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811화 (809/1,009)

***

“……윽?!”

한순간 의식을 잃었던 라리루라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일행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참았던 그녀였지만, 작은 비명까지 참지는 못했다. 평범하게 돌아온 성에 새빨간 피가 가득했다.

발퀴리에는 소멸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화살이 꽂힌 키아라가 쓰러져 있고, 엉망이 된 티르시가 팔을 떨면서 간신히 서 있었다.

“언니!”

“……저는 멀쩡해요. 콜리도 경이 지켜준 덕에. 우선 그를 치료해 주세요.”

눈을 돌리지도 않고 온신경을 집중하며 답하는 티르시.

라리루라는 대답할 시간도 아까워졌기에 포션을 들이부으며 다른 사람, 크라운 크라운을 찾았다. 그 모습은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라리루라. 너도 회복 포션 마셔 둬.”

배를 붙잡은 그녀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속이 뒤집혔을 거야. 아, 나는 됐어.”

“……뭐가 어떻게 된 건가요?”

“다비드가 시간을 멈췄어.”

이해가 따라잡지 못했다.

라리루라는 입을 벙긋대다가 되물었다.

“……시간을 어쨌다구요?”

“멈췄다고. 사실 굳이 따지면 차원 마법의 일환인데, 엄청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 장악한 공간 안의 상대속도를 늦춘 거지. 멈췄다고 봐도 크게 틀리진 않아.”

놀랄 기력도 없이 라리루라는 주변을 훑었다.

시간이 멈췄다는 말처럼, 날아가던 파편들이 붕 뜬 상태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티르시가 뿜은 냉기가 저 시간정지 마법을 얼리지 않았다면 그녀들도 저렇게 됐을까.

“짧은 시간정지를 연발하면서 화살을 쏴대고서 해제했겠지.”

크라운 크라운은 라리루라 옆에 앉으며 말했다.

“저 수준이면 거의 옛 지배자가 되기 직전인데. 그릇을 얻으니까 장난 아니네.”

안색이 좋지 않은 그녀를 보던 라리루라는 그런 그녀의 가슴 사이에 이상하게 옷이 깊이 가라앉아 있는 걸 눈치챘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크라운 크라운은 라리루라의 시선을 눈치챈 듯 말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저딴 반칙 같은 마법을 막는 방법도 있기는 해.”

“있다고요?!”

일상생활에서도 익숙한 마법은 커녕 권능이라고 해도 두려울 정도의 기적이다. 그걸 막을 수 있단 말에 라리루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하면 돼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나요?”

키아라를 눕힌 라리루라의 눈동자에 악착스러운 의지가 깃들었다.

크라운 크라운은, 아니. 로키는 작게 웃었다.

“당한 만큼 갚아주고 싶어서?”

“당한 것보다 2배는 더 갚아주고 싶어서요☆!”

그 즉답과 미소가 그녀는 마음에 들었다.

조롱에 굴하지 않고 말과 장난으로 갚아주려는 그 승부욕. 실수나 능력 부족에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기고 우직한 노력. 웃음을 잃지 않는 근성.

그게 광대로서 꼭 갖춰야 할 덕목 아니던가.

“지금부터 질문을 몇 개 할 거야. 네, 아니오로 거짓 없이 대답해.”

“네!”

─쿠웅!!

검은 화살이 날아왔다. 차원의 틈새는 숨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강화한 화살이 차원벽을 뚫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저격 상태로 들어간 것이었다.

신경도 쓰지 않은 로키는 검은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물었다.

“질문 1. 양성애자 기질이 있다.”

“………………헤?”

─콰앙!!

화살이 돌조각을 튀겼다. 단련은 했어도 여인의 몸. 이마에 부딪힌 작은 돌조각은 생각보다 매우 아팠지만 라리루라는 멍하니 입만 벌렸다.

양성애자 기질? 그게 무슨 의미에서의 질문이지?

라리루라는 딱히 동성애에는 관심이 없다. 그냥 예쁘고 귀여운 걸 좋아하기 때문에, 언니들 같은 미녀들에게도 호감이 갈 뿐이다.

“질문 2. 동물을 좋아한다.”

“저기, 잠깐만요. 장난칠 때가 아니거든요?!”

“대답은 네, 아니면 아니오로.”

“좋아해요! 좋아하지만! 이거 무슨 질문인데요?!”

“네가 할 수 있는 걸 알려달라매! 얌전히 대답해! 크라운 크라운도 했던 거야!”

“제 영혼의 스승님도 이 짓을 했다구요?! 아니, 그보다 아주머니가 크라운 크라운 님 아니에요?!”

“누구더러 아주머니래!!!! 나 여신이다?! 유희신 겸 만언신, 로키=로두르 님이라고!!”

“여신?! 로키?!”

로키는 빼액거리면서 날뛰었지만 라리루라는 그 말에 더 혼란할 뿐이었다.

“그보다 대체 무슨 의식인데요 이게!!”

“나랑 얼마나 닮았는가 확인하는 절차라고!! 신좌 적성은 인생의 궤적이 얼마나 비슷한가에 달렸단 말야!! 질문 3!! 나는 엄마아빠가 없다!!”

“패드립!! 이 사람 저한테 패드립 했어요!!”

콰아아앙─!!!

라리루라는 크게 소리쳤지만 그 소리는 요령을 깨우친 듯한 화살비에 묻혀버렸다. 티르시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얘기에 그만 작게 웃어버렸다.

광대의 자질이 사람을 웃게 하는 데 있다면, 이 급한 상황에서도 헛웃음을 나게 하는 그녀들은 참 대단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라리루라. 그냥 대답해 드리세요.”

“그치만 너무 프라이버시한 질문인데요!!”

“아, 신경 쓰이는 부분이 거기군요. 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닌데, 저는 좀 전에 깔아뒀던 얼음까지 전부 끌어다 써서 마나가 많이 안 남았어요.”

“으큭……!”

라리루라는 쭈그러들었다. 확실히 너무 뚱딴지 같은 이야기에 그만 칭얼대고 말았다.

하지만 별 수 없지 않은가. 진지한 질문이라면 당연히 성실하게 대답했겠지만, 질문 1부터 ‘양성애자냐’ 같은 묻는데 어떻게 진지해지란 말인가?

“포기하렴. 우리 광대는 드워프가 망치를 들고 머릴 깨려고 들 때도 입으로는 나불대야 한단다. 다음, 질문 4. 언니오빠처럼 의지가 되는 사람을 좋아한다.”

“……장난 치시는 거면 나중에 두고 보세요.”

하다 못해 실실대면서 묻지만 않았어도 제대로 대답했을 텐데.

【어찌 그리 헛짓거리를 하고 계시오?】

그러자 다비드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어깨를 흠칫한 라리루라는 눈을 돌렸지만 모습을 드러낸 듯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말했다.

【이제 와서 후계자라도 찾아보려 하다니. 그럴 생각이었으면 좀 더 일찍 하지 그랬소? 그대처럼 운명의 노리개가 아닌 이들이라면 혹시 여기까지 일을 망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무시해. 겁쟁이가 쫄려가지고 저러는 거니까.”

【레이디. 나 같으면 관두겠소. 한평생을 실수와 실패만 거듭한 신의 신좌라니. 광대로 살고 싶다 해도 인생을 해학적인 비극으로 보내고 싶진 않을 것 아니오?】

이번에는 라리루라에게 말을 거는 듯 싶었다.

라리루라는 박스를 쥔 손이 살짝 떨린 걸 보고 입을 닫았다.

【그 자, 로키는 저주받은 실패자요. 그 신좌를 받아서 살아남는다 한들, 남은 삶은 상상도 못할 고통 속에서 ‘살아남기만’ 하리라고 예언하겠소.】

다비드의 말은 메아리처럼 이어졌다.

【선택은 자유요. 허나 알만큼 알지 않소? 삶은 때로 죽음보다 고통스럽소.】

“……아핫♡ 그러니까 저더러 곱게 죽으라구요?”

【룬으로 침묵과 순종을 맹세하겠다면 살려드릴 수도 있소. 나도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나는 로마니아 인을 지키는 귀족이기도 하거든.】

라리루라는 눈을 찡그리고 크라운 크라운, 본인 말로는 로키 신이라는 여인을 봤다.

그녀처럼 광대옷을 입고, 오랜 시간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애쓴 듯한 겉모습.

저렇게 될 만큼 노력해온 시간과, 그 한결같은 의지에 대한 존경심은 있다. 하지만 저렇게 되고 싶냐는 물음에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그래서 라리루라는, 의심이나 의문을 제쳐두고 묻기로 했다.

“왜 이렇게 될 때까지 싸우셨어요?”

“사랑하는 언니가 저놈들 손에 죽어서.”

“아, 그거라면 어쩔 수 없네요.”

그녀였어도 그랬을 것 같으니까.

눈앞이 맑게 개인 느낌이었다. 라리루라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인정하기는 싫은데, 저희 꽤 마음이 맞는 편이네요♡!”

“동족혐오니? 그래, 공연으로 먹고 살려면 경쟁심도 좀 있어야지.”

로키는 싱긋 웃고 남은 질문을 한 번에 다 쏟아냈다.

【……■■■■■!!】

역겨운 듯 외친 다비드가 라리루라를 노렸다.

로키에게 남은 유희신의 신좌가 제대로 계승됐다가는 전황이 뒤집혀버릴 것이었다. 우르의 화살은 차원의 벽을 뚫고 날아갔다.

그렇게 화살을 쏘고 나서, 다비드는 바로 앞에 옛 지배자의 혈통을 느꼈다.

“불리할 때만 사람인 척입니까? 낭만을 모르는 분이군요.”

─터엉!! 키아라가 화살을 받아쳤다.

부상이 적은 다리에 비늘과 본체의 힘을 실어서 화살을 발사 직후 걷어찼다. 차원의 벽이 메워지기 전에 되돌아간 화살이 다비드의 활을 3개 꺾었다.

【……이 잡종 놈이, 어느새!!】

“유물입니다. 아, 저기 엎어져 있는 건 제 허물이구요. 파충류라서.”

─츠팟!! 키아라가 추가로 공격을 날렸지만 다비드는 다시 시간을 멈췄다.

노이즈를 느낀 키아라는 몸을 날리며 물러났다.

“아르마슈나스 씨! 다시 날릴 겁니다!”

“기왕이면 저도 백작 부인이라고 불러주실래요!”

라리루라와 로키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남은 마나를 끌어모았다.

형성한 필드는 100연발을 막느라 사라졌고, 또 환경을 조성하자니 시간을 끌어서 유리한 것은 그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다비드였다.

목표를 겨누는 과정은 필요없다. 완드를 믿고 〈대소멸(Big Crunch)〉을 외웠다.

“질문 9. 이번 걸로 마지막 질문이야.”

로키는 노르드가 남기고 간 상자를 라리루라의 손에 쥐어주며 윙크했다.

“똑똑한 사람이 바보처럼 굴때가 제일 귀엽다. 네 / 아니오?”

“무슨 질문이 그래요? 당연히 ‘네’죠.”

한결같은 수준의 질문들에 라리루라가 어이없어 했을 때였다. ─달칵. 상자가 열리고 안에 숨겨져 있던 황금색의 열쇠가 굴러 떨어졌다.

“끝내주네. 9문항 중에 8개. 크라운 크라운보다 2개나 더 많은걸.”

로키는 그 황금색 열쇠를 집고서는 라리루라의 가슴에 내밀었다.

그리고 염려를 담아서, 마지막으로 다시 물었다.

“후회할 것 같으면 그만둬도 돼.”

“안 해요. 절대로.”

오딘을 죽였다는 이들이다. 그 후계자라는 노르드를 살려둘 리가 없다.

그러니 목숨을 구걸해서 살아남을 이유가 없다.

“고마워.”

로키는 살짝 찡한 듯 눈물을 글썽대며 외쳤다.

“이 신좌는 앞으로 네 거야! 마음대로 쓰렴!”

─달칵.

문을 잠긴 적도 없었던 것처럼 열리고, 로키의 신좌가 그녀를 떠났다.

넘겨준다고 죽는 건 아니구나. 안심 반 아쉬움 반으로 로키는 눈을 감았다.

평생 함께 한 힘이 사라진다. 허전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언니 오딘이 후계자를 만들려 했던 게 조금 이해가 가서, 그것만은 기뻤다.

그렇게 그녀가 의식을 잃고, 시간이 멈췄다.

다비드는 전황을 확인하면서 이를 갈았다.

종족의 마술로 늘렸던 활은 4개가 됐다. 쏠 수 있는 화살도 그만큼 줄어든다.

도망치는 것도 실패는 아니다. 죽는 것보단 낫다.

하지만 상대는 이제 갓 신좌를 손에 넣은 인간 계집.

거기에 담긴 힘을 얼마나 다룰 수 있을까. 다룰 수 있다고 해도, 우르의 신좌를 얻은지도 몇 년이 지난 그다. 저 계집이 권능의 사용에서 더 뛰어날 리는 없다.

오히려 후일을 도모했다가 강해지는 편이 더욱 문제다.

─철컥.

생각은 길지 않았다. 멈출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은 만큼 1발이라도 더 많은 화살을 쏘고자 그는 촉수로 석궁처럼 일그러진 화살을 당겼다.

우습지도 않은 광대년들. 하찮은 농담에 기분을 잡치는 것도 이제 끝이다.

그는 있지도 않은 입매를 비틀며 시위를 놓고, 놓고, 또 놓았다.

─쩌적.

하지만 그 순간, 화살은 발사하자마자 얼어붙고 정지했다.

시간이 멈춘 차원에 물리법칙의 영향은 대부분 적용되지 않는다. 예외는 오직 그와 그가 다루는 마법과, 차원을 다루는 권능 뿐.

【…………R'ap-Vokuqa!!】

그래서였다. 그는 빙결 현상을 인지한 즉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도주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의 동족을 말살한 미치광이 광대. 그 2번째 프리퀄에 어울려줄 마음은 결코 없었다.

─터엉!!

그러나 차원의 틈도, 공간을 뛰어넘는 마법조차 작용하지 않았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듯, 실이 끊긴 꼭두각시가 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 ……?! …………!!】

마법만이 아니라, 그의 몸까지도.

그때, 그는 뒤늦게 발견했다.

그 손가락에서 뽑아낸 마나의 실을, 고장난 꼭두각시 대신 공간 전체에 두른 소녀를.

이 공간을 자신만의 무대인 양, 수만 년에 걸친 사악한 지혜를 다루는 그보다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는 그 권능의 모습을.

“생각보다 쉽네요. 공연할 때 무대를 장악하는 거랑 다를 바 없어요♡”

─까딱. 그녀가 손가락을 당겼다.

라리루라가 발휘한 권능은 멈춰 있던 티르시의 시간을 다시금 흐르게 하고.

“〈대소멸(Big Crunch)〉.”

벌레처럼 묶인 별의 자손의 영혼을, 실금이 간 공간이 잘게 찢어발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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