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797화 (795/1,009)

***

‘안 들키고 메달을 회수할 수 있으려나.’

공간의 미로를 이동하면서 나는 고민했다.

짭 라리루라…… 부르기 힘드니까 사기꾼이라고 할까. 이 사기꾼의 눈을 피해서 메달을 회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왜냐고? 메달도 이 부부 놀이를 끝장낼 원인이 되니까지.

아내들과 연락을 취할 수단인데 당연하다. 아직 이 새끼의 목적도 모르는데 놓칠 수야 없잖은가? 내가 어그로를 끌고 있는 게 맞다.

‘그렇다고 메달을 방치할 수도 없고.’

누군가가 보안을 뚫고 내용물이 손을 넣었다간 문제다.

통신 담당으로 들어가 있는 발퀴리에 1마리로는 영 미덥지가 않았다.

메달을 손에 넣었다간 아내들을 유인하는 것도 누워서 떡 먹기. 아이템을 전부 빼내거나 포션에 독을 타서 우릴 큰일나게 만들 수도 있다.

수작부릴 여지가 많으니까 회수는 필수.

결국 나는 사기꾼 새끼를 끌고 다니면서 틈틈이 천리안을 남발했다.

단지, 적을 피하는 것 말고는 별로 도움이 되진 않더라.

천리안은 보려는 장소와 점과 점으로 연결된다. 영상통화로 남산타워가 보였다고 핀란드인이 강릉에서 남산타워까지 갈 방법을 알아내겠냐고.

그래서 미로를 뚫는 방법은 깃털에 의존했다.

‘그만큼 발이 고생하는 수밖에.’

그렇게 오랫 동안 미로를 헤매며, 성에 가는 척 메달이 있는 곳─내가 떨어진 길목 근처였다─에 향하던 중. 나는 걷던 걸 멈추고 얼굴을 굳혔다.

“……하아.”

뻥 뚫린 대로는 신기루처럼 일렁거렸다.

저곳을 넘으면 전혀 다른 곳과 이어질 것이다. 문제는 난 이 눈깔에 달린 맵핵 치트로 건너편에 있는 보스몹의 모습을 스포일러 당했다는 거였고.

나는 작게 속삭였다.

“……라리루라. 꼭두각시 없이도 싸울 수 있지?”

“……적이에요?”

“빙 우회해서 앞뒤로 치자. 내 뒤에 있지는 마. 내가 공격을 피하면 니가 맞는다.”

거짓말이다. 이 수상한 녀석을 등 뒤에 냅두고 싸울 수는 없어서였다.

마음 같아선 지금 이 새끼부터 해치워두고 싶을 지경인데, 말이 쉽지. 그러다가 2대 1이 됐다가는 나만 좆되잖아? 지금은 꼴마초의 쫀심을 접고 전언 철회다.

아니지 시발. 입 밖으로 내진 않았으니까 전언 철회도 아니네.

그럼 아직 상남자 자칭 씹가능이지.

‘어쨌든, 가지 않을 수는 없다.’

이 건너편에 있는 놈이 내 메달을 주워서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필 남이 먼저 주워버렸다. 아까 전까지는 저 위치에 아무도 없었는데. 염병.

“알겠어요. 선배, 제발 조심하세요.”

사기꾼은 내 손을 꼭 잡고서 진심인 것처럼 절절하게 말했다.

연기라면 대단하고 연기가 아니라면 소름돋네. 처음 보는 사이일 텐데 뭘 안다고 나한테 이렇게 몰입을 하실까. 나는 사기꾼이 우회하는 걸 보고 브류나크를 뽑았다.

─우웅!

비틀린 공간을 넘나드는 감각도 익숙해졌다.

나는 어떤 늪지처럼 보이는 곳으로 나왔다.

“……늪지가 아니라 호수인가?”

“어느 쪽도 아니다. 시체 썩은 웅덩이지.”

쌍검을 허리에 찬 놈이 말했다.

늪지로 보이는 호수는 예전에는 도시의 경관을 장식하는 자연이었겠지만, 수맥이 끊기고 버려진 탓이었을까. 저 새끼의 말대로 시체 썩은 진녹색 스포닝 풀과 같았다.

바구니로 크게 떠다가 어디 냇가에 뿌리면 물고기들이 중독되서 떠오르려나.

“늪지는 생명이 숨쉬는 곳이다. 신군의 권능이 닿는 곳이기도 하지. 이런 썩어문드러진 웅덩이는 결코 늪이 될 수 없다. 물새들도 살지 못할 테니.”

호숫가에 박힌 나뭇가지에 웅크려 앉은 새끼는 메달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허나 어떤 의미로는 그 말도 맞겠군. 작금의 【중간가지】는 이곳과 같지.”

“아, 예. 그러시군요.”

관심없다. 대충 흘러넘기고 놈이 앉은 가지부터 살폈다.

썩은 나뭇가지인데 부러지지도 않는다. 초상비 같은 거라도 썼나. 골때리네.

나는 사기꾼의 기척이 없는 걸 확인하고, 촉수 마법사 새끼의 지식을 읊었다.

“니가 라한 크루어히냐? 너도 굴라나뢰크지?”

“이곳을 돌아다니는 놈들에게 물었나? 처음 본 상대가 나를 알아보는 게 썩 기분 좋지만은 않군. 하물며 스반르들이 지은 이름까지 알고 있어서는 더욱이.”

라한이라는 이름의 쌍검충 새끼가 나를 봤다.

맞다. 다비드로부터 대충 들은 인상착의를 촉수 브라더즈도 기억하고 있더라.

“스반르? 고유명사는 좀 자제해 줬음 좋겠네.”

빡대가리 새끼. 남들이 못 알아들을 소리를 왜 하는 거야? 혹시 이세계인이신가.

라한은 메달을 주머니에 넣었다.

“네 손에 죽은 아이들. 엘프, 유니콘, 바이콘.”

아하. 대충 멤버들을 부르는 호칭 같은 건가.

“아, 그 반푼이 병신 떼거리들?”

의식해서 도발을 날렸다.

적을 부추길 때는 아예 감정을 드러던가, 대충 건성으로 던지는 게 효과적이다. 1번 2번으로는 안 낚이는 새끼들도 계속되면 신경이 곤두서거든.

“내가 솔직히 니들 꼬라지를 보면서 감탄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너무 용기로워서. 어떻게 신의 권능을 써대는 새끼들한테 저런 병신 반푼이들을 데리고 개길 생각을 하셨대?”

“당연하다. 그들은 전사가 아니었으니까.”

라한은 대답했다. 도발에 빡친 기척은 없었다.

“망국의 왕녀와 그 수호기사. 축복인 척 가장한 저주에 고통받던 신족들. 그들은 모두 너나 나처럼 재능과 운명에 축복받지 못했던 아이들이다.”

“그렇겠지. 나 하나한테 죄다 뒤져나간 걸 보면 거의 시민단체야, 아주.”

유니콘 흑마법사부터 예르나, 그밖에 다른 굴라나뢰크들은 한결같이 대가리를 굴려서 좆도 아닌 힘을 손에 넣고 그걸로 뭘 해보려는 새끼들이었다.

행적과 인성 때문에 깔보곤 있지만, 그건 동물 같은 타고난 포식자에게 허접한 도구로나마 저항하려던 인류의 과거사와 닮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병신 같았던 건 착각이 아니라, 그냥 진실이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이라는 격류를 타고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흐름에 인생이 개박살난 이들이지.

학부가 사라진 대학원생이자, 시국이 나쁘다며 회사에서 쫓겨난 직장인 같은 것.

그러던 끝에 사이비에 빠져들어서, 목숨을 걸고 세상을 더 곱창내고자 했다.

운명에게 버림받은 패자들.

그리고 그들의 처지를 보듬는 목만 남은 신.

그게 굴라나뢰크라는 집단의 한심하고 비극적인 정체였다.

“허나 그것이 신(神)의, 신앙의 본질이다.”

라한은 늪지로 내려섰다. 놈의 발은 늪에 전혀 빠지지 않았다.

늪을 내려봤다. 수작을 부려뒀을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하면 그냥 밟을 순 없다.

그렇다고 이 존나게 넓은 물 웅덩이를 안 밟고 싸우는 건 힘들다. 장소를 바꾸자니 메달을 들고 튀면 좆 되는 건 내 쪽이었다.

그래서 나는 힘껏 발을 굴렀다.

─쿠펑!!

늪지는 오물을 튀기는 대신, 내 발끝에서 뿜어진 냉기에 얼어붙었다.

광활한 늪지가 얼음처럼 굳었다. 내가 빙판에서 자빠질만큼 몸치도 아니고.

─쿠확!

호수를 넓게 얼리던 냉기는 라한의 주변에서는 튕겨져나간 것처럼 멈췄다.

“신이란 뛰어난 자에게 축복을 내려주는 존재가 아니다. 부족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구원하려 하는 자야말로 신이라고 불릴 가치가 있지.”

“어느 정도는 동감해. 무신론자라 머릴 굴려서 상상한 것 뿐이긴 한데.”

검을 역수로 쥐는 라한에게 나는 그리 대꾸했다.

결국 사냥의 여신 사티스 때랑 같은 논지였다.

사람을 비극에서 구하지 못하는 신에게 신앙을 바칠 가치는 있는가?

에퀴녹스의 애비도 오프툼도 그들이 믿는 신이 불행을 막아주지 않았잖나.

나는 이 논의에 대답할 수 있다.

“멍청한 소리지. 누군가가 행복하려면 누군가는 많든 적든 그만큼 불행해야 해.”

이 대답이 진리는 아니다.

학자는 자신의 이론을 맹신하면 안 되지. 절대 틀리지 않은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건 그냥 믿는 대상만 다를 뿐인 신앙이잖은가?

하지만 굴라나뢰크 놈들의 병신 같은 개소리를 때려부수기엔 과분한 팩트였다.

“평등은 불평등의 다른 관점이지. 세금도 내지 않는 씹새들은 그것도 모르는가 보군.”

재산이 100억대인 재벌이 세금으로 2억을 떼인다고 이게 나라냐면서 불알을 덜덜 떠는 건, 그들에게 있어서는 진지하고 당연한 빡침이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는 당장 2천원이 없어서 굶는 사람도 있기 마련.

돈은 물질화된 행복이다.

재산의 재분배는 행복의 재분배이고, 이건 절대 평등할 수 없다.

“신이 절대자라면 이 모순도 해결해 줘야지.”

에퀴녹스는 명계의 신이 되어서, 현세에서 고통받고 죽은 이들이 죽은 뒤에라도 그렇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다.

신으로 승천해서 운명이라는 기만을 부정하려고 한 것이었다.

본질은 광인의 오만이면서, 트라우마에 기인한 만행이었겠지만…… 뭐 어쨌든

“그런데 세상에 완벽한 초인이란 없거든.”

아무리 잘난 사람도 혼자서는 제대로 못 산다. 자연인이 창고에서 라면이랑 테팔 프라이팬 꺼내는 거 못 봤냐고. 그 양반들이 오두막 짓는 못은 뭐 하늘에서 떨어지냐?

티르시랑도 몇 번 나눴던 얘기 아닌가.

불행한 이들이 남을 욕하고 신세를 한탄하는 건 그들의 권리일 수 있다.

“그렇지만 남의 논문을 빼앗는 건 정의가 될 수 없어.”

나는 언제까지고 그렇게 규정할 생각이었다.

자기 논문이 축복받은 씹새들한테 도난당했다는 사실은 변명이 못 되기에.

‘시발 난 넘모 불행해요 힝잉’거리면서 내 것에 손을 덴다?

‘그럼 좆되게 만들어 줘야지.’

그게 교수 슬레이어가 교수 슬레이어인 이유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병신이라는 거고.”

나는 브류나크를 어깨에 걸쳤다.

세상 시시한 얘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실제로도 시답지 않은 얘기였고.

벌이는 일마다 사사건건 실패하는 머저리 집단.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수단을 강구하지만 어딘가 2% 모자란 빡통들.

“너희의 본질은 떼쓰기와 의존이야. 머저리들의 똥이나 치워줘야 하는 느그들 신이 불쌍해진다. 그 노력을 건전한 정신승리에만 썼어도 범죄자는 안 됐을 텐데.”

내 고향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었다.

신의 정체성은 신도들의 신앙이 정의한다.

“헤니르를 망상병 환자로 만든 건 너다.”

그래서 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기대나 믿음, 구라에 떠밀려서 멀쩡하던 놈이 머리가 이상해진다. 사이비 교주나 독재자의 흔한 좆망 테크트리지. 네 꼴을 보면 헤니르라는 놈이 튀어나와도 별 문제 없──”

─콰앙!!!!

나는 二자로 내 목과 몸통을 베어내려는 쌍검을 창대로 막았다.

찌릿찌릿 하구마잉. 살기 때문인지, 팔이 저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빡쳤죠? 할 말 없죠? 말문이 막히니까 손부터 나가죠?”

나는 표정없이 검을 밀어붙이는 라한에게 쭉쭉 밀려났다. 거 무식한 새끼.

힘도 기술도 후달리는 건가. 못 해먹겠네.

“그리고 선빵 맞았을 때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하지만 내 입가는 웃음기 가득한 호선을 그렸다.

승산 없는 싸움이라. 뭐 언제라고 안 그랬나?

“나는 우리 가족을 빼면, 내 아내한테 손찌검한 새끼를 살려둔 적이 없어.”

─터엉!!!

쌍검을 흘려넘긴 나는 【게르튀르】를 펼치며, 힘껏 쥔 창을 내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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