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척척석사 노루-829화 (827/1,009)

***

로마니아의 재상 카사디누스는 소매를 당겼다.

그의 체형에 맞춰서 재단한 유물의 사이즈가 꽉 끼거나 해서는 아니었다. 이 나이를 먹고도 새삼 키가 자란다면 그것도 웃기는 일일 것이다.

소매를 당기며 옷매무새를 만지는 것은 재상이 중요한 일에 앞서 행하는 버릇이다.

방을 나와서 걸었다. 말없이 보필하는 시종들이 믿음직스럽다. 이 모임을 준비한 자가 누구였는지 떠올린 그는 해당 인물의 평가를 2점 올렸다.

웅성웅성….

그렇게 도착한 파티 홀은 기이한 열기에 뒤덮여 있었다.

귀족의 모임에 음악이 동반되는 이유는 하나다. 스무 명만 모여서 각자 담소를 나누기만 해도 그 자리가 시장통처럼 시끄러워지기 때문이다.

곧 죽어도 품위를 잃기 싫은 귀족들은 웅성대는 소리를 감추고자 연주자를 부른다.

그 연주에 은밀한 대화를 숨기는 것도 귀족들의 고질병이었다.

‘그 또한 마땅한 결과겠지.’

재상은 반색하며 환영하는 이들에게 기품 있는 노인의 미소로 화답했다.

‘천통절의 결말…… 폐하의 해명이 어떻게 되건, 황실의 권위가 추락하는 건 필연.’

파란(波瀾)에서 자기 몸을 간수할 자신이 있는 상류 귀족들에겐 좋은 일이다.

이번 사건은 귀족과 황실의 대립에서 발생하는 힘의 균형을 무너트릴 것이니까.

비등비등하거나 황실 쪽에 좀 더 기울어져 있던 저울이 자신들 쪽으로 기울 것 아닌가. 연주자의 고풍스런 교양곡도 열기를 감추지 못할 수밖에.

자신이 품은 열망─욕망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그것─을 부딪혀오는 귀족들을 적당히 상대해주던 재상은 아무렇지 않게 목표대상에게 접근했다.

〈쿨라피우스 경.〉

〈이런, 재상 각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허리를 숙였다.

재상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신분은 개의치 말게. 내가 보낸 결혼 선물은 받아보았나? 어디, 금슬은 좋고?〉

〈예. 덕분에 의수 생활에서도 벗어났습니다.〉

강직한 답변에 쓴웃음을 지으며 재상은 말했다.

〈그렇군. 부인이 아름다움을 되찾았다니 어린 신랑 군도 기뻐하겠어. 헌데 헤르마이온 길드에서 엘릭서를 구매했다고는 들었네만……〉

〈왜 얼굴을 고치지 않았느냐는 물음이시라면, 이 상처는 제 공훈이기 때문입니다.〉

얼굴의 반을 안대로 가린 여인. 열락과 신앙이 혼재한 모순적인 도시 루크레겐스의 영주, 미네르바 폰 쿨라피우스였다.

꼬마 신랑이 목돈을 써서 구매한 엘릭서로 팔과 다리를 고친 그녀였지만, 얼굴의 상처는 전쟁터의 기억이었기에 고칠 마음은 없었다.

그 마음을 이해한 재상은 바닥을 짚은 지팡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를 위해 잠시 시간을 내주겠나?〉

─긴히 하고 싶은 말이 있다네.

2개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재상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는 심념을 나누는 매직 아이템이었다. 과연 미네르바는 표정에 미동도 없이 대답했다.

〈재상께서 바라신다면 얼마든지.〉

〈고맙네. 어린 신랑이 걱정하지 않게 잠깐이면 족하네.〉

재상이 꼬마 신랑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가 긴장한 듯 회답하는 어린 귀족을 보며 웃고 있자 미네르바는 파티 홀을 눈으로 살피고 말했다.

〈쉴 만한 곳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이리로.〉

〈고마우이. 나이를 먹으니 즐거운 대화도 별로 오래는 못 하겠더군.〉

앞장서는 미네르바를 재상이 천천히 따라갔다.

그가 미네르바를 부른 이유는 모레 있을 반역에 대해서 경고해주기 위해서였다.

재상은 황자의 반역에 협력하고자 했으나, 그때 벌어질 전투에서 귀족들이 죽길 바라지는 않았다. 선심이 아니라 국내의 혼란을 막고 싶어서였다.

‘직접적으로 말해서는 이 강직한 전직 장군님이 따라줄 리 없겠고……’

그래도 경고를 하는 정도로 충분할 것이었다.

재상은 한평생 말을 아끼며 살았노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강경하게 주장한다면 첩보 등을 받았으리라고 짐작해줄 것이었다.

끼이익….

하지만 그렇게 미네르바를 따라간 끝에, 재상은 자신이 어수룩했단 걸 눈치챘다.

귀족답게 위기를 짐작하는 후각이 기어이 몸과 함께 노쇠해버린 걸지도 몰랐다.

〈안녕하신가요. 재상 각하.〉

창가를 등지고 선 하얀 머리의 여인을 발견하자 재상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그녀가 다음 세대의 산증인 같은 느낌마저 들었으니까.

─달칵.

미네르바는 재상만을 두고 방을 나갔다.

재상을 안에 들이고 빠져나가는 동작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재상이 그녀를 찾아가서 말을 걸기 전부터 그렇게 하기로 합의했던 것처럼 말이다.

덕분에 재상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저 꽉 막힌 친구를 설득했나? 대단도 하군.〉

〈반역 얘기를 했죠. 달변가가 있거든요.〉

네페르티티를 대동한 티르시가 대답했다.

미네르바를 통해서 재상을 유인한 건 노르드와 코르넬리우스의 합동공세였다.

─재상께서 접촉한다면 이 장소로 안내해주시길.

모임이 시작되기 전, 재상이 접촉할 법한 후보 몇 명을 미리 찾아간 그들은 딱 그 정도의 부탁을 건넸던 것이다.

─……알겠다. 아르마알스 후작과 네 이야기의 설득력을 믿지.

어려운 부탁이 아니기에 미네르바는 고심 끝에 수락했다.

미네르바라도 반역 이야기는 쉽게 흘러넘길 수 없었으니까.

완고하기에 가장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인물이 오히려 그 완고함 때문에 재상을 함정으로 이끈 것이었다. 한 방 먹은 걸 깨달은 재상은 손녀를 보는 노인처럼 껄껄 웃었다.

웃음을 터트리던 그가 숨을 내쉬었다.

〈그래……. 나를 죽이러 왔는고?〉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무뚝뚝한 대답에 재상은 눈을 반개했다.

〈대숙청을 지휘한 게 나였으니까.〉

아르마슈나스 가문을 멸문시킨 대숙청은 황제의 칙명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 과정을 황제가 몸소 전두지휘하지는 않는다. 결과를 점검하기는 해도 세부적인 계획과 실행을 맡는 중간 다리 격의 인물은 있기 마련.

10여년 전에 벌어진 대숙청에 있어서, 그 중간 다리이자 주범은 재상이었다.

네페르티티가 안색을 살폈지만 티르시는 머리를 흔들었다.

〈오늘 제가 듣고 싶은 건, 황자님들의 위치와 그분들이 꾸민 반역에 대해서에요.〉

〈반역이라…… 어찌 알았는가는 묻지 않겠네. 그런나 자네가 황자님들을 저지하고자 하는 겐가? 다름도 아닌 이 나라를, 황제를 위해서?〉

황자를 높이고 황제의 경칭을 생략했다. 재상은 티르시가 자신의 말에 담긴 은유를 알아들은 듯이 보이자 분수에 맞지 않게도 흡족스러워졌다.

티르시는 창밖을 흘깃 보고 말했다.

〈비가 오면 우산을 펴야죠. 우산 밑에 꼬이는 개미를 신경쓸 만큼 속이 좁진 않아요.〉

〈……하하하! 헤리토의 손녀가 멋지게 자랐군.〉

의외의 대답에 재상은 껄껄대다가 의자에 먼저 엉덩이를 걸쳤다.

〈앉지.〉

〈네.〉

티르시는 소파에 앉으며 노인을 보았다. 재상의 눈은 과거를 반추하는 듯 흐려졌다.

〈늙으면 시간 감각이 이상해지지. 어제 일은 가물가물한데 수십 년 전은 눈에 생생해. 머리의 용적이 새 걸 담기엔 모자라져서 낡은 기억이 넘치기라도 하는가 보더군.〉

〈……………….〉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아장아장 거닐던 자네를 기억하네. 그래서 원한을 살 법도 하다고 여겼지……. 대숙청의 전말은 알고 있나?〉

〈코르넬리우스 님께는 묻지 않았어요. 그분도 먼저 말해주진 않으셨고요.〉

〈누군가 했더니 역시 그놈인가. 흠.〉

재상은 지팡이를 소파에 기대놓았다.

거기에 담긴 다른 마법 따위를 티르시에게 겨눌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 결국 들고 있나 놓고 있나 다를 게 없었다. 그보다는 조금이나마 짐을 덜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네는 자네 조모랑은 별로 닮지 않았군. 그 꼬장꼬장한 친구가 아내한테는 죽고 못 살았는데, 몇 세대만에 태어난 여자애가 자기를 닮아서 아쉽다고 얼마나 투털대던지.〉

〈재상 각하.〉

〈넋두리 좀 들어주게. 말했잖나. 최근 일을 떠올리려면 필요한 과정일세.〉

티르시는 입을 닫았다.

황자의 소재(所在)가 중요하긴 했지만, 협박하지 않아도 대답해주려는 듯 하지 않은가. 굳이 저지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어쩌면 재상의 입으로 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그녀의 이기적인 마음이 적당한 핑계를 찾아낸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딱히 잘못된 방법은 아닐 것이었다.

〈아르마슈나스 가문은 예전에는 마법이 출중한 명문가였지. 그러나 나와 자네 조부 대에는 이미 그렇지 않았었어. 왜인지 알겠나?〉

〈대마법사 아르마 슈나스의 혈통 때문인가요.〉

〈자네 조부는 그렇게 말하더군.〉

마법으로 신의 경지를 넘보던 아르마 슈나스.

그 대마법사의 자질은 그녀의 노력과 돌연변이 같은 우연이었을까? 혹시 그만한 자질이 혈통으로 남겨져서 저들 가문의 구성원들에게도 흐르는 건 아닐까?

〈그런 이유로 경계하는 이들은 대대손손 온갖 시대에 있었겠지. 그래서 자네 가문 사람들은 일부러라도 마법을 멀리했어. 불필요하게 적을 늘릴 순 없으니.〉

어리석은 선택으로도 보이지만, 티르시는 그럴 만 하다고 여겼다.

‘이해득실을 따져보고 내린 결론이었겠죠.’

정말로 대마법사나 그에 준하는 달인이 쏟아져 나왔다면 저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적을 늘려가며 수준 낮은 마법사를 기를 가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게다가 재상은 ‘경계’라고 말했지만, 아마도 그 압박은 상상 이상이었을 터였다.

아르마 슈나스와 인공신좌에 얽힌 전말.

초대 원로원의 〈강림〉 마법은 인공신 계획의 프로토타입이다.

‘……로마니아의 신을 만들어낸 능력의 골자가 아르마슈나스 가문에 있다면.’

아르마슈나스의 피는 그것만으로도 경원시당할 만 하다.

실제로 대마법사의 후손들이 재능을 가졌는지는 논외로 두고서도 말이다.

어쩌면 별의 자손들이 긴 시간 귀족들을 유도한 결과였을 수도 있다. 원로원의 주도권은 어떤 시대에도 다비드가 잡는 게 제일이었을 것이고.

〈우리 가문의 선조도 로마니아에게 끝까지 항전하셨던 전사였다는데, 나는 골골대는 정치가잖나. 결국 초상화 정도로밖에 모르는 조상님의 행적에 혜택도 보고, 피해도 받고 하는 거지.〉

재상은 담배를 꺼냈다. 티르시가 끄덕이자 그는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결국은 초대 원로원 가문도 각각 당대 가주의 능력으로 이끌어가는 걸세. 자네 조부는 성실하고 좋은 남자였지만…… 정치란 게 그렇잖나? 친절한 놈이 할 짓이 아니지.〉

〈……이해했습니다. 마저 말씀하세요.〉

〈아끼던 걸 잃고, 배신도 당하고, 나이도 먹고. 사람은 그렇게 바뀌어가지. 헤리토는 건실한 놈이었기에 가문을 지키고 싶다는 의지도 강했다네.〉

티르시에게는 가문이란 말이 ‘가족’으로 들렸다.

만약 그녀의 할아버지가 가족을 지켜낼 능력이 부족했다면. 양보하면 떠말려서 절벽 끝까지 굴러 떨어지고, 버티고 서면 적이 늘어나는 처지였다면.

노르드를, 프랑과 다나, 라리루라와 베로니카를.

가족들의 안전과 목숨을 다른 누군가의 목숨과 저울질해야 했다면.

〈……그래요.〉

전부 다 지켜낼 수 없다면 한쪽을 골라야 한다.

평범한 사람은 선택에 기로에서 행운과 능력이 따라주지 않을 때가 더 많다. 티르시마저 노르드 없이는 죽거나 누군가의 도구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알고 있어요. 남들에게 원한을 가질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건, 철이 들고서 찾아본 조부님…… 할아버님이 저희 앞에서만 손에 튄 피를 씻는 분이라는 걸 알게 되서였으니까요.〉

〈……가주에 오른 뒤, 헤리토는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귀족다워졌다네. 내 뜻을 미리 읽을 줄도 알게 됐고, 지도자로서 거짓말을 덕목 중 하나로 삼았어. 빼앗기기 전에 먼저 빼앗기도 했지.〉

〈네. 어쩌면 할아버님 덕에 저한테까지 원한을 품은 사람도 있을 거에요.〉

티르시가 픽 웃자 재상은 눈에 불똥을 튀겼다.

〈그런 헛소리는 말게. 일고할 가치도 없으니.〉

〈네?〉

〈태어난 건 죄가 아니야. 자네가 입었던 옷이 헤리토가 피 묻은 금화로 산 것이었다고 해도, 그 금화의 경위와 의미를 10살도 못 된 아이가 이해하고, 거부할 수 있을쏘냐.〉

어린 아이는 보호자에게 보호받을 뿐인 존재다.

보호자가 주는 의복, 음식, 집, 생활을 거절하면 아이는 죽을 수밖에 없다.

〈아이는 부모를 고를 수 없으며, 국민은 왕을 고를 수 없다네. 황제가 역사를 말소했던 자금이 시민들의 혈세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모르던 국민들한테까지 죄값을 물을 텐가?〉

혜택을 받았으니까 책임도 져야 한다고?

그러면 빈곤한 부모에게 태어난 아이는 어째서 가난이라는 책임만을 가져야 하는가?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받는 존재다. 그 사랑에 책임이라는 이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야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이 자식에게 독을 먹이는 행위가 되지 않는가.

잘잘못에 대해 가르치는 건 당연해도, 아이에게 나고 자란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무고한 이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누린 행복에 죄값을 요구할 순 없어. 부모와 통치자는 아이와 국민을 지키는 보호자고, 우리는 우리들이 책임진 이들 몫까지 잘잘못을 짊어져야 하네.〉

부모는 그게 아이를 낳은 자의 의무이기에.

권력자는 그게 권력을 얻은 대가이기에.

〈……그래서 반역에 협력하셨군요.〉

〈나는 이 나라의 재상일세. 황제가 빼돌려가며 전용(轉用)한 돈의 존재를 모를 만큼 멍청하지도 못했고. 역사를 말소하는 데 쓴 줄은 몰랐네만.〉

알고도 모른 척 했던 것에 책임을 느꼈기에 이 반역에 협력했다는 뜻이었다.

재상이 역설한 주장이 옳은 의견인지 티르시는 몰랐다. 저런 관점에서 세상을, 나라를, 죄를 생각해 봤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재상의 관점은 그가 시민들의 세금을 관리하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녀는 귀족이었던 기억보다 평민이었던 기억이 더 길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당신이셨군요.〉

티르시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떠오르는 건 그녀의 가문이 무너질 때의 하루다. 병사를 따라가는 조부가 자신을 돌아보며 지었던, 미안하다는 듯한 서글픈 미소 말이다.

〈제가 살아남았던 건, 당신 덕분이었어요.〉

재상은 자신이 말이 너무 많았다는 걸 깨달았다.

곰방대를 물었지만 담배 연기보다도 괜한 소릴 했다는 후회 쪽이 더 씁쓸했따.

〈……운 좋게 그럴 여건이 됐었을 뿐일세.〉

〈그렇다고 해도요.〉

누군가가 아르마슈나스의 혈통을 완전하게 근절시키는 건 아깝지 않냐며 황제의 귀에 속삭였기에 가능했던 결과였을지도 모르지만.

권력구도를 바꾸려는 욕심으로 대숙청을 지휘하려던 귀족들을 물리치고, 가능한 공정하게 책무를 지휘했던 인물의 노력이 무의미해지는 건 아니었다.

티르시는 재상에게 고개를 숙였다.

〈갑사합니다. 당신이 구해주셨던 덕분에, 저는 지금까지 웃으며 살 수 있었어요.〉

〈……오래 살고 볼 일이군. 헤리토의 손녀에게 감사를 다 받고.〉

재상은 담배 연기를 뱉었다. 예전에 죽어버렸던 친구를 닮은 아가씨였다. 생긴 건 어쨌든, 귀족이 못 될 만큼 솔직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황자님들의 위치는 모른다네.〉

재털이에 담뱃재를 턴 재상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묻지 않았지. 고문을 당하면 불지 않을 자신이 없었으니. 그래도 청동옥좌가 수도 안에 있다는 것과, 어떤 유물인지는 들었지. 헤리토가 왜 숙청당했는지도.〉

티르시는 작게 웃었다.

〈물어봐도 될까요?〉

〈흠. 내가 해쳤던 이들의 손녀가 나를 함정에 빠트리고 물어보다니. 이 정도면 황자님들께서도 내가 냉큼 이실직고한 걸 이해해 주시겠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재상은 종이에 자기 필적을 숨기지도 않고 글을 남겼다. 티르시는 그 종이를 챙겨서 일어섰다.

재상은 성벽보다 단단한 실드를 펼쳐낼 수 있는 지팡이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물었다.

〈그래서, 설마 그냥 갈 생각인가?〉

〈아뇨. 한 가지 더, 할 일이 남았어요〉

티르시의 손바닥에서 얼음이 피어났다. 마나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바람. 재상은 그런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무엇인지 들어본 적이 있었다.

‘허. 마스터 클래스라.’

고대의 전설 속 대마법사와 같은 경지.

아니, 아르마 슈나스의 힘 그 자체인가.

‘……헤리토. 보이는가? 이게 자네가 그토록 떠들던 그 힘인가 보구먼.’

이 정도면 티르시도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하겠지.

치를 필요가 없었던 죗값을 10년이나 흙밭에서 구르면서 치른 그녀다. 앞으로는 티르시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하다는 생각에 재상은 만족스러웠다.

그렇기에 눈을 감고 그 냉기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의 몸이 얼어붙는 일은 없었다.

〈……티르시야?〉

아무리 기다려도 죽음이 찾아오지 않자 재상은 눈을 떴다. 그의 몸에는 서리가 껴 있었지만 피부 어디도 괴사하거나 얼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대신, 쪽지에 처음 보는 남성스러운 필적의 메모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후보에서 제외.

마치 이 방에 계속 숨어있던 누군가가, 떠나기 전에 남겼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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