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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리루라는 꿈속에서 눈을 떴다.
“……얍!”
어느새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허릿심만으로 일어난 그녀는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꿈속에 라리루라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가 꿈속이라는 걸 안 이유는 별 것 없다.
로키의 도움으로 유희신의 권능을 쓰는 연습을 하던 차에, 노르드의 제안으로 라리루라를 포함한 여러 명이서 셰이드의 주술로 꿈속에 들어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제 꿈이지만 좀 독특하네요?”
오늘 ‘들어온’ 이 꿈속 세상은 노르드의 내면이 아닌, 라리루라의 꿈속이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익숙한 초원은 온데간데 없고, 무척 번성한 느낌의 대도시였다. 어쩐지 좀 익숙한 느낌에 라리루라는 고개를 모로 꼬았다.
여기가 어디인지를 눈치챈 건 골목 밖에 고개를 내밀고 나서였다.
‘……그렇구나.’
로마니아 양식의, 조금 전시대적인 풍경.
이곳은 라리루라가 크고 자란 도시였다.
자라난 곳이긴 해도, 태어난 곳인지는 모르겠다. 라리루라가 ‘라리루라’라는 예명을 쓰기도 전부터, 철이 들기도 전부터 살던 곳이었으니까.
하필 이곳이 꿈속 세상이자 그녀의 내면이라니. 생각하는 바가 없는 건 아니다.
성도 부모도 없는 ‘프리실라’는 어느 날 이곳을 찾은 서커스단과 만났다.
운명이라고 하면 듣기는 좋지만, 정말 운명이긴 했을까는 의문이다.
‘같이 데려가 달라고 했다가 불벼락을 맞은 서커스단만 다섯 개는 되는걸.’
그녀는 주머니를 뒤졌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엔 작은 책자가 있었다.
〈원숭이도 할 수 있는 궁중광대〉.
크라운 크라운의 저서.
그녀가 꿈을 꾸게 만들어준 계기였지만, 이것에 홀려서 나름 연습하고 따라 한 기술들을 뽐내봐도 도시에 찾아온 서커스단은 라리루라를 쫓아낼 뿐 받아 주지는 않았다.
지금 와서 보면 왜 그렇게 쫓겨났는가는 일목요연했다.
도적도 있는 세상에서 순회공연을 하러 다니는 서커스단은 위험한 직업이다. 게다가 그 크뤼소스 서커스단처럼 악독한 인신매매범도 있다.
‘프리실라’를 무섭게 쫓아냈던 서커스 단원들은 그녀가 행여나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일부러 더 매몰차고 사납게 굴었던 것이다.
하지만 끝끝내 그녀는 플랑궁쿨라 서커스단을, 알렉산드라 단장을 만났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끝에, 문득 한 남자의 곁에 정착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으음. 그런데 왜 꿈속에 저 뿐이죠? 혹시 제가 1착이어서?”
“그럴걸? 【보천의 편자】는 모든 형태의 이동 전반에 유리하거든.”
뒤에서 빛이 퍼지며 나타난 로키가 말했다.
“우리랑 달리 다른 애들은 아직 의식이 꿈속에 투영되기 전일 거야.”
어쩐지 마법사인 노르드나 베로니카보다 빠르게 들어왔나 했더니, 유희신의 신좌 덕분이었던 모양이다. 라리루라는 눈을 깜빡였다.
“네에? 이건 차원을 다루는 권능 아니었어요?”
“꿈도 엄연히 하나의 세계니까.”
라리루라의 뒤를 이어 꿈속에 찾아온 로키는 휙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저었다.
“말했지? 태초의 세계는 우둔한 거신 이미르의 꿈과도 밀접했다고. 그리고 세계수의 대지도 나를 비롯한 신들이 창세의 권능으로 현실에 끄집어낸 ‘꿈’── 즉, 상상 속 이미지기도 하고.”
“아, 맞다! 그렇게 들었었죠?”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얘기는 노르드의 경험 등에서 들은 바 있었다.
로키가 들려준 창세신화도 그런 내용이었고.
“창세의 권능은 자신의 내면을, 상상력을 세계 외부에 투영하는 능력. 자의식을 가진 생물들에게 꿈과 현실은 표리일체야.”
또한 마나는 현실이라는 꿈을 주무르는 일체의 행위에 지불되는 비용이었다.
손가락을 꾸물거리던 로키는 곧 체념한 듯 손을 내렸다.
“창세의 권능을 쓰는 시범을 보여주려 했는데, 생각보다 어렵네. 뭐, 당연한가. 이제 나는 만언신으로서의 소소한 능력밖에 안 남았고.”
셰이드의 주술은─꿈속 세상에 한정한─ 창세의 권능의 하위호환 마법이다.
ᚦ(Thurisaz)의 룬이나 셰이드의 주술, 그밖에도 자격이 있는 자는 꿈속 세상을 주무를 수 있었다. 단지 로키는 지금 다른 영혼─라리루라─의 꿈을 개찬할 여력이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키는 라리루라를 여기 불렀다.
“그래도 네가 연습하긴 쉬울 거야. 자신의 꿈을 원하는대로 조종하는 요령은 창세의 권능을 쓰는 요령이랑 거의 똑같거든.”
두 기술은 기반이 되는 원리가 같기 때문이다.
노르드가 명계에서 세헤테피브라의 꿈, 피라미드 속 세상을 주무른 것처럼.
그리고 후에 레티티아와 싸운 실전에서 창세의 권능에 준하는 마법을 펼쳤던 것처럼.
현실 세계는 신들이 구현화한, 영원불멸히 깨지 않는 꿈.
꿈을 지배하는 자는, 마땅한 권한만 가진다면 현실 역시 지배할 수 있다.
“꿈속의 세상은 연습 스테이지인 셈이지. 칼로 저글링 묘기를 하기 전에 안전한 공으로 먼저 연습하는 것처럼 말이야. 더 낮은 스테이지에서 훈련하다가 현실에서도 적용하면 돼.”
신적 존재의 힘─신좌의 권능 등─은 대부분이 창세의 권능의 강화형.
꿈속이야말로 권능 연습을 위한 공간으로 가장 적당한 것이었다. 라리루라는 들어오기 전에도 한 번 들었던 얘기에 눈가에 V자를 가져갔다.
“아핫♡! 비유하니까 알기 쉽네요! 금방 습득해 보일게요!”
“자신이 넘쳐서 좋네. 젊은 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아.”
대답을 하던 로키의 눈길이 라리루라의 왼손에 머물렀다.
라리루라는 시선을 눈치채고 말했다.
“아, 이거요? 크라운 크라운 님의 저서에요! 음, 그런데 이 ‘크라운 크라운’ 님은……”
“내가 맞아. 내가 기른 제자가 멋대로 내가 쓴 것처럼 남겼더라고.”
“……스승을 추억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크라운 크라운이 아닌걸. 이 몸은 죽어가던 주인의 소원을 들어준 대가로 잠시 빌린 것에 불과하거든.”
로키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크라운 크라운의 청(請)은 자신의 이름을 가장 뛰어난 광대로 남겨달라는 것.
그렇지만 로키는 크라운 크라운이라는 이름이나 기술을 뛰어난 곡예나 기예로 세상에 퍼트리기는 해도, 굳이 스스로의 손으로 글로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식으로 기억되는 ‘크라운 크라운’은 원래의 당사자가 아니니까.
그래선 그녀가 신화로 전해지는 로키와 오딘의 가짜와 다를 게 없잖은가.
“그래도 역사라는 게 남겨지기 싫다고 남겨지지 않는 건 아니더라.”
로키는 한숨을 참고는 장난기 있게 윙크했다.
“우중충한 얘기는 이쯤 할까? 그보다 다른 애들 엄청 늦네? 빠져가지고.”
“누가 빠졌다고?”
휘익─!
건물 위쪽에서 내려오며 노르드가 말했다. 그의 팔뚝에는 거의 매처럼 큰 까마귀가 앉아 있었다. 라리루라는 팔을 벌리며 꺅꺅 웃었다.
“꺄앗♡! 브류나크, 커졌어도 귀여워!”
“뺘앗?”
“……너도 이 녀석 좋아해? 아, 원래 동물은 다 좋아했었지?”
노르드는 고개를 모로 꼬다가 브류나크를 라리루라에게 보냈다.
안면이 있던 만큼 브류나크는 갸웃거리긴 해도 망설임없이 라리루라에게 안겼다.
“……라리루라, 새치기했어.”
“이해하거라. 여긴 라리루라의 꿈속이잖느냐.”
네페르티티와 베로니카도 걸어왔다.
아무래도 각자 깨어난 위치가 달랐던 모양이다. 복슬복슬한 날개에 얼굴을 묻은 라리루라는 그 틈새에 얼굴을 내밀고 헤실헤실 웃었다.
“에헤. 언니들도 연습이셨나요♡?”
“그렇고말고. 룬은 천공신께서 만드신 권능이니, 룬을 충분히 숙달하면 권능에도 필적하신다는 게 로키 님의 가르침이셨느리라.”
룬은 창세의 권능의 파생이자, 사용자에 따라선 더 강력한 힘이다.
에퀴녹스가 죽은 파라오들로부터 흡수한 창세의 권능을 진짜 신 수준으로 모은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강화법이었다.
적잖이 불쾌한 비유기에 베로니카는 입에 담을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나도.”
네페르티티도 짧게 긍정을 나타냈다.
오델리아로부터 들었던 조언을 기반으로 그녀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고민 중이었다.
바빠 보이면서도 일과인 단련은 빼먹지 않았던 오델리아다. 물어볼 기회는 있었다.
─……요령? 에른스트도 말했듯이 강한 감정은 성장에 있어서 큰 원동력이긴 해.
네페르티티의 질문에 오델리아는 그렇게 말했다.
─내 지레짐작이 아니라면 네가 나이나 출신에 비해 빠르게, 그리고 굉장하게 강해질 수 있었던 건 네게도 그럴 만한 연원이 있어서였을 거야.
─그래도 역시 그것만으론 한계가 있겠지.
복수를 바라며 뼈와 살을 깎아내서 얻은 강함.
오델리아는 네페르티티의 황량한 마음속을 지적했던 것이다.
─짐을 비우면 산에 오르긴 쉽지만, 정상까지는 도달할 수 없는 법이란다.
비우면 비울수록 몸은 가벼워지겠지만, 한계와 저점은 가까워진다.
네페르티티는 그런 선문답에 약했기에 고민은 더 깊어졌다.
엊그제 노르드가 먼저 눈치채고 묻지 않았다면 그에게도 상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흐흐. 네페르티티는 문과가 아니니까요.
─……무슨 뜻?
─아무 것도요. ‘한 우물만 판다’는 말이 듣기는 좋지만, 파는 곳이 쫌만 삐끗해도 수맥을 놓치게 되잖아요? 네페르티티는 이미 충분히 굵은 수맥을 찾긴 했지만요.
그래도 ‘더 큰 수맥’을, 더 강한 힘을 얻으려면 다른 곳에 눈을 돌려야 한다.
오델리아와 노르드의 조언은 그랬다.
물론, 이 길고 복잡한 사정을 설명할 말재주가 네페르티티에겐 없었지만 말이다.
만지작….
네페르티티는 오빠의 유언을 옮겨둔 룬 스톤을 매만졌다.
자신을 깎아내는 식으로는 자신의 내면에 산을 쌓을 수 없다.
굴라나뢰크의 늙은 엘프도 복수와 증오를 쌓아 권능에 준하는 힘을 얻었음에도 마스터가 되지는 못하지 않았던가.
네페르티티는 기사단장 가이우스가 보여주었던 일검의 충격을 되새겼다.
불필요한 여분의 무게를 담았기에 오히려 그의 검 끝은 오델리아에게도 닿았다.
쓸데없는 감정. 불필요한 여분.
‘……나한테는 없는 것들.’
네페르티티는 조금씩 웃고, 농담할 수 있게 됐을 뿐이다. 이 정도로 감정을 제대로 되찾았다곤 할 수 없을 것이었다.
당장 네페르티티부터가 이런 삭막한 땅에 뭔가 피어나리라곤 기대하지 못했으니까.
“삐엑?”
날갯짓을 하며 날아온 브류나크가 그녀의 팔에 앉았다.
브류나크를 끌어안은 네페르티티는 저도 모르게 노르드를 보았다가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작은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아른거렸다.
“뺘아 뺘?”
“……걱정 마. 전부 옛날 일.”
사막에도 꽃은 핀다.
네페르티티는 고작 이 정도의 벽에 가로막힐 생각은 없었다.
“서두르지 말고 이것저것 하면서 쉬고 있어.”
우르르르─!! 노르드는 도시 외곽에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퍼올린 기억으로 현대 도시를 세우면서 말했다. 숙련된 조교의 루시드 드림 시범이다.
“꺄! 역시 선배는 제 마음을 알아준시다니까♡!”
라리루라는 반색하며 박수를 치다 그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어? 선배는 어디 가시게요?”
“나는 이 양반이랑 잠깐 들릴 데가 있어서. 아, 물론 들린다고 해도 꿈속이야.”
로키를 가리키며 말하는 노르드.
“아핫, 그러시다면야♡! 느긋하게 다녀오셔도 된다구요? 한 3일 정도?”
“너 농땡이 부리고 싶어서 그러지?”
“완전 편견이거든요? 놀랍게도 광대는 성실하지 않으면 못 해먹는 직업이에요?”
말이야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라리루라는 어떤 사정인지 대략 이해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에부터 노르드한테 들은 여러 이야기들이 워낙 충격적이었던만큼 연상하긴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노르드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오딘의 모습.
천공신 오딘의 분신은 노르드가 부르거나 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고, 애초에 더는 보지 못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딘의 기억이나 이미지는 아니다.
울프헤딘으로서 본 오딘이나 슬레이프니르.
혹은 예르나의 기억에서 봤던 헤니르.
그 기억 정도는 재생하기 어렵지 않다.
더불어 그건 로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한 번쯤 다시 보고 싶은 기억들이었다.
“다녀오세요♡! 사랑스러운 후배는 현모양처의 아이콘답게 조신하게 기다릴게요!”
그렇기 때문에 라리루라는 매번 그랬던 것처럼 평소 같은 말투로 상대를 배려했다.
“하여튼♡! 선배도 참 복 받으셨다니까♪ 저처럼 참하고 다소곳한데다 얌전하고 남편에게 내조하는 아내라니, 요즘 같은 시대엔 멸종위기종이라구요?”
“다녀오세요 한마디를 A4용지 25% 분량으로 떠드는 현모양처가 어딨슴.”
“놀랍게도 지금이라면 그런 현모양처가 무료로 체험 가능! 품질 보증 기간도 무려 100년! 놓치면 땅을 치고 후회할 초특가 찬스♡!”
“사장님이 미쳤어요식 세일 잘 봤구요. 갔다 올 테니까 안 오면 먼저들 돌아가도 돼.”
“네에~? 선배, 상품 계약은요~?”
“이미 1200개월 할부로 계약해 뒀음.”
낄낄대며 떠나는 노르드를 배웅하던 라리루라는 돌아서면서 눈을 반짝였다.
“그럼 언니들, 뭐 하고 놀까요?”
“직전의 긴 인삿말을 한달음에 휴지통에 던지는 멘트는 어쨌건, 놀 생각이 먼저구나?”
“……나는 찬성.”
결국 찬성의견이 많았고, 베로니카도 진심으로 반대하진 않았기에 그녀들은 잠깐의 휴식을 먼저 가지기로 했다. 휴식은 성장을 위한 보약이니까.
“음, 그러니까…… 분명 그 책이 있던 곳이……”
라리루라는 찾아다니던 건물에 들어가서는 바로 잡지를 집어들고 펼쳤다.
능숙한 무대연출가인 그녀는 알고 있다.
의외성이나 허를 찌르는 연출은 도가 지나치면 안 하느니만 못할 때가 있다. 너무 뜬금없는 쑈는 흥미롭기는 커녕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도 한다.
때론 관객들이 ‘지금인가?’하고 기대하게 만드는 게 가장 좋은 반전이기도 한 것이다.
“……에헤헤.”
그러니까, 딱히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니다.
절대로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라리루라는 남몰래 결혼 잡지를 펼치면서, 그만 실없이 웃고 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