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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채로 산산이 찢겨지는 이생물체.
‘잡았다.’
완드의 자동조준 효과가 정확하게 들어간 것과, 다비드의 본체가 마나 한 톨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을 확인한 티르시는 드디어 긴장의 끈을 놓았다.
〈강림〉 상태의 그녀가 기척을 기울여도 적의 기척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이에요!”
그래서였을까. 라리루라가 이완되려는 분위기를 다잡으려는 듯 외쳤을 때, 티르시는 놀란 나머지 마법이 거의 풀릴 뻔 했다.
“지금, 한순간 차원의 틈새로 빠져나갔어요!”
라리루라는 실을 차원 너머로 뻗으면서 권능을 눈에 집중했다.
시공간을 주무르는 다비드의 차원 마법을 뚫고 왕궁 안을 지배했던 유희신의 권능. 그 권능은 한순간에 빠져나간 다비드의 기척을 붙잡았다.
“기사회생으로 반격할 힘은 없겠지만, 도망치려 할지도 몰라요!”
일행을 독려하면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놓쳤어.’
놓치고 만 것은 전적으로 라리루라의 실수였다.
이 잠깐 동안에 〈꼭두극〉을 응용하여 권능을 다루는 방법을 습득한 건 놀랄 일이었지만, 오늘 처음 다뤄보는 전혀 다른 차원의 힘 아닌가.
공간이 일그러지는 순간에 실의 구속은 그녀의 의지력과 무관하게 뚝 끊어졌다.
퍼엉─!!
하다 못해 다비드를 찾아내고자 감각을 곤두세웠지만, 그 순간 라리루라의 영감을 커다란 마나의 파도가 뒤흔들었다. 동문 쪽에서 터져나온 마나의 분류였다.
누군가 신에 준하는 이가 죽었다.
그 마나가 그녀의 지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하기도 잠시. 라리루라는 이 혼란스러운 흐름에서 적을 찾아낼 자신이 없었기에 생각을 바꿨다.
“……발퀴리에!”
통신용으로 남은 마지막 발퀴리에.
이 개체마저 잃었다간 통신과 합류마저 어려워질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과감하게 꺼냈다.
다비드를 놓치면 동족과 합류할 것이다. 적들은 거의 전부 쓰러졌다. 따라서 지금은 합류 자체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중요한 분수령이다.
“얼음 마법! 닥치는대로 뿌려버려요!”
“명령 실행.”
ᚺ(Hagalaz)의 룬을 흩뿌리는 발퀴리에. 눈에만 보인다면 모든 얼음은 티르시의 마나가 된다. 마나 중독 같은 부작용을 겪을 일도 없다.
─콰지직!
권능으로 얼음 자체를 술식으로 삼은 티르시는 완드를 겨눴다.
“……지하?”
하지만 완드가 조준한 다비드의 위치는 다름도 아닌 지하.
〈강림〉 상태의 마나를 조금 빌려서 차원벽을 뚫고 들어왔을 때, 티르시는 지하에 있는 마나의 혼돈을 감지했다. 저기가 카네쉬의 공간 왜곡, 그 중심이라는 것도.
다비드에게 공간 마법을 맞춘다면 티르시가 그 봉인을 푸는 걸 돕는 꼴이 된다.
【도 망.쳐? 내가 인.간을.상 대.로? 틀렸.소.】
재차 일그러진 목소리를 내뱉는 건 벽의 얼룩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사그라든 다비드의 본체였다. 앙상하게 사그라든 촉수가 지하계단의 봉인을 관통했다.
─푸욱!
【그럴. 여.력은없 소.만, 지.하의 왜.곡을. 끌.어올릴.수. 는 있소이.다.】
“동반자살이라도 하려구요?! 저희는 아직 죽기엔 파릇파릇하다구요!”
라리루라도 방금 얻은 권능으로 왕성의 지하가 얼마나 마경(魔境)이 되어 있는지 알았다. 다시금 권능을 펼쳐서 그를 구속하려 한 것은 그래서였다.
…파르르!
하지만 그 잠깐 사이에 모든 진력을 다 써버린 듯 권능은 발휘되지 않았다.
【그권.능 은 특히. 연비. 가 좋.지 않소. 나.를 막을.체 력.은 없.을 테지.】
다비드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생물로서의 감수성이 다른 그에게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감정에 물들기는 했어도 죽는 것에 대한 공포는 없다.
동족에게 이 난적들의 존재를 경고하고 싶기는 했지만, 그의 목숨을 대가로 동귀어진을 이룬다면 이러나 저러나 결과는 같을 것이다.
【자. 최후.를 받 아들.이시.오!! 이.는 곧 심.연 건너.의 존.재요!!】
남은 생명력을 탕진하여 이계의 문을 연다.
어려울 게 무언가? 카네쉬의 왜곡의 중심점에선 별의별 이계의 출입구가 뒤섞여 있다. 그가 가진 신좌를 건네준다면 초대에 응할 이들은 있겠지.
【Iail'k! Ms-ofu Aiodu'──】
“2000만 볼트 방전.”
다비드가 바깥 세계의 신을 부르는 주문을 목이 터져라 외쳤을 때였다. 콰르르르릉─!!! 정확하게 봉인만을 피하며 날아온 번개가 그의 남은 체적을 불살랐다.
처참한 사념파를 비명처럼 터트리면서 다비드는 눈을 돌렸다.
그렇게 방해꾼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는 태어난 이래 느껴본 적 없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에 머릴 얻어맞았다. 익어버린 눈동자가 안압으로 터지고 말았을 정도였다.
“쓰벌, 끝나자마자 달려왔더니 무슨 일이래.”
번개를 날린 것은 왼쪽 눈을 감은 노르드였다.
그러나 다비드를 엄습한 감정의 원인은 영혼을 지져지고 발버둥을 방해받은 것이 아니었다. 노르드의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 때문이었다.
【신을……!! 우리 신의 힘을 어떻게 했느냐!!】
“느그 신은 제물로 삼았다, 왜.”
정확하게는 그 힘을 ‘노르드’ 자신에게 바쳤다고 해야 하겠지만, 그는 굳이 친절한 설명을 덧붙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다 죽어가는 괴물이다. 트래쉬 토크를 걸 만한 가치도 없다.
【아, 아아아아아!!!!!! AaaAAaaaa■■!!!!!!!!!!】
단지, 그것만으로도 다비드의 이성은 증발했다.
부글부글부글…!!!
치이이이익…!!
번개에 지져져서 한층 늘러붙은 타르처럼 변한 그의 육신은 미쳐버린 세포의 움직임을 그림으로 묘사한 듯 부글거리며 두려움에 날뛰었다.
죽음도 고문도 이 절망감에 비하면 하찮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의 사후에 위대한 존재께서 이 땅에 강림하지 못하게 된다면? 노르드의 몸을 기점으로 부활을 이룰 수 없게 된다면?
그걸 막지도 못하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채 죽게 된다면?
그 공포는 다비드에게 있어서 미지였다. 공포를 부르기에 충분한 절망이었다.
【……죽어. 죽어.라!! 싸.그 리 죽어.버.려!!】
─덜컹!! 그가 지하계단의 봉인을 풀었다.
본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고 미치게 만드는 이족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모독적인 정신은 인간에 불과한 노르드를 본 것으로 붕괴한 것이었다
“선배!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저 사람을 막아야 해요!”
다친 모습이 보이지 않는 노르드에 대한 기쁨도 접어두고 라리루라가 외쳤다.
노르드는 잠시 팔찌에 손가락을 끼웠다가 눈을 반개했다. 어째서 움직이지 않는 걸까. 겉으론 안 보이는 상처라도 입었던 걸지도 모른다.
‘제일 부상이 적은 건 나야. 내가 해야 해.’
라리루라는 손톱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쥐었다.
권능이 풀린 건 어쩔 수 없는 실수였다지만, 그 결과로 가족이 죽는다면 피치 못한 결과라고 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쿵.
지하로부터 발소리가 울렸다.
다비드는 절망하다가 환희했다. 죽기 직전인 그 몸으로는 올라오는 기운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절대 약해빠진 존재는 아니었다.
낮게 잡아도 반신!
그의 예감이 맞다면, 연전으로 쇠약해진 저들을 쓸어버리기에 충분한 신적 존재!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보라, 불신자들아!! 절망과 시련 끝에서 나는 운명을 잡았노라!! 아버지께서, 나를!! 이 Bagd'ana를 보우하셨음이 분명하도다!!】
미래를 엿본 노르드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다비드라는 이름을 쓰던 별의 자손은 그 변화에 광소를 터트렸다.
인간의 몸으로 그의 신의 총애와 축복을 받았으면서도, 그 힘을 거절하다 못해 자신이 준신으로 승화하는 데 사용한 배덕! 그 오만!
끔찍한 배은망덕을 저지른 그가 절망하는 꼴이 다비드의 죽어가는 혼에 스며들었다.
【네놈은 스스로 벌인 죄악을 갚게 되리라! 그 업에 목졸려 죽으리라!!!】
다비드는 소멸해가는 사념파를 터트리며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올라오는 위대한 존재를 찬양하고자 쇠를 긁는 것만 같은 끔찍한 축가를 외웠다.
【오시오, 이계의 신이여──!!】
혼탁한 이족의 축가 속에서 [그것]은 올라왔다.
─철벅.
[그것]은 갓 뒤집어쓴 생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오리할콘보다 질긴 외피로 몸을 감고 있었다.
[그것]은 4개의 부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보는 뭇 인간들을 무릎꿇고 숭배하게 만드는 비행기관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방금 전까지도 1만을 넘는 이계의 존재들을 말살하고 있었기에, 낯선 공간에 들어서는 이 순간에도 새 사냥감을 찾으려는 듯 눈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 이런 시발.”
때문에 예지에서도 봤던 [그것]의 눈빛과 눈이 마주친 순간, 어떤 강적과 싸울 때도 승산을 찾던 노르드는 저항할 투쟁심과 대화를 시도할 의지를 통째로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비드는.
그는 축가를 멈추고 터진 안구를 주르륵 흘렸다.
【……인간… 암컷?】
─콰직!
[그것]은 구둣발로 다비드를 밟아터트렸다.
“새끼가 누구더러 암컷이래. 징그럽게 생겨선.”
─북북. 구두 밑창을 문지르자 성스러운 갑옷에 짓밟힌 다비드는 완전하게 소멸했다.
머리카락을 넘긴 그녀는 이계 생물들의 혈액에 젖은 투구를 휙 벗어던졌다.
티르시는 완드를 내리면서 턱을 떨어트렸다.
“……다, 다다, 다나?!”
“네, 다다다다나 베르베이아입니다.”
발퀴리에의 갑옷을 입고 빛의 날개를 펼친 여인.
강대한 기척을 흘리며 지하에서 올라온 그녀는 다름 아닌 다나였다.
파티가 뿔뿔이 흩어진 후로 소식도 없던 다나는 대답하면서 티르시를 살폈다. 아르마 알스의 장비 일식(一式)을 위아래로 훑고 눈이 점이 되는 다나.
“꼴이 왜 그래? 노출증?”
“풀 플레이트 메일에 피칠갑을 한 다나한테 들으니까 좀 울컥하는 게 있네요.”
“아하, 그건 신앙심이에요. 영광스런 다나 교의 제 1성녀가 될 권리를 드리겟읍니다.”
“와, 이름 세상 없어 보이네요.”
“그건 또 뭔…… 야, 너 이교도지. 이교도? 이교도지?”
툴툴댄 다나는 갑옷을 해제했다.
─텅! 그리고 지하계단의 뚜껑을 발로 걷어차서 닫았다.
“개 같은 괴물 새끼들.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다나를 따라서 올라오던 발퀴리에들이 마법으로 몸에 튄 더러운 피를 지워주자, 그녀는 평소보다 짙어진 다크써클을 문지르며 안숨을 내쉬었다.
입을 헤~ 벌리고 있던 라리루라는 차렷 자세로 거수했다.
“……네! 죄송한데요 언니들! 제 머리가 이해가 잘 안 가서 그러는데요! 왜 다나 언니가 지하에서 나오죠? 괴물이 나올 장면 아닌가요?”
“니가 기대한 괴물들 내 경험치로 대체되었다. 유감을 표하지.”
지하도(들어가면 못 나옴)에서 싸움을 벌이다가 온 다나는 한숨을 쉬었다.
라한에 의해서 공간이 뒤틀린 채 날려보내졌던 건 다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위치가 하필 밖과 연결된 왕성의 지하였던 것이다.
“발퀴리에랑 에인헤리를 닥치는대로 뽑아서 다치지는 않았지만, 메달은 연결되지도 않지, 어느 쪽이 출구인지도 모르지…… 나 진짜 개고생하다 왔다?”
“무사하셔서 천만다행이에요! 그런데 이제부터 제가 새로운 힘에 눈 뜨고 끝내주는 클라이막스를 장식할 예정은 어디로 갔나요?! 대활약한 제가 일 끝나고 선배랑 뒹굴댕굴거리다가 덜컥 애를 배서 제일 먼저 아들을 낳을 예정은?!”
“썸녀 L 주제에 건방지다. 반지부터 끼고 오렴.”
“으아앙─!”
라리루라를 침몰시킨 다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기 쉬운 왕성을 대충 훑다가, 죽거나 크게 다친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치료사답게 안심했다.
그리고 나서는 아까 전부터 등을 돌린 채 말이 없던 노르드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쓰담쓰담. 베어진 우신 가죽 갑옷을 쓰다듬던 다나가 물었다.
“우리 남편놈도 고생 많았었나 보네. 그런데 왜 아까부터 눈을 돌리고 계실까?”
“우리 눈나 여신 폼이 너무 예뻐서 눈이 멀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칭찬 고맙네. 그래서 눈도 꼭 감고 있었쪄요?”
“내!”
활기차게 대답했지만 노르드의 다리는 공포심에 덜덜 떨고 있었다.
노르드는 다비드가 봉인을 풀려는 걸 방치했다. 지하에서 나타나는 게 다름 아닌 다나라는 사실을 미래예지로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재차 말하자.
예지능력이 가장 읽기 쉬운 미래는 죽음과 그에 준하는 예언자의 파멸이다.
그렇기에 노르드는 이 미래를 읽었다.
“후후후. 그래서 말인데, 노르♡?”
평소 그녀로부터는 절대 상상도 못할 간드러진 목소리.
다나는 노르드를 뒤쪽에서 끌어안고는 측면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너, 눈깔은 어쨌니?”
에일리언처럼 어깨 건너로 그를 바라본 다나의 눈은 무저갱처럼 깊었다.
“……‘새로운 시대’에 선사하고 왔지.”
나는 뒤졌다.
─끼릭.
세 아내들이 동시에 얼굴을 향하는 걸 보면서, 노르드는 파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