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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척척석사 노루-795화 (793/1,009)

키아라는 착지의 충격에서 몸을 추스렀다.

생각보다 먼저 몸을 움직였다. 그늘에 숨은 그는 손에 쥔 팔뚝을 꽉 쥐었다.

‘팔을 잘린 건 몇 년만이던가요.’

기억하기론 20년 쯤 전이 마지막이었던 듯 하다. 그는 잘려나간 팔을 단면에 붙였다. 워낙 깔끔한 단면이었지만 그 정도론 붙을 리 없다.

“쓰으으으으……”

하지만 그가 몸에 흐르는 피를 일깨우자 단면은 용접하듯이 붙었다.

물론 겉모습 뿐이다. 추가로 포션을 마셔서 그 단면을 강고히 했다.

─까딱까딱. 손은 다시 움직였다.

‘엘릭서는 울프헤딘 경에게서 몇 병 사뒀지만, 이 정도 부상에는 아까우니.’

엘릭서는 스스로 치료하지 못할 치명상에 쓰는 게 옳았다.

상처를 고친 그는 조용하게 도시를 살폈다. 이 넓은 지대를 둘러보려면 높은 곳으로 가는 게 제일이겠지만 그만큼 위험할 가능성도 컸다.

‘그러나, 감수해야 할 위험부담이겠죠.’

고지대에서 일행과 합류할 수도 있으니.

그는 오감을 깨우다가 눈치챈 사실을 확인하는 마음으로 근처의 벽을 짓눌렀다.

노르드에게는 엄살을 부렸지만 신체가 쇠약해진 걸 빼면 부상은 적다.

단지 신체능력이야말로 강함의 근간인 키아라였기에, 약화된 것도 맞았다.

우신의 힘을 해방하면 오델리아에게도 이길 수 있겠지만, 지금은 미스릴 클래스 중하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초인이라기엔 충분한 힘이다.

꽈아악…!

장정 100명이 올라탄 것보다 강한 압력으로 키아라는 벽을 짓뭉갰다.

석조건물이라면 가루가 되기에 충분한 압력!

‘부숴지지 않는군요.’

건물은 그 압력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공간의 왜곡이 이계 전체에 펼쳐져 있다.

합류를 우선하자. 노르드의 아내들과 합류하면 기습을 가해온 쌍검의 사내가 다시 나타나도 몸을 피할 수는 있을 것이었다.

키아라는 기척을 죽이며 고지대로 이동했고, 그 중간에 멈췄다.

철컥, 철컥….

아주 작은 발소리였다. 그가 아니었으면 놓쳐도 이상할 것 없다.

신중하게 움직이는 금속성의 발소리!

‘풀 플레이트 메일의 철 구두?’

일행 중에 금속 갑옷을 입은 이는 없다. 얘기를 듣기로는 다나 베르베이아 박사가 마나로 갑옷을 만들 수는 있댔지만, 십중팔구 아닐 것이었다.

동료일 가능성과 기습의 이점을 저울질한 그는 건물 위로 소리없이 올라갔다.

‘이건……’

그리고 그 상대의 정체를 발견하고서, 아래로 휙 뛰어내렸다.

***

촉수 마법사의 이름은 알리라는 모양이었다.

〈익스프레스한 이름이군.〉

【뭐, 뭐?】

〈혼잣말이야, 새꺄.〉

본인이 지껄인 바로는, 그는 상원의원 다비드가 고용한 마법사 길드의 마법사라고 한다. 정확히는 프리랜서에 가깝지만 연구원으로 고용된 것이다.

〈무슨 연구지?〉

【……공간 마법.】

〈히타이트의? 유물을 쪼물거리며 밥 벌어먹고 살았나?〉

촉수 마법사는 이세계 학문의 최첨단을 그렇게 표한하자 자존심이 상한 듯 했지만 눈치껏 머리만 끄덕거렸다. 나는 생각을 거듭했다.

〈이곳으로 이어지는 문은 다비드가 열었겠지? 그럼 너희를 고용한 건 대외적인 위장이거나, 이 공간의 위치를 찾아내려는 하청이었겠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분의 심오한 마도에 비하면 내가 마법사 길드에 돈을 가져다 바치면서 습득했던 학문은 쓰레기나 다름없었지……】

자학보다는 황홀해 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의 명치를 후려깠다.

【끄악!! 왜, 왜……?】

〈재수없어서.〉

짧은 대꾸에 말문을 잃는 촉수 마법사.

말하자면 악마에 홀린 과학자 같은 것일까. 다비드라는 원로는 사람을 홀리는 화술이 뛰어나다고 했으니 그 일환일 것이었다.

〈괴물이 되고서라도 마법을 연구하고 싶었나? 다른 두 놈들도?〉

【다른 놈들의 생각까진 모른다. 갑자기 제안을 받았고, 그분 곁을 지키는 기사놈들한테서 따르지 않았을 경우의 결말을 보았다. 죽고 싶지 않아서 복종한 놈도 있겠지.】

〈생각보다 순종적이군?〉

【……너도 그분을 만나보면 알 것이다. 인간과 비교도 되지 않는 존재야. 그분이 신들이 떠나간 직후의 고대에 뜻을 펼쳤다면 새로운 신으로 군림하셨어도 이상하지 않다.】

변명하는 말대꾸. 나는 픽 웃었다.

〈니 충성심 말고. 나한테 대답을 따박따박 잘 한다고.〉

【……………….】

촉수 마법사는 침묵 끝에 말했다.

【계약을 나눴을 때, 감히 상상도 못할 심연의 지식과 풍요로운 지혜의 꿀을 핥았다. 무진한 공포심과 존경심이 치솟는, 맹독 같은 꿀이더군.】

그의 목소리는 공포로 떨고 있었다.

【기사 놈들의 선택이 옳았다고, 한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내 혼은 저당잡혔고, 죽음조차 죽음이 돼 주지 않으리라. 그렇기 때문에라도 죽을 순 없다.】

〈불지옥에라도 떨어지나 보지?〉

우신 토나슈일루카틀과 비슷한 케이스일까.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이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마초가 여인의 엉덩이에 꼴리는 것처럼 저들은 인간의 영혼을 콜렉션으로 삼는 게 아닐까.

【흐, 흐흐. 불로 지져지는 고통에 비할까. 그렇기에 더 알 수가 없는 것이야.】

그는 벽에 달라붙으려는 것처럼 기어갔다. 나한테서 도망치려는 것처럼.

【너는…… 도대체 뭐하는 존재냐?】

〈노르드 폰 울프헤딘. 보다시피 학자다.〉

【이름 따위는 묻지 않았다. 너는, 너는 어떻게 그 심연의 힘을 네 것처럼 다루지? 다비드 님처럼, 아니. 그분보다 더 자연스럽게……】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는 나를 셀루스티아 남작을 보듯 바라봤다. 사람의 거죽을 쓴 정체 모를 괴물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난들 아냐. 악영향이라도 받았는갑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왜인지는 알고 있다.

시구르드 이전에 오딘의 성좌를 더럽힌 존재.

남작이 ‘천공신’이라며 섬기던 어떤 신적 존재의 영향은 야수회귀와 울프헤딘의 운명을 타고 나의 몸에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폭주 중에는 나한테 직접 간섭하기도 했고.

나는 ‘혼돈의 마나’라고 부르고, 촉수 마법사는 심연의 힘이라고 부르는 그 힘.

그 힘을 다룰 수 있는 것도, 내가 어둠과 음의 마나에만 유독 비정상적인 적성을 가진 것도 대충 비슷한 맥락일 것이었다.

【흐, 흐흐……. 뭐, 아무래도 좋은가. 그걸 안답시고 내 처지가 바뀌진 않으니.】

그렇게 지껄이던 후드 안쪽에서 축축한 안광이 터져나왔다.

【Eahj'ot- Ahula──!!】

─푸확!!

터져나온 건 안광만이 아니었다. 그놈의 가슴도 쩍 갈라지면서 굵직한 촉수 다발이 튀어나왔다. 그 몸속에 절대 안 들어갈 굵기와 양이었다

〈찌찌 커다란 거 보소. 무쳐버린 거냐구.〉

뒤로 뛰면서 브류나크를 휘둘렀다.

내 급소를 노려대는 촉수를 몇 가닥 잘라냈다. 기사들보다 더 질겼다.

그래도 베어내고 몸을 지키는 데 큰 무리는 없는 정도였다. 촉수 마법사는 미스릴 수갑에 묶인 채로 일어나서는 옆의 동료들을 잡아먹었다.

【죽어라!! 네놈을 잡아먹고 그 자질을 연구해 주겠다!!】

촉수로 마법사와 사제를 짓이기며 흡수한 그가 외쳤다.

나는 검은 피에 젖은 창을 거뒀다.

〈시체가 말을 하네.〉

【……ㅝㅁ?】

…뎅겅. 그의 목이 뒤늦게 바닥에 떨어졌다.

【게르튀르 푸타르크】·ᚱ(Raidō).

반격기 제 6품새는 적의 공격이 닿는 것보다 더 빨리 창의 길이와 스피드를 살려서 족치는 카운터 기술이었고, 나는 그 창술에 가속의 룬을 담았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기술은 눈에도 보이지 않는 존나 빠른 반격기.

나는 뒤로 후퇴한 시점에서 촉수가 뻗어오기도 전에 마법사의 목을 쳐냈던 것이다.

곧바로 룬 스톤을 꺼냈다. 이 새끼들의 영혼을 회수해서 가두기 위해서였다.

슈와아아아악─!!

영혼은 룬 스톤에 빨려들어가고, 놈들이 쥐꼬리 만큼 갖고 있던 혼돈의 마나는 브류나크가 꺼억- 하고 뚝딱 해치워버렸다. 이 아빠는 걱정이 태산이에요.

“계약인지 뭔지는 몰라도 영혼이 끌려가기 전에 잡으면 그만이지.”

신체포기각서 특) 안 지키면 그만임.

흑마피아 새끼를 놓쳤을 때 깨닫고, 우신 토벌 때 습득한 교훈이었다.

“선배! 무슨 일이에요?!”

“덮쳐들길래 잡았어. 망 보고 있으라니까.”

라리루라가 허겁지겁 들어왔지만 나는 손짓으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룬 스톤을 이마에 댔다.

‘브류나크가 흡수한 룬 지팡이의 힘이면……’

셰이드의 꿈에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나는 집중하며 그 영혼에서 필요한 기억만을 추출했다. 한 사람의 기나긴 인생을 엿보는 것보단 효율적이다.

‘추출할 수 있는 정보는 한정되지만, 어차피 이 새끼들이 알 만한 거라곤 뻔하지.’

나는 그들로부터 몇 개의 마법 지식과 여기까지 온 이유, 그리고 몽타쥬로도 본 다비드의 얼굴을 확인했다. 거기까지는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라리루라는 걱정스러운 것처럼 날 들여다봤다.

“선배? 다치신 덴 없죠?”

“당연하지 이 새끼들, 이유도 모르고 끌려왔나 봐.”

나는 룬 스톤을 챙겨넣으면서 말했다.

“다비드가 초원이 날아가버린 걸 듣고 데려와서 차원 문을 열려고 할 때, 쌍칼잽이 새끼가 모가질 노려대서 허겁지겁 들어왔던 모양이야.”

“그러면 저 사람들도 안에서 헤매고 있을까요?”

“시간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면.”

라리루라는 고심하며 팔짱을 꼈다.

“제가 봤는데요, 선배. 이 이계공간은 미로처럼 휘어 있어요. 목적지는 성이고, 그 성은 더 강고한 뭔가로 막혀 있었구요! 저는 그쪽에서 헤매다가 온 거에요.”

“여기서부터 성까지 생각보다 가깝다는 거?”

“그렇지도 않아요. 분명 저는 성 근처에서 한 발짝 움직였는데, 갑자기 풍경이 바뀌었거든요! 성이 갑자기 훨씬 뒤편으로 보이던걸요?”

“공간이 뒤엉켰군.”

로켓단 기지처럼 워프 스퀘어를 제대로 밟아야 도착할 수 있다는 건가.

나는 짐짓 고민하며 심사숙고를 했다.

고민하는 데 쓰는 시간마저 금쪽처럼 아깝다. 이 시간 낭비 중에 아내님들이 위험해질 걸 생각하면 당장 잡생각은 관두고 움직이고 싶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꾹 참았다. 서둘렀다가 일을 망치면 그 편이 더 큰일이다.

불로 지져지는 듯한 인고의 시간.

“……선배, 그 깃털을 꺼내 보시는 건 어때요?”

내가 나답지 않게 몇 분이 되도록 고민만 하자, 라리루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깃털?”

“유적에서 주운 거 말이에요! 어쩌면 이럴 때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구요☆?”

“아, 그러네?”

나는 엘리트 대갈통을 풀가동하며 깃털을 손에 들었다.

─살랑.

깃털은 살랑거리면서 움직였다. 지켜보던 나는 그 깃털을 기둥에 갖다댔다.

스이잉….

기둥에서 느껴지던 느낌이 변했다. 꽈배기처럼 꼬여진 게 원상복구된 건 덤이었다.

라리루라는 환한 얼굴로 팔짝 뛰었다.

“그것 보세요! 역시 히타이트의 유물! 효과가 있잖아요♡!”

“그러게? 이걸 쓰면 왜곡된 공간을 그냥 오갈 수 있겠다.”

“선배가 찬 〈공간 도약〉 시계도 이런 곳에서 멀리 공간을 뛰어넘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잘못하면 어디 이상한 공간에 날려버려질지도요☆?”

“상큼하게 말하지 마. 그래도 멀리 날아가는 건 삼가야겠네.”

그렇게 돼도 ᚱ(Raidō)의 룬으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말이다.

깃털로 근처의 오브제를 고쳤다. 대체 뭔가 싶은 모양새였는데, 고치고 보니 식탁이었던 모양. 나는 역사적 의의가 깊은 골동품에 엉덩이를 걸쳤다.

“미안한데, 라리루라. 잠깐만 쉬자.”

고개를 모로 꼬는 라리루라에게도 손짓을 했다.

“기습을 당했을 때부터 체력을 너무 많이 썼어. 간단한 식량이라도 먹고 피로부터 풀지 않았다간 강적을 만났을 때 개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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