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800화 (79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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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은 강인하면서도 유약하다.

팔다리가 꺾이고 떨어져서 감염을 일으켜도 몇날 며칠을 사는가 하면, 조금 부러진 정도로 합병증을 일으켜서 허무하게 죽는다.

절벽에서 떨어져도 살아남는가 하면 키보다 더 낮은 높이에서 떨어져서 죽는다.

머리에 칼이 꽂혀도 살 때가 있고, 손가락을 좀 베였다고 즉사하는 이들도 있다.

알래야 알 수 없는 복잡한 구조야말로 인체라는 장치의 실상이다.

하지만 라한 크루어히는 그 모순에 해박했다.

인간이란 절대 죽지 않을 듯 하다가도 무척이나 허무하게 죽어버리는 별난 생물이라는 것을, 그는 어지간한 치료사보다 많은 경험으로 몸소 익혔다.

그런 라한에게 의견을 묻는다면, 노르드가 입은 부상은 치명상이었다.

─후두둑. 피가 더러운 얼음 바닥을 적셨다.

2척(尺) 길이 날붙이에 의한 심장부 관통.

상처의 폭은 1촌 반. 대각선 뒤에 있는 폐 역시 한꺼번에 관통당했고, 라한 입장에서는 운 좋게도 심장과 연결된 굵은 혈관 중 1개가 절삭되고 2개 가량이 찢어졌다.

과다출혈. 쇼크사. 내출혈. 질식. 폐혈증.

라한이 아는 단어로는 다르게 표현되는 증상들. 면밀하게 말하자면 병이나 증세라기보다는 인간의 사인(死因)에 더 어울리는 부상이었다.

살아날 가망은 전무하다.

“무례한 태도에 맞지 않게 지혜는 뛰어나군.”

그래서였을까. 라한은 즉사를 면한 노르드에게 거짓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에게 품고 있던 분노가 유례없는 수위였다는 걸 생각하면 최대한의 찬사였다.

두근… 두근….

심장의 부상이 회생이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 노르드는 정체 모를 술수로 직접 심장과 폐 호흡을 멈췄다.

룬 마법인가, 아니면 인간이 오딘이 남긴 부스러기를 모아서 만든 잔재주인가.

노르드는 사망 직전까지 치달은 목숨을 골 라인 바로 앞에서 붙든 것이었다.

“쉬이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기는 톡톡히 봤다. 그 억지만큼은 존중하지.”

하지만 그 노력도 역시 무의미하리라고 라한은 확신했다.

마땅히 그럴 수밖에.

심장과 폐를 멈추면 뇌가 죽는다. 저 부상으로 죽음을 면하려면 몸의 생존활동을 멈추고 가사상태까지 밀어넣는 방법밖에 없다.

수작 1~2개로 해결되면 치명상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노르드는 그 상태로도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한 모양이었지만, 그 역시 실패했겠지.

가사상태에서 움직이는 흑마법은 발동이 시간에 맞추지 못했다.

기절한 노르드는 신체의 괴사나 라한의 처형을 기다릴 뿐인 식물인간과 같았다.

“때문에…… 우려 또한 생기는군.”

그런데도 라한은 그의 목을 쳐내지 않았다.

누가 봐도 승자인 그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다. 라한 스스로도 그렇게 여겼다. 서로 행운이 따랐기에 그만큼 실력에서 명암을 갈린 결과라고.

그런 만큼, 당장 무릎을 꿇은 패자의 수급을 취하고 육체를 회수하는 게 옳다.

망설임? 있을 턱이 있나.

동정심? 전사에게는 모욕일 뿐이다.

단지 그에게는 한 가지, 무시하지 못할 의문이 남아 있었다.

‘내 권능에 의한 참수를 피했다.’

그 사실이 라한의 마무리를 지연시켰다.

검과 신념의 끝에 깨우친 그의 권능. 이름하여 [황금의 황혼(Gulllanarøkkr)].

라한이 적수의 목을 베어내는 미래를 확정하는 권능이다.

권능을 발동한 시점에서 승패를 가르는 변수와 난수는 사라지고, ‘라한이 적수의 목을 베어서 승리한다’는 운명으로 미래의 모양을 고정시킨다.

극론을 말하자면 사용한 순간부터 결코 방어가 불가능한 힘이었다.

라한이 사용을 결의한 이상, 적이 맞이할 미래는 목을 베어진다는 결말 뿐.

적에게 주어진 수만 개의 가능성을 죽음이라는 결말로 한 데 묶어버리는 권능.

운명이 선고하는 필연적인 죽음.

라한 자신은 이 권능에 아무런 감흥도 자부심도 없었지만, 권능이 품은 본질과 가능성에 대해서만큼은 느끼는 바가 있었다.

신들이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운명을 비트는 존재인 인간들에게 거스를 수 없는 파멸의 미래를 선사하는 초상능력.

운명을 우롱하는 자들에게 씌우는 운명의 멍에.

그래서 라한은 이 권능을 [황금의 황혼]이라고 명명했다.

그야말로 살인과 암살, 참수에 모든 것을 바친 권능이다.

그런만큼 소모가 크고, 확실한 승산이 발생하기 전에는 사용할 수도 없다. 에른스트를 상대로 사용하지 못했던 건 ‘100% 이길 미래’를 만들어내기 전에 그가 도주했기 때문이다.

운명을 비트는 권능이기에 기승전결에 개연성이 필요하다.

운명의 흐름이라곤 해도, 거인이 개미에게 밟혀 죽는 건 말이 안 되니까.

하다못해 개미에 물린 거인이 넘어졌다가 머릴 잘못 박아서 죽었다, 정도의 귀결은 있어야 했다. 그런 한계조차 없는 힘은 필멸자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황금의 황혼]은 진짜 신들과 비교해도 무색하지 않은 권능이다.

전투를 포함한 일개 살인행위에 있어서 이만한 살상능력을 갖춘 힘은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울프헤딘은 죽지 않았다.’

목이 잘려 죽는다는 확정된 미래를 더욱이 비틀어보였다.

미래를 확정하는 [황금의 황혼]을 초월하는 힘.

라한은 그러한 권능의 존재를 알았다.

‘〈미래편찬〉.’

히타이트의 왕좌를 물려받아야 했던 자의 권능.

지상 최강의 인간이 가진, 운명을 비트는 힘.

“좋군.”

라한은 이 결과가 마음에 들었다.

미래를 읽는 권능을 갖췄다면 오딘와 흡사하다. 그녀의 의형제였던 헤니르에게 노르드의 몸 만큼 잘 맞는 육신은 달리 찾아볼 수 없을 것이었다.

저 육체를 가져간다면, 헤니르는 라한이 바라는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아주 좋다만, 다소 불쾌해.”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라한은 노르드를 마무리 짓지 않았다.

가장 예지하기 쉬운 미래는 사용자가 파멸하는 미래다.

그 증거로 노르드는 [황금의 황혼]을 예지했다. 라한은 모르지만 우신과 어떤 신의 태동이 세계를 파멸시키는 미래도 예지한 전적이 있었다.

하지만 라한이 자신의 등을 찌르는 미래는 예지하지 못했다.

예지했다면 심장을 뚫렸을 리가 없었다.

“아주 불쾌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경고하마.”

죽음을 예지하는 권능이 이 결말을 읽지 못했다.

거꾸로 말해서── 이 결말은 노르드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한은 역수로 고쳐쥔 쌍검을 휘둘렀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죽이겠다.”

“아, 역시?”

─서걱!!

환술을 배어내자 분홍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휙 소리가 나도록 튀어나왔다.

“으하! 칼침 피하는 게 워낙 오랜만이어서 맞을 뻔 했네!”

능청맞게 말한 소녀는 실을 뿌리며 가사상태의 노르드를 낚아챘다.

“놓치지 않는다.”

라한은 그 즉시 덮쳐들었다.

그에게 권능은 최후의 수단이다. 세상을 향해서 자신의 에고를 외치며 법칙을 지배하는 게 권능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황금의 황혼]의 여파는 며칠 밤을 목놓아 외친 것처럼 라한에게 피로를 남겼다.

그렇다고 해도, 카네쉬에 던져넣기 직전에 봤던 라리루라 정도는 가볍게 토막낼 수 있어야 했다. 라한과 그녀 사이에는 그만한 격차가 있었다.

쌍검이 번뜩이며 라리루라의 목을 노렸다.

“아, 그건 곤란하지.”

하지만 그때, 라리루라는 어느샌가 꺼낸 상자로 쌍검을 막아냈다.

손에 들어갈 만한 상자를 마나의 실로 조종했던 것이다.

“상당히 잽싸군.”

“몸이 둔하면 공연을 못 하잖아!”

놀랄 만한 것은 상자의 강도가 아니다. 라한의 품속에서 어느 샌가 소매치기당한 메달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고, 상자가 거기서 나왔다는 점이 가장 경악할 일이었다.

이 실력과 교묘함이 있었다면 그 기습 때 밀려 떨어졌을 리가 없다.

라한은 공격을 몰아치며 혀를 찼다.

“가짜로군. 환술로 감춘 건 모습만이 아닌가.”

노르드가 라리루라를 공격한 걸 좌시했던 것도 그런 이유라면 말이 됐다.

그의 일행으로 위장한 가짜.

누구일지는 상상이 갔다. 지금은 이 카네쉬에 몇 명이나 되는 강자가 활보하고 있었으나, 원래 이 버려진 수도에 진을 치고 있던 존재는 하나 뿐이었으니까.

“다 잡은 사냥감을 가져가고 싶다면, 그만한 값을 치러라.”

그래서 라한은 부담을 감수하고 돌진했다.

“너나 울프헤딘. 어느 쪽인가의 몸을 받아가마!”

한 번 더다. 다시 [황금의 황혼]을 사용한다.

그만한 부담을 짊어지고 생환할 수 있는가는 이 순간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냉철한 이성을 광증에 가까운 신앙심에 맡기며 라한은 한 줄기 화살처럼 돌격했다.

“……과거의 인연이란 끈질긴 법이네.”

라리루라로 변장한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끝까지 개입을 망설였던 이유는 그녀가 나서건 나서지 않건 악수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 순간 노르드를 구출하러 온 것은 그를 죽게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라한의 권능은 목격했다. 물러나지 않았다간 이 자리에서 함께 죽는다.

노르드를 끌어안은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권능이 발현한다.

“헤니르 오빠한테 전해!! 제발 친구는 좀 골라 사귀라고!!”

차원의 벽이 공연을 끝내는 커텐처럼 쳐지며 두 사람의 몸을 지웠다.

라한이 승리하는 미래가 사라진다. 미래를 고정하는 힘이기에, 발동이 가능한지의 여부로 어느 정도는 미래를 짐작할 수도 있었다.

─쏴아아아악!!!

검섬이 허공을 갈랐다.

“……놓쳤나.”

휘두른 검을 되돌리며 라한은 혀를 찼다. 차원 이동을 사용한 도주였다. 카네쉬의 차원 장벽까지 넘어서 저들을 쫓아갈 능력이 그에게는 없었다.

지체없이 노르드를 베려고 들었다면 역공까지도 당할 수 있었다.

그녀의 존재를 사전에 계산하지 못했을 때부터 이 결말은 막기 힘든 미래였다.

신승(辛勝)인가. 라한은 검을 거뒀다.

인내심으로 아쉬움을 다스렸다. 각자의 목적을 가진 강적들은 아직도 많고, 노르드는 벌써 환자보다는 시체라고 부르는 게 어울리는 상태다.

심장도 결국은 인체의 일부다. 마법으로 고치지 못할 건 또 없다.

그럼에도 심장과 폐 같은 내장 급소인 건, 치료 속도가 출혈과 죽음보다 빠를 수 없기 때문이다. 심장을 관통당한지 상당히 지난 이상 쉽게 고칠 순 없으리라.

애초에 시체가 필요한 라한은 상관없지만, 죽게 되는 당사자한테는 다르겠지.

치명상을 입고서 오랜 시간이 지나면 엘릭서로 채운 수조에 수백 년을 잠들어 있어도 그 상처를 완전히 고칠 수는 없다.

지금 막 도주했던 그녀가 산증인이다.

“찾아내서 쓰러트리면 그만인 일이다.”

죽다 못해 살아난 반신 둘. 질 생각은 없었다.

라한은 선혈을 털어내고 비틀린 공간의 미로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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