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발이 끝내주겠어.”
화가의 실력에 감탄한 것처럼 사진을 보는 오델리아.
“군대를 동원해서 탄압할 게 아니면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의 통제는 불가능하겠지. 국내만 피와 칼로 다스려도 다른 나라도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진 않을 테니.”
간단한 묘사까지 동봉된 그림.
그것은 지금 로마니아를 달구는 기사에도 자주 보이는 유적의 삽화나, 촉수 괴물들의 초상화였다. 다비드는 녹아서 없어졌지만 그 부하들은 남았던 것이다.
“이제 더는 황제도 권력으로 이 판을 뒤엎을 순 없어.”
“이만큼 달궈진 판을 뒤집으려면 화상을 입게 될 터이니.”
나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리 이세계가 신분사회여도, 여론은 강력한 무기다.
‘시민들만으로는 조금 모자라지만, 귀족들도 이 판에 꼈으니까.’
우리는 기사를 퍼트리고 고고학자들의 연구서를 공개하며, 카네쉬에서 찾아낸 증거를 퍼트렸다. 이 물증들이 아틀란티스 회담의 연장선이었다.
─로마니아는 아틀란티스와 협력했던 대전쟁의 주역이었다!
─해명할래, 뚝배기 터질래?
─여기서 뚝배기는 니들 경제입니다.
이 프레임은 강력하다. 로마니아를 그대로 국제 사회의 왕따로 만들기 충분할 만큼.
‘하지만 너무 강력한 게 문제지.’
외부의 적은 일치단결을 일으킨다.
전세계에서 다굴을 때리면 로마니아의 모든 사람들이 ‘세상이 나를 억까한다! 역시 우리 로마니아야말로 100% 정당하고 올바른 인종이야!’라면서 정신승리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로마니아를 고립시켰다간 내 권력 기반─이랄 게 생겼다는 게 감개무량하긴 하지만─도 다 무너져버린다. 듀나미스 공방 빼고 전멸이에요.
막말로 로마니아가 2차대전 직후의 전범이 되는 것 아닌가.
셀레나, 어르신, 오델리아. 와이번 운송.
게다가 우리 아내들까지 전부 ‘으으 문어박이’란 소리를 듣게 되는 미래!
안 돼! 난 그런 미래 감당할 수 없어!
그래서는 황실과 같은 체급이 되서 죽빵을 1대 때리겠다고 팔다리를 잘라서 체중을 감량하는 짓! 이런 미친 병신 짓거리는 절대로 벌일 수 없다.
그럼 어떡한다?
‘어떡하긴 어떡해. 외부의 적이 안 되면 내부의 적을 만들어야지.’
─뚝! 나는 쿠키를 나누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휴, 정치인들의 갈라치기는 무섭군요.〉
〈혹시 마스터 클래스가 되고 양심을 잃었니?〉
〈이 친구는 원래 양심이랄 게 없었다네.〉
〈가끔 있더라. 머리는 좋은데 공감능력이 많이 결여된 정치괴물들.〉
노인네 둘이 합심하고 사람 소시오패스 만드는 것 봐.
노인공격이라는 게 노인한테 처맞는 걸 말하는 거였나. 나는 삐져서 말했다.
〈대전쟁의 책임을 전부 황실에 씌우면 간단히 갈라치기가 가능하다고 말한 게 누구였죠?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귀족들이 자기한테 날아오는 모든 비난을 황실에게 덩크슬램할 거라고 한 건?〉
〈너.〉
〈자네일세.〉
아닌데? 아닌데? 비디오 판정 돌려봐라. 당신들 이거 치매 증세야.
아무튼 누군가가 제의했고, 우리는 그 끝내주는 계획 아래 도원결의를 했다.
뭐시기 병법에서 가로기를, 적이 강하면 약하게 만들면 장땡이라 하였다.
고전 명작 영화에서도 그런 대사가 있지 않은가.
─저 새끼 순 나쁜 새끼에요!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전부 시켰어요!
─그래서 할 수 없었어요! 저 새끼 순 나쁜 새끼에요!
착한 어린이 친구들도 경험은 있겠지?
그냥 속 편하게 월급이나 타고 싶지, 학생들의 감수성 및 성장환경을 텔레토비 동산처럼 평화롭게 조성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는 일부 악질 선생들의 무책임한 책임론 말이다.
─떽! 누가 제일 잘못했어! 말해!
연대책임은 때리는 자에게 좋고, 꼬리 자르기는 맞는 자에게 좋다.
외부의 적이 왜 일치단결을 부르는가. 그건 ‘아! 이 개씹호로새끼를 먼저 족치지 않으면 내 소중한 뒤통수에 칼빵을 맞겠구나!’ 싶어서다.
반대로 내부의 1명을 희생하는 걸로 끝난다면?
─……이번 일, 누구 한 명 옷 벗어야겠다.
─나는 우리 기업의 회장을 병원 또는 구치소로 보내는 것으로, 이 턴의 종료시까지 판결에 의한 형량 데미지를 무효로 한다!
바로 맞췄다. 형사 영화, 범죄 영화의 단골 소재인 그거다.
누구 하나가 독박을 쓰거나, 혹은 쓰는 척 하는 행위.
로마니아의 권력자들은 기꺼이 도마뱀 꼬리 자르기를 시전했다.
하지만 그 꼬리란 게 쉽게 잘리지도, 자를 수도 없는 상대인 게 난점이다.
“현실적으로 황제를 몰아내는 건 어렵지만, 이 한 건으로 적을 묶어놓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로마니아의 권력구도를 보자.
만인지상의 황제. 하지만 그의 폭정을 막는 기관으로서 원로원이 존재한다.
나라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명목.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황제는 충성의 대상이지만, 계급제란 허상이다.
‘사람 심리라는 게 교수일 때는 행복해도 대학원생으로 돌아가라면 싫거든.’
나는 제 잘난 듯이 모가지에 힘을 주고 다니던 교수들일 수록 윗사람한테 굽실대다가, 그가 떠난 뒤에 표정이 썩창나서 지랄하는 걸 너무 많이 본 사람이다.
원로원에 들어갈 만한 귀족들은 자기 땅에서는 황제 부럽지 않은 금수저들.
그들에게 절대황권은 곧 악습이자 폐단이다.
기업이 법에 반발하듯 귀족은 황권에 반발한다. 그리고 황실은── 그들의 뒤에서 실을 드리우는 별의 자손들은 귀족들을 휘어잡지 않았다.
황제가 대대손손 몇백 년 내내 원로원을 회유해 구슬리는 것보다는, 다비드처럼 내부에서 여론을 잡고 조종하는 게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대놓고 말해서 황제 따까리로 전락하면 원로원 밖에서 반항세력이 생겨날 테니.
하지만 일은 돌고 돌아, 지금 그들이 풀어 기른 개들은 한시도 제 주인이었던 적이 없는 황제님을 물어뜯을 생각이 만만했다.
‘거슬리는 황제를 때려서 약화시키면서 면피도 할 수 있다?’
엄맛! 이게 버닝 이벤트지 뭐야?
누가 ‘니들 잘못임?’하고 물어보면 ‘저는 착하고 황제가 다 잘못해슴’으로 세간의 비난을 피하면서 패스하기. 이런 찬스를 놓칠 귀족들이 아니다.
그보다 놓치면 황실이랑 같이 처맞아야 될 걸?
─황제! 해명하시오!
─왜 숨겼어? 왜 숨겼어? 왜 숨겼어? 왜 숨겼어? 왜 숨겼어? 왜 숨겼어? 왜 숨겼어?
─이보게, 혹시 자네는 알았나? 황제가 어인을 따라서 전쟁을 일으키고 그 역사를 직할부대에게 시켜서 수백 년 동안 숨겨왔다더군!
─우린들 알았겠나! ……아니 시발 근데 진짜로 몰랏음. 자다 깨서 뺨 맞은 느낌임.
─그니까 시발! 이러다 우리 다 죽어어!
─답은 뭐다? 황제를 때린다. 지 혼자 감췄죠? 감추다가 들켰죠? 책임 져야죠?
당연히 귀족들은 입을 모아서 황실에게 해명을 요구하게 될 수밖에.
우리는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상황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대전쟁 후에 융성해진 나라. 저 놈들도 해명해야 할 입장이지만.’
분명 적을 압박하는 수단으로는 적절하다.
하지만 딱히 즐겁지는 않다. 꼭 매국노 새끼를 종용해서 일본 전범 몇 명만 골라다 패는 것 같은 느낌도 드니,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옳은 말을 하는 K-소울이 징징 우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고전 명작 영화도 그렇다. 꼬리 자르기보다 더 중요한 대사는 그 뒤에 나온다.
─니들도 다 나빠! 히잉…….
알고도 묵인했냐, 아니면 진짜 몰랐냐의 차이는 있지만 모른다고 해서 끝날 일은 아니다. 평범한 로마니아 인들로서는 뜬금없이 원죄를 씌워지는 느낌이겠지.
‘근데 이걸로 끝이라고는 아무도 말 안 했거든?’
모든 역사는 발토되고, 발토된 역사는 평가받는 날이 온다.
지금은 꼬리를 자르려는 도마뱀도, 로마니아의 죄악이 세상에 알려지면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피를 보지 않는 선에서 죄를 갚아간다면 그게 제일이겠지만.
인간의 역사가 어떤 결말이 될지는 운명을 보는 내 눈으로도 예지할 수 없다.
‘……윤리를 따지는 일은 나중으로 제쳐두고.’
나는 복잡한 생각을 뜨거운 차로 흘러넘겼다.
일단은 황실에게 빅 엿을 던졌다는 걸로 충분한 상황.
“황제를 압박하고, 증거를 토대로 황실에 있을 이생물체들을 구축할 거야.”
오델리아는 티스푼을 검처럼 내질렀다.
“환부는 도려내야 하지. 아무리 아프고, 환자의 원망을 사더라도.”
“옳은 말씀이십니다. 힘내시길 바랍니다.”
“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르신도였다.
“……자네는 끼지 않을 생각인가?”
“이미 도와준 것만 해도 충분하긴 한데, 몇 주 알고 지낸 너는 여기서 뺄 성격이 아닌데? 남한테 못 맡기고 나선다면 모를까.”
“여러분들이 제 안 좋은 소문의 근원지였군요?”
나는 혀를 내둘렀는데,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보통 때라면 나도 여기서 본격적으로 체스 두듯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거리면서 고민을 거듭했을 것이니까.
“아니 뭐, 아예 손을 떼겠다는 건 아니고요. 또 이런 일이란 게 저희가 시간을 들이고 노력한다고 진전되는 게 아니잖아요?”
“책임자는 방향을 정하고 서류를 찍으면 족하긴 하지.”
“그거야 제가 새벽에 잠 좀 안 자면 되고요.”
며칠 안 자도 피곤하지 않은 몸이다. 업무연등 빡세게 굴리면 그만이지.
내가 실실 웃자 오델리아는 이 새끼가 돌았나? 하는 느낌이었고, 어르신은 눈치챈 것처럼 손뼉을 쳤다. 알고 지낸 시간의 차이였다.
“……그렇군. 회임은 아닐 테고, 브리타니아까지 귀국하나?”
“예. 그래도 아내의 친가 같은 분들이 이 나라 사람들이어서요. 데리고 잠깐 돌아가 있을 생각입니다. 인질로 잡히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고요.”
나는 품에 손을 넣으면서 말했다.
“건실한 어른이라면 가정에도 충실해야죠.”
***
음습한 노인네들과의 대화 후.
내가 우리가 묵는 변관으로 나가자, 거기는 웬 종교집회장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입니까?”
“그래, 룬은 그렇게 쓰는 거야. 언니가 쓰는 걸 본 만언신이 정통성을 보장할게.”
벤치에 앉아 있는 로키, 크라운 크라운과 우리 여신님이다.
“오오, 오오오오오……!”
“로키 님께 가르침을 받다니!! 이제 죽어도 더는 여한이 없어요……!!”
베로니카의 뒤로는 거의 무릎 꿇고 교주의 말을 경청하는 사이비 광신도들도 있었다. 바이콘 신족 친구들이다. 우는 사람이 80% 쯤 된다.
나머지 20%는 안 울고 버텼냐고?
“다들! 일어나셔야 합니다! 그렇게 쓰러지셔선 안 됩니다!”
“힘 내십쇼! 힘 내십쇼, 형님!”
“일어서라…! 상대는 로키 님이다! 우리를 낳아주신 로키 님이야!”
아니, 울며불며 기절했다가 다른 사람들이 깨워주고 있었다.
충성심이란 게 내면에 뿌리 박힌 듯한 그들이다. 이 분위기는 그야말로 수령님이 부활한…… 크흠. 그 뭐시냐, 그리스도가 부활한 바티칸 같았다.
“묭묭묭묭……”
뒤로는 짐볼 같은 것에 한 발로 서서 무슨 무공 수련 중인 것처럼 꿈쩍도 않는 라리루라도 보였다. 기행 그 자체지만 라리루라다워서 저건 아무렇지 않다.
이걸 시민들이 보면 난 빼박 이교도 재판이다.
브류나크, 부탁해. 어둠과 음의 마나랑 그 사용 기록은 빼돌려 줘…!
“……다들 뭐하고 있는 거야?”
“응? 뭐냐니? 후임 교육이지.”
바이콘들의 신앙을 몸소 받는 로키가 정작 대수롭지 않게 나한테 손을 흔들었다.
당연히 그런가. 오히려 인간으로 위장하고 사는 게 더 이상한 태초신이었지, 얘.
“룬을 가르치고 있어. 네 부인한테 알려주니까 다른 애들을 부르더라고?”
“베로니카가?”
“……이런 천은망극한 가르침을 혼자 들었다간 내가 뭇매 맞을 것이니라.”
기름 부음 받은 성녀처럼 제일 앞에서 조아리며 기도하던 베로니카의 말이었다.
로키는 내가 쳐다보자 황급히 말했다.
“오해 말아줄래? 내가 꿇린 거 아니거든? 얘가 멋대로 이러는 거야!”
“알아. 말리기 힘들지. 나도 반말 시키는 데 한 고생 했었어.”
“그, 그래. 휴. 난 또 ‘감히 우리 귀염둥이한테 얼차려를 줘?’라며 날뛸 줄 알았지.”
“……………….”
“………………아닌 거 맞지?”
로키는 태초신의 위명에 맞지 않게 벌벌 떨다가 바이콘들에게 휴식 시간을 줬다.
“돌아가서 연습하고 와.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예!!!! 성은이 망극했나이다!!!!”
“……아, 어어. 응.”
입을 모아서 대답하는 바이콘들. 얼탱이나 나간 로키.
신님의 시간을 빼앗을 수 없다고 생각한 걸까. 바로 물러나는 게 좀 신기할 정도다. 신과 인간이 나뉘어지고 존엄의 격차가 있는 진짜 신분사회의 위엄을 본 기분이었다.
이렇게 비교하고 보면 무력해지면 황제고 뭐고 바로 물어뜯는 인간은 대체 뭘까.
“그저…… 좆간…….”
“좆간? 지구에는 별 이상한 말이 다 있구나?”
로키는 벤치에 앉은 채로 라리루라를 가리켰다.
“저 애는 뭘 하고 있는지 안 궁금해?”
“서커스 훈련.”
“……【보천의 편자】의 사용법을 배우고 있는 거야.”
무슨 편자? 나는 고개를 모로 꼬았으며, 로키는 바로 대답했다.
“【보천의 편자】. 유희신의 권능 말이야.”
“아하. 근데 이미 잘 다루지 않았어?”
“천재도 배움은 필요해. 좋은 교사가 있으면 더 그렇고.”
“백 번 천 번 맞는 말씀. 내가 멍청했네.”
나는 우리 후배님의 훈련 모습을 살폈다.
집중 상태인지 우리가 떠드는 동안에도 눈을 뜰 기미가 없다. 내가 오면 바로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듯 달려오던 라리루라의 보기 드문 모습에 좀 감탄이 앞섰다.
【보천의 편자】.
신화에선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달리는 구두’로 알려진 유희신의 차원 조작 권능.
보천(普天)이라는 말은 천하를 뜻한다.
천하란 ‘하늘 아래’라는 뜻이다.
천공신 아래에서 가장 자유로운 장난의 신. 그 권능의 이름이 어떤 기분으로 지었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물려준 로키의 기분은 또 어떨 것인가.
감히 짐작해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수만 년이라는 시간은 인간이 이해한다고 떠들 만큼 얕지 않을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대신 로키를 불렀다.
“로키.”
“남들 앞에선 그냥 크라운이라고 불러. 왜?”
무슨 일이냐는 듯이 묻는 그녀. 나는 혹시라도 라리루라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잠깐 시간 좀 내 줄래?”
사람의 마음을 잘 아는 이 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