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마 슈나스의 마나를 불러낸 티르시와 구신의 무기를 장비한 다비드.
속을 떠보려는 것처럼 대치하는 시간이 찰나와 다름없었기에, 싸움의 발발도 순식간이었다. 진짜 몸을 드러낸 다비드가 활과 방패에 촉수를 감았다.
혼자서도 자동으로 공격을 가하는 무구를 굳이 흡수하는 저의는 알 수 없다.
다비드의 의중이 어쨌든 기세를 잡은 티르시가 이제 와서 공격을 늦출까. 그녀는 막대한 얼음의 마나를 눈사태처럼 불어넣었다.
퍼어어엉─!!! 왕성에 때아닌 자연재해가 터졌다.
환경 자체를 장악하는 강설량!
이만한 대마법을 시전하면서 티르시에게는 정말 0.1초의 주문 준비시간도 없었다.
같은 대마법사인 에른스트조차 발사구를 늘리고 마법을 장전해두는 식의 전법을 취하고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마법사의 고질적인 문제가, 그녀에게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쌓아둔 금화를 던지는 대부호처럼 그녀의 손이 닿는 마나가 곧 마법이 되는 기적!
흡수를 멈추고 방패를 앞세웠던 다비드는 상식 밖의 기적에 방어를 멈췄다.
【■■■■ ■■ ■■.】
낡은 문헌을 떠올린 그가 활을 땅에 겨눴다.
─콰앙!!
발사된 화살은 근본에서부터 변질된 듯이 전혀 다른 폭발을 보였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눈알 모양의 무지개색 아오라를 터트리면서 다비드는 그 눈사태에서 탈출했다.
촤아아악─!
눈사태는 마치 의지를 가진 폭풍처럼 그를 추격했다. 공중에서 몸을 비튼 그는 화살을 연발했다. 동시 발사가 가능한 최대치인 3연발이었다.
“비린내 나는 화살이라니, 대귀족 씩이나 되는 분의 선물 치고는 초라하네요.”
팀을 노리는 공격을 티르시는 공간 째로 화살을 얼려서 막아냈다.
티르시는 얼어붙인 화살을 그대로 180도 돌려서 발사했다. ─쿠곽!! 화살이 흡수되던 중인 방패를 우그러트리자 라리루라가 소리쳤다.
“티르시 언니! 저희 몸은 알아서 지킬게요! 마나 낭비는 안 돼요!”
“상관없어요, 라리루라.”
─쩌저적! 서리가 내리다 못해서 냉동고로 변한 왕성이 흔들렸다.
“마법 면에서는 저도 당신의 선배인걸요? 한 번 믿어보세요.”
【■■■■■──!!】
공간도 지반도 관통하는 신의 화살이 날아왔다. 티르시는 하나하나 막고 돌려주었다.
“똑같은 〈강림〉 상태더라도, 자의식도 없었을 때랑은 다르거든요.”
굳이 적의 공격을 막고, 되돌려준다.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할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마나를 헛되게 쓰는 행위였다.
오직 그녀만을 제외하면.
【■■■■■aaaaaaaaaa─!!!】
쐈을 때보다 강력하게 되받아친 화살은 우르의 활이 다시 시위를 매기는 것보다 빠르게 다비드의 허벅지를 뚫고 하반신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티르시는 그 와중에 자동조준을 피한 다비드의 능력에 혀를 차며 말했다.
“영혼이 통제받지 않으면 〈강림〉 마법의 능력 제한도 사라지니까요.”
“느, 능력 제한이요?”
라리루라는 망연해졌다. 얘기로만 들었던 명계의 싸움에서도 티르시는 무려 계속 부활하는 드래곤을 상대로 압도적으로 이겼다지 않았나?
그만큼 강력한 마법인데 추가로 제한까지 걸려 있었다는 얘기일까?
크라운 크라운은 그녀가 광대로 활동할 때보다 더 과거의 기록을 반추했다.
“……말로만 듣던 아르마 슈나스의 권능인가?”
로마니아의 신은 마스터 클래스 중에서도 매우 특출났던 고대인들.
신을 잃은 인류가 새롭게 신으로 숭배한 이들의 마나는 명계에 아직도 남아서 신도들에게 기적을 내리고 그들 자신의 성장을 복돋아준다.
말 그대로 인간의 몸으로 신좌를 만드는 위업!
그것을 가능하게 한 기적이 바로 아르마 슈나스의 권능. 〈탄빙옥궤〉.
얼음을 마나로, 마나를 얼음으로 삼는 권능.
티르시의 눈길이 닿는 얼음은 모두 그녀의 마나이자 수족이 된다.
─쩌저적!!
다비드가 뿜는 사념파는 검은 서리꽃을 피우며 바닥에 쏟아졌다.
그가 촉수를 꿈틀거리며 몸에 달라붙은 새까만 서리꽃을 부쉈다.
초대 아르마 슈나스의 권능은 마나 자체를 얼리고, 그렇게 얼린 마나를 자신의 것처럼 부릴 수 있다. 아무리 섬세한 마법이라도 상관없이.
자질이 있는 인들의 마나를 얼려서 명계에 수천 년 넘게 보관하고, 신으로 숭배받도록 만든 것도 그 권능의 하위호환 마법 덕분이었다.
사실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에 사용을 제한했던 것이기도 했지만.
‘사념파 자체를 얼렸어.’
놀란 크라운 크라운은 라리루라의 행동을 막던 손을 치웠다.
티르시의 권능이 발동하고 있는 동안에는 정신 오염도 걱정할 게 없었다.
‘아무리 오염을 일으키는 사념파를 뿜어도 피부 위에서 멈추면 날리는 의미가 없지. 그게 그대로 얼어붙어서 몸을 둔하게 만드니까 더더욱 그래.’
사념파는 지속효과이기에 출력이 낮은 것도 한 몫 했다.
〈탄빙옥궤〉를 넘어서 타격을 주려면 순식간에 얼리지 못할 고출력의 공격이나 감당 못할 대량의 화살비를 퍼부어야 할 것이었다.
─슥.
다비드가 시위를 꿈틀한 순간이었다. ─푸슈슉! 바닥에 가득하던 눈꽃이 얼음 고드름처럼 솟으며 그의 촉수 가닥을 잘라냈다.
배를 꿰뚫린 다비드가 그르륵 거리며 울었다.
티르시의 차가운 눈빛이 그를 노려봤다. 인간을 초월한 지혜를 갖춘 다비드도 그녀가 어떤 마법을 쓸지 전혀 읽지 못했다.
바닥의 눈들은 이미 마법도 뭣도 아니건만, 그것들이 스스로 마나라도 된 것처럼 직접 술식을 구축하고 공격을 가하다니?
저렇다면 마나 부족을 걱정하지 않을 만 했다.
얼음 마법의 여파를 주위에 남기고, 거기서 또 마법을 만든다. 마나의 재활용이다.
그의 화살을 얼리고 돌려줬던 것도, 화살의 마나를 얼려서 재활용하는 게 자기가 마법을 쓰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효율적이니까였다.
마법을 쓸수록 마나 소비가 0에 가까워진다.
적의 마법술식을 얼리고 자기 것으로 삼는다.
활용도가 높고 위력도 강력한 권능!
‘……〈강림〉 시에는 못 쓰게 제한할 만 해요.’
티르시 본인도 차분한 표정 뒤에서 그리 생각할 정도였다.
‘병기’가 이 권능을 가졌다간 통제술식을 얼리고 자유를 되찾을 확률이 높았다.
실제로 주인인 노르드에게 자유를 받은 그녀가 권능으로 〈강림〉 마법을 얼리고 자아를 유지한 상태라는 걸 보면, 그 제한은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억지로 실험체가 된 게 아닌 티르시는 이 힘을 주인…… 아니, 남편을 위해서 쓸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마법의 설계자는 ‘병기’와 우호적으로 지낼 자신이 없었겠지.
제한이 풀린 아르마슈나스의 ‘병기’는 신에 필적할 힘을 갖추고 있으니.
【Rrorororo…!!】
신을 전쟁병기로 삼으려던 조국의 통치자들에게 경악하는 한편, 티르시의 맹공은 다비드를 쉼없이 몰아세웠다. 피하기도 힘든 광범위한 대마법들이 쏟아지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그만큼 마법이 스치고 할퀸 다비드는 아직 활발했다.
크라운 크라운은 다비드의 〈인신〉으로서의 완성도에 혀를 찼다.
“얼음은 상성이 안 좋아! 폐백신 우르는 겨울의 사냥꾼이었으니까!”
“겨울의 사냥을 관장하는 구신이신가요?”
사냥감은 공양의 대상이기도 하다. 〈인신〉이 된 다비드는 냉기에 대한 내성도 적지 않았던 듯, 기어이 무구를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공간 속성의 마법을 맞춰야 할까?’
티르시는 고민했다. 아르마 슈나스의 마법이 주로 공간 속성이었던 건, 냉기와 허무를 의미하는 공간 속성이 얼음 마법의 발전형 중 하나여서였다.
그리고 동시에 권능으로 유지가 가능한 얼음의 마나로 마나를 많이 잡아먹는 공간 속성의 마법을 효율 좋게 사용할 수 있다.
단지 인공 신, 〈인신〉의 프로토타입인 그녀의 본능이 사용을 만류했다.
‘차원벽을 세우고 걷을 정도의 공간 마법사야.’
어떤 수작을 부릴지 예상할 수──
【■■■■■.】
그때, 다비드가 인간의 귀로는 해석할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법은 곤란하죠.”
장고에 빠진 티르시보다 키아라가 빨랐다. 그는 브레스를 뿜으면서 그 머리를 절반 날려버렸지만, 다비드는 부상을 아랑곳않고 걸쭉한 고치로 몸을 감췄다.
“……그대로 가만히 있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티르시는 예상 못한 기회에 얼음을 조종했다.
대놓고 노리라는 듯 고치에 들어갔지만, 반격을 받더라도 얼려서 막을 생각이었다. 언제까지고 이 탐색전을 끌었다간 적이 새 공격수단을 꺼내들지 몰랐으니까.
얼음이 마나처럼 술식으로 짜이며, 권능의 지휘봉에 맞춰서 대마법을 펼쳤다.
저 고치는 차원 마법일 게 분명하지만 맞출 수만 있다면 뭔들 어떠랴. 왕성의 차원벽을 찢었던 것부터가 티르시의 마법이었는데.
차원벽도 찢어버리는 공간 마법의 최고봉.
“〈대소멸(Big Crunch)〉.”
카가가가가각─!!!
얼음의 안개가 고치를 습격했다. 스치기만 해도 공간을 찢어발기는 공간 왜곡의 덩어리다. 규모와 위력이 작은 블랙홀이라고 평가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얼음이 열풍에 녹는 것처럼, 물체는 안개에 닿자마자 소멸한다.
하지만 그 개세적인 위력이 고치를 감으려고 한 그때.
…지지직.
그들의 눈앞에 회색 노이즈가 꼈다.
느끼지 못한 것은 라리루라 뿐이었다. 티르시가 무슨 일인지 깨닫지 못했을 때, 이번에도 역시 그 기습에 반응한 건 베테랑 마스터 클래스인 키아라 뿐이었다.
“고치 위!! 화살이 쏟아집니다!!”
그는 가지고 다니는 무기 하나를 위로 던졌다.
공격용이 아니라, 위치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 사실을 라리루라가 눈치챈 건, 하늘에서 활을 겨눈 괴물이 무기 1~2개로 제압될 리가 없다는 사실이 누가 봐도 명확해서였다.
굵은 촉수 다발이 양팔에서 덕지덕지 감겨서는 거의 석궁처럼 보이는 화살.
고슴도치처럼 6개로 늘린 활은 하나하나가 다비드의 몸보다 크고, 그는 마치 꽃다발 같았다. 단지 꽃가루 따위보다 치명적인 재해를 뿌리는 더러운 꽃다발이다.
다비드는 포효도 없이 화살을 발사했다.
─투두두두두두두두두퉁!!!!
18발의 화살은 아까보다 빨랐다. 화살보다 티르시의 안색을 먼저 살핀 키아라는 막지 못할 것을 알고 그나마 멀쩡한 팔을 휘둘렀다.
그의 손은 본체의 크기로 돌아오면서 화살들을 막았다.
“Kurrrrrrrr……!!”
몸보다 큰 손바닥이 18발의 화살이 벌집이 다 되도록 꽂혔을 뿐이지만, 관통해서 누군가가 따로 맞지 않았으면 막을 걸로 쳐도 되겠지.
권능을 완전히 사용하는 건 어렵다.
부상이나 사용한 후의 치사성(致死性)은 어쨌든 성이 너무 좁았다.
“이게!!”
라리루라는 오러 미사일을 난사했다. 분홍색의 파괴가 휘몰아쳤다.
‘아까는 방패 때문에 막혔지만, 활밖에 안 보이는 지금이라면!’
다비드의 방어력은 높지 않았다. 연발의 과부하 때문인지 다비드는 피하지도 요격하지도 못하고서 작은 성벽 정도는 갈아버릴 폭격을 그대로 맞았다.
【……Lirn■, ■■■ Cro■n?】
맞고서, 멀쩡했다.
티르시는 다시 공간 속성의 대마법을 펼치면서 일갈했다.
“우르의 방패를 흡수했군요!!”
피부 자체가 방패처럼 강고해졌다.
구신의 신좌를 정말로 ‘그릇’으로 삼은 것이다.
이야기를 나눌 생각도 없는지 다비드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지지직. 또다시 시야가 어그러지며 다비드의 모습이 사라졌다.
“……여기!!”
라리루라는 그 순간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설픈 감각 대신 몸을 돌리며 바로 위에 최대 출력의 〈복사 방출〉을 발사했다.
─콰앙!! 레이저 탄이 다비드의 머리에 직격했다.
“이동하는 곳이 뻔하다구요!!”
물리 에너지를 동반하는 파괴는 공중을 날 뿐인 가벼운 이생물체의 체중을 뒤흔들기 충분했다. 반 실체인 활이 몸과 함께 얻어맞고 18발의 화살은 차원벽에 꽂혔다.
“히이! 그 와중에 위력도 더 올랐어요!”
“잘 했어요, 라리루라!”
티르시는 빗나간 마법에 연연하지 않고 후배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마침 손에서 자기 허리보다 굵은 화살을 뽑아낸 키아라가 엘릭서를 마셨다.
“……콜리도 경. 어떻게 피한지 아시겠어요?”
“공간 속성 마법 아니었습니까?”
“아니에요. 재밍을 걸리고 마나까지 얼렸는데도 피했어요.”
“그럼 권능이겠군요.”
당연한 결론이다.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초상능력이라면 그것 뿐이니까.
“권능이 아냐.”
그렇기에 크라운 크라운은 계속 생기는 회색의 노이즈를 떠올리며 눈을 만졌다.
“별의 자손 놈들의 기술이야. 이계의 마법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막는 방법은요? 어떤 마법이죠?”
“저 놈들은 시공간과 룬 밖에 마법적성이 없어. 고치에 들어갔던 걸 생각하면──”
…지직. 노이즈가 눈앞을 스쳤다.
“……윽! 결계든 뭐든 써서 주변을 둘러싸!”
오싹한 느낌에 소름이 돋은 크라운 크라운이 외쳤다. 마스터 클래스의 두 사람이 어디서 나타날지 주시하면서 마나를 운용했을 때였다.
…지직.
…지직 …지직 …지직 …지직
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노이즈가 거듭해서 터져나왔다.
시야에서 꾸물대던 회색 노이즈가 더 확실하게 머무르며 라리루라의 눈에까지 보였다. 왕성이나 일행의 모습마저 신기루처럼 거뭇하게 흐려졌다.
상상도 못한 마법의 연속사용에 그녀들이 몸을 굳혔을 때.
─퉁!
100발을 아득하게 넘는 숫자의 화살이 그들을 둘러싸고, 동시에 날아들었다.
“──〈한빙극점(Extreme point of Freezing)〉!!”
티르시가 그 모든 화살을 향해서 마법을 터트린 찰나.
차가운 빛이 터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