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을 당했을 때부터 체력을 너무 많이 썼어. 간단한 식량이라도 먹고 피로부터 풀지 않았다간 강적을 만났을 때 개털릴 것 같다.”
“앗, 네. 서두르다가 다치면 안 되기도 하구요!”
내가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자 라리루라는 손을 쪼물거리며 다가왔다.
“우후후. 어깨라도 주물러 드릴까요~?”
“됐어. 그보다는 내 쪽에서 주무를련다.”
─탁탁. 나는 무릎을 두들겼다.
“……어, 네? 거기 앉아요?”
“응? 왜?”
“에, 이런 상황에요?”
“내 힘의 근원은 아내님들의 가슴이란다.”
“싫은 근원이네요. 뭔가요? 가슴의 신님이라도 되실 생각이신가요?”
“귀찮을 것 같은데. 내가 관장하는 가슴은 우리 아내님들 거면 충분해서.”
“와아, 뻔뻔도 하셔라.”
라리루라는 조금 망설이더니 쭈뼛거리며 무릎에 앉았다.
낯익은 향기가 났다. 향긋하군.
과연 발기는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말캉말캉.
나는 지체없이 그녀를 안고서 가슴을 주물렀다. 으음. 감촉 보게.
“우와, 이 사람 진짜 만지고 있어……”
“배고프지? 가슴에 기운이 없네. 너도 배에 뭣 좀 채워넣어둬.”
눈을 감고 한참을 주무르던 나는 식량을 꺼내서 그녀에게도 건네줬다.
“아, 초콜릿이에요? 잘 먹겠습니다!”
당황하던 라리루라는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내가 준 초콜릿을 한입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우물거리며 씹다가, 천천히 저작하는 턱이 느려졌다.
굉장히 이상한 표정이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는 듯도 하다.
“맛있지?”
“네? 아, 음…… 네에.”
“……푸흐흐. 크흐흐흐흐!!”
나는 낄낄거리다가 다른 초콜릿을 내줬다.
“맛이 좀 생각하고 달랐지? 그거 민트 초코야. 호불호 엄청 갈리는 거.”
“……선배. 이럴 때까지 장난을 치셔야겠어요?”
“미안. 상한 건 줄 알았어?”
“몰라요. 하여튼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니까.”
─홱! 토라진 것처럼 초콜릿을 낚아채서는 입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그 농밀한 단맛에 멈칫했다가, 와구와구 씹어먹었다.
“후아…… 잘 먹었습니다♡!”
“배고팠지? 원래는 들어오기 전에 밥을 좀 먹고 왔어야 했는데.”
나는 라리루라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투시를 껐다.
그녀의 가슴을 주물거리며 도시를 돌아보는 건 몇 분이면 충분했다.
키아라나 그와 합류한 파티, 그리고 방금 전의 기습한 쌍검잽이한테 자신의 기사단이 전멸당했으리란 생각에 분노하며 돌아다니는 오델리아도 볼 수 있었다.
‘다른 아내님들은 어디 숨어 있는지 찾기 조금 힘들지만……’
존나 넓은 도시다. 항공뷰로 보는 거면 몰라도 건물 안까지 전부 훑는 건 너무 곤란했다. 지하실 같은 곳도 있다면 몇 시간은 앉아 있어야 하고.
‘셀루스티아 남작은 내 천리안을 눈치챘었다.’
다비드라는 놈도 마찬가지로 황실에 숨어 있는 어떠한 존재라면, 내 시선을 눈치챌 게 뻔했다. 몇 명의 위치는 알아냈으니 말이다.
투시라면 언제든지 다시 쓸 수 있고.
나는 추락 지점과 방향을 기점으로 잃어버렸던 메달의 위치를 확인한 뒤에 엉덩이를 들었다. 이제 그만 움직일 때였다.
“라리루라. 소리 안 내고 움직일 자신 있지?”
“물론이죠♡! 선배 침대에 숨어들듯이 조용조용 걸을게요!”
“들키고 싶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나는 피식 웃고서 앞장서는 라리루라의 뒷목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자, 그러면……’
이 녀석은 대체 누굴까.
‘라리루라는 아니다.’
합류했을 때부터 의아했고, 끌어안았을 때 벌써 느꼈다.
‘가슴의 크기가 달라. 한 사이즈 더 커.’
그뿐인가? 가만히 살펴보면 행동거지도 다르다.
라리루라는 팔짱 같은 건 끼지 않는다. 건방져 보이는 걸 싫어하니까.
게다가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경계심도 없이 움직이며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선배 거기 계세요?’ 같은 질문을 할 리도 없다.
초콜릿은 개발 과정에서도 실컷 맛 봤다.
민트를 넣은 초콜릿은 입에 넣자마자 ‘우웩’하고 뱉고선 울먹거거리며 ‘저한테 정이 떨어지셨으면 말로 해 주세요’라며 칭얼거리던 라리루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키아라와 합류한 일행에 이미 라리루라가 있다.’
금속 꼭두각시인 링링이 6호를 다루고 있는, 내 귀여운 아내님이 말이다.
그중 어느 쪽인가는 가짜이고, 의심은 확정됐다.
이 녀석이 가짜다.
‘촉수 브라더즈한테 은근히 공격하게 시켜볼까 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나.’
부탁하고 싶었던 건 그거였는데, 사실 이제부턴 있으나 마나 상관 없긴 했다.
이 잠깐 사이에 확신을 얻었으니까.
‘천리안을 쓰려는 걸 숨기길 잘 했군.’
일부러 핑계를 대면서 가슴도 재확인하고, 내가 천리안을 발동한 걸 숨겼다.
천리안의 존재를 아는지는 몰라도, 내가 도시를 정찰하려 한다는 걸 이 녀석이 눈치채면 곤란하지 않겠나. 내가 라리루라를 찾아냈다가는 자길 의심할 게 뻔한데.
그래서 이 녀석은 깃털의 효과를 언급해 놓곤, 천리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입에 담지 않았다.
‘천리안을 쓸 수 있다는 걸 모르거나, 내가 눈치채길 바라지 않은 거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먼저 말했다.
내가 고민하다가 ‘천리안로 봐 보면 되네!’라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도록.
하지만 근본적인 의문도 있다.
‘이 녀석은 나와 라리루라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아.’
나와의 관계. 깃털의 존재. 그밖의 여러가지.
잠깐 지켜본 정도로는 알 수 없는 부분까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말투가 똑같은 건 물론이었고, 라리루라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상하게 빠삭하다.
가끔 머뭇거리거나 흉내를 실수하는 걸 보면 100% 이해한 건 아니겠지만, 뭘 어떻게 하면 저 퀄리티의 연기가 가능할까?
‘생각할 수 있는 제일 나쁜 케이스는……’
이 녀석에게 아내들 중 누군가가 잡혀 있는 것.
‘아내들 중 누군가가 이 새끼한테 기억을 추출당하고, 사로잡혀 있다면?’
다시 말해서, 그녀들이 인질이 됐을 가능성이다.
나도 시체한테서 기억을 뽑을 수 있었다. 내가 오딘의 눈으로도 변신을 알아볼 수 없었던 새끼가 그 정도도 못할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이 새끼가 변장을 들키고 나서 도망치면, 그땐 잡혀간 아내들이 위험해진다.’
라리루라가 같은 장소에 2명 있는 것도 피해야 했다.
‘아내들이랑은 당분간 합류할 수 없겠네.’
이 놈을 어떻게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진실이 뭐가 됐든,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선배? 안 가세요?”
라리루라가 문득 돌아보았다. 나는 싱긋 웃음을 지어주었다.
“아니, 가야지.”
만에 하나,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다른 강적이나 일행을 만나기 전에, 이 녀석의 목부터 꺾어놓는다.’
질문은 그 다음 하면 되니까.
영혼이나 시체에게 말이다.
***
나이프를 잡는 손이 축축하다.
긴장감 때문이다. 프랑은 숨을 골랐다.
“베로니카.”
“……이젠 멀쩡하다. 걱정을 끼쳤구나.”
추락한 곳이 좋지 못해서 엘릭서까지 써야 했던 베로니카가 힘겹게 웃었다.
그녀의 허리를 흠뻑 물들였던 피는 일부러라도 〈정화〉 마법으로 깨끗하게 만들었다. 노르드가 보고 눈이 뒤집히는 것도 문제지만 피 냄새가 퍼졌다간 곤란했다.
“주인님한테는 말하지 말거라. 금지옥엽 취급은 진저리가 나니.”
“응. 다쳤다구 하면 엄청 화나겠지. 알겠어.”
오감을 곤두세운 프랑은 그렇게 대답했다가 다가오는 기척을 감지했다.
경계는 하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다.
아니나가 다를까, 네페르티티가 그녀들이 있는 지하실로 내려왔다.
“네페르티티 씨. 어땠어요?”
“정찰은 어려워. 공간이 뒤섞여서 바깥은 거의 미로.”
무뚝뚝한 그녀는 피를 닦으며 말했다. 오며가며 몇 명인가의 기사단을 기습해서 해치웠던 것이다. 피하기 곤란한 위치였기에 별 수 없었다.
“이 지하실을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 연락은?”
“노르드랑 다나 외에는 메달로 연락이 됐어요. 아, 변경백님도 빼구요.”
“그 인간이라면 알아서 살아남지 않겠느냐?”
베로니카의 농담 아닌 농담. 프랑은 조금 웃었다.
프랑이 합류한 건 베로니카, 네페르티티 뿐이긴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덜 걱정해도 될 사람들이었다.
오델리아나 노르드는 말할 것도 없고, 다나도 이 멤버 중에서는 특출한 편이었으니.
‘그리고 라리루라, 티르시 씨, 콜리도 경이 같은 조.’
거기까지 생각하던 프랑에게 네페르티티의 말이 닿았다.
“수녀 엄마랑 달인 둘은 아마 안전.”
“마스터 클래스와 그에 준하는 2명이니 말이다.”
“응. 그치만 우리는 상대적으로 위험군.”
인간 사회에서는 군계일학인 달인이면서, 아니. 그런 달인이기에 네페르티티는 자신과 이 일행의 강함을 객관적으로 구분했다.
─슥슥. 악필로 바닥에 문자를 적는 그녀.
“다른 사람들이랑 합류하는 게 최선. 마스터급 파티원을 찾는 게 제일이고, 힘들면 모험가 총장 쪽 팀과 합류해야 해.”
“메달로 연락을 취할게요. 눈에 띄는 건물이나 지형에서 합류해요.”
“응. 연락이 된 팀과 합류만 해도 급제점.”
네페르티티는 미로 같은 공간에서 그게 얼마나 난제가 될지 언급하기보단 희망적인 얘기를 입에 담았다. 그 정도의 배려는 있는 그녀였다.
“마스터 클래스가 없어도, 우리 가족이 모이면 강적들도 쉽게는 못 건드려.”
미스릴 클래스 정도의 전력이 4~5명.
환자인 키아라는 뺀 계산이기는 했는데, 어쨌든 일가족이 모이면 든든하다. 대마법사라는 에른스트나 기습을 가했던 쌍검잡이도 얕보지 못할 전력이었다.
“……글쎄. 쉽게 못 건드리는 수준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때 베로니카가 조금 짖궂게 웃었다. 네페르티티의 귀가 쫑긋 섰다.
“무슨 얘기? 뿔 엄마도 미스릴 클래스가 됐어?”
“나도 마나가 늘었으니 그만한 자부심은 있다. 하지만 좀 다른 얘기야.”
명상하며 몸 상태를 추슬렀던 베로니카는 잠시 내려놓았던 지팡이를 들었다.
“합류하기도 전에 괜히 기대시키는 것도 뭣하니 이쯤 하지. 주인님이 있었으면 뭣하러 김칫국부터 마시냐고 꾸짖을 테니.”
“너무해. 그럼 말하질 말지. 신경 쓰이잖아.”
호기심은 생겼지만 말 자체는 맞는 말이었기에 프랑은 넘어갔다.
키아라 쪽과 합류한 뒤에 물어봐도 될 얘기다. 토라진 프랑에게 웃어준 베로니카와 함께, 3명의 여인들은 미로처럼 어지러운 시내를 누볐다.
메달을 가진 티르시와 약속지점은 잡아두었다.
시내에 솟은 여러 개의 첨탑 중에서 무너진 쪽. 사람이 없어 보이면서 눈에 띄어서 합류하기 좋은 지점을 고른 것이었다.
─다들 멈춰. 다음은…… 왼쪽일 거야.
프랑은 귀를 세우며 심념을 쏘았다.
그녀의 왼손 약지에서 반지가 빛을 뿜었다.
노르드가 룬의 마나를 보조해준 뒤부터 반지에 새긴 ᚲ(Kenaz)의 룬은 더 효과가 강해졌다. 정작 본인은 몰랐지만, 프랑의 감지능력은 세계에서도 내노라 할 수준까지 올랐던 것이다.
눈치챈 건 흑마법사를 추격한 경험이 많은 네페르티티 뿐이었다.
─……어디가 안전한지는 어떻게 알았어?
─공간이 뒤섞였어도 길은 이어져 있으니까요.
한 발짝 건너편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는 알지 못해도, 소리와 냄새는 전해진다.
길이 연결되어 있는 한 프랑이 감지 못할 것도 없었다.
─피 냄새가 나거나 기척이 있거나 퀘퀘한 유적 묵은내 외에도 사람 냄새가 섞여 있는 곳은 미리 피할게. ……말해놓구 보니까 살짝 강아지가 된 것 같아서 싫다……
─괜찮아. 노르드는 강아지도 좋아할 거야.
─그건 알지만요……
좌절한 프랑은 네페르티티의 위로를 듣고 다시 집중했다.
‘……풀밭의 냄새. 신발 밑창에 으깨진 풋내야.’
균열 바깥의 초원을 밟은 사람들이다.
바깥에서 온 사람들. 그럼 그녀들의 일행일까?
절대로 아니다. 프랑은 확신했다.
‘……소금 냄새.’
썩은 바다 같은 냄새가 코를 찌르는 듯 하다.
최대한 일깨운 오감은 공감각처럼 프랑의 영적 감각을 후각이나 청각으로 연결시켰다. 상대방의 마나의 성질이 오감으로 전해지는 것이었다.
정면은 기각.
나가면 십중팔구 적이다. 저 기분 나쁜 마나는 노르드나 라리루라가 말했던, 혼돈의 마나를 가진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프랑은 코를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이 앞에는 다비드 상원의원이 있을 거야.
─후퇴하자꾸나.
베로니카의 결론도 빨랐다. 그녀들은 반대쪽을 목표로 멀찍이 물러났다.
소리를 죽이던 네페르티티가 물었다.
─다비드는 여기에서 뭘 하고 있어?
─쫓겨서 들어온 건 아닐 테지. 그랬다면 이미 나갔을 것이야.
베로니카의 의견. 프랑은 무심코 말을 덧붙였다.
─마법의 기척이 났어. 이곳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는 걸지두 몰라.
프랑은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도 놀라웠다.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확신이 들었다.
저들은 누군가를, 이 도시에 숨어 있는 사람을 찾고 있는 거라고 말이다.
─탐지 마법의 술식을 감지한 것이냐? 마법조차 아닌, 육신의 감각 만으로?
베로니카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아, 음…… 그, 그런가 봐.
그런 걸까? 그다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프랑은 베로니카의 추측이 맞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 감각을 설명할 방법이 달리 없었으니까.
거의 감각적인 차원의 직감이었다.
야생동물이 같은 야생동물의 행동거지를 보고서 뭘 하려는지 아는 것처럼 말이다.
─……드워프는 눈으로 열원을 느낄 수 있었지. 프랑, 네 안에서 룬의 마나를 느낀다. 주인님이 일깨워준 마나와 너 자신의 성장이 좋은 결과를 낳았구나.
자상하게 웃는 베로니카 탓에 프랑은 후퇴하는 중에도 낯뜨거워졌다.
출신이나 머리색이 비슷해서일까. 베로니카에게 저런 눈빛으로 칭찬을 받으니 어머니 생각이 났다. 이제는 그립긴 해도 슬프지는 않은 추억이다.
무심코 노르드가 준 반지를 만졌다.
그녀가 배운 룬은 아직 적었다. 감각이 더 향상됐다면 이 반지 덕분일 것이었다.
프랑은 확장한 감각이 이끄는대로 걸었다.
눈이 향한 곳은 공간이 왜곡된 도로변이었다.
‘풍겨오는 마나가 어쩐지 낯익어.’
이 위기상황에 처음 깨우친 감각이었기에, 어떤 인물의 것인지는 몰랐다. 누구인지 구분할 정도로 경험이 쌓여 있지 않아서였다.
‘그래두, 이 친근한 느낌은──’
혹시 노르일까?
기척은 하나. 바깥 세상의 냄새도 난다.
일행과의 합류를 기대할 만 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해?
─가 보자꾸나.
─응. 저쪽이 약속한 합류지점일지도 몰라.
일행과 상의한 프랑은 숨을 죽이며 건너편으로 미니 골렘을 보냈다.
정령화의 술식을 섞은 작은 골렘이다. 정찰로는 적당했다.
프랑은 청동 거울이 사랑하는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을 비추길 기도했다.
【왜곡을 중첩했나. 이만한 공간 마법을 유지할 마나가 도대체 어디서 나서?】
하지만, 그곳에 있던 건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노르드와 같은 것이라곤 머리색 뿐인 제 3자.
【세계수다. 히타이트 놈들, 세계수의 가지를 이 밑에 숨겨놓고 있었군? 써먹을 수 있을까? 놈들과 지식을 교류하던 시절의 기억은 거의 잊었지만.】
그는 순수 혈통의 드워프였다.
그는 긴 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지팡이를 띄우고, 수십 개의 팔로 보이지 않는 지맥의 중심부를 틀어잡은 마법사였다. 그는 펼쳐낸 마법을 일절 바깥으로 흘리지 않고 통제할 수 있는 대마법사였다.
드워프는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리며 눈을 한껏 빛냈다.
【과연, 과연…!! 보았노라, 알았노라! 숨어 있던 거로군? 누구로부터 숨었지? 별의 아이들? 아니, 놈들은 이 세계에서 본래 힘을 쓰지 못할 터.】
그는 마법으로 왕성의 단면도를 만들어냈다.
【헤니르의 눈을 피했나? 〈편찬대대〉의 사신의 예지력을 꺼렸나? 아니면 둘 다냐? 네가 숨어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 곧 물어보러 찾아갈 테니 기다리라고!】
혼잣말을 되뇌이던 그는 뭐가 재밌는지 광소를 터트렸다.
프랑은 느꼈다. 저 드워프는 꺼려야 할 상대란 걸.
초인의 수준까지 오른 감지능력 덕분에?
설마. 이것은 여자의, 생물의 감이었다.
어째서 저 드워프의 마나를 낯익게 느꼈는가는 둘째치고, 이쪽 방향도 꽝이다.
그것도 다비드에 버금가는 대재앙 수준의 꽝.
프랑은 조용히 정찰하던 골렘을 뒤로 빼냈다.
한참 떨어진 곳에 숨어 있던 골렘이다. 저만큼 집중하고 있다면 들키진 않았겠지.
골렘이 머리를 돌리고 청동 거울에 비춘 화면도 휙 돌았다.
【하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휙 돌아서, 그 드워프의 얼굴을 비췄다.
“……윽!!”
못해도 수십 미터는 떨어져 있었는데, 어떻게?
프랑의 등골이 오한으로 쭈뼛 섰을 때, 골렘을 붙잡은 에른스트는 웃었다.
【엿보기라니, 좋은 취미시네? 마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