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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통절 여섯째 날, 수도 인근의 대도시.
제 1황자의 사병은 천으로 칼날을 닦았다. 막내 황자의 호위들의 피가 튀어서였다.
〈얌전히만 계십시오, 레벨리오 황자님. 재갈은 풀어드리겠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철창에 갇힌 황자가 앉아 있었다. 사병이 재갈을 풀어주자 막내 황자는 생각보다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병은 다소 놀라웠다. 조금 전에 호위를 잃고 납치당한 사람 치고는 꽤 의연했기에.
〈……침착하시군요.〉
〈첫째 형님의 병사께서 천통절에 이런 폭거를 저질렀으니, 필시 반역이겠지요.〉
〈예.〉
사병은 그의 추리에 놀랐지만 겉으론 드러내지 않았다.
‘눈치채도 소용없다. 이미 레벨리오 황자의 대역을 세우고 모조품 성배를 인계했으니.’
그렇지만 아무리 막내 황자가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도 동시에 2명이 존재해선 안 됐다. 납치 감금과 그에 따른 사망자는 피치 못할 희생이었다.
사병은 칼에 묻은 호위들의 피를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막내 황자의 무력한 호위는 전멸한 뒤라는 것도.
〈이틀만 여기 계시면 됩니다. 제 1황자님께서 황위에 오르신 뒤에 풀어드리겠다고 약속드리죠. 먼 곳에 귀양을 가시기는 하겠습니다만.〉
〈됐습니다. 여행이라면 얼마 전에 다녀왔으니.〉
〈……다녀왔다고요?〉
사병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지 못했다.
─서걱.
그가 입을 연 순간, 뒤에서 소리없이 날아든 한 자루의 칼이 그의 명줄을 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병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목숨을 잃었다.
〈늦었군요. 에덴.〉
〈죄송합니다, 황자님.〉
사병을 해치운 집행관은 무릎을 꿇며 조아렸다. 레벨리오 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저런 잡졸들에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건 당혹스럽군요. 형님은 제 곁에 있는 호위가 미스릴 클래스라곤 상상도 못 하셨을 테니, 납치범들의 실력도 하찮았을진대.〉
바닥을 보고 있음에도 뒤통수에 꽂히는 차가운 시선.
실력도 모자란 자들의 납치 시도를 왜 저지하지 못했냐는 힐난이었다.
그렇지만 에덴은 황자가 그의 실수를 탓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어쩔 수 없다. 그는 고개를 더 조아리면서 준비해왔던 말을 읊었다.
〈……죄송합니다. 폐하의 명령이었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제가 납치되게 놔두라는 명령을 내리셨다는 겁니까?〉
〈예. 황자들의 반란을 좌시하라는 어명입니다.〉
아틀란티스에 사절단으로 갔을 때도 레벨리오의 호위를 도맡았던 에덴 헤이빈저다. 굳은 충성심을 황실에게 인정받은 집행관은 술술 말했다.
〈폐하께선 저들의 반란을 예기하셨을 뿐더러, 역으로 이용하실 생각이십니다. 어심을 거스르지 못한 저를 부디 질책해 주십시오.〉
〈어심이라…… 후.〉
중얼대던 레벨리오는 홀가분하게 웃었다. 마치 그 대답을 듣고 싶었던 듯 했다.
…콰직! 그의 손목을 묶은 족쇄가 끊어졌다.
〈어심이 아니라, 당신의 주인님의 뜻이겠죠.〉
〈예?〉
에덴은 고개를 들며 눈을 크게 떴다. 그 한순간 드러난 황망함은 연기가 아니었다.
레벨리오의 말이 뜬금없어서? 아니, 그 반대였다.
그가 ‘에덴의 주인’과 황제를 다른 인물이라는 듯 언급했기 때문이다.
또, 그 언급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순간적으로 이해가 따라잡지 못한 에덴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셀루스티아는 죽었고, 다비드도 이미 당한 듯 하더군요.〉
레벨리오는 오히려 놀란 것처럼 되물었다.
〈당신과 아틀란티스로 향했을 당시와는 상황이 이렇게나 바뀌었는데, 설마 제가 아직도 감시자들 앞에서 얌전히 있을 줄 아셨습니까?〉
〈무ㅅ……!〉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는 물음보다 빠르게 빛이 번뜩였다.
─퍽!! 에덴의 목에 검이 꽂혔다.
〈크악……?!〉
칼날은 사람의 목이라기엔 지나치게 질긴 목을 절반 정도 자르다가 정지했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청동검은 레벨리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연기는 그쯤 하지. 자네가 별의 자손이 붙인 감시자라는 건 예전부터 알았어.〉
레벨리오는 무뚝뚝하게 말하다가 웃었다.
〈이렇게 말해주는 편이 더 이해하기 편합니까? 별의 자손의 하수인.〉
〈……이 개자식이!!〉
순식간에 목이 반이나 잘렸으나 에덴은 죽지도 않고 훌쩍 물러났다.
〈망할 사생아 새끼!! 황실을 배반할 때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평생을 얌전하기에 거세당한 개새끼라고 여겼건만!!〉
욕설을 외치면서 에덴은 승산을 점쳤다.
황자의 일검은 미스릴 클래스의 달인인 그보다 빨랐다.
에덴은 어떻게 무력한 일반인이었던 레벨리오가 그런 놀라운 솜씨를 발휘했는지 고민하기보다는, 자신의 불리함을 깨닫고 하사받은 힘을 드러냈다.
‘이 모습을 보였다간 황자를 죽여야 하지만, 할 수 없다!’
─뿌직! 촉수가 에덴의 살을 뚫고 자라났다.
에덴이 달인이 된 후 몇십 년이나 넘지 못했던 신체능력의 한계를 가볍게 초월하는 완력이 몸에 깃들었다. 주인이 내려준 힘은 황홀함과 만족감을 선사했다.
〈폐하께 전해주마!! 황태자로 내점하신 사생아 놈은 반역에 협력하다 죽었노라고!!〉
에덴은 고양된 감정에 맞춰서 촉수를 내질렀다.
〈반역을 꾸민 건 사실이지만, 형님들과 협력한 기억은 없군요.〉
─채앵!
레벨리오의 반격이 유연하면서도 단단한 촉수를 베어버렸다.
〈차라리 이용했다고 한다면 모를까요.〉
〈뭐?〉
에덴은 발을 물렸다. 자신이 오러까지 사용해도 그의 주인이 하사해준 촉수를 저렇게 쉽게 벨 수 있을까?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에덴이 경악한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협력한 게 아니라고?〉
레벨리오의 말투에서 위화감을 느낀 에덴은 눈을 부라렸다.
〈……다른 놈이 있구나!! 폐하와 우리의 주인께 거역하려는 놈들이!! 너와 협력한 놈들이 있었어!! 황족이면서 나라를 팔아먹을 생각이더냐!!〉
레벨리오는 비뚫어진 애국심에서 우러난 일갈을 시큰둥하게 흘렸다.
〈수백 년 동안이나 황실과 로마니아를 뒤에서 지배한 괴물입니다. 당신이나 괴물에게 협력하는 아버지나, 왜 그들의 통치가 영원히 계속될 거라 생각합니까? 저는 그게 더 의문이군요.〉
〈잡종 놈!! 천한 핏줄은 속이지 못하는구나!!〉
에덴은 분노했지만 황자의 반격이 생각보다 더 매서웠다.
막기 급급한 탓에 발이 삐끗했다. 촉수를 쓰는 싸움에는 적응했지만, 그 촉수를 썩둑썩둑 잘라버리는 상대와 싸우는 데는 익숙하지 못해서였다.
달인답지 않은 실수. 하지만 이 정도의 실수가 패배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힘을 하사받은 에덴에게는 실수를 커버할 만한 생명력이 있다. 지금까지 쭉 그래왔다.
─서걱!!
하지만 오늘은 지금까지와 달랐다. 레벨리오의 검이 에덴의 촉수를 싸그리 잘라냈다.
【■■■■■■!!!!!】
레벨리오는 이생물체의 성대로 비명을 질러대는 에덴을 벽에 꽂았다. 목에 박힌 검을 비틀자 그는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지나친 고통에 비명마저 못 지르는 꼴이 되었다.
〈……누, 누구냐.〉
─끄르르륵. 피와 가래가 들끓는 것처럼 역겨운 소리를 내던 에덴이 말을 더듬거렸다.
〈이건, 내 상처가 낫지 못하게 막는 이건, 빛의 마나다. 시, 신성력이야……〉
〈……………….〉
〈누가 네게 힘을 줬지? 인공신밖에 남지 않은 로마니아에서, 대체 어떤 신이 너 따위의 기도에 응한 거냐……?〉
〈인간에게 사용되는 존재는 신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레벨리오가 보기에, 이 나라에 신은 없다. 신성제국이라는 이름을 쓰고는 있지만 사실상 이곳은 인간의 나라였다.
아니, 인간의 나라라는 가죽을 뒤집어쓴 괴물의 나라인가.
그는 검 손잡이에 악력을 불어넣었다.
〈자고로 신이란, 숭배를 받아야 비로소 신으로 기능하는 겁니다.〉
더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여긴 레벨리오는 검을 위로 올려쳤다.
에덴의 머리를 가르고 손목을 돌려서 다시 내려쳤다. 도마 째로 고기를 써는 것처럼 벽이 잘리며 타락한 집행관은 죽음을 맞이했다.
─달그락.
레벨리오가 손을 내리자 청동검은 기사 모양의 기물로 바뀌었다.
심호흡을 한 황자는 로브를 걸쳤다.
그의 형들은 황제인 아버지에게 반역을 감행할 생각이겠지만, 천통절을 반기를 들 날로 정한 건 다른 황자들만이 아니었다.
레벨리오야말로 그의 형들보다 더 오랜 시간 이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순적인 일이군.〉
아무 것도 모르기에 황제가 되고자 하는 황자들.
황실의 실상을 알기에 황태자로 뽑혔음에도 그 운명을 거부하는 레벨리오.
역시 지식은 독이다. 경계해야 마땅할 독.
예전부터 계속 생각했던 진리를 다시 되새기며 레벨리오는 어둠에 잠겨들었다.
***
많은 나라는 자국의 수도를 가장 아름답게 꾸미고자 노력한다.
나는 교단을 감싸는 오각형의 탑 중 하나에서 그 장엄한 광경을 굽어봤다.
나라의 수도는 사람으로 치면 얼굴이었다. 다른 곳의 흠이 있을지언정 와꾸의 때나 멍을 방치하는 건 체면에 관련되는 문제 아닌가.
그래서였을까. 로마니아의 거리는 드워프들과도 많은 교류를 나누는 게르마니아보다 한층 정갈한 구조와 청결한 길거리를 만들고 그걸 자랑거리로 삼았다.
역대 황제는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면서 깔끔한 구획 구조를 유지했다던가.
수도를 처음 세웠을 때부터 천 년이 지나도 사용하기 곤란하지 않은 토대를 닦아두었기에 유지와 보수는 용이했다. 더 많은 건물을 세우는 것도.
나는 구획설계나 건축에 무지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건 안다.
전통을 존중하는 황실은 황제가 바뀌어도 마치 줄곧 같은 사람이 지휘하는 것처럼 이 구획만큼은 깔끔하게 지켰다. 근데 시발 진짜 같은 새끼였을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아무튼 일개 밑바닥 앰생 범죄자 씹새끼들부터 원로원의 후작 어르신까지, 온 국민들이 자랑으로 삼는 수도의 거리는 그렇게 완성되고 유지됐다고 한다.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며 시대에 뒤쳐지지 않는 것.
뿌리를 가지고 이파리를 넓히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건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이다.
역사관을 내세워도 국뽕이고, 국력을 돌아봐도 국뽕이다. 거 주모 과로사하시겄어.
그렇게 존나 애국 메타로 활활 타오르던 시민들에게 내 언플이 어떻게 작용했을까.
그 결과는 탑 아래를 내려다보면 일목요연했다.
로물루스 교단은 인파로 복적거리고 있었다.
천통절 마지막 의식과, 황제의 해명을 들으려고 모인 귀족들이었다.
“봐라. 사람이 마치 개미 같구나.”
“끄르륵.”
“끅.”
그리고 그런 천통절 마지막 행삿날.
나는 열심히 근무하던 근위병 콤비를 기절시키고 있었다.
“미안하게 됐수다.”
목을 조르면서 수면 가스를 살포하고 눕혔다.
평시라면 이 근위병들은 책임을 지고 목이 날아갈지도 모를 일이긴 한데, 오늘 일어날 사건들을 보면 자고 있으나 일어나 있으나 다를 게 없을 것이었다.
아무튼 이들을 제압한 덕분에 우리는 고지에서 황제가 나올 신전을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워매 사람 바글대는 것 봐. 개미집인 줄.
“환술을 쳤어. 겉으로 봐서는 안 들킬 거야.”
로키가 환술을 치며 말했다.
나랑 아내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야 천리안으로 보면 되겠지만, 정작 그 내가 이제부터 다른 곳에 가야 한다. 기절한 근위병의 사주경계 진지는 우리 가족의 대기소로 삼은 것은 그래서였다.
“많이도 모였네요.”
티르시가 귀족들을 보면서 말했다.
금실과 보물을 몸에 두른 귀족들이 어디 의자에 앉는 일도 없이 수백 명씩 집결해서 도열해 있는 광경은 일대 장관이었다.
눈 따가울만큼 햇볕이 쨍한 하루인데도 그들의 자세에서는─일부 인원의 불평불만을 제외하면─ 마치 엄숙하고 경건한 교인들이 연상되었다.
개중에 내가 심어둔 쁘락ㅊ…… 아, 아니. 임시 구급대원들이 있는 걸 꼼꼼하게 확인한 나는 팔찌 모드의 브류나크를 만지면서 눈을 돌렸다.
“다녀올게.”
“조심해.”
여기 남는 그녀들에게 웃어주고 나서 돌입조끼리 모였다.
마나로는 감지하기 어려운 권능을 오딘의 눈이 느꼈다. 라리루라의 권능이 우리를 감싼 것이었다. 잠깐의 부유감이 몸을 감쌌다.
셰이드의 꿈에 들어갈 때랑 비슷한 느낌이 나를 휩쓸었다.
라리루라는 헤엄치는 것처럼 차원의 틈새를 유영했다. 우리는 그녀의 인도대로 어둑어둑한 별무리 사이의 어딘가를 지나, 놀라운 공간에 도착했다.
트롤과 오우거의 조상, 훌드폴크의 유적을 연상시키는 지하공간!
하지만 그곳이 생활의 터전이었다면 여기는 정 반대였다. 지하라고 믿겨지지 않는 대리석 구조물 가득한 사방에는 성스러운 느낌이 충만해 있었다.
무교인 나까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게 될 듯한 장소.
지하가 아니라 천상의 신전이라고 하는 게 훨씬 믿기 쉬울 듯한 자리에는 3명의 황자들이 경악에 눈을 부릅뜨며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들의 뒤편에는 삭아버린 청동색 옥좌도 한 개 놓여져 있었다.
녹푸른 색이 될 걸 예상하고 만든 것처럼 세상 씹간지나게 만든 의자였다.
‘저게 〈청동옥좌〉인가.’
나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첫인상은 중요하지.
〈불철주야 수고하십니다. 청동옥좌의 A/S 점검 차 나왔습니다.〉