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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척척석사 노루-806화 (804/1,009)

‘빨리도 쫓아왔군. 하긴, 이만한 부상을 입혔는데 놓치긴 싫었겠지.’

좌시할 순 없는 노릇이다. 나는 눈을 반개했다.

저기 있다가 티르시 일행을 눈치채고서 ‘쟤네를 죽여대면 빡쳐서 기어나오겠지?’하고 환상의 참수쑈라도 벌였다간 봐라. 오늘이 강씨 가문 줄초상 데이가 돼 버린다.

“그래, 씹놈아. 어디 한 판 붙어보자고.”

이를 간 나는 브류나크를 창으로 바꿔쥐었다.

“가려고? 네 가족이랑 합류해서 안 싸우고?”

걱정된다는 듯 묻는 그녀.

그렇지만 친구나 지인을 보는 얼굴은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사촌이나 옆집 동생을 걱정하는 어른 같았다. 나는 픽 웃었다.

“합류해서 싸우는 건 별로 내키질 않네.”

저번의 패배를 설욕하고 싶어서?

1대 1로 이기고 싶다는 오기 때문에?

물론 그런 것도 있다. 처음부터 다굴을 깠다면 또 몰라, 1번 발리고 나서 우르르 몰려가는 꼴은 너무 마초답지 못한 짓 아니던가.

하지만 내가 그렇게 자존심을 세우다가 뒤지면 아내들은 왠 날벼락인가.

필요하다면 자존심을 버리는 게 진짜 꼴마초다. 교만을 부리고 가오에 사로잡혀서 탱크에게 죽창 하나 들고 돌격하는 건 병신이지, 남자다움이 아니라는 말씀.

단지, 다굴을 깐다고 퍼펙트하게 이기지는 못할 거라는 게 문제였다.

“그놈의 권능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닌 사람을 노렸다간 못 막는다.”

내 예지능력이 그걸 읽어주지 못한다면, 두 눈 훤히 뜨고 아내들의 목이 숭덩숭덩 날아가는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꼴을 볼 바야에 뒤지고 말지.

그렇게 말하고 나자, 크라운 크라운은 날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라한 크루어히의 권능은 운명을 조종하는 거야. 이름은 【황금의 황혼】. 승산을 붙잡았을 때, 결과까지의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적의 목을 베어내는 권능이지.”

“흐음……. 어떻게 아냐고는 안 묻는다?”

“고마워. 착한 아이네.”

둘 다 장수한 할배할매고, 알 수도 있겠지. 나는 슬슬 의심스러워지는 크라운 크라운의 정체를 콕 짚고 넘어가기보단 마초이즘으로 포용했다.

“출신을 따지자면 라한 크루어히는 인간이 아닌 요정인 걸로 알아. 얼스터의 옛 신족. 바이콘들처럼 신에게서 태어나서 신들을 섬기던 존재지.”

“당연히 그렇겠지. 인간차별주의자들이 인간을 대빵으로 뒀을 리 없으니.”

“진지하게 들어.”

새삼스런 일도 아니기에 흘러넘기는 나였는데, 크라운 크라운은 정색했다.

“알겠어? 신에게 도달한 존재들은 권능을 얻어. 그 권능은 그들만의 상징이고.”

“알긴 아는데…… 그게 왜?”

“다시 말해서, 권능이 꼭 원하는 형태로 발휘된다는 보장은 없다는 소리야. 그렇다고 손에 넣은 권능을 부정했다간 절대 초월자가 될 수 없고.”

권능을 부정했다간 초월자가 될 수 없다.

초월자. 즉, 현대에서 일컫는 마스터 클래스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크라운 크라운은 그런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네 눈은 그것 자체로 완성된 하나의 권능이야. 그러니까──”

“아니, 그만. 이해했어.”

“뭐?”

아직 더 말하려는 듯 하던 그녀는 내가 말을 딱 끊자 약간 욱한 듯 했다.

“끝까지 들어. 내 말은──”

“이 눈깔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나는 초월자가 못 됐다는 소리잖아.”

브류나크를 바닥에 꽂고 팔짱을 끼는 나.

“하지만 그렇다고 마스터 클래스가 되겠다고 이 눈깔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거고. 이건 절대 오딘의 힘이 아니니까.”

단호한 대답이 정답에 가까웠던 걸까?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알고 있었어?”

“어렴풋이는. 하지만 네 말을 들으니까 확실히 이해가 가네.”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내가 흑마법을 꺼린 이유도 같은 맥락이거든.”

막말로 내가 창술에 고집하지 않고 흑마법을 쭉 팠다면 어땠을까.

오딘의 눈과, 어둠과 음의 마나에 대한 적성.

나는 내 예상을 벗어나는 모든 위기를 저것들의 도움을 받아서 극복했다.

예르나, 호르샤, 레티티아, 우신, 라한.

강적들을 상대로 나를 일으켜 세우고, 이기게 해 줬던 힘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오딘의 눈이었고, 검은 손길들이었으며, 어둠과 음의 마나였다.

내 전적이 노력과 깨달음, 기지와 지혜가 거둔 승리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하지만 까놓고 말해서 저 정체 모를 자질들이 아예 없었다면 못 이겼을 싸움도 있었잖은가.

물론 운명의 장난처럼 승리를 거뒀을 수는 있다.

그래도 분명 내 주변인 중 몇 명인가는 목숨을 잃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재능을 적극적으로 다뤘다면.’

진작에 마스터 클래스가 되고도 남았겠지.

이건 능히 그만한 업적을 이뤄낼 자질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았기에, 도리어 내 경지는 정체를 겪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다음 계단으로 올라간 미래는 ‘혼돈의 마나를 가진 흑마법사 노르드’지, ‘꼴마초 창쟁이 울프헤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계단에 한 발만 걸친 채로 멈췄다.

강함을 추구한 끝에, 산의 정상에 보이는 것이 내가 바란 모습이 아니었기에.

“그야 이래서야 마스터 클래스가 못 될 수밖에. 이미 난 권능을 갖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권능을 얻겠어.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에 새롭게 누굴 더 앉히려는 짓이지.”

미스릴 클래스의 상징은 오러.

마찬가지로 마스터 클래스의 상징은 권능이다.

‘그런데 내 권능이 들어갈 자리에 오딘의 눈이 한 발 먼저 들어앉았다면?’

어느샌가부터 보이기 시작한 예지.

그 예지는 마스터 클래스만큼 강해진 내 능력에 맞춰서 오딘의 눈이 권능으로서 발현한 게 아닐까? 이렇게 보면 존나 딱딱 들어맞지 않는가.

나는 마스터 클래스와 싸우거나 이길 수 있다. 오딘의 눈이라는 권능이 있으니.

하지만 똑같은 이유로 마스터 클래스는 못 된다.

“이 눈에 권능의 힘이 머무는 한, 내가 도달할 경지도 하나 뿐이니까.”

쓰벌, 생각하니까 좆같네. 레벨은 되는데 전직을 못 하는 상황이다.

아니지. 전직 가능한 직업이 1개 빼고 다 막힌 상황이라고 해야 맞나?

아무튼 간에, 깨닫지 못한 사이에 게임의 엔딩 분기를 이미 지나쳐버려서 나는 이제 오염된 흑마법사 루트밖에 못 고른다는 얘기였다.

앞날이 막막한 기분이다. 나는 한숨을 쉬고 손을 저었다.

“네 우려는 알아들었어. 마스터가 못 된 상태로 저 쌍칼 암살맨한테 개털리거나, 이기기는 했는데 길을 엇나가갈까 봐 우려된다는 거 아냐.”

“무성의하게 단언하자면 그렇지.”

“그렇다고 별 뾰족한 수가 없잖아. 당장 이기나 지나, 죽나 사나의 갈림길인데. 이 일이 다 끝나면 그때부터라도 대책을 생각하던가 해 볼게.”

지금이 어디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인가. 나는 꽂아놓은 브류나크를 뽑았다.

크라운 크라운은 내 고집을 보고서는 어째선지 익숙한 것처럼 탄식을 토했다.

“하…… 정말. 일은 일대로 벌여놓고 뒷처리는 매번 남한테 떠넘기지.”

나한테 건네는 불평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 심장을 툭 치며 말했다.

“사실, 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건 아냐.”

“뎃?”

“신과 신이 아닌 자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해?”

나는 눈을 끔뻑거렸고, 그녀는 지친 듯 웃었다.

“그건 바로, 공양하는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야.”

***

라한 크루어히는 성 앞에서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두터운 벽이군.’

인간이 쌓은 문명의 전성기, 황금시대.

그 시대에서도 최고봉을 다투던 나라가 진력을 다해서 세운 벽이다.

마법사가 아닌 그는 이런 난해한 장애물을 뚫을 방법이 없었다. 혹시 얼마 전에 싸웠던 드워프족 대마법사라면 방법이 있었을까.

힘으로 찢어발기고자 한다면 어떻게든 여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효율 나쁜 식의 우격다짐은 전투에 쓸 체력을 낭비하고 만다.

상대가 그걸 노리고 있다면 그 잔꾀에 휘둘려선 안 될 일이었다. 그렇기에 라한은 눈을 감고 때를 기다렸으며, 기다림은 그의 예상보다 짧았다.

누군가가 차원의 틈새를 열어젖히는 감각.

성문을 투과하듯 나타난 남자를 보며 그는 눈을 떴다.

“한 번 패주하고도 뻔뻔하게 돌아왔군.”

“솔직히 서로 한 대씩 치명타를 주고 받았는데, 내가 존나 운 나빴던 걸 고려해도 백보 양보해서 무승부였다. 인정?”

“너도 권능을 쓰겠다면 기량 싸움이 되겠군. 질 것 같지는 않은데.”

노르드의 안색을 살핀 라한은 위화감을 느꼈다.

창백한 안색에 맞지 않게 편한 발걸음. 부상을 내색하지 않고자 하는 위장인가?

같잖은 소리. 노르드의 인격과 행동원리는 대충 파악이 끝났다.

약한 척 빌빌대다 기습을 가하면 가했지, 뻔히 아는 부상을 숨기진 않을 것이다.

“특수한 치료법을 취했군. 궁여지책으로 신체가 더 무뎌지지는 않았길 바라지.”

싸아악─. 라한은 면도날보다도 예리한 쌍검을 칼날을 가는 것처럼 맞물렸다.

“괜찮아. 할머니의 지혜 보따리를 듣고 왔거든. 개인적인 아이디어도 있고.”

노르드도 야수회귀의 마나를 둘렀다. 그의 눈이 일대를 샅샅이 훑었다.

“설마하니 승부를 걸어놓고 동료를 찾나?”

눈을 찌푸린 건 라한이었다. 왕성의 동쪽 문에 싸움의 행방을 좌우할 요소는 없다. 오히려 벌레 1마리 없다는 걸 그도 방금 감각을 곤두세우며 알아냈던 참이다.

“설마는 무슨. 찾는 거 맞는데?”

그리고 노르드가 바란 것도 그것이었다.

“지금부터 약속을 하나 어길 거거든. 들키면 안 되서 조금 둘러본 거야.”

“……약속?”

“어. 다시는 다치지 않겠다는 약속.”

츠즈즈즈즈즈즛─!!!

오러가 폭발적으로 노르드의 몸을 감쌌다.

─콰앙!!

노르드는 도개교를 진각의 여파로 부숴버리면서 돌진하고, 창을 내려쳤다.

“무모한 특공이군!! 목숨이 아깝지 않아졌나!!”

우습지도 않아진 라한은 일갈하며 쌍검을 좌우 연속해서 휘둘렀다.

그가 노르드의 육체를 회수해야 한다고 상처를 입히길 주저할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라한은 그 몸을 사리지 않는 공격을 간단하게 받아쳤다.

왼다리의 힘줄을 끊는다.

상처는 치료하면 된다. 라한의 칼날은 노르드의 허벅지를 노렸다.

회피하기엔 늦다. 1초 뒤면 허벅지 깊숙이 파고들 것이었다.

파고들 텐데── 노르드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라한의 머리를 노렸다.

“……정신나간 광인 놈!!”

찰나지간에 그의 생각을 눈치챈 라한은 욕설을 토해내며 공격을 방어로 바꿨다. 채애앵─!! 발이 땅에 파고들면서 충격의 여파가 크레이터를 만들어냈다.

“어차피 지금 거의 시체 같은 꼴이거든. 나중에 하나하나 치료해야 돼.”

노르드는 웃으며 자신이 떠올린 아이디어를 언급했다.

아내들이 봤다간 100% 졸도하고서, 그를 평생 골방에 가둬버릴 전략을 말이다.

“그럼…… 어차피 끝나고 나서 고쳐둬야 될 거, 뒤지지만 않으면 그만 아니냐?”

발상의 전환은 아이디어의 기본이지. 그는 크게 웃었다.

“꼴마초 특) 아내가 금지한 거 몰래 함.”

─꽈아앙!!

훌쩍이는 듯한 브류나크가 라한의 가슴을 세게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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