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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란 건 전파됨에 따라 점점 바뀌는 거야.”
방의 원근감이 무너트리고 우주 공간처럼 바꾼 로키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해주는 신화가 인간의 세상, 중간 가지 미드가르드나 노르드의 고향에 알려진 것들과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질문은 몰아서 해 주길 바랄게.”
휴욱─. 로키가 다트하듯 던진 빛은 우주를 헤엄치다가 별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가 모인 방을 밝은 우주로 만들고서 로키는 설명을 시작했다.
“세계가 만들어지고 나서, 태초의 우주에는 혼돈에서 태어난 우둔한 거인 이미르와 거대한 암소인 아우둠라만이 있었다고 해.”
우주에는 하얀 거신과 암소가 유영하고 있었다.
암소는 별보다 거대한데도 무색무취해서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았지만, 거신은 달랐다.
이미르는 그 하얗게 명멸하는 몸에 걸맞지 않게 소름 돋는 공포심을 새기는 존재였다. 성스럽다는 느낌보다는 하얀 정신병원에 갇힌 것처럼 호흡이 턱 막혔다.
“셰이드의 주술은 알지? 이 우주를 지탱하던 건 우둔한 이미르의 꿈이었어. 이미르는 잠에서 깨지 않는 존재였기에 창조주와는 거리가 멀었지.”
이야기에 맞춰서 별들이 뭉쳤다. 그것은 우리의 눈에 익숙한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개중에서 하얀 여신을 발견하고 곧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눈치챘다. 저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저들은 태초의 신들이었다.
“그리고 우주의 곳곳, 얼음이나 불꽃, 바위에서 가장 오래된 신들이 태어났지. 처음부터 부모조차 없이 오롯이 홀로 태어난 존재들이지.”
로키는 그렇게 말하면서 우주를 관망했다.
“인간들이 말하는 주신들은 대부분이 이 무렵의 존재들이야.”
그녀가 바라본 차원에는 두 눈이 멀쩡한 시절의 오딘과, 헤니르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근처에 낯선 신이 1명.
아마 저게 로키의 본래 모습일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아직 스스로 신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즈음의 우리는 알게 됐어. 저 우둔한 거인은 사악한 존재이고, 그가 깨어나선 안 된다는 걸.”
거신으로부터는 마치 껍질이나 땀 같은 노폐물 등이 떨어지는 것처럼 끔찍한 괴물이 쏟아졌다. 그것들은 여러 차원으로 굴러 떨어지며 제각각 번성했다.
‘……니플헤임의 서리 거인도 있군.’
그들 중에는 내 눈에 익숙한 몬스터들도 있었다.
나는 그다지 강하진 않았던 괴물들이 생각보다 굉장히 오랜 역사를 가진 괴물들이었다는 사실에 좀 낯선 기분을 느꼈다.
“이미르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지만, 그렇다고 선악을 구분할 수 없다는 건 기만이지. 우리들의 생존에 위협적인 존재를 선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우둔한 거신이 사악한 존재라는 건 그 존재방식 자체로도 확고했다.
우주를 메울 듯이 사악한 괴물들을 낳는, 보기만 해도 공포를 일으키는 존재. 로키의 환상일 뿐인 모습도 저렇게 역겨운데 진짜는 또 어땠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이미르를 죽였어.”
하얀 거신의 목이 찢어지면서 우주가 피로 가득 물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 시체로 세계수를 만들었지.”
거인들은 태반이 익사하면서도 살아남았고, 그 시체에 오딘은 작은 묘목을 심었다.
묘목은 시공의 흐름을 초월한 것처럼 확장하며, 이미르에 비하면 아주 작은 나무를 낳았다. 물론 작다는 그건 거인이랑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다.
엄청난 크기의 세계수는 뿌리와 가지를 그때도 있었던 차원들과 연결하며, 새 열매를 맺었다. 그 열매들로 날아가는 신들의 모습도 보였다.
“우리는 창세의 권능으로 대륙을 만들고, 인간을 만들었지.”
프랑은 거신이 사라지기 전, 그 발가락 끝에서 생겨난 작은 존재들을 보고 있다가 로키의 설명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도 그녀를 따라하듯 머릴 돌렸다.
세계수의 중간 쯤 되는 가지에 대륙과 새 피조물들을 창조하는 신들이 보였다.
이미르의 시체라는 비옥한 토지와, 법칙을 주무르는 창세의 권능.
그런 조건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피조물들과 보낸 수만 년의 시간은 이미르를 해치우기로 마음 먹기까지 걸린 시간에 비하면 아주 아주 순간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몹시 충실한, 그리고 즐거운 시간이었어.”
로키의 설명은 그랬지만, 나는 개중에서 유독 더 천방지축인 신들을 보고 있었다.
【~♬】
리즈 시절의 로키도 장난이 아니었던 모양이긴 한데, 오딘은 한 술 더 떴다.
수십 년이나 되는 시간을 세계수 아래에서 계속 명상하던 그녀가 문득 눈을 떴다. 나도 매우 눈에 익은 배경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창을 쥐고 일어났다.
“나는 저 언니가 기어이 미친 줄 알았어.”
─푸욱.
세계수에 자신을 메다 꽂는 오딘.
자신을 자신에게 공양하는 제물의식이었다.
“그래도 저 이후 멀쩡하게 내려와서, 우리들도 모르던── 우리 태초신들이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를 해 주는 언니를 보곤 힘이 쫙 빠졌지.”
피투성이로 떠벌거리는 크레이지 마법 사이코.
몇날 며칠을 매달려 있다가 내려와서 하는 말에 골치가 아픈 듯 눈을 문지르는 두 신들.
헤니르와 로키는 그러다가 슬쩍 눈빛을 섞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지만 인정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잖아? 우리들도 모르던 지식을 깨우치고, 세상의 진리를 저 작은 문자열에 전부 담기까지 하는 언니인데.”
가족 같은 상대의 업적을 칭찬하는 말투였는데, 로키의 목소리는 가라앉은 채였다.
“……만약 우리가 저때 말렸으면, 오딘 언니도 더 많은 지식을 추구하진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시간은 흐르고, 인간은 번영한다.
신들의 가호와 축복, 때로는 치사한 질투심이나 패악으로 세상을 통치하던 신들. 십인십색이라고 못난 신들도 있었지만 그만큼 선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오딘이 추구하는 지식은 끝이 없었다.
그건 아마 운명의 흐름대로 정해진 오딘의 존재방식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었던 성 싶다. 사람이 배가 고프고 잠이 오는 것처럼, 지혜의 신이었던 오딘은 태초로부터 줄곧 그럴 운명의 존재였겠지.
끝없이 지식을 탐구하고, 그렇지 못할 때 솟는 분노를 다스리는 신.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어느덧 세계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우주의 변방에서 지혜로운 거인 미미르를 만나고, 그의 샘에 눈을 바친 대가로 한층 더 지혜를 얻었다.
눈을 포기하여 미래를 보는 눈을 얻었다.
어떤 신들도 보지 못하는 세상의 끝에도 그녀의 눈길은 능히 닿았다.
그래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도 만족하지 못해서, 계속 더 멀리까지 그 눈길을 뻗고──
오딘은 보고 말았다.
신들의 지혜도 미처 닿지 못한 광활한 우주의 그 어딘가. 오딘처럼 별의 바다를 관망하던 전혀 다른 계보의 신. 신도 인간도 닮지 않은 존재.
‘그녀’는 거인들보다 거대했다.
다족류를 닮은 촉수를 길렀으며 등에는 피막이 붙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으나, 사실 어떤 정해진 형태도 모습도 갖지 않은 영적인 존재였다.
위그드라실의 신들과 다르게 육체를 갖지 않은 이질적인 이들.
우둔한 원초신이 살아생전에 낳은 사생아인가.
혹은 다른 신들처럼 스스로 태어나고자 했기에 발생한 신적인 존재인가.
또 그마저 아니라면, 혹시 그들보다도 더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이들인가.
오딘은 무한하게 지혜를 탐닉하던 끝에 그들을 발견하고 만 것이었다.
─번뜩.
그리고 오딘이 ‘그녀’를 보았기에, ‘그녀’도 역시 오딘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문득 지구의 유명한 글귀를 떠올렸다.
네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본다던가.
“언니는 뒤늦게 알았어. 무지를 알게 된다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란 걸.”
오딘이 ‘그녀’를 관측했기에 비로소, ‘그녀’와 그 혈족들은 세계수의 존재를 알았다.
세상과 세상의 끝에 있던 신들.
그들은 언젠고 그렇게 마주치게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린 언니는 서둘러서 해결에 나섰어. 저들이 찾아오는 날은 곧 전쟁의 시작이 될 테니. 자기만한 예지력을 갖춘 선지자들을 찾았지.”
“……그리고 들으셨겠지요.”
그 선지자들의 후예인 베로니카는 억지로 입을 여는 것처럼 말했다.
“신들의 파멸. 라그나로크의 예언을.”
라그나로크.
대다수의 신족들이 죽고, 신대가 끝나버린 원인.
─파스스.
우주가 무너져내리면서 히타이트의 왕성은 전과 다름 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우리도 그대로였다.
“……오딘 언니는 누구보다 운명을 잘 읽으면서 정작 그 운명의 존재를 혐오했어.”
로키는 한숨을 섞어가며 눈을 감았다.
“그야 그렇겠지. 주어진 운명대로 파멸을 불러버리고 말았으니까. 언니는 자기 책임을 운명이라는 편리한 변명거리에 맡길만큼 무책임한 성격이 못 됐던 거야.”
“그 뒤로는 신화의 내용과 비슷하겠군요.”
입술을 만지던 티르시는 얼굴을 찡그렸다.
미미르를 만나서 지혜를 빌렸으며, 발퀴리에를 만들거나 에인헤리를 모았다.
옛 지배자들과의 전쟁, 라그나로크를 대비해서.
“신들은 라그나로크를 막고자 동분서주했지만, 결국 막지 못하고 멸망한 거였군요.”
“……그건 아냐.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 멸망도 막을 수 있었을지 몰라.”
눈을 부라리는 로키. 자신들의 실패를 정당화할 생각으로 억지를 부리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문어 대가리도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았어. 그년은 바니르의 왕, 우리와 사이가 껄끄러웠던 신들의 주신인 뇨르드를 죽이고는 그 가죽을 뒤집어썼지.”
“해신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년의 이름은 세계수의 생물들은 제대로 발음할 수 없어서 나는 여전히 그년을 【해신】이라 불러. 이름을 알아도 부를 생각은 없지만. 너희도 절대 부르면 안 돼.”
왜 그래야 하냐고 물어보진 않아도 됐다. 우리가 전부 비슷한 표정을 지었기에, 로키도 굳이 우리 입을 통해서 질문을 듣지 않고도 대답했으니까.
“옛 지배자들은 이름 자체에 힘을 가지고 있어. 우리들이 천공신이니 뇌신이니 하는 식으로 불린 것도 그 일환이지만, 저들은 더 지독하지.”
“지독하다면, 어떤 식으로?”
“자격을 가진 이가 이름을 올바르게 부르면 그 자리에 즉시 강림할걸.”
다나는 괜한 걸 물어봤다는 표정으로 질색했다. 로키는 픽 웃었다.
“하지만 보통 문자나 발음으론 표기하지 못해. 오직 언니가 만든 룬 문자만이 그나마 근접하게 그 발음을 표현할 수 있었고.”
“그래서 오딘 님은 사람들이 룬을 못 쓰도록 봉인한 거에요?”
“그런 이유도 있고, 언니의 성좌가 오염됐으니 룬에도 영향이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도 있지. 기록으로만 남기게 ‘글자로 새기는’ 것만 허락했던 거야.”
프랑은 납득했다는 듯 자기 나이프를 살폈다.
인간은 룬을 발음하는 걸로는 효과를 못 본다. 오직 그에 적합한 물체에 각인했을 때에만 효과를 볼 수 있었고, 그건 인간의 변종인 일부 몬스터도 마찬가지.
예외는 바이콘들 같은 신족이었고 말이다.
“……음.”
나는 이 얘기를 듣고 지구의 유명 호러 소설을 떠올렸지만, 다른 것부터 물었다.
“그 이후, 【해신】의 행보는 어떻게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