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틀란티스로 돌아오고 며칠 뒤.
나는 계약을 한 건 마치고 살짝 가벼워진 가죽 주머니를 챙겼다. 정확하게는 내가 아니라 옆에서 시종처럼 따라온 발퀴리에가 말이다.
“역시 현찰 박치기가 짜세긴 해.”
흐뭇하게 웃은 나는 바이콘 마법사 친구의 도움으로 아틀란티스까지 돌아왔다.
이동이 워프 한 번으로 끝나버리니까 중독되게 생겼다. 흐뭇하게 미소지은 나는 방을 둘러보고서 가지고 다니는 메모 노트를 펼쳤다.
─찍찍.
준비 리스트에서 한 줄을 더 그었다.
무대는 갖췄으며 연기자도 불렀다. 연습도 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뿐.
라리루라를 부르는 것이었다.
‘아마 저 녀석도 눈치를 챈 모양이긴 한데.’
생일이 다가오면 괜히 들뜨고 주변에 눈이 돌아가는 것처럼, 일이 돌아가는 느낌을 직감한 듯이 보이던 우리 후배님이셨다.
‘덕분에 알렉산드라 씨 눈치는 덜 봐도 됐지만.’
서프라이즈를 놓친 건 아쉽지만, 뭐 별 수 없지.
이 이세계는 내가 자란 지구와는 다르다. 고백 문화가 거의 없는 곳이다. 그래서였는지 내가 프랑에게 했던 나름 화려한 고백에 누구보다 놀라하던 라리루라였다.
그래서 나도 오늘은 라리루라의 취향에 맞춰줄 생각이었다.
주먹을 쥐었다가 편 나는 심호흡을 하고 추가로 몇 시간을 들여서 세팅을 끝냈다.
─파앗!
바이콘 레이틀링의 도움으로 다시 원래 있었던 곳으로 〈공간이동〉.
내가 옷매무새를 만지자 그는 몸을 숙였다.
“좋은 시간 되시길.”
─끄덕.
인사하고 떠나가는 그를 보내고 대기하길 몇 분.
아니, 어쩌면 몇 시간이었을지도 몰랐다.
내게도 이런 기다림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니.
“……으응…?”
꽃에 감싸인 침대에서 라리루라가 눈을 떴다.
며칠 동안 꿈속 세상에서 권능을 연습하던 우리 후배님이 깨어난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비비면서 일어났다가 낯선 공간과 어둠에 깜짝 놀랐다.
말은 없었지만 바짝 굳어서 주변을 살피는 것만 봐도 충분히 놀란 모양이었다.
어둠에 눈이 적응하는 데 시간은 들지 않았다. 라리루라가 누워있는 침대는 꽃이 핀 얕은 물 웅덩이였고, 그 웅덩이는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일어난 그녀는 발치의 빛나는 물에 발을 담그려다가, 큰 꽃이 피어나면서 발이 젖지 않도록 받쳐주자 중얼거렸다.
“……요정왕의 완드?”
눈치도 빨라요.
라리루라는 밑을 내려다봤다가 여기가 이상하게 커다란 무대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전세를 낸 오케스트라 연주장 같은 회관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라리루라가 들리도록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암막에 둘러싸인 무대가 밝아졌다.
빛이 흩뿌려지면서 몽환적인 색채가 연극 무대에까지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새 것처럼 깔끔한 광대옷을 입은 로키, 크라운 크라운을 말이다.
“오늘밤. 하나 뿐인 소중한 관객님께 이 무대를 바칩니다.”
“어? 네?”
이번엔 이해가 따라잡지 못한 것처럼 벙긋대는 라리루라.
정중하게 예의를 차린 크라운 크라운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저, 궁중광대 크라운 크라운의 마지막 공연을 이토록 기쁜 무대로 장식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그럼 지켜봐 주십시오. 〈꿈을 선물한 밤〉.”
나는 한 번만 더 숨을 고르고, 건반을 두들겼다.
─♬~ ♪~.
무대의 등은 내게도 쏟아지고, 연습했던 곡조에 맞춰서 크라운 크라운이 무대를 보였다. 생전에도 펼쳤던 기술들, 라리루라가 알거나 모르거나 하는 온갖 예술들이 곡조 속에서 반짝였다.
곡예기예는 로맨틱한 곡에 맞춰서 몽환적인 분위기로 나아갔다.
라리루라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크라운 크라운의 마지막 공연. 그 최후의 콘서트다.
무대와 가까운 관중석을 개조한 침대에 앉아서 라리루라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그녀도 미처 엄두를 못 낼 아름다운 곡예와 온갖 환상이 펼쳐진다.
로키로서 후배에게 보여줄 것은 남지 않았다.
하지만 크라운 크라운으로서는 아니다. 그녀가 만든, 로키가 남기지 못했던 예술혼은 시대를 몇 세기나 건너뛰어서 여기에 펼쳐졌다.
오딘이니 슬레이프니르니 하는, 로키가 또다시 보고 싶어하던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 대가로 약속받은 무대였다. 나조차도 1시간 가량을 아무 말도 못하고 지켜봤을 만큼 압도적인 예술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서곡으로 1시간은 너무 길다.
오늘의 주역은 로키가 아니고, 크라운 크라운도 아니며, 하물며 나도 아니었으니까.
─휙!
로키는 자연스럽게 공연의 분위기를 주도하면서 점차 밝고 경쾌하게 바꿨다.
그녀가 지휘하며 가르쳤던 곡조를 따라가는 건 무척 어려웠다. 내가 싸울 때처럼 온 신경을 눈과 손가락에 집중했기에 간신히 가능했다.
평생 처음 치는 피아노를 두들기면서 나는 이쪽 세상의 노래를 노래했다.
〈아, 그대! 연분홍 뺨을 붉히며 키스해준 날을 기억하나요? 처음으로 손을 맞잡았던 날은요~♬? 내 혼의 일부는 지금도 당신의 눈과 같은 색으로 하늘거려요~.〉
모략을 짜거나 욕설을 지껄일 뻔뻔함은 있어도, 낯부끄러운 노래를 부르면서 얼굴을 붉히지 않을 뻔뻔함은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못났다 싶다.
〈만약 그대 안에 제가 머물 자리가 있노라면, 들어주세요. 당신만을 위한 세레나데♪〉
그래도 노래는 계속됐다.
크라운 크라운의 실이 백일몽에서 태어나는 꼭두각시들을 휘감고 흥겹게 춤을 췄다. 정갈하게 합이 맞으면서도 자유분방한 춤이었다.
차라리 춤을 출 걸. 노래로 하는 고백이라니 잘 통하긴 할까.
낡은 느낌은 아닐까. 이세계에서도 이런 고백은 흔할 것 같은데. 그냥 로키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무대를 맡기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고민과 후회가 건반을 꼬게 할 뻔 했다. 하지만 끝까지 노래할 수 있었던 건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웃으며 침대에 걸친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는 그녀 덕분이었다.
그렇지. 이럴 때 울거나 하는 성격이 아니지.
그래서 나도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 거절당하고 폄하당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은 얻기가 힘든 만큼 얻고 나서는 큰 의지가 되는 것이었다.
〈당신만을 위한 세레나데, 오늘만을 위한 세레나데~♬!〉
♬♪~ ♬~….
마지막 가사를 부르며 건반을 놓았다.
“아핫! 아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핫♡!”
긴 고백 노래가 끝나고 나자 라리루라는 무대로 달려와서는 나한테 안겼다.
─쪽, 쪽!
정신없이 뺨에 키스하고 내 가슴에 얼굴을 비벼대던 라리루라는 활짝 웃었다.
“뭐에요, 진짜! 뭘 꾸미시나 했더니 로키 님이랑 이런 걸 준비하고 계셨어요? 아, 그보다 정장 잘 어울려♡! 이거 선배네 세상의 옷이에요?”
이제 나는 이 녀석이 재잘재잘대는 속도로 기분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말이 빨라지는 속도나 억양을 보건대 기분은 꽤 좋은 모양. 나는 흐흐 웃엇다.
“어때? 괜찮았어?”
“아뇨~? 감점이에요! 전 화장도 못하고 자다가 깨서 못나 보이진 않을까 걱정해서 집중을 못 할 뻔 했다구요! 수면에 제 얼굴이 멀끔한 게 비쳐서 다행이었다니까요!”
“끄악.”
완전 풀린 얼굴로 헤실대며 말하는 라리루라.
웃는 걸 보면 농담이겠지만, 틀린 말은 아니군. 이런 농담을 주고 받는 게 가능한 신뢰감이 있는 우리지만 내가 미처 여심을 헤아리질 못했다.
라리루라로서는 자다가 깬 느낌일 테니 무대에 집중하기보다 자기 차림새가 신경 쓰였을런는지도 모른다. 공듀님처럼 거울을 보여주는 중간과정을 끼워둘걸.
뭐라고 한 것 치고는 전혀 기분 나빠 보이지를 않는 라리루라는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치만 자다 깬 게 아니었으면 이렇게 놀라고 두근거리진 못했겠죠♡? 감점한 점수의 3배만큼만 가산점을 넣어드릴게요! 넉넉하게 받아가세요!”
라리루라는 허리를 틀며 그제야 자기 옷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앗, 그래도 옷은 예쁘네요♡? 얼굴도 깔끔하던 걸 보면 제가 잘 때 준비하셨어요?”
“……나름 꾸며주려고 노력하긴 했어.”
“누가요? 설마 선배가? 언니들한테 고백하는 걸 도와달라고 할 선배가 아닌데?”
“당연히 나지. 신을 잡부로 부리더라고.”
무대용 기물에 앉아갖고 다리를 흔드는 로키.
추억이 깃든 백일몽을 고용료로 불려온 광대는 턱을 괘고 킥킥댔다. 처음으로 이 녀석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장난의 신처럼 보이는 나였다.
“너무 나쁘게 보지 마. 열심히 준비한다고 하는 게 얼마나 기특하고 귀엽던지.”
“떽. 칭찬하셔도 안 나눠줄 거에요?”
“안 가져. 근육 많은 애는 내 취미 아니야.”
나는 꺅꺅 떠들어대며 나를 붙잡는 라리루라의 팔을 풀었다. 라리루라는 냉큼 비켰다. 그렇겠지. 아직 중요한 절차가 남았으니까.
사라락─.
무릎을 꿇고 연출을 가미했다.
손에서 회전하던 달무리가 상자를 만들었다. 그 안의 내용물은 불 보듯이 뻔하지만 상자의 색이나 형태는 라리루라의 취향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사랑해, 프리실라.”
역시 K-마초로서는 몇 번을 뱉어도 오글거리는 멘트였지만, 그 수치스러운 억양 덕에 진심이 전해진 듯 라리루라는 뒷짐을 지며 발을 종종댔다.
“늦어서 미안했다. 오랫 동안 힘들었지?”
어쩔 줄 몰라서 조바심을 내는 모습에 나는 픽 웃고 상자를 열었다.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라도 행복하게, 웃으면서 기다릴 수 있게 해 줄게.”
정해져 있는 대답은, 그래도 입에 담는 것으로 더욱 힘을 가진다.
주문은 꼭 마법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어차피 멀거니 선배가 와주길 기다리기만 하진 않을 거였지만…… 뭐, 좋아요.”
라리루라는 내민 왼손 약지에 끼운 결혼 반지를 가슴에 끌어안고는 혀를 내밀었다.
“참을성 정도는 가져볼게요! 어른이니까♡!”
나는 라리루라를 번쩍 안아들었다. 소리 죽여서 웃은 로키는 기구에서 빙글 돌면서 내려오고서는 불로 만들어진 미끄럼틀을 쭈욱 미끄러졌다.
우리는 침대석으로 돌아가서 손을 잡고,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어릿광대의 무대를 몇십 분이고 몇 시간이고 쭉 지켜보았다.
***
우리 후배님은 결혼식 때 한복을 입고 진행하고 싶다는 모양이었다.
“결혼식까지 내 나라 전통식으로 하면 눈에 좀 심하게 띌 텐데?”
“제가 입을 옷만 이것처럼 해 주시면 돼요!”
프로포즈 이후로 쭉 웃음이 가시질 않던 라리루라는 잡지를 묘사해 온 그림을 보여주며 말했다. 아무래도 본인만 입을 수 있으면 족한 모양.
“알았어. 준비해줄게.”
“선배 최고에요! 쿨해서 멋져♡”
언제까지 선배라고 부를지도 내기 거리겠구만. 우리는 라리루라가 삐뚤빼뚤하게 그려둔 단면도를 가지고 재봉 길드를 찾았다. 이색적인 옷이었지만 재단은 어렵지 않다.
“저어, 백작 부인? 정말 송구스럽지만, 이색적인 옷이어서 기간까지 만들기는 어렵──”
“현찰! 금화로!”
“저희 지부의 총력을 기울이겠습니다!”
혼수 자금이라면서 벌어둔 돈을 쾌척한 덕분에 완성은 순식간이었다.
“옷 정도는 내가 산다니까.”
“싫어요~. 서방님 옷을 제가 맞춰주는 게 오랜 꿈이었단 말이에요~.”
“검소한 꿈이군.”
라리루라는 눈을 빛내면서 허름한 노트를 한 권 꺼내서 펼쳤다. 안에는 이상한 그림이나 수십 줄 상당의 소녀소녀한 필체로 가득했다.
“결혼식 자체를 제가 하나부터 열까지 설계하는 게 목표에요♡!”
웨딩 홀의 아이디어 같은 건가?
화환 같은 모양까지 그려져 있…… 아니, 이거 나랑 베로니카 결혼 때 쓴 건데.
아주 철저하네. 진짜 기다리게 한 내가 쓰레기 그 자체가 돼 버렷!
─왁자지껄.
은근히 라리루라다운 꿈에 납득하면서 결혼식을 준비하길 한참.
우리 아내님들께 부탁해서 브리타니아 국내까지 다녀왔던 알렉산드라 씨의 정장 모습이 결혼식에 보였다. 딸 같은 라리루라의 결혼식에 공연을 안 할 사람들이 아니지.
“음. 바쁘긴 하지만 이번만은 안 올 수 없지. 내 손주 결혼식 때 혼수금을 받아야 하니.”
“풋풋하네. 어색해 보이는 게 또 아주 괜찮…… 생각해 보니까 너, 결혼 몇 번째니?
틀딱들은 높은 곳에 VIP 룸을 마련해 뒀으니까 내려오지 마시고.
펑! 펑─!
폭죽처럼 폭발하는 꽃잎이 화려하기도 하다.
누구 취향인지 딱 보이는 가운데, 우리 두 명은 웨딩 로드를 팔짱을 끼고 걸었다.
사람들을 부르고, 전혀 긴장감도 없이 헤벌쭉한 라리루라와 케이크를 썰고, 알렉산드라 씨가 주례 중에 펑펑 울었다. 이번에 주례로 부른 헨네시스 영애가 VIP룸으로 대쉬한 건 담이다.
“짠! 라리루라! 우리가 누굴 데려왔게!”
울어서 못쓰게 된 화장을 공연 전까지 고치러 간 알렉산드라 씨 대신, 플랑궁쿨라 서커스단의 단원들이 어느 소녀를 데리고 왔다.
쭈뼛거리는 것 치고는 곧은 자세로 걷는 소녀.
옷 디자인은 라리루라랑 비슷하다. 혹시 후임을 구했나?
‘어디서 본 듯한…… 아.’
에리카. 에리카다.
누구냐고? 예전에 크림소스 서커스단의 짝다리 씹년에게 납치당했던 아이다. 라리루라에게 곡예 기술을 배우던 소녀 말이다.
라리루라도 드레스처럼 꾸민 한복으로 입을 가리면서 깜짝 놀랐다.
“어? 어? 뭐에요? 혹시……”
“그래. 고아원 원장님이나 거기 영주님을 오래 설득한 끝에 우리 서커스단에 와 주기로 했었어. 예전부터 얘기는 있었는데, 드디어 잘 풀렸거든!”
나는 그 점에 대해서 고아원 원장이 나랑 우리 후배님의 소식─울프헤딘 백작의 소문─을 들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들었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어, 언…… 앗. 배, 백작 부인!”
“아핫♡! 언니라고 불러도 아무도 안 잡아가요.”
그럴 수밖에. 저렇게 기뻐하는데 어떻게 그따위 무정한 소리를 하겠는가.
나는 그렇게 열심히 연습한 에리카를 주역으로 한 서커스의 리허설을 보면서 팔짱을 꼈다. 그런 도중에 무대 뒤편에서 고개를 모로 꼬는 나.
“……근데 나, 결혼식이 너무 잦지는 않나?”
“귀족 중에서는 첩들 결혼식은 한 번에 몰아서 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아니, 처첩 구분도 좀 역한데 그건 에바죠.”
“그렇죠? 하나하나 구분하시는 점에서 충분하게 신경 쓰시는 편이니까, 이상한 데서 걱정하실 것 없어요. 귀족들은 생각보다 적당적당이고 자기중심적이거든요.”
엘리자베트가 보낸 왕궁 쪽 사람이 알려줬다.
아마 우리 관계를 들었을 테니까 립 서비스만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다행이다.
“얼른 가요, 선배! 시작하겠어요!”
“아직 10분은 남았어.”
플랑궁쿨라 서커스단의 공연을 보려면 앞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우리는 무대 뒤편에서 나가려다가, 길목 한가운데에 서 있는 로키를 발견했다.
라리루라는 멈춰서며 손을 흔들었다.
“로…… 크라운 님도 혹시 공연 해 주시게요?”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는 내 공연은 저번 걸로 끝이야. 수백 년을 건너뛰어서 되살아난 광대라니, 아무리 이름을 널리 퍼트리는 약속이라도 신빙성 자체가 없어지겠다.”
라리루라를 따라하듯 손을 내젓던 로키. 그녀는 우리 부부를 번갈아보았다.
“……너희들이라면 어떤 불행이 닥쳐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갑자기?”
“시끄러. 언니의 후계자랑 내 후계자한테 주는 축사 같은 거라고.”
내 리액션에 입을 삐쭉대던 그녀는 라리루라의 뺨을 잡고서 이마를 가볍게 맞댔다.
“……나는 차가운 별의 바다에 부모도 없이 태어났어. 출신을 모른다는 건 슬픈 일이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어떤 이유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가운데 얻은 자유는 마냥 막막하기만 해.”
이마를 맞대고 하는, 조금 뜬금없기까지 한 말. 하지만 라리루라는 전해지는 게 있는 것처럼 눈을 감고서 로키의 말을 들었다.
스스로 태어나고자 하여 태어난 태초의 신들.
그들을 생각하기 나름으로는 부모 없는 고아로 볼 수도 있을 것인가. 나는 로키의 말에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관점을 느꼈다.
“부모라는 건 모든 피조물이 탄생하기도 전부터 가지는 가족이야. 그렇지만 나는…… 오딘 언니랑 헤니르도 그런 게 없었어. 어떤 전지전능한 신도 혼자서는 고독을 달래지 못해.”
장난이나 도발로 타인의 감정을 사와도 그것은 로키가 바라던 게 아니었을 것이다.
관심을 받을 상대가 없기에 남의 관심을 바란다.
사람은 이미 가진 걸 찾아헤매지 않는다. 갖지 못한 것을 소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웃음소리를 갈구하는 사람은, 스스로 웃지 못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익살과 광대의 근원은 그런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가지지 못한 채 태어났다고, 쟁취하는 것마저 안 된다고 정해진 건 아냐.”
“아핫♡ 하나부터 열까지 당연한 얘기네요.”
라리루라는 웃었다. 로키도 따라서 웃었다.
“웃음을 추구하는 것만이 우리 광대의 권리야. 빈 손 가득히 네가 추구하는 꿈을 가득 움켜쥐렴. 너희라면 분명 문제 없을 거야.”
축복의 말을 남긴 여신은 내게 눈짓하며 말했다.
“왕과 광대가 나오는 동화는 보통 희극이거든☆ 나랑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피유우웅─.
퍼엉─!!
결혼식장에 폭죽이 올랐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공연장에 모여들었다.
“앗?! 늦겠어요!!”
라리루라는 깜짝 놀라서는 내 손을 잡고 다급한 걸음으로 달렸다. 치맛자락을 휘날리는 신부에게 끌려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로키는 계속 거기 남아 있으려는 것처럼 가만히 손을 흔들었지만, 난 걱정하지 않았다.
“같이 가 주지 않으시렵니까? 로키님.”
“……어?”
로키의 뒤에 무대 준비를 돕던 바이콘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현대 이세계의 옷으로 차려입은 그들은 가슴을 두드렸다.
“저희도 열심히 준비한 무대입니다. 사실 저들 뒤에 작은 공연도 준비해 봤습니다.”
“인간 세상에…… 아뇨, 새 시대에 적응하려면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될 듯 해서요.”
“저희도 나름 로키 님의 자손인데, 춤도 노래도 서툴러서야 쓰겠습니까!”
이제 자유를 얻고 세상을 살아갈 그들.
많은 걸 잃고 실패를 거듭했어도, 이 미래까지 이어진 건 있다.
오딘이 보고, 로키가 바랐던 광경이 말이다.
“……오늘 정도라면, 그래. 괜찮겠지.”
더는 그들의 마음을 받아들이기 버거웠던 듯이 어색해 했던 로키다. 그렇게 계속 입을 벌리고만 있던 그녀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가면 남는 거 있지? 나는 허접한 장난은 용서 못 한다?”
불꽃과 장난의 신은 그 이름에 걸맞게 웃으며, 방자하게 그들의 어깨에 홱 올라탔다.
까마득한 옛날, 평화로운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