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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통절 첫째 날.
로마니아 제 3황녀는 기도하던 손을 풀었다.
〈지금부터 교단의 성뢰(聖雷)를 내리겠습니다. 귀인께서는 부디 제 앞으로.〉
교황의 지시를 따라서 제 3황녀, 에스메랄다는 아버지 황제로부터 받아온 성배를 내밀었다. 엄숙한 얼굴에 의구심과 연민을 띄우며 그녀를 맞이한 교황은 가만히 손을 뻗었다.
그는 의식 전까지 보였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성스러운 책무에 몰두했다.
파지지직….
교단 최심부에서 화톳불처럼 타오르던 번갯불을 옮겨든 교황은 그것을 에스메랄다의 성배에 가득 담았다. 번개는 소멸하지 않고 횃불처럼 타올랐다.
훅….
베스타 교단의 화톳불은 성배에 옮겨간 것처럼 사그라들었다.
교황은 몸을 깊숙이 숙였다.
〈……신심 깊은 순례를.〉
〈예하의 축복에 감읍하옵니다.〉
몸을 숙인 그녀는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는 성뢰 성배를 착잡하게 내려다보았다.
천통절의 의식은 7일 밤낮을 이어진다.
로마니아는 신앙 깊은 초대 황제가 축복이 쏟아지는 가운데 평원에 세운 국가였다. 그렇기에 그 개국을 기념하는 천통절의 의식도 전통에 기인한 것이었다.
황족들에 의한 성배 순례.
성뢰를 모시는 관화신의 교단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순례는 나라의 대소사를 주관하는 로마니아의 7개 교단을 하나씩 걸치며 이동하는 의식이다.
관화신의 교단부터 수도까지 뻗는 순례길.
일주일 간의 순례지만 짧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성뢰를 옮기는 황족은 마차에 오르는 것은 물론 말을 타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오직 스스로의 발품으로 국토의 평원을 밤낮도 가리지 않고 성배를 들고 걷는다. 그리고 다음날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다른 황족에게 인게한다.
천통절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강행군이며, 7개 교단을 지나야 하는 만큼 당연히 최소 7명의 황족들이 필요하다. 인원이 부족하면 그만큼 황족 1명 1명의 부담도 커졌다.
윗세대 황족도 남지 않았기에─황제와 계승권을 타투면서 전멸했기에─, 에스메랄다가 어렸을 때 그녀의 오빠는 3일을 내리 걸었던 적도 있었다.
단련한 사지를 갖춘 전사에게는 힘들지 않은 일.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몸이 약하고 마법도 쓰지 못하는 18살 소녀였다.
황녀라는 점을 빼면 특출난 곳도 없었다. 단지 천통절은 이미 철이 들 무렵부터 겪어본 의식이며 올해는 황족도 7명이 모였기에 부담도 적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마음이 어지러운 건, 오직 요 몇 주 사이 벌어진 일들 탓이었다.
─철컥.
에스메랄다가 계단을 올라오자 강직한 얼굴의 여기사가 군법에 맞춰 경례했다.
〈……황녀님.〉
〈이만 가요. 기다릴 사람도 없으니.〉
〈예.〉
호위들이 그녀를 지키며 행렬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 외의 순례자는 아무도 없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신앙심 깊은 순례자들이 그녀를 뒤이으며 길디 긴 행렬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동반자들의 존재를 바랄 수도 없었다.
이 순례자 행렬이 얼마나 늘어지며, 거기에 몇 명이나 되는 유력 귀족이 함께하는가.
그 척도는 천통절의 의식을 황족 간의 입지 싸움으로 변질시킨 요인이기도 했다.
나태한 귀족들이 순례에 함께할 만큼 그 황족을 지지한다는 증거. 민심을 장악했다는 증표. 끝으로 수도에서 황제에게 성뢰를 건네는 마지막 타자가 누구인가.
그야말로 계승권 경쟁의 추이를 요약한 조감도.
그게 유서 깊은 천통절의 의식이 가진 현실적인 가치였다.
에스메랄다는 비록 계승권으로는 말석이어도 민중의 지지만은 높았다. 의식 때마다 그녀를 따라 걸어주는 평민 순례자들이 많았던 건 그래서였다.
에스메랄다는 그런 그들의 방문이 기뻤다.
평소 열심히 지켰던 덕목과 선행이 보답받는 것 같아서.
따라와주는 이들에게 식사를 베풀고 담소하는, 그 짧은 자유가 행복해서.
매번 발이 부르트고 끝나면 며칠을 내리 누워야 하는 천통절이 기다려지던 이유였다.
그러던 게 올해는 에스메랄다와 호위들 뿐이다.
그럴 수밖에. 선한 황녀로 알려진 그녀 아닌가. 배신감을 느끼고 돌을 던지고자 온 사람이 없는 건 오직 그녀를 철통처럼 지키는 호위들 덕분일 것이었다.
파리가 날아들어 짐마차에 앉았다.
순례자들에게 나눠주고 고군분투하며 모아뒀던 식료품들이 상해가고 있어서였다.
〈……흑.〉
핑 도는 눈물을 입술을 깨물어서 삼켰다.
에스메랄다는 순례자가 없다는 것보다, 그만큼 민심을 잃은 황실의 현실에 개탄했다.
인륜을 저버리고 대전쟁을 일으켰음에도 과거에 대해서 침묵한 것.
침묵하지 않으려던 이들을 피와 칼로 다스린 것.
이제는 산골짜기 시골의 어린애도 알게 된 신성제국의 추악한 면모였다.
‘……진실을 부정하지는 마, 에스메랄다. 세간의 소문은 전부 사실이야.’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는 증거가 너무 많았다. 모르긴 몰라도 일단은 전부 음모라며 잡아떼고 보려던 다른 황족들이 전부 안색이 파래졌을 만큼.
당연히 황실을 규탄하는 목소리는 에스메랄다에게도 날아들고 있었다.
길고 길던 기만 끝에 로미니아의 피비린내 나는 일대 사기극이 막을 내렸으니, 당대의 황족들은 마땅히 그 폭정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가진 거라곤 순진함 뿐이던 황녀에겐 너무나도 아픈 비난의 화살이었다.
‘……아버님, 대체 왜…?’
같은 황족이라고 해도 이 사실을 모두가 알았던 건 아니다.
하물며 세간의 비난이 사실이라면 로마니아에 있어 불리한 역사를 말소하는 건 황제의 업(業)이다. 그런 기밀이 계승권이 낮은 황녀의 귀에까지 들어왔겠는가.
오직 국익을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고 수백 년 간 세상을 속이다니?
알았더라면 에스메랄다는 절대로 버티지 못했을 것이었다.
진실을 아는 건 황제와 일부 측근 정도일까.
‘……궁정의 분위기를 보면 첫째 오라버니마저 몰랐어.’
두각을 드러낸 이가 없었던 만큼 황태자로 내정된 듯 했던 제 1황자.
그런 그조차 여실하게 당황한 듯 굴다가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황제는 제 1황제에게도 로마니아의 비사를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 뿐이라면 아직 괜찮을지도 몰랐다.
‘그 비밀을 황좌를 계승하면서 전하는 거였다면 나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황제의 속마음이 어쨌든 제 1황자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듯 했다.
왜냐하면 이번 천통절에서 6일째 되는 날, 황제에게 직접 성배를 전하는 풍요신 교단을 담당하는 황족이 다름 아닌 말석 중의 말석인 황자였기 때문이다.
하필 얼마 전, 문제의 중심이 된 아틀란티스에 밀사로 파견된 것도 그 황자였다.
역대 황제들만이 계승받은 처참한 역사의 진실.
황족 중에서 유일하게 진실을 전해받은 황자.
그렇기 때문에 황제가 계승권도 말석인 황자를 황태자로 내점하고, 그에게만 비밀을 전해줬다는 소문이 천통절을 전후로 퍼져가고 있었다.
에스메랄다는 이제 조국의 평원도, 가슴에 안은 성배도 자랑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나는 건 그저, 4살 많은 남매의 안전 뿐이었다.
〈오라버니……〉
날이 저물고 동이 트며, 부르튼 발이 찢어지는 그때까지 에스메랄다는 쭉 흐느꼈다.
【……………….】
그렇게 번갯불을 담은 잔에 눈물을 떨어트리는 소녀의 등을, 하늘보다 높은 곳에서부터 한 쌍의 눈길이 지켜보고 있었다.
***
나는 축제처럼 파티를 벌이는 홀을 내려다봤다.
“무슨 축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
“축제가 아니라 추락한 황실 권위의 장례식일걸.”
드레스 차림의 다나가 말했다. 내 취향에 맞춘─직접 보고 대답하느라 쇼핑 나온 여친을 따라다닌 기분이었다─ 빨간색 드레스였다.
우리가 있는 곳은 천통절의 여섯 번째 중간지점.
풍요신 포모나 교단의 본교가 있는, 수도에서도 가까운 대도시였다.
도시 이름이 뭐더라. 코퀴리움? 몰라 시발. 별로 중요하지는 않겠지.
그보다 나는 복층 백화점처럼 나뉜 2층 홀에서 1층 파티 홀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그래서 황족들이 뼈빠지게 마라톤을 하건 말건 파티 중이시다? 대단들도 하셔.”
여기는 삶에 여유가 생기면 인생이 개씹노잼이 되기도 쉬운 판타지랜드다.
밀짚모자가 트레이드 마크인 해적단처럼 이세계 귀족들이 연회에 미쳐 날뛰는 건 충분히 배웠다. 참석도 많이 해 봤고 말이다.
그런데 황족들이 좆빠지게 구르는데, 귀족들은 골라인 직전에서 파티 중이라니.
존나 오진다. 이게 군약신강이지. 좆간…… 좆간 네버 체인지…….
“황족들이 나라를 괜찮게 운영했다면 문제없지 않았을까요~?”
마찬가지로 파티 드레스를 입은 라리루라도 한 마디를 했다. 노출도가 높고 등이 파였기에 남편 되는 입장에선 괜히 신경 쓰이지만, 입지 말라고는 하기 싫은 게 또 꼴마초의 마음.
나는 공짜 술을 마시다가 말했다.
“문제가 없었다고? 고건 또 뭔 소리래?”
“생각해 보세요. 선배처럼 평소에 엄청 열심히 일하는 귀족은 별로 없다구요♡? 아마 황족님들도 그렇게 바쁘거나 하진 않을 걸요?”
라리루라는 내가 마시던 잔에 입을 댔다. 잔을 살짝 기울여서 마시게 해 줬다.
달콤한 술이어서 그런지 술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후배님도 혀로 굴리며 맛봤다. 나는 어색한 음주 모습에 픽 웃었다.
“1년 내내 편하다가 하루 엄청 고생하면 언플이 된다는 얘기야?”
“언플, 언플……? 어, 아마도요.”
용어가 낯선지 우물쭈물 수긍하는 라리루라.
말은 된다. 선거유세 비슷한 느낌이라고 보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라리루라도 정치에 조금 밝아진 모양.
황족들 입장에서도 가끔씩 빡세게 구르는 것이 큰 손해는 아닐 것이었다.
“제가 살던 때만 해도 기념일이니까 어느 정도 즐겨도 괜찮다는 풍조이긴 했구요.”
“그래도 도가 지나친 듯 보인다만……”
티르시의 쓴웃음에 옆머리를 넘기던 베로니카도 탄식했다.
그녀들도 드레스 차림이 이하생략.
다들 끝나고 방으로 데려가고 싶어지는 복장이 인상적이었다. 애초에 내가 속옷 차림의 아내님들 사이에서 한두 마디 거든 결과니까 당연한가.
“이렇게 노골적이라는 건, 음…… 그게……”
“……시위의 일종. 귀족들, 불만 가득해.”
당연히 프랑과 네페르티티도 있다.
보다시피 우리 가족 전원이 이 도시에 모였다.
왜 굳이 여기냐고? 뻔하지.
수도에 묵는 건 은근 위험하고, 수도에서 너무 떨어지는 것도 여차할 때 개입하기 어려워지니까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 도시에 안착했다.
나는 중2병 환자처럼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모순적이지만 나는 제일 위험한 곳에 있는 게 제일 효과적이기도 하고.’
미래가 위험할수록 예지로 나타날 확률도 높다.
그렇기에 나는 위험을 가까이 하는 게 효율적이었고, 앞서 혼나며 들었던 이유대로 나만 다치고 구를 수는 없기에 아내들도 같이 온 것이었다.
어르신과 오델리아도 각자의 위치에서 활동 중.
“황제…… 님의 공식 언사는 천통절의 마지막에 있다고 했지?”
프랑이 나한테 다가붙으면서 속삭였다. 끝까지 경칭은 못 쓰는 게 프랑답다.
“응. 성뢰인가 하는 걸 궁전에 붙이면서 선포할 게 있다더라고.”
우리가 세운 계획은 그때까지 황제의 끄나풀로 유명한 셀루스티아 남작(가짜)의 이름으로 마지막 공격을 꽂는 것이었다. 이 파티 참석은 그 일환이었고 말이다.
‘천통절이 국가행사라 외국인들도 축하하러 올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지.’
엘리자베트를 통해서 편지를 받고, 길다트 가문 누구누구의 대리로 왔다.
인맥이란 이토록 위대한 것이었다.
“남편. 오늘로 천통절이 시작한지 며칠 째였지?”
“4일째.”
성뢰 성배가 순례길을 거쳐서 오고 있다. 오늘 새벽에 5일째 담당 황족이 성배를 받을 테니 내일 안에 이 도시의 황족도 출발하겠지.
─그리고 그 마지막 성배를 저희들이 쫓아가는 겁니다.
나는 1층과 2층의 귀족들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순례는 순례여도, 황제 폐하께 저희들의 진심 어린 충언을 보이는 순례길이죠.
─장관이 되겠군요. 아예 마차에라도 탈까요?
─국가의 근간이 되는 날인데 그렇게 불경하게 굴어서야 쓰나요.
─그래도 이만한 귀족들이 한 데 모여서 행진, 크흠. 순례하는 건 역사상 처음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저희의 충심을 알아주신다면 좋으련만……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일을 확실히 매듭짓고 국외의 대처에 나서야죠.
─맞습니다. 해명만 요구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요.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테고, 혹여나 소문이 다 사실이라도 완전히 긍정해서야 저희 입지가……
─쉬잇. 말을 조심하셔야지요.
─이크.
나름대로 매직 아이템 등을 써서 대화의 내용을 숨기는 모양이었는데, 나한테는 저들의 계획이 낱낱이 들렸다. 오딘의 눈과 예민한 오감의 시너지 덕분이다.
‘목적은 촛불 시위, 아니. 봉화 시위인가.’
쿠데타만 아니지, 미리 예상한 데드라인과는 별 차이가 없긴 했다.
나는 혀를 찼다. 오프툼한테서도 보고는 왔었다.
‘아직도 황실은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어.’
남아 있는 별의 자손은 뭘 꾸밀 생각일까. 우리 가족이 머리를 맞대도 그럴싸한 답은 안 나왔다. 지금은 단지 초조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역시 나는 야생의 육식동물은 못 되겠다. 그냥 참을성 없이 주인님이 밥을 주는대로 죄다 처먹는 애완견이 속 편하고 최고기는 해.
그렇게 내가 인고의 시간을 고통스럽게 여기자, 하늘이 보살피기라도 한 것일까.
예상 밖의 사태는 그때 일어났다.
〈울프헤딘 백작님.〉
어르신이 붙여준 사람이 파티를 만끽하는 삼류 자작 같은 꼴을 하고 다가왔다.
나는 편한 대화를 나누는 척 위장하려 했는데, 그의 표정이 남달랐다. 긴급사태라는 뜻이었다. 내 손에 들려 있던 잔을 프랑이 눈치 빠르게 가져가주었다.
〈제 4차 지점에서 온 급보입니다.〉
내가 들을 자세를 갖추자 어르신의 밀정은 낮게 속삭였다.
〈제 1황자에게 인계되는 과정에서 성배가 도둑맞았다고 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나는 문제의 심각성이 별로 실감되지 않은 터라 눈을 끔뻑거리다가 되물었다.
〈……참고로, 성배가 없으면 어떻게 되죠?〉
〈당연히 천통절의 진행도 그만큼 지연되겠죠.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성배에 담겨진 성뢰는 적잖이 강대한 에너지원입니다.〉
니미 시발, 급보 맞네. 나는 이마를 탁 쳤다.
〈움직입시다. 사정을 좀 알아봐야겠군요.〉
분충들에게 새치기당한 굴욕…… 절대로 용서치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