사들.
〈여전히 저희 기사단은 믿음직하네요.〉
〈마님!〉
게다가 그 변경백의 곁에 아이를 안은 프리모르까지 있었으니, 훈련을 멈추지 않는다는 게 훨씬 어불성설인 일이었다.
프랑이랑 라리루라도 하던 걸 멈췄다. 함께 온 기사단장이 손을 저었다.
〈전원 편히 쉬도록. 훈련을 방해하게 되겠지만, 장소를 좀 빌리지.〉
〈……예!!〉
그들의 상급자가 명령을 내리자 군기가 제대로 든 기사들은 일단 자세를 풀었다.
하지만 그러는 한편으론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패검(佩劍)은 하지 않았지만 오델리아와 기사단장은 무장하고 연무장을 찾아온 것이었다. 기사들 몇몇이 눈치 빠르게 목검을 가져왔다.
목검을 받은 기사단장은 연무장을 가로질러서는 스승의 반대편에 멈췄다.
〈제 억지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검을 겨눴다.
지난 날의 리벤지였다.
〈……훈련 중지! 연무장을 비워라!〉
─우르르! 상급기사의 지시에 기사들이 움직였다.
스승과 제자를 바라보는 그들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띄웠다가, 그들의 대표를 대표를 향한 존중과 자부심으로 우려만을 지웠다.
〈나는 내일이면 떠나. 너랑 다시 만날 기회는 있겠지만 검을 겨뤄볼 일은 거의 없겠지. 경우에 따라서는 이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어.〉
기대감에 찬 시선을 둘러본 오델리아가 말했다.
〈패배를 무르는 것도 방법이지. 사람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아.〉
고작 며칠만에 재도전한다고 결과가 바뀔 리가 있나.
그녀는 언외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지고 있었음에도 깨닫지 못했던 걸 되새길 따름.〉
하지만 검을 겨눈 기사단장의 자세는 굳건했다.
눈빛을 가라앉힌 오델리아는 그러면 됐다는 듯 검을 세웠다.
─꽈악. 내 손을 쥐는 프랑.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우기 시작해서일까? 잠깐의 연습보다 이 싸움을 보는 게 더 값어치 있다는 걸 느낀 듯 프랑은 숨도 죽이고 집중했다.
고요하던 연무장에 바람이 불었다가 찢어졌다.
상대의 검술을 알 만큼 알 뿐더러, 기사단장은 오델리아의 안목을 초월한 검술을 펼치지 못한다. 검로(劍路)를 읽히는 게 뻔하기에 정답도 뻔했다.
첫 수로 결판을 짓는다.
〈잘 보렴, 루키우스. 네 아빠도 자랑스러워하던 검술이란다.〉
프리모르는 품 속의 아들에게 속삭였다.
가문의 도련님은 순진한 얼굴로 자신을 지키는 기사단의 대표에게 손을 뻗었다.
지켜보는 이는 많고 패배의 의미는 무겁다. 그 상대가 로마니아에서 가장 빼어난 검사라고 해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치솟는 긴장감은 임계점을 넘은 듯 침을 삼키는 소리마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어느 기사가 그만 수통을 놓쳤다.
자신을 몰아붙이는 훈련으로 탈진했던 것일까. 빈 수통은 땅으로 곤두박칠쳤다.
─퉁.
그렇게 수통이 바닥과 닿은 순간이었다.
기사단장이 질풍처럼 거리를 좁혔다. 바람을 두 다리에 휘감은 도약. 비검 기사단의 오의인 도약 보법은 바람의 마나 덕분에 예전보다 신속했다.
단지, 괄목할 부분이라고는 그것 뿐.
그저 좀 더 빨라진 검에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세상엔 더 빠르고 더 강한 것이 얼마든지 있다.
저 바람과 같은 질주보다 빠르게 달리는 흉포한 몬스터도, 기사단장보다 강한 적도 전부 일패도지했던 오델리아의 눈에는 차지 않을 것이었다.
나 또한 저것보다 빠르고 강대하던 적을 몇 명 이상이나 댈 수 있었다.
아니, 프랑이나 우리 아내들조차 그랬을 것이다.
한결같은 우직함은 미덕이지만, 그걸로 나아질 정도로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검을 받아치는 그때까지도 오델리아가 의지와 근성밖에 남지 않은 제자에게 아무 감정도 보여주지 않았던 이유는 말이다.
오델리아의 검이 태양빛을 비췄다.
자연의 힘을 휘두르는 검. 내가 모르는 절기가 그녀의 손에서 펼쳐졌다.
그런데 어째서였을까. 기사단장은 머뭇거리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때, 프랑이 중얼거렸다.
“바람이 그쳤어.”
오델리아와 나를 포함해서 누구도 깨닫지 못한 사실.
기사단장의 검에 바람이 몰아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나 뿐만 아니라, 프랑 본인도 자기가 한 말에 놀라며 눈을 크게 떴을 때.
─채앵!!! 그들의 검이 부딪혔다.
오델리아의 절기는 그 여파로 연무장에 깊숙한 흔적을 남겼다. 반면 기사단장의 검은 폭풍 같은 바람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날카롭게 뿜어진 것도 아니었다.
〈바람도 때로는 그쳐야 할 때가 있겠죠. 영원히 떠도는 나그네는 없으니.〉
그래도 기사단장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바람도 돌아갈 장소는 있어야 하겠죠. 머무를 곳이 없어선 처량할 터이니.〉
목검이 부러지지도 않았고, 베인 곳도 없었다.
달인 중의 달인에게 정면에서 덤벼들어서 뚫고 나간 것이었다.
그는 검을 내려친 상태로 말했다.
〈제 검은 바람이 돌아오는 둥지이길 바랍니다. 머물다 떠날 수 있는 안전한 장소이길 바랍니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검을 놓치지 않은 기사단장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지키지 못했던 차기 가주의 아들은 어머니 품에서 방실거리고 있었다.
〈몇 년 못 봤다고 시인이 다 됐네.〉
오델리아는 올려쳤던 검을 한 바퀴 휘둘렀다.
〈그렇지만, 그래.〉
─주륵.
그녀의 뺨에 그어진 실선이 얇게 피를 흘렸다.
날이 없는 목검인 것에도 무관하게, 뺨을 찢은 바람이 그만큼 예리했던 것이다.
〈앞으론 어디 가서 내 제자라고 말하고 다녀도 좋아.〉
오델리아는 목검을 옆구리에 끼고서 기분 좋게 말했다.
바람을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오고 가게 한다. 마스터 클래스의 경지는 못 되더라도 기사단장이 얻은 깨달음의 힘은 그 위력을 여실하게 입증했다.
기사단장은 긴 한숨을 토해내고서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예, 스승님.〉
나는 한 발 늦게 눈치챈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나한테도 스승이었다는 말은 일언반구도 없고, 당사자한테도 원로라고만 부르더니. 알고 보면 다 그런 이유에서였던 모양이다.
마초의 자존심이란 이리도 억척스러운 것이었다.
프리모르도 나랑 같은 마음으로 한숨을 쉬었다.
〈정말, 성실한 것도 정도가 있죠.〉
〈꺄우!〉
핏덩이 도련님의 해맑은 웃음이 산뜻한 끝맛을 남기며 대련의 끝을 고했다.
“……아핫♡! 좋은 구경을 했네요!”
“응. 정말로 그래.”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었던 걸까. 프랑이랑 라리루라는 여운에 젖어들었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거에요?”
“모르겠군. 예상을 웃돌아서 뺨을 벴다는 것은 알겠다만, 그 외에는 전혀……”
아리송하니 고개를 모로 꼬면서 갸우뚱 거리는 마법사 콤비. 음. 갬성의 차이가 이렇게 확고하게 갈리는군. 삭막한 이과식 논리로는 몰라봐도 별 수 없긴 하다.
“바람의 마나가 검을 가속시킨 겁니다. 본인의 능력 이상으로요.”
“변경백의 예상보다 더 빨랐다는 건가요?”
“낭만은 없지만,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그렇죠.”
이치에 맞게 설명하자면 그런 것이었다.
마스터 클래스의 안목은 초능력보다는 경험이나 상식에 근간한 예측이다.
그래서 기사단장의 검은 오델리아의 예측을 벗어났다. 기사단장이 저 자세, 저 힘, 저 속도에서는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 움직임이었기에.
오델리아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뺨을 베인 이유였다.
달인형 마스터 클래스를 이기고자 한다면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기예로 상대의 예상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크게 깨우친 느낌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프랑이나 라리루라도 뭔가 갈피를 잡은 듯 하고, 나도 마스터 클래스의 적을 이길 단서랄 걸 얻을 수 있었다. 실천하는 건 어렵겠지만 말이다.
투자한 시간에 비하면 얻은 건 차고도 넘쳤다.
‘나 자신의 한계라…….’
나는 팔찌 상태의 브류나크를 내려다보았다.
오딘의 눈을 켰다. 보석처럼 깎인 미스릴의 표면에는 내 눈동자가 비치고 있었다.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의 지혜를 머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